하지만 하늘을 어떻게 사고팝니까?
최근에 Joseph Campbell의 책을 읽다 참으로 감명 깊은 글을 접했다.
1852년경 미국 정부가 늘어나는 미국 국민을 이주시키기 위하여
씨애틀 부족의 땅을 사고자 팔 것을 요구했을 때 그 부족의 추장이 보낸 답서이다.
함께 나누고 이 편지가 담고 있는 도덕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그리고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각오를 하자.
"워싱턴에 있는 대통령은 우리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뜻을 전합니다.
하지만 하늘을 어떻게 사고팝니까? 땅을 어떻게 사고팝니까?
우리에게 땅을 사겠다는 생각은 이상하기 짝이 없어 보입니다.
맑은 대기와 찬란한 물빛이 우리 것이 아닌 터에 그걸 사겠다는 것일는지요?
이 지구라는 땅 덩어리의 한 조각 한 조각이 우리 백성에게는 신성한 것이올시다.
빛나는 솔잎 하나하나, 모래가 깔린 해변, 숲 속의 안개 한 자락 한 자락, 풀밭,
잉잉거리는 풀벌레 한 마리까지도 우리 백성에게는 신성한 것이올시다.
우리는 나무껍질 속을 흐르는 수액을 우리 혈관을 흐르는 피로 압니다.
우리는 이 땅의 일부요. 이 땅은 우리의 일부올시다. 향긋한 꽃은 우리의 누이올시다.
곰, 사슴, 독수리..... 이 모든 것은 우리의 형제올시다.
험한 산봉우리, 수액, 망아리의 체온, 사람..... 이 모두가 형제올시다.
반짝거리며 시내와 강을 흐르는 물은 그저 물이 아니라 우리 조상의 피올시다.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이것이 얼마나 거룩한 것인가를 알아주어야 합니다.
호수의 맑은 물에 비치는 일렁거리는 형상은 우리백성의 삶에 묻어있는 추억을 반영합니다.
흐르는 물에서 들리는 나지막한 소리는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의 음성입니다.
강 역시 우리의 형제입니다. 강은 우리의 마른 목을 적셔줍니다.
강은 우리의 카누를 날라주며 우리 자식들을 먹여줍니다.
그러니까 그대들은 형제를 다정하게 대하듯 강 한 다정하게 대해야 합니다.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공기가 우리에게 소중하다는 것에, 대기의 정기가 그것을
나누어 쓰는 사람들에게 고루 소중하다는 것에 유념해주어야 합니다.
우리 할아버지에게 첫 숨결을 불어넣어 주었던 바람은 우리 할아버지의 마지막 한숨을 거두어갑니다. 이 바람은 우리의 자식들에게도 생명의 정기를 불어넣습니다.
그러니까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다른 땅과는 달리 신성한 땅으로 여겨주십시오.
풀밭의 향기로 달콤해진 바람을 쏘이고 싶은 사람을 찾아가는 신성한 땅으로 여겨주십시오.
그대들의 자식들에게 우리가 우리 자식에게 가르치는 것을 가르쳐주시겠어요?
우리는 자식들에게 땅은 우리의 어머니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땅을 낳은 이 땅의 모든 자식을 낳았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땅이 사람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땅에 속한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이 세상 만물이 우리가 핏줄에 얽혀 있듯 그렇게 얽혀 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사람이 생명의 피륙을 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그 피륙의 한 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사람이 그 피륙에 하는 것은 곧 저에게 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이 그대들의 신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 땅은 신에게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이 땅을 상하게 하는 것은 창조자를 능멸하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대들의 운명이 우리들에게는 수수께끼입니다.
들소가 모두 살육되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이지요?
야생마라는 야생마가 모두 길들여지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이지요?
은밀한 숲의 구석이 수많은 사람의 냄새에 절여지고, 언덕의 경치가 말하는 줄로 뒤엉킨다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이지요? 수풀은 어디 있나요? 사라지고 말았나요?
그러면 독수리는 어디에 살지요? 사라졌나요?
저 발 빠른 말과 사냥감에게 이제는 그만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이 어떠할는지요?
누리는 삶의 끝은 살아남는 삶의 시작이랍니다.
마지막 붉은 인간이 황야에서 사라지고 그 추억이 초원을 지나가는 구름의 그림자의
신세가 될 때도 이 해변과 이 숲이 여기 이렇게 있을까요?
거기에 우리 백성의 혼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게 될까요?
우리는 이 땅을, 갓난아기가 어머니의 심장 소리를 사랑하듯 사랑합니다.
그러니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우리가 사랑했듯이 이 땅을 사랑해주시오.
우리가 보살폈듯이 보살펴주시오. 그대들의 것이 될 때
이 땅이 간직하고 있던 추억을 그대들 마음속에 간직해주시오.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이 땅을 잘 간직하면서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듯 이 땅을 사랑해주시오.
우리가 이 땅의 일부이듯 그대들도 이 땅의 일부올시다.
이 지구는 우리에게 소중합니다. 이것은 그대들에게도 소중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한 분뿐이라는 것을 압니다.
홍인종이 되었든 백인종이 되었든 인간은 헤어질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우리는 결국 형제인 것입니다."
2010년 7월5일 오리건 포틀랜드에서
장로님,
어느덧 같은 하늘아래 (더 가까운 하늘아래) 있다고 생각하니, 장로님이 더 가깝게 느껴 집니다.
사람은 생각하는대로 사는지, 사는대로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최근에 읽는 책들이 주로 미국역사, 미국 잔혹사, 인디언들의 이야기, 그리고 과거에 몇년을 흑인교회에 다녀서 그런지, 저의 생각도 10년전의 생각과 많이 달라진것을 보게 됩니다.
혹시 최근에 상영한 영화 "아바타"를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직 안 보셨으면 한번 보시라고 권합니다. 이 영화를 보면 크게 두가지를 생각할수 있을것 같습니다. 첫째는, 3D 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다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Native American의 사상과 역사를 생각하게 됩니다. "시조"인가 "가정과 건강"에서 어느 목사님은 아바타를 "구원"과 "예수"라는 또 다른 명제를 가지고 설명을 하였던데, 그것은 조금 억지가 아닌가 하고 개인적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려서 시골에서 살때 느끼던, 자연과의 조화, 그리고 사람들간의 친밀함이 미국 인디안들이 느끼던 그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기독교라는 거대한 이름으로, 구원이라는 거대한 명제로 하늘을 우러러 보고, 하늘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을 참혹하게 죽였던 역사는 유럽에서 십자군전쟁, 마녀사냥, 그리고 지식인들을 박해하던 그 역사와 행동을 그대로 보여준, 기독교의 모순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우리교회의 기둥인 켈록박사도 어쩌면, 장로님의 글과 같은 사상에 공감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됩니다. 사랑하는 재림교회에 몸 담고 있으면서, 늘 한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바로 "똘레랑스 (관용)"의 부족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나의 생각만이 우선이고 최선이라는,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반드시 필요한, 사상은 자칫 잘못하면 타인에 대한 이해부족을 낳고 그것이 더 깊어지면 "선"이라는 이름으로 "악"을 저지르는 실수를 하지 않을까 염려 됩니다. 마치 "예수"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을 공격했던 필그럼 처럼,
늘 새로운 주제, 좋은 글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