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읽고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 중에는 이 제목을 보고

그런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대답을 서슴지 않고 할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내 생각이 나 한 사람의 생각일 뿐인지는 확인해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로 세상에 오셨다.

그분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9:13),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5:32)고 하셨다.

그러므로 죄인이 아닌 사람은 구주가 필요하지 않다.

 

만일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 중에 구주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면

그것은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죄인이라는 말이다.

죄인이 아니면 구주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요즘 “생애의 빛” 그룹에서 내가 쓴 책, “숨 쉬는 것은 썩지 않는다.”와

“죄 예수 그리고 구원”을 아주 신랄하게 비판하는 유인물을

“마지막 세대(34호, 혹 35호)”라는 이름으로 발간하여

많은 재림교인들 집에 우송한 것 같다. 그것이 나에게도 왔다.

 

우선 내 책을 어떤 의미로 읽었든지 관심 있게 읽은 것에 대하여 고맙게 생각한다.

나도 글을 쓰는 중에 읽는 사람이 충분히 바르게 알 수 있도록 쓰지 못한 점들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며, 이런 비판을 통하여 한 번쯤 더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이 허락하셨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러나 비판하는 사람은 자기가 비판하기 좋은 문장들을 골라서 하기 때문에

책 전체의 사상의 흐름을 바르게 비판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을 읽는 사람들이 내 책을 구하여 읽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 비판한 것과 책 전체의 내용을 잘 대조하면 귀한 것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들이 이런 반응을 했는지 명쾌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나는 그들 기관을 표적으로 책을 쓴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반응을 한 것을 보면 아마도 이 책들이 그들이 주장에

피해를 입혔다고 여기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들의 주장이 정말 확고히 옳다면 이 책을 읽고 왜 흔들렸을까?

왜 피해를 당한다고 생각했을까 참 안타까운 일이다.

피해의식은 사람들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사물을 정당하게 보는 눈을 어둡게 만드는데 말이다.

 

아무튼 보내준 유인물이어서 앞부분부터 조금 읽었다.

읽다가 미안하지만 더 읽을 가치를 발견하지 못해서 중단하고 책장을 그냥 넘기면서

대강 눈에 들어오는 것만 보고 말았다. 참 죄송한 표현이지만 이 글을 쓴 분은 자기가

쓰고 있는 글이 앞뒤가 모순되는 것을 스스로 조금도 느끼지 못하고 쓴 것 같이 보였다.

어떤 주제로 글을 쓰면 그것이 앞뒤가 논리적으로 맞아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는가?

 

설명하자면, 마지막 세대 8쪽에 예언의 신을 인용하였는데 이렇다.

“빛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빛을 등한히 하거나 거절하면 심판을 당하게 되고,

하나님의 불쾌히 여기심을 받게 된다.

그러나 빛이 주어지기 전에는 죄가 되지 않는다.”(1증언 116)

 

이 말을 인용하기 바로 앞에는 이렇게 썼다.

“죄에 대한 정의가 상태로(죽음) 세워지면 바로 원죄라는 오류로 연결된다.

죄의 결과인 타락한 본성은 유전되지만 죄 자체는 유전되지 않는다는 것이

1950년대 이전의 가르침이다.

죄는 빛을 받고 깨달음을 받은 이후에 오는 선택이라는 것이 재림교회의 가르침이었다.”(8쪽)

주의 깊이 읽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는가?

“죄는 빛을 받고 깨달음을 받은 이후에 오는 선택이라”고 한다.

그러니 빛을 받지 않아서 선택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죄인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교회증언의 말씀이 그런 뜻인가? 정말 그런 뜻인가? 나중에 볼 것이다.

예언의 신의 증언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성경말씀을 인용하였다.

그것은 행17: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와 요9: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는 말씀이다.

 

만일 인용된 예언의 신의 글이 이 글을 쓴 분이 말하는 의미라면 빛을 받지 않은 사람은

죄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왜냐하면 빛이 주어지기 전에는 죄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빛이 주어지기 전에는 그 사람이 어떤 짓을 해도 죄가 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재림교회가 왜 전도를 해야 하는가? 빛을 주지 않으면 죄가 되지 않는데 말이다.

죄가 되지 않으면 죄가 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구주가 필요 없는 것이 아닌가?

 

또 만일 행17:30이 그와 같은 뜻이라면 하나님은 참 이해 못할 일을 하신 분이 된다.

왜냐하면 알지 못하도록 내어버려두면 그들은 허물이 없을 것이고 죄인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요9:41도 그 글을 쓴 분이 주장하는 그런 뜻이라면 소경들은 죄가 없다.

모든 소경들은 이 세상에서 눈을 뜨기를 바랄 이유가 없다.

소경으로 있으면 죄가 없기 때문이다.

정말 이런 뜻일까? 또 야고보 4:17도 인용하였다.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이 말씀도 이 글을 쓴 분이 생각하는 그런 뜻이라면 선을 행할 줄 몰라서

행치 않는 것은 죄가 아니라는 뜻이 된다.

그러면 사람들이 선을 행할 줄 알 필요가 없다.

그러면 선을 행하지 않아도 죄가 안 되기 때문이다.

 

또 겔18:20도 인용하였다.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이 말씀도 죄를 짓지 않는 자는 죄인이 아니라는 뜻으로 인용한 것 같다.

아들이 아비의 죄악을 담당해서 아비가 당할 벌을 대신 받을 이유가 없다.

역시 아비가 아들의 죄악을 담당해서 아들이 받을 벌을 받을 필요가 없다.

당연한 일이다.

 

이것을 인용한 것은 아담 안에서 태어나는 사람은 이미 아담 안에서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것을 반론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아담은 그의 후손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다.

그는 선악과를 먹고 죽은 자가 되었다.

그가 죽었기 때문에 그에게서 산 자가 태어날 수 없고 죽은 자가 태어난다.

이것은 사람이 도덕적으로 악을 행하고 선을 행하는 것 이전의 상태이다.

죽은 자는 썩는 것 외에 아무것도 못한다. 그는 도덕적으로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

죽었기 때문이다. 아담 안에서 다 죄인이 되었다는 말은 이런 뜻이다.

그것을 성경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선언한다.(고전15:22)

그렇지 않다는 말인가?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엡4:18)

그렇지 않다는 말인가?

이런 사람들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다.(엡2:3)

그래서 그들은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은 옛 사람인 것이다.(엡4:22)

이 옛 사람은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것 외에 다른 것이 나올 수 없다.

그들이 행하는 도덕적 의나 선도 썩어져가는 구습의 하나일 뿐이다.

 

죽은 자가 하는 행동은 썩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히6:1)

또 다른 행실이 있는가?

아담의 후손 된 사람들이 아담이 받을 벌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아담 안에서 죽은 자가 되었기 때문에 썩고 있는 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겔18:20) 빛이 주어지지 않았을 때는

죄가 되지 않는다는 증언을 뒷받침 하는 말씀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예언의 신의 다른 증언을 보자.

“부모들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책무를 가지고 있다.

 자녀들의 유산이 죄의 유산이다. 죄는 저들을 하나님과 분리시켰다.

예수께서 끊어진 고리를 하나님께 연결시키려고 그의 생명을 주셨다.

첫 아담과 관련하여 사람은 그로부터 죄와 사망 선고를 받는다.

(Parents have a more serious charge than they imagine. The inheritance of children is that of sin.

Sin has separated them from God. Jesus gave His life that He might unite the broken links to God.

As related to the first Adam, men receive from him nothing

but guilt and the sentence of death.)”(9MR 236.1)

(inheritance는 생물학적으로는 유전 형질이라는 말이다.)

 

이 말씀은 아담으로부터 죄가 유전된다는 말씀이 아닌가?

위에서 이미 인용한 이 글을 쓴 분의 글 “죄의 결과인 타락한 본성은 유전되지만

죄 자체는 유전되지 않는다는 것이 1950년대 이전의 가르침이다.

죄는 빛을 받고 깨달음을 받은 이후에 오는 선택이라는 것이 재림교회의

가르침이었다.”는 말과 바로 위의 예언의 신의 증언을 비교해보라.

예언의 신을 믿을 것인가?

사람의 말을 믿을 것인가?

 

아무튼 나의 책에 반론을 쓴 분이 “만일 한 사람의 죄로 모든 사람이

자동적으로 죄인이 된 것이라면 예수님을 통하여 모든 사람이,

믿든지 안 믿든지 자동으로 다 의인 된다는 말인가?

믿지 않고 굴복하지 않는 악인들도 자동으로 의인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라고 10쪽에 썼다.

8쪽의 말과 10쪽의 이 말을 비교해보라.

빛이 주어지기 전에는 죄가 되지 않는다고 예언의 신의 증언을 인용하고,

10쪽에는 “모든 사람이, 믿든지 안 믿든지 자동으로 다 의인 된다는 말인가?”라고 질문한다.

8족의 말에 의하면 이 글을 쓴 분이, 예수를 믿지 않고 빛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다 죄인이 아니라고 말 한 것이 아닌가? 죄인이 아니라면 의인이 아닌가.

그러면 의인도 아니고 죄인도 아니라는 뜻인가?

 

나에게는 참으로 애매하기 짝이 없는 말을 한 것처럼 보인다.

빛을 받지 않았으면 죄가 되지 않는데. (무엇이 죄가 되지 않는다고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빛이 주어지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죄 되는 일이 없다는 주장을 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죄 되는 일이 없는 그들이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

 

이 글을 쓴 분은 계속하여 이렇게 썼다.

“심판받고 멸망 받는 것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의롭게 되는 일에는

‘나의 선택’이라는 조건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아담의 죄 때문에 자동으로

모든 사람이 정죄를 받은 것이며, 인간이 아기로 태어나는 그 자체가 죄라고 한다면

얼마나 모순되는 말이 되는가? 자기가 각각 죄를 지어 사망에 이르고

자기가 각각 예수님의 의를 받아들여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10쪽)

 

빛이 주어지기 전에는 죄가 되지 않는데, 왜 심판을 받고 멸망을 받아야 하는가?

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의롭게 되어야 하는가?

들은 빛이 주어지지 않았으므로 죄가 무엇인지 모르며

설령 빛을 받은 사람이 짓는 죄를 지었다고 해도 그들에게는 죄가 안 되는데

그대로 있으면 그냥 영생에 이르는 것이 아닌가?

죄가 안 되는 사람들이 왜 심판을 받고 멸망을 받아야 하는가?

자기가 각각 죄를 지어 사망에 이른다고 했는데,

빛이 주어지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죄를 짓는가?

 

결국 이 글을 쓴 분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 없이 스스로 의를 선택하고 행하여서

구원에 이른다는 주장을 한 셈이고,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성행하는 다원주의적

사상을 무의식 속에 품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다원주의자들은 예수를 믿는 것 외의 종교들도 그들 나름으로 수행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지 않는가.

 

이것은 행4:12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사상이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그런데 성경이 계시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고전15:22) 말은

무슨 뜻이며, 예수께서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고 하셨는데,(요5:25) 그 죽은 자들은 누구라는 말인가?

 

각각 죄를 지어서 죽은 자들을 뜻하는 말인가

아담 안에서 죽은 모든 사람을 뜻하는 말인가?

아담 안에서 죽지 않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살아나야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여기서 말한 죽은 자들은 각각 죄를 지은 죄인들에게 해당하는 말씀일까?

 

이 글을 쓴 분은 사람의 의지로 죄를 선택하여 행해야 죄가 되고 그때 죄인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내가 읽기에는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을 한 것처럼 보인다.

여기까지 읽고 더 읽을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 다음은 그냥 책장을 넘기며 훑었을 뿐이다.

사람이 자기주장을 요지부동으로 세워놓고 그 주장과 일치하지 않는

어떤 주장을 읽을 때에 그것을 반대하기 위하여

반대 주장을 하다가보면 이런 경우에 이르기 쉽다.

 

나 역시 이렇게 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자주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리고 하나님께 묻는다.

내가 잘못 깨달았으면 가르쳐주셔서 잘못 가지 않게 해주시도록 기도한다.

우리는 말씀 앞에 겸손해야 한다.

 

나는 이 글의 제목을 “지구에 태어난 사람 중에 구주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있는가?”라고 하였다.

“마지막 세대”에 글을 쓰신 분의 주장대로 하면 빛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죄가 되지 않기 때문에 구주가 필요 없는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또 갓 태어난 아기들이나 아직 의식이 생겨나지 않은 어린 아기들은 적어도

그 기간 동안은 구주가 필요하지 않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죄성은 있지만 죄는 없고 죄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연 성경의 기별이 이런 기별이며 예수의 복음이 이런 복음인가?

“마지막 세대”에 글을 쓴 분은 로마 5:15, 19에 “많은”이라는 말을 썼다고

주장하여 “모든”이 아니라고 말한다.

예수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는 것은 예수가 순종했지만

그를 믿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처럼 아담 한 사람의 순종치 않음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지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죄인이 안 된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구주 예수가 필요 없다는 주장과 다를 것이 있는가?

 

그랬는데 이 글을 쓴 분은 또 “심판받고 멸망 받는 것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의롭게 되는 일에는 ‘나의 선택’이라는 조건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누가 심판받고 멸망을 받는다는 말인가? 빛을 받지 못한 사람도 여기에 포함되는가?

빛을 받고 순종하지 않은 사람만 포함되는가?

또 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의롭게 되는 일을 선택해야 하는가?

빛을 받은 사람이 하는가? 빛을 받지 않은 사람이 하는가?

빛을 받지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도 십자가도 모를 것이기 때문에

‘나의 선택’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닌가? 선택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또 어떤 상태의 사람인가? 의인도 아니고 죄인도 아닌 중간 지대의 사람인가?

세상에 그런 사람도 있는가?

그런 사람은 죄를 택하기 전에는 어떤 상태라고 해야 하고 의를 택하기 전에는

어떤 상태라고 해야 하는가? 그들은 구원도 안 받고 멸망도 안 하는 사람인가?

 

아담의 후손은 누구든지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가 아닌가.

왜 아담의 후손은 아무도 예외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을 받는가?

의지로 죄를 선택하지 않고 죄를 행하지 않은 사람은

구주 예수 없이도 하늘나라 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양심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고 롬2:13,14을 인용하여 주장한다.

그들은 구주 예수 없이 자기 양심의 선한 행위로 구원을 받는가?

그들이 양심으로 선한 행위를 했다 해도 구주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가?

만일 구주 예수가 그들의 구원이 되었다면 그들 역시 구주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다.

구주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라면 그들도 죄인이었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은가?

 

아마도 예수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는지 모르겠다.

만일 이렇게 말한다면 확실히 구주 예수 없이도 구원받는다는 주장이 된다.

아마도 이런 주장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화잇 선지자는 슥13:6 “혹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에 상처는 어찜이냐 하면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는 말씀을

예수께서 받으신 상처에 적용시켰다.(사도행적 226)

러면 “네 두 팔 사이에 상처는 어찜이냐?”고 묻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고난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그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직접 물을 수 있다면 그들은 하늘나라에서 물을 것이 아닐까.

이렇게 묻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몰랐으나 구원받은 사람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예수님은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고 대답하신다.

그것은 곧 너희가 나를 몰랐으나 여기에 온 것은 내가 이렇게 상처 입는

고난을 통하여서 오게 된 것이라고 대답하시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 말은 구원에 참여한 어떤 사람이라도 예수 없이는 구원에 참여할 수 없다는 말이다.

모든 사람에게 구주가 필요하며, 구주가 필요한 사람은 자기가 의지적으로

죄를 지었든지 안 지었든지 다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불러 회개하게 하시려고 오셨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마지막 세대”에 글을 쓴 분은 “죄의 결과인 타락한 본성은 유전되지만

죄 자체는 유전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것이 1950년대 전에 재림교회가 가르친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한 것 같다.

죄의 본성은 무엇이며 죄는 무엇인가?

죄는 하나의 실재인가? 아니면 사람이 행할 때 생기는 것인가?

죄의 본성은 죄를 생산하는 근원이 아닌가?

 

이 글을 쓴 분은 모든 사람에게 죄의 본성은 있지만 그 본성으로 죄를 짓지 않으면

죄인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 같다,

성경은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삼상24:13)고 하였다.

악이 나와서 악인이 되었는가?

악인이기 때문에 악이 나오는가?

성경은 악인이기 때문에 악이 나온다고 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죄인이기 때문에 죄가 나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이 되어서 그때부터 죄가 나온다는 말인가?

아니면 근본적으로 죄인이기 때문에 죄가 나온다는 말인가?

 

성경은 사람들이 “본질상 진노의 자식”(엡2:3)이라고 단언한다.

아담의 후손은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며 그들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이다.

그들이 구주 예수 없이는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다 진노를 당하는 것이라는 뜻이 아닌가.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래서 사랑의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신 것이다.

독생자를 보내어 그들을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 된 데서 구원하여

“본질상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은 제쳐놓고 “아담의 죄 때문에 온 인류가 지옥불의

정죄를 받고 태어난다고 가르치면,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심각하게

왜곡시키는 것이다”(10쪽)라고 말하는 것은 바른 이해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아담의 죄 때문에 지옥불의 정죄를 받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아담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 영생의 생명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다 사망의 생명으로 태어난다는 말이다.

 

사망의 생명으로 태어나면 그가 스스로 영생의 생명을 취할 수 있겠는가?

사망이 된 자는 스스로 아무것도 못하고 다만 썩을 뿐인데 말이다.

아담의 죄 때문에 온 인류가 바로 이런 사망이라는 죄에 빠진 것이 아닌가?

이 세상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된 것이 아닌가?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롬5:12)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

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롬3:23)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소멸하시는 불이신 하나님의(히12:29) 영광에 다 소멸된다는 말이 아닌가?

모든 사람이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다 소멸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된 사람이 이렇게 되는 것을 견디지 못하신다.

그래서 독생자를 보내셔서 대신 죽게 하셔서 그를 믿음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조처를 취하신 것이다.

 

무엇이 하나님의 성품을 심각하게 왜곡시키는 것인가.

오히려 어떤 사람은 죄를 짓지 않고 자기 양심으로 선을 행했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 다는 주장이야 말로 그 극진한 사랑으로 이루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필요 없게 만드는 주장이 아닌가.

이런 주장이야말로 하나님의 성품을 크게 오해하게 하는 것이다.

 

죄가 사망이 아니고 죄의 결과가 사망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로마 5장을 읽어보면 죄와 사망이 동격이 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인가.

17절에 보면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21절에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다고 하였다.

죄와 사망은 함께 왕 노릇한다. 동격이 아닌가?

한 사람의 범죄로 사망이 왕 노릇하고(17) 죄는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다.(21)

내게는 죄와 사망이 동격으로 보이는데 잘못 본 것인가.

 

그 글을 쓴 분은 롬5:15,19의 “많은”이라는 말을 강조하여 “모든”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 문장을 보면 그렇게 보일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18절은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5:18) 이 말씀에

“많은”은 “모든”이라는 말이다. 물론 KJV에도 그렇고(all) 헬라 원어도 그렇다(파스).

 

15절과 19절에 “많은”이 18절의 “모든”과 같은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닌가?

그 글을 쓴 분이 “모든”이 아니고 “많은”이라는 말을 강조함으로 모든 인간이

다 죄인 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자기도 모르게 한 것인지,

알면서도 그렇게 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결국 인간들 중에는

죄인인 존재도 있고 죄인이 아닌 존재도 있다는 논리를 주장한 셈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구주가 필요한 사람도 있고 필요하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논리가 된다.

이것은 또 다른 의미로 예수님의 속죄가 제한된 속죄라는 칼뱅주의 자들의

주장과 같은 사상을 드러낸다.

칼뱅주의는 예수의 십자가의 속죄가 구원이 예정된 사람들만을 위한 속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글을 쓴 분은 죄인 된 사람들만을 위한 속죄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결국 예수 십자가의 속죄가 필요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십자가의 속죄가 모든 사람에게 미쳐서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음으로 예수 안에서 생명에 이른다는 말씀을 한다.

 

예수님은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에 대한 비유를 하셨다.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셨다.

그리고 찔레와 포도나무 엉겅퀴와 무화과나무를 비교하셨다.(마7:16-19)

찔레나무가 찔레 열매보다 먼저 있는 것이 아닌가?

포도나무가 포도열매보다 먼저 있는 것이 아닌가?

찔레나무니까 찔레가 열리고 포도나무니까 포도가 열리는 것이 아닌가?

찔레나무는 죄가 아니고 찔레 열매만 죄인가?

죄의 본성은 죄가 아니고 죄의 본성이 지은 열매만 죄라고 한다면

바로 찔레나무는 죄가 아니고 찔레 열매만 죄라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과연 그런가?

오히려 찔레나무가 문제 아닌가? 찔레를 맺지 않게 하려면 찔레나무를 처리해야 한다.

그러면 찔레가 맺히겠는가.

그런데 찔레나무는 괜찮고 찔레 열매가 문제라는 말은 옳은 이야기인가.

 

나는 근본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그런데 그 글을 쓴 분은 근본은 제쳐놓고 과정과 결과만 이야기 하는 것 같다.

근본이 없으면 과정과 결과는 생기지 않는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사람을 여호와께서 심으신 의의 나무라고 하셨다.(사61:3)

의의 나무가 된 사람은 의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 글을 쓴 분은 마가복음의 자라나는 씨앗을 이야기하면서 성화가 진행이라고 주장한 것 같다.

그러면 그 씨는 무슨 씨인가?

죄의 씨인가? 의의 씨인가? 좋은 씨인가 가라지인가?

죄의 씨가 자라면서 노력으로 의가 되고 진행하여 성화가 되는가?

의의 씨가 자라니까 의가 자라는 것인가?

 

성화문제도 죄를 의지의 행동으로 보는 것처럼 생각하니까,

아마도 죄의 씨(죄의 본성)가 자라면서 노력해서 성화로 진행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가라지가 노력하여 점점 좋은 곡식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과연 그런가?

예수께서는 좋은 씨를 심으셨다.(마13:37) 그 좋은 씨가 자라는 것이다.

의 자체가 자라는 것이라는 말이다. 성화 자체가 자라는 것이라는 말이다.

죄의 씨가 자라면서 성화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씨가 완전한 좋은 씨이기 때문이 아닌가?

그 씨가 무엇인지는 제쳐놓고 자라는 것을 근본인 것처럼 생각하면 오류가 생기는 것이다.

 

나는 근본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근본이 없으면 자라는 과정이 없다.

씨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아담의 후손들은 썩어질 씨로 태어난 사람들이고 예수 안에서 거듭날 때만

썩지 않을 씨로 나는 것이다.(벧전1:23) 아담의 후손은 한 사람의 예외 없이

다 썩어질 씨로 태어난 것이다.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두 가지 씨로 태어나는

것 밖에 다른 씨가 없다.

 

썩어질 씨로 태어나서 그대로 썩어질 씨가 자라는 대로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든지,

예수를 믿고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 곧 썩지 않을 씨로 다시 태어나서

거듭난 생명을 가지든지(벧전1:23) 둘 뿐이다. 그 중간 씨는 없다.

 

나는 내가 쓴 책에서 모든 사람이 자동으로 의인이 된다는 말을 쓴 일이 없다.

그러나 아담 안에서 사망이 된 모든 사람이 예수 안에서 생명을 얻어

생명의 존재가 될 수 있다고는 말하였다.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이다.

그래서 양쪽 다 “모든 사람”이다.

예수를 믿을 때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다 의인이 되도록 해 놓으셨다는 말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하신 일이지 사람이 한 일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자동으로 의인이 된다는 말이냐고 물었기 때문에 이렇게 쓴 것이다.

 

그 글을 쓴 분은 자기가 쓰는 내용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2009년 2기

안식일 학교 교과 저자의 말을 인용하였다.

그것이야말로 사람의 말이 아닌가.

그 잡지 표지에 “예언의 신을 따라야 합니까?

사람의 말을 따라야 합니까?” 라고 큰 글씨로 써 놓았다.

그는 왜 안교교과를 쓴 사람의 말을 따랐는지 모르겠다.

뿐만 아니다.

자기들과 신학사상이 같다는 재림교단의 여러 저명한 18명의 지도자들의

이름을 열거하였다.

자기들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람의 권위를 의지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람이 무슨 말을 했든지 상관없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롬4:3)이다.

창세기로부터 계시록까지 근원부터 미루어 살펴서(눅1:3)

성경이 계시하는 일관된 복음을 깨닫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닌가.

 

자 이제 처음에 인용한 예언의 신의 증언으로 돌아가 보자.

“빛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빛을 등한히 하거나 거절하면 심판을 당하게 되고,

하나님의 불쾌히 여기심을 받게 된다. 그러나 빛이 주어지기 전에는 죄가 되지 않는다.”

이 글을 정말 어떤 사람에게도 빛이 주어지지 않았을 때는

죄가 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인용해도 되는 것인가?

 

화잇부인이 이 글을 쓴 전체를 찾아 읽어보자.

무슨 말씀인지 분명하여질 것이다.

[나는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까지 안식일을 지킬지니라”(레 23:32)고

한 말씀이 그 말씀 그대로임을 보았다. 천사는 말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펴서 읽고 깨달으라. 그리하면, 오해하지 않을 것이다.

주의 깊이 읽어 보라. 그대는 거기서 무엇이 저녁이며, 그것이 언제인지 발견하게 될 것이다.

” 나는 천사에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금껏 시작한 것처럼 안식일을 시작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불쾌히 여기셨는지 물어 보았다. 나는 안식일의 최초의 기원으로 되돌아가서

이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펴보도록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기뻐하지 않으시거나 불쾌히 여기신 것을 보지 못했다.

나는 왜 이렇게 되어 왔으며, 우리가 이 마지막 때에 안식일이 시작되는 시간을 변경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물어 보았다.

천사는, “너희가 이해할 것이지만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다. 아직은 안 되었다”라고 말했다.

천사는 다시 말했다. “빛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빛을 등한히 하거나 거절하면

심판을 당하게 되고, 하나님의 불쾌히 여기심을 받게 된다.

그러나, 빛이 주어지기 전에는 죄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거절할 빛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안식일이 저녁에 시작되었다는 것밖에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나는 어떤 이들이, 안식일은 6시부터 시작된다고

하나님께서 보여 주셨다고 마음에 생각하고 있음을 보았다.

그들은 저녁이 6시를 의미한다고 추론하였다.

나는 하나님의 종들이 연합하고 일치되어야 할 것을 보았다.](1교증 116)

 

여기 말하는 빛이 무엇을 뜻하는가?

복음 전체의 빛을 뜻하는가?

구원의 빛을 뜻하는가? 안식일 시작하는 시간에 대한 것인가?

안식일 시작 시간에 대한 것이다.

재림교회 선구자들은 안식일 시작이 오후 6시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성경은 저녁부터 저녁까지라고 하였다.

그런데 선구자들에게 이 빛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6시부터 안식일 시간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렇게 안식일을 지켜야 된다고

주장하고 그렇게 안식일을 지킨 그것은 죄가 안 되는 것이라고 한 것이 아닌가?

 

아니면 일요일을 안식일인 줄 알고 지킨 사람들이

아직 참 안식일의 빛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일요일을 지키는 것이

죄가 안 된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확한 상황을 잘 모르겠으나 복음의 빛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죄가 안 된다는 말씀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것을 보편화하여 어떤 경우에도 빛이 주어지지 않았을 때는

죄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 예언의 신의 증언을 왜곡하는 것이다.

만일 정말 그렇다면 이미 말한 대로 알지 못하는 시대에 산 사람들은

다 빛이 주어지지 않은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고

그렇다면 구주가 필요 없는 사람들이라는 주장밖에 안 된다.

그들은 구주 없이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된다.

 

예언의 신의 증언을 이와 같이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예언의 신을 오해하게 하는 사용이다.

엘렌 화잇의 선지자성을 의심하게 하는 사용이다.

전체를 다 읽어보라.

그러므로 이것은 의지를 행하여 죄를 짓고 안 짓는 그런 주장에 사용할 내용이 아니다.

리고 아담 안에서 죽은 자로 태어나는 아기들에 대한 반론이 될 수 없는 말이다.

 

이런 주장을 고집한다면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사람들이 아담 안에서

죽은 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성경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했는데, 아니다.

아담 안에서 죽은 자로 태어는 것이 아니라 아담의 죄의 본성만 받은 자로

태어났을 뿐 죽은 자는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닌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말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아담 한 사람이 범죄한 것 같이 모든 사람이 각기 범죄해야 죄인이 된다고 강조한다.

모든 사람이 각기 범죄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롬5:12의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동사 직설 과거형을 사용하였다.

모든 사람이 과거에 죄를 지었다는 말이다.

여기 모든 사람은 바울이 로마서를 쓸 때 이미 죽은 과거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인가? 아니면 이 지구상에 살았고, 살고 있고 앞으로 태어나서

살아갈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가?

앞으로 태어날 사람도 가리킨다면 그들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과거에 죄를 지었다고 기록할 수 있는가?

 

같은 말은 로마3:23에도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같은 “모든 사람”이고 같은 과거형 동사 직설법

“죄를 범하였으매”이다.

바울이 이 글을 쓸 당시에서 미래에 태어날 아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가?

갓 태어난 아이는 그 상태 그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가?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아담의 후손 누구든지 아무것도 아니다.

 

예수 안에 거하지 않는 사람은 예외 없이 누구든지 밖에 버려져서 말라지고

불에 태워진다.(요15:6) 그것은 어린아이거나 스스로의 의지로 의와

선을 행하였거나 예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 글을 쓴 분은 “하나님은 선과 악을 분명하게 판단할 수 없는 사람을

마치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것처럼 취급하실 것이다.”(11쪽)라고 썼다.

초기문집 275쪽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지와 타락 속에서 하나님과 성경에 대해 아는 것이 없고

오직 주인의 채찍밖에 두려워할 줄을 모르는 짐승보다도 더 낮은 수준에 있는

노예들을 하늘에 데려가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동정심 많은 하나님께서는

할 수 있는 한 그들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취급하시는 반면에

그들의 주인들은 (마지막 일곱 재앙을 만날 것이며 둘째 부활 때에

다시 일어나 고통을 받게 될 것이며 마지막으로)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이다. [() 안의 말씀은 ....을 찍고 인용하지 않았음.]

 

비참한 죽음을 당하는 주인들은 창조되지 않은 것과(존재하지 않은 것과) 같이 되는 것이 아닌가?

모든 죄인들은 종국에 다 불로 소멸되어 창조되지 않은 것과(존재하지 않은 것과) 같이 된다.

그것이 사망의 실상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라고 하였다.(고전15:26)

계시록은 사망이 불 못에 던져진다고 계시하였다.

(계20:14) 그래서 사망이라는 것이 없어지고 예수 안에서 생명을 얻지 못하여

사망에 머물고 있는 모든 악인들과 악한 천사들도 다 불 못에서 없어진다.

창조되지 않은 것(존재하지 않은 것과) 같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선과 악을 분명히 판단할 수 없는 사람과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데

악을 택한 사람들의 결과가 무엇이 달라졌는가?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두 다 창조되지 않은 것과(존재하지 않은 것과) 같이 되었다.

 

이 글을 쓴 분은 선악을 판단할 수 없는 사람들은 고통을 면한 상태로

창조되지 않은 것(존재하지 않은 것과) 같이 된다는 것을

마치 죄가 없어서 벌을 받지 않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

죄의 형벌에는 고통이 따르겠지만 고통이 없어도 죽어서 없어지게

되는 (존재하지 않은 것)것이 형벌이다.

그것을 영벌이라고 하지 않았는가.(마25:46)

영벌이 영원토록 고통 받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이 글을 쓴 분도 잘 알 것이다.

 

영벌은 영원히 없어지는 것이다.

그 존재를 영원히 상실하는 것이다. 고통 중에 상실하거나

고통 없이 상실하거나 다 존재를 상실한다.

그것이 영벌이다. 무엇이 달라졌는가?

 

형벌의 고통에 대해서도 주인의 뜻을 모르고 행하지 아니한 사람들은 적게 맞고

알고도 주인의 뜻을 행하지 않은 자는 많이 맞을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에서 그 진상을 알 수 있다.(눅12:47,48)

모르고 주인의 뜻을 행하지 않아도 맞는다. 빛이 주어지지 않아서

몰라서 주님의 뜻을 행하지 않아도 맞는다는 말씀이 아닌가.

다만 적게 맞을 뿐이다.

적게 맞으면 고통이 적고 많이 맞으면 고통이 크다.

그러나 결국은 다 불 못에서 타서 재가 되어 창조되지 않은 것과(존재하지 않은 것과) 같이 된다.

 

그것이 최초에 아담에게 선고된 흙으로 돌아가리라는 내용이다.

아담은 흙으로 지음을 받았다.

런데 선악과를 먹어서 죽게 되었는데, 그것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즉 창조되기 전의 상태, 곧 창조되지 않은 것과 같이 되는 것이다.

선악의 판단을 분명하게 못하는 사람이나 할 줄 알고 죄를 지은 사람이나

결과는 창조되기 전으로 돌아간다.

그것은 결국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말이다.

구원을 받지 못했으면 그는 죄인이다.

그렇지 않은가?

 

예수님이 우리의 전부이다.

그분이 나의 의이고 거룩함이고 생명이고 나의 전부이다.(고전1:30) 그렇지 않은가?

자기의 의지로 의를 선택하여 행하므로 의인이 된 사람들은

구원하심이 예수님에게 전부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행한 의지의

노력에도 일부가 있다고 주장해야 맞은 것이 아닌가?

 

죄와 더불어 싸우는 노력은 거듭난 생명의 생태(生態)라는 것을

그 글을 쓴 분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사람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죄와 싸운다.

그렇지 않으면 죄와 싸우는 자기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거듭난 생명은 죄를 용납하는 생명이 아니다.

죄를 거부하고 죄와 싸우는 생명이다.

그래서 싸운다.

사람이 거듭나면 새 생명으로 행하게 된다.

새 생명에는 새 생명의 의식이 생긴다.

그래서 육신에 있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에 있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한다고 가르치신 것이다.(롬8:6)

 

그래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고 했으며,(롬8:9)

예수께서는 친히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하신 것이다.(요3:6)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성경은 분명히 계시한다.(고후5:17)

하나님은 새로운 피조물을 죄성이 있는 피조물로 창조하신다는 사상이 성경에 있는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사람은 새 생명을 얻는다.(요3:5, 롬6:4)

그것은 아담 안에서 죽은 사망에서, 예수 안에서 부활의 생명을 얻어 생명으로 옮긴 그 생명이다.

생명으로 옮길 때 반쯤 썩고 있는 상태로 옮길 것인가.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만에 살아날 때 반쯤 썩고 있는 상태로 살아났을까.

그렇지 않고 온전히 건강한 상태로 살아났을 것이 확실하지 않는가.

그처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사람도

완전한 새 생명으로 살아나는 것이다. 이때 하나님은 새 마음을 주신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36:26,27)

 

이 새 마음은 새 생명의 마음이며 하나님의 율례를 행할 수 있는 마음이고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받은 마음이다.

그래서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6-9)고 계시하셨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는 7절 말씀은 뒤집어보면 “영의 생각은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이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뿐 아니라 할 수 있음이라”고 이해할 수 있지 않는가.

 

이 글을 쓴 분은 성경의 이런 약속보다 사람의 일상생활에서 당하는 어려움을

성경에 적용시켜 설명하고 있는 것 같다. 일상 신앙생활에서 날마다 죄의 유혹을 받으며

그것을 행하지 않으려고 고심참담하게 노력해도 자꾸 죄에 유혹에 이끌리는 경험을 하며,

이런 인간의 연약한 것을 단호히 물리치려는 끈질기고 힘을 다한 노력이 죄를 이기고

의를 이루며 성화로 나아간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인간 경험을 성경의 약속보다 앞 세워

성경을 설명하는 모습이 아니겠는가.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잠23:7)

하나님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새 생명을 얻은 사람에게 새 마음을 주시는데,

그 새 마음에서 죄의 삶이 나온다는 말인가?

예수께서는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약속하셨다.(요4:14)

이 샘물은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난다.

이 샘물에서 죄가 솟아나올 것인가?

성경은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약3:11)라고 묻는다.

거듭나서 새 생명을 가지고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가진 사람의

그 샘에서 단물과 쓴 물이 같이 솟아나오겠는가.

 

성경의 이 말씀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계시하는 말씀이 아닌가.

야고보는 계속 말한다.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약3:12)

 

그런데 포도나무가 된 사람이 찔레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주장하면 말이 되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포도나무가 아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과 성화는 바로 이런 관계이다.

근본은 나무이고 과정과 결과는 열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죄 문제에 대하여 성경이 가르치는 근본을 이야기 한 것이다.

 

그리고 중생과 성화에 대한 것도 그 근본을 이야기 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제쳐놓고 과정과 결과만을 가지고 근본인 것 같이 주장하는 것은

나무는 어떻든지 열매를 선하게 맺으면 된다는 논리가 아닌가.

본성적으로 찔레나무가 노력하면 포도를 맺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본성으로 죄의 성질을 가졌는데”, 이 말을 “본성적으로 찔레나무인데”라는

말로 바꾸어 읽어보는 것은 잘못 말하는 것인가.

그런데 그 죄의 본성이 노력하여 의의 열매를 맺으면 의인이다.

이것은 찔레나무가 노력하여 포도를 열면 포도나무다 라는 논리가 아닌가.

찔레나무가 노력한다고 포도를 맺는다는 것은 불가능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찔레나무가 포도나무로 재창조되기 전에는 결코 포도를 맺을 수 없다.

 

내가 오해하고 있는가.

예수님이 자신을 포도나무라고 하셨고 우리는 그 가지라고 하셨다.(요15:5)

포도나무의 가지도 포도나무이지 찔레가 아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다 포도나무가 된 것이다.

그런데 그 포도나무가 찔레를 맺을 수 있다는 말인가?

본성은 그 본성에서 결과를 낸다.

하나님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을 만드실 때

그 죄의 본성에서 건지시는 것이 아닌가.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는데 이제 예수 안에서 “본질상 신의 성질”을 얻게 된 것이 아닌가.

베드로는 그렇게 계시한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벧후1:4)

여기 “신의 성품”이라고 번역된 말은 KJV에 “the divine nature”라고 번역하였다.

“신성의 본질”이라는 말이다.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의 본질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 예수 안에서 주신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이다.

 

여기 “성품”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퓌시스”인데 신약성경에 14번 사용되었다.

엡2:3의 “본질상”이라는 말도 바로 퓌시스이다.

우리는 아담의 씨로 태어나서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면 신의 본질에 참여한다는 약속이 아닌가.

그 신의 본질에서 죄가 나올 수 있다는 주장인가.

그래서 진정으로 거듭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은 세상과 사단의 세력이

공격하는 그 공격에 상하는 것이 죄라는 말이다.

 

“마귀의 불화살에 맞아서 음욕을 품게 되면 그 죄는 정죄 받지

않는다는 말인가?”라고 물었다.(19쪽)

나는 화살에 맞아서 죄를 지은 것이 정죄 받지 않는다고 주장한 일이 없다.

그것은 죄이다.

그러나 죄로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아픈 고통을 느끼고 속히 길르앗의

의사이신 예수께 나아가서 고침을 받아야 된다고 하였다.

 

만일 상처를 입은 줄도 모르고 상처를 입었는데 그것이 전혀 아프지 않다면

그는 감각 없는 자이며 죽은 자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자이다.(엡4:18)

아프면 치료받으러 가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회개라고 나는 말하였다.

회개하지 않으면 그도 또 사망에 이른다고 하였다.

이 설명이 성경적으로 잘못 되었는가.

그런데 나의 현실 생활이 이렇게 잘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성경의 이런 계시를 그렇지 않은 것처럼 설명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진정으로 죄와 싸우고 있다면 그는 거듭난 생명의 생태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거듭난 것이 근본이고 죄와 싸우는 것은 과정이다.

근본을 떠나서는 과정이 없다.

거듭난 생명에서는 죄가 나올 수 없다.

죄에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만일 거듭났다고 주장하는 사람 속에서 죄가 계속 나온다면

그는 거듭난 경험이 없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악은 악인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삼상24:13)

사단은 끊임없이 거듭난 성도들을 공격한다.

멀리서 또는 가까이서 불화살을 쏜다.

우리는 믿음의 방패로 그것을 막아야 한다. 그것이 죄와 싸우는 싸움이다.

그런데 그 싸우는 사람은 죄의 세상이라는 환경에 처하여 있고,

과거에 경험한 죄의 경험들이 지체 안에 있다.

그래서 마귀가 쏘는 화살을 지체 안에 있는 죄를 경험한 경험의 법이 쉽게 연합한다.

그래서 상처를 입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길르앗의 의사로 소개되었고,(렘8:22)

그의 손길로 우리를 씻어주시는 분이라고 친히 말씀하셨다.(요13:8)

 

그래서 그 옷을 어린양의 피에 씻어 희게 하였다고 하였으며(계7: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였다.(계22:14)

이 말은 KJV에는 그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행한 의로운 일이나 선한 일이

그것 자체로 하나님 앞에 선이나 의가 될 수 없다.

그것이 예수의 보혈로 씻겨서 하나님 앞에 가납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의는 아무리 의로워도 그것은 더러운 옷과 같기 때문이다.(사64:6)

 

기도하고 말씀을 상고하는 현명한 독자들은

구구한 설명을 하지 않아도 진리를 옳게 분변할 것이다.

그리하여 부끄러움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하나님 앞에 설 것이다.

나는 논쟁을 하려고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다.

나의 책을 신랄하게 비판했기 때문에 그 비판이

성경적으로 옳은가 하는 것을 조명해봤을 뿐이다.

앞에 말한 대로 다 읽지도 않았다.

다 읽을 필요를 느끼지도 않는다.

시작 부분에 잘못된 것을 보면 다른 것은 읽어보지 않아도 잘못되게 시작한

그 논리를 전개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 글을 쓴 분의 주장대로 첫 단추를 잘못 끼었기 때문에

모든 단추가 잘못 끼어질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댓글 '19'

김정대

2009.09.19 20:37:37
*.82.200.26

김명호 목사님,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저도 목사님께서 최근에 집필하신 [죄, 예수 그리고 구원]을 몇주간 출퇴근하면서 정독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얼마전 생애의 빛에서 목사님의 책을 비평한 글도 접하게 되어 읽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느낀 점이 있습니다.

사실 이런 말씀을 성공적으로 목회를 하시고 은퇴하신 원로 목사님께 드린다는게 무척 죄송스럽습니다만,

제가 볼때도 목사님의 이 책은 성경과 예언의 신 말씀을 국부적으로 읽어 곡해한 부분도 적지 않게 있고

또 그릇된 전제로 시작하여 전개한 논리적 취약성도 여러군데 산재해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구원의 섭리에 대하여 마지막 세대를 사는 재림성도들을 호도할 내용이 다분히 있다고 보여집니다.

 

제가 요사이 시간적 여유가 별로 없어 일일히 언급은 지금 하지 못하겠습니다만, 이곳에서 제시하신 목사님의 반론에 담겨있는

한 두가지 점에 대해서만 외람되지만 나름대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너그러히 고려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명호 목사님 글: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로 세상에 오셨다. 그분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9:13),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5:32)고 하셨다.

그러므로 죄인이 아닌 사람은 구주가 필요하지 않다.

만일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 중에 구주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면 그것은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죄인이라는 말이다. 죄인이 아니면 구주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이런 목사님의 주장은 소위 자유주의적인 미국인 재림교인들로 부터 저도 여러번 들어 보았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죄를 전혀 범하지 않고 살 수 있다면, 그러한 사람에게 구주가 필요하겠는가?"라고 자주 그들이 주장했지요. 화잇여사의 말대로 세상의 마지막 환란을 통과하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사하심을 계속적으로 필요치 않고 살 수 있다면, 그들이 그리스도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말이라고 이 자유주의자들이 비난하곤 했습니다.

 

목사님께서 이런 주장을 하시는건, 구원을 위한 구주의 두가지 측면을 간과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생각되네요. 그리스도께서 체험하신 이 땅에서의 삶과 죽으심으로 가능해진 구원의 측면에는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는 권능과 우리로 하여금 죄를 범치 않고 살 수 있게 해주는 권능이 또한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죄로부터 구원하는"(마태 1:21)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지요. "누가 죄를 범하면" (요일 2:1)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용서함이 제공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요한이 죄를 지을 필요가 없다는 의미에서의 "IF we sin"이라는 말을 쓰며,  죄를 짓는게 불가피하다는 의미에서의 "WHEN we sin" 이라는 말을 하지 않은건 아주 중요한 점입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가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도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능력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용서함이 필요치 않다는 말은 구주가 필요 없다는 말과 같은 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주의 역할은 죄를 사해 주시는 역할과 더불어 그 죄를 이기는 능력을 부여하시는 역할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이생에서 타락된 육적인 본성을 지니고 사는 한, 우리를 실족하지 않게 도와주시는 이 구주의 능력은 우리에게 계속하여 절실히 필요하니까, 과거에 죄를 지어 죄인이 었는지 몰라도 회개하여 이제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더라도, 그 구주의 구원하시는 은혜의 능력은 계속 필요해 지는 겁니다.

 

[김명호 목사님 글:

 

그렇다면 예언의 신의 다른 증언을 보자. “부모들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책무를 가지고 있다. 자녀들의 유산이 죄의 유산이다. 죄는 저들을 하나님과 분리시켰다. 예수께서 끊어진 고리를 하나님께 연결시키려고 그의 생명을 주셨다. 첫 아담과 관련하여 사람은 그로부터 죄와 사망 선고를 받는다. (Parents have a more serious charge than they imagine. The inheritance of children is that of sin. Sin has separated them from God. Jesus gave His life that He might unite the broken links to God. As related to the first Adam, men receive from him nothing but guilt and the sentence of death.)”(9MR 236.1) (inheritance는 생물학적으로는 유전 형질이라는 말이다.) 이 말씀은 아담으로부터 죄가 유전된다는 말씀이 아닌가?]

 

이 예언의 신 말씀도 목사님께서 잘못 이해하고 계신 점이 있습니다. 이와 똑 같은 글이 새자녀 475쪽에도 있지요.

 

화잇여사가 "자녀들의 유산은 (The inheritance of children IS SIN)" 라고 하지 않고 "자녀들의 유산은 죄의 유산 (The inheritance of children is that OF SIN)" 이라고 하신 점을 유의하시면 좋겠습니다. 이 두가지 말 사이에는 그 의미에 큰 차이가 있음을 주지해야 합니다. 전자는 죄를 유산으로 받는다는 뜻이고, 후자는 죄에서 기인한 유산 혹은 죄의 결과를 유산으로 받는다는 뜻입니다. 화잇 여사는 물론 후자의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목사님께서 "원죄론적으로" 이해하시는 것 처럼, 아담에게서 죄를 유산으로 물려받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화잇여사는 그녀의 생각을 표현함에 있어 그녀 나름대로 정확한 표현과 단어를 쓰는 체계가 있었습니다. 다른 곳에 기록된  화잇 여사의 글은 목사님께서 인용하신 이 글이 목사님의 주장을 대변해 주는 그런 종류의 글이 아님을 분명히 해주고 있습니다:

 

"모든 질병은 죄의 결과이기에 병에 걸리는 것은 죄다. 많은 이들이 그들 부모의 죄의 결과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다. 그들이 그들 부모의 죄로 인해 견책됨을 받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의무는 그들 부모가 삶의 법칙을 범하여 후손들에게 너무나 비참한 유산을 물려주게 되었음을 분명히 인식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부모들이 올바르지 못한 습관을 지녔더라도 그들은 자신들 삶의 방향을 수정해 올바른 습관을 터득함으로써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올바른 위치에 서는 것이다." (Counsels on Health, p. 37)

 

"인간은 퇴화하였다.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고 죄로 인해 사망이 들어왔기에 모두가 서로 뒤를 이으면서 저주 속으로 빠져들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길을 택하여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반면에 우리 자신들의 길을 택하여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온 것과 그 죄로 인해 죽음이 들어온 것을 알게 될 수도 있다." (영문 시조, 1900년 6월 27일)  

 

즉, 아담때문에 죄와 사망이 이 세상으로 들어왔지만, 그 죄와 죽음을 이어받는데는 분명히 개인의 선택에 의한 것이란 사상입니다 ("택하여"라는 말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조상의 죄의 결과로 인해 고통을 받지만, 조상의 전례를 스스로 택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전에는 그 조상의 죄로 인해 견책됨을 받지 않는다 (죄로 간주되지 않는다) 라는 뜻이지요.

 

[김명호 목사님 글:

 

만일 인용된 예언의 신의 글이 이 글을 쓴 분이 말하는 의미라면 빛을 받지 않은 사람은 죄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왜냐하면 빛이 주어지기 전에는 죄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빛이 주어지기 전에는 그 사람이 어떤 짓을 해도 죄가 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재림교회가 왜 전도를 해야 하는가? 빛을 주지 않으면 죄가 되지 않는데 말이다. 죄가 되지 않으면 죄가 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구주가 필요 없는 것이 아닌가?]

 

예언의 신 말씀은 오해의 소지가 없이 분명합니다. 예언의 신은 빛에 무지한 사람들이 구주가 필요없는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 무지에 의해 범해진 죄들이 그들의 죄로 간주되어 저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말을 했을 뿐입니다. [생애의 빛] 분들도 그런 뜻으로 목사님의 글을 비평했을 뿐이라고 보여집니다. 다음 글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피조물들을 그렇게 대하지 않으신다. 무지한 가운데 범해진 죄들에 그분의 저주가 결코 임하지 않는다." (영문 시조, 1899년 11월 1일)

 

"이 기별을 깨닫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은 지성소로 향하게 되었다. 그 곳에서는 예수께서 법궤 앞에 서서 아직도 자비를 베풀 모든 사람과 무지하므로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고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마지막 중보를 하고 계시다. 이 속죄는 죽은 의인과 살아 있는 의인을 위한 것이다. 그것은 예수를 믿고 죽었으나 계명에 대한 빛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무의식 중에 계명을 범한 모든 자들을 위한 것이다." (초기, p. 254)

 

또한 동시에 그녀는 구원의 경륜에 대한 이해를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분명히 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그분의 말씀을 연구하여 생명의 길을 배우도록 그 말씀을 주셨다.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구원의 조건들에 순복한다면 아무도 잘못을 범할 필요가 없다. 영생을 위하여 품성을 형성하도록, 모든 사람에게 은혜의 기간이 허락되어 있다. 모든 사람에게는 생과 사를 결정하도록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빛의 정도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다. 빛이 그들에게 이르러오지 않았다면, 아무도 그들의 어둠과 잘못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서 그들은 범죄하지 않았다. 예수께서 지성소에서 그분의 위치를 떠나시기 전에, 모든 사람들은 시험을 받게 될 것이다. 죄인을 위한 간구가 끝나고 복수의 옷이 입혀질 때에 모든 사람의 은혜의 기간은 끝난다." (2 증언, 690)

 

즉 화잇 여사가 가진 죄의 개념이 목사님이 주장하는 그러한 철학적이며 추상적인 존재의 개념이 아니란 말입니다. 아주 실제적이며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올바른 마음만 가지만 얼마든지 이해하고 실천할수 있는 개념입니다.

 

동시에 화잇여사는 다음과 같이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모든 무지의 죄에 대한 속죄를 이루셨다. 그러나 고의적인 맹목에 대한 대책은 전혀 없다." (SDA Bible Commentary, vol. 5, p. 1145)

 

그 어떤 죄가 정말 무지의 죄로 간주되기 위해서는, 만일 빛과 진리가 그 사람에게 제시되었다면 그것이 분명히 받아들여졌을 것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우주거민들에게 확인하셔야 됩니다. 의도적인 무지와 나태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으므로 용서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2:3).  재림교회가 전도를 하여야 되는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한마디로 예언의 신 말씀에 있는 사상은 분명히 죄가 우리의 자유의지인 선택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태어나면서 부터 죄인이라는 개념은 지극히 칼빈주의적인 원죄론 개념인데, 화잇 여사는 절대로 칼빈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다음의 몇 글을 인용해 드립니다:

 

"어떤 사람도 강제로 죄를 범하게 할 수는 없다. 욕심이 이성을 지배하거나 불의가 양심을 압도할 수 있기 전에, 먼저 그 사람의 동의가 구해져야 하며 그 심령이 범죄의 행위를 의도해야 한다." (5 증언, p. 177)

"사단은 그 아무도 죄를 짓도록 강요할 능력이 없다. 죄는 죄를 짓는 자의 개인적이 행위이다. 의지의 동의함이 주어지기 전에는 죄가 마음에 존재할 수 없다. 그 의지의 동의함이 주어지자마자 죄는 승리하며 지옥은 기뻐한다. 그러나 크거나 작은 죄에 대한 어떠한 변명도 있을 수 없다." (영문 시조, 1893년 12월 18일)

 

"가장 훌륭한 사람들조차도 사단에 의해 심겨지며 조장되는 불순한 생각들과 느낌들로 괴롭힘을 당한다. 하지만 만일 그러한 것들을 마음속에 품어 키우지 않고 가증한 것으로 격퇴하면, 그 영혼은 죄책으로 물들지 않으며 그들에 의해 다른 사람들이 또한 더럽혀지지 않게 된다." (리뷰와 헤럴드, 1888년 3월 27일)

 

그리고 목사님께서 주장하시는대로, 만일 아담의 후손들이 아담의 지은 죄를 물려받아 태어날 때 부터 죄인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사상이 성경이 말하는 것이라면, 다음 구절은 어떻게 이해해야 되겠습니까? 

 

(창 4: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 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 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목사님의 입장에 따르면, 가인이 벌써 태어나면서 부터 죄인인데, 어찌하여 이 곳에서 하나님은 그에게 선을 행하지 않으면 죄가 (가인안에 내재해 있지않고) 문에 엎드려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원한다고 주의를 주었을까요? 그러면서 죄를 다스리라고 경고를 했나요? 이는 분명히 죄가 가인의 의지적 선택과 직결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성경절이 아닌가요?

 

하여튼, 저도 지금 시간이 나는대로 목사님께서 [죄, 예수 그리고 구원]에서 밝히신 입장들에 대해 저나름대로 생각을 좀 정리해 볼 목적으로 비평을 쓰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어느 정도 꼴이 잡혀지면 목사님께 먼저 원고를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의 책이 담고있는 내용에 대해 [생애의 빛]이 신랄하게 비평을 하였다고 일종의 불평을 표하시는데, 사실 그런건 불평할 것이 못된다고 생각됩니다. 따지고 보면 목사님의 책도 목사님과 다른 입장을 표하는 교회내의 분들이 지닌 견해에 대해 여러모로 신랄한 비평을 담고있더군요. 아이디어는 그런 아이디어를 가진 이의 인격과는 별개의 존재로 비평과 비판의 대상이 분명히 될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연두빛

2009.10.01 17:15:43
*.103.204.210

 어머나, 김정대님의 명확하고 논리적인 군더더기없는 필치, 먼저 존경심이 가는군요.

전, 제 마음속에 무엇인가 막연한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던 참이었습니다. 많은 도움이 될것에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

김정대

2009.09.20 19: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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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5장의 해석

 

「죄, 예수 그리고 구원」의 저자는 또한 로마서 5장 12절인 "한 사람에 의하여 죄가 세상으로 들어오고 그 죄에 의하여 사망이 왔으니,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었느니라" 는 구절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석을 가하고 있다:

 

"바울이 여기서 가르치는 것은 한 사람의 죄가 그의 모든 후손을 다 사망이 되게 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라는 표현이 이 사실을 명확히 표현한다. '죄를 지었으므로'는 과거형 동사이다. 모든 사람이란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가? 바울이 이 글을 쓸 당시에 살던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말일까? 이 말씀 자체가 그렇게 한정적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아담에게서 생육하는 이 세상 제일 마지막에 태어날 사람까지를 다 포함하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 제일 마지막에 태어나는 사람까지 이미 죄를 범하였다. 로마서 3:23에도 같은 말씀이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여기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라는 말씀도 과거형 동사이다. '죄를 짓는다' 는 동사는 '하마르타노(hamartano)' 인데 이 두 곳에 쓰인 말은 과거 직설형 동사로서 '헤마르톤(hemarton)' 이다. 이것은 '과거에 이미 단번에 죄를 지었다' 는 뜻이다. 한 사람 아담 안에서 아담의 모든 후손이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다 죄를 지었다는 뜻이다." (죄, 예수 그리고 구원, p. 108)

 

그런데 "한 사람 아담 안에서 아담의 모든 후손이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다 죄를 지었다"는 저자의 주장은 일종의 추측적인 공론으로서, 그런 뜻이기를 바라는 원죄론적 선입관으로 말미암아 이 구절에 무리하게 주관적인 해석을 가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저자의 원죄론적인 입장을 지지하기 위해서는 바울이 로마서 5:12절에서 "아담이 죄를 지었으므로 (bacaused Adam sinned)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었느니라" 고 기록했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러한 주장은 바로 이 로마서 5:12절에 대해 원죄의 유전적 선입견이 아닌 전례와 선택의 안목으로 설명한 화잇 여사의 주석과도 정면으로 충돌되는 견해임이 다음 증언 말씀에 비추어 보면 자명해 진다:

 

"인간은 퇴화하였다.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고 죄로 인해 사망이 들어왔기에 모두가 서로 뒤를 이으면서 저주 속으로 빠져들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길을 택하여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반면에 우리 자신들의 길을 택하여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온 것과 그 죄로 인해 죽음이 들어온 것을 알게 될 수도 있다." (영문 시조, 1900년 6월 27일)

 

아담의 죄가 그의 모든 후손으로 하여금 그 자신의 선례를 따르는 결과를 불러왔지만, 그렇게 아담의 선례를 따른 것도 결국은 그들 자신의 선택이었다고 엘렌 화잇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희랍어의 부정 과거형 (aorist) 혹은 과거 직설형 (aorist indicative) 동사는 이 저자가 제시하는 그러한 용도로만 쓰이는 동사가 아니다. 문맥에 따라 과거 혹은 현재 완료형 등등의 여러 가지 형태로 사용되는 동사이다. 분명한 것은 이 동사형은 주어의 전반적인 행동 혹은 활동을 조망(眺望)하는 견지에서 어떤 사실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동사임에는 틀림없다. 한 성서 희랍어 사전 웹사이트는 이 저자가 칼빈주의적 원죄론 안목으로 해석하는 로마서 5:12절과 동일하게 사용된 로마서 3:23절의 "죄를 지었다 (hemarton)"는 부정 과거형 동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로마서 3:23절에 쓰여진 '헤마르톤(hemarton)'은 분명히 바울이 로마서 1:18-3:20에 걸쳐 묘사한 인간의 집합적인 죄악 행위들을 요약하는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이 틀림없다. 따라서 이것은 집합적인 역사적 사실을 나타내는 부정 과거형 동사(aorist)이다. 연속된 죄악 행위들이 바울이 이 말을 한 그 순간까지 계속되었기에, 그 역사적 사실과 바울의 이 말을 한 사이에 그 어떤 공백 기간이 있음을 뜻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이 동사형은 영어의 현재 완료형('have sinned')으로 번역되어야 한다.....바울 사도가 이 말을 한 그 시점에서 보아, 일 개인의 죄는 과거의 행위이며 더불어 이러한 개별적인 죄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총집합체인 죄도 과거의 사실로 간주되는 것이다.....이 '헤마르톤(hemarton)' 동사는 바울 사도가 말하는 그 시점의 견지에서 보아 과거에 계속되어온 죄들을 지칭하고 있으며, 미래에 범해질 죄에 대해서도 그와 동일한 원칙이 그 당시에 같은 문법적 시제(時制)로 적용됨을 암시해 주는 말이다." (Section 54 of "The Aorist Indicative," Burton Moods Tenses, www.dabar.org)

 

즉 로마서 전반부 (1-3장)에 걸쳐 바울이 인간의 총체적인 죄악 행위들의 역사를 요약하여 증거를 제시한 후에, 로마서 3:23절과 5:12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라고 객관적으로 납득이 가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로마서 5:12절의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라는 구절에 대해, 「이것은 '과거에 이미 단번에 죄를 지었다'는 뜻이다. 한 사람 아담 안에서 아담의 모든 후손이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다 죄를 지었다는 뜻이다」 라는 이 목사님의 해석은 다른 여러 성경 절들과도 모순되며 너무 무리한 논리적 비약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오히려 성경의 전반적인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려면 (출에굽 32:31-33; 신명기 1:34-39; 이사야 59:1-8; 에스겔 18:5-20; 야고보 1:14-15; 야고보 4:17; 요일 3:4 등등 참조), 이 구절을 "한 사람인 아담에 의해 죄가 이 세상 안으로 들어왔고, 그와 더불어 영적인 사망, 즉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영적 결합이 파괴된 상태가 또한 왔는데, 그 후 모든 사람이 그들 자신의 선택으로 아담이 지은 죄에 개별적으로 모두 참여하여 하나님을 거부하는 죄를 지었으므로 그러한 영적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었다"라고 이해하는 편이 성서적으로나 인간사적 측면에서도 훨씬 더 실제성과 합리성을 보여주는 해석이 될 것이다. 그리고 선과 악의 대쟁투 속에서 인간의 자유 의지를 존중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공의를 담은 세천사의 기별을 전파하는 남은 무리의 사명과 일치하는 성서적 죄론이 될 것이다.

 

한 가지 더 부연하자면, 로마서 5:19절은 "한 사람의 순종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shall many be righteous)" 고 하여 예수님의 순종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될 것이라는 미래형의 동사를 쓰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의인이 될 사람들은 "더욱더 은혜의 풍성함과 의의 선물을 넘치도록 받는 사람들 (those who receive)" 이라고 명시한다. 이것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예비해 두신 구원을 받는 선택함을 통해서만 개인의 구원이 성취됨을 알려주는 구절이다. 모든 사람에게 강제로 부여한 무조건적인 본의 아닌 구원 (involuntary salvation)을 이 로마서 5장이 가르치고 있지 않다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바로 만인 구원론이란 이설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같은 장의 구절인 5:12절을 인용하며, 아담 한 사람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무조건적으로 그들 각자의 선택 여부와는 상관없이 본의 아닌 죄(involuntary sin)를 부여했다고 감히 주장할 수 있는가? 일관성이 결여된 주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의 양식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식의 죄론으로 진정 하나님의 공정성과 사랑을 나타내는 복음을 제시할 수 있을까?

 

재림교회 성경주석 12권에 수록된 한 재림 신학자의 다음 글은 이러한 필자의 관점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만일 우리가 어떻게 죄가 아담을 통해 전수되었는지 혹은 어떻게 의가 예수님을 통해 전수되었는지를 발견코자 하는 의도로 로마서 5:12-19절을 읽는다면, 아무런 결론을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이 구절에서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다. 하지만 죄가 진실로 인간의 경험에서 현존하는 실제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또한 실제임을 발견하려는 의도로 이 구절을 읽는다면, 우리는 그 죄가 이미 패망된 적임을 알 수 있게 되고,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의 생애에서 죄의 문제를 완전히 정복할 수 있다는 기쁨에 넘치는 발견에 우리가 도달하게 된다. 로마서 5:12-19절로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모든 것은, 죄가 아담에게서 시작되었다는 사실과 모든 사람이 다 죄를 범하였다는 보편적 실체와 또 그 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분리됨을 가져왔다는 점이다. 그리고 아담의 죄 때문에 이 분리됨과 함께 육체적 쇠퇴 (physical degeneracy)뿐만 아니라 죄의 성향 (a propensity to sin), 그릇된 경향 (wrongful tendencies), 변태된 식욕 (perverted appetites), 천해진 도덕성 (debased morals) 등을 우리가 물려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 죄로 기우는 경향이나 죄의 유혹을 느끼는 그 자체는 죄가 아니다.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에 대한 반역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죄에 굴복하여서 죄의 행위를 범함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거역하게 되면, 그것이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소외시키며 하나님 앞에서 정죄됨을 받게 되는 바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하여 책임을 지게 되는데, 하지만 하나님께 감사한 바는 그 죄의 사함과 더불어 하나님 앞에 가납되어짐이 '의를 통하여 군림하여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인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로마서 5:21) 해주시는 은혜로 말마암아 우리에게 제공되기 때문에 그러하다." (John M. Fowler, Sin, SDA Bible Commentary, v. 12, p. 257)

 

결론적으로 이러한 죄와 인간의 본성에 대해 상고할 때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원초적으로 타락된 본성이 존재하지 않을 때에 죄가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하늘에서 죄가 시작되 것이 루시퍼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타락된 본성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고,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게 된 것도 그들이 타락된 본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는 사랑과 공의의 법이 절대 바뀌지 않은 것처럼, 죄의 정의가 결코 인간의 타락 전이나 후를 통해 바뀌지 않았다. 따라서 분명한 것은 죄가 본성에 달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자유 의지에 달린 것임을 우리가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에만 우리는 루시퍼의 반란으로 시작된 대쟁투의 근본적인 이슈가 우리의 타락된 본성이 아닌, 하나님으로 부터 부여된 자유 의지의 선택과 직결되어 있음을 절실히 깨닫게 될 것이다.

에녹2

2009.09.24 06:55:24
*.119.92.166

김정대님 글 감사합니다. 원죄론이 정말 잘못됐다고 생각했는데 생애의 빛, 김정대님의 글을 통하여 확신이 생겼습니다.

은빛 날개

2009.09.24 11:17:56
*.215.17.183

김정대님

쓰신 댓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질문이 좀 있어서요

그렇다면 갓난 아기로 태어나서 1살정도에 (죄를 지을 선택의 의지가 없는 나이로 보고) 죽은 아이들은

100%다 하늘에 가나요?? 그들은 그럼 의인으로 간주되나요???

 

사실이 그러면  낳자마자 아기를 잃은 부모들은 기뻐 뛰며 춤을 추어야겠군요

적어도 그 자식은 하늘나라를 이미 맡아놓은 것이니까요.

 

만약 그들을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것으로 간주해 주신다면

그들 입장에선 하나님께서 공평치 못하신 분이랄 수있지 않을까요?(부모들 생각에)

죄를 짓고 안짓고의 선택권을 다 공평하게 주시지 않은것으로 생각할수있으니까.

 

저도 모태 교인이라 어릴때부터 들은 소리가 하나 생각 나는데

확실한지는 모르겠어요

나이가  8살인가?6살??될때까지는 부모의 믿음으로 하늘나라를 가고 못간다고.

예언의 신에 그렇게 쓰여있담서요?(어디인지는 몰라서 죄송해요)

 

이말이 사실이라면, 이 아이가 구원 받지 못한다면 부모의 죄 때문이란 얘긴데..??

그 아이는 아직 죄를 지을 선택의 능력이없으니 당근 의인으로 간주되야하는데

뭐땜에 부모의 행위에 적용을 받나요??

생애의 빛 식으로  겔 18:20절 말씀을 해석하실때 이런것은 걸림돌이되지는 않으신지.  

 

김 명호 목사님의 말씀으로 적용하면 이해가되지만

김정대님의 말씀으로는 해답이 잘 안풀려서 여쭙는겁니다

에녹2

2009.09.24 16:43:39
*.119.92.166

성경이 침묵하는 일에는 침묵하는 것이 최고일 것입니다. 은빛날개님처럼 저도 궁금하긴 합니다만...

김정대

2009.09.24 20:21:57
*.82.200.26

갓난 아기가 죄의 행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죄를 짓지 않은 상태에서)

죽었더라도 그 아이는 둘째사망(영멸)의 대상이 되는 죄인이라는

소위 "원죄론"에 기반을 둔 가설이 사실이라고 해 봅시다.

그것이 김명호 목사님의 주장인데

그렇다면 그렇게 죄짓지 않고 죽은 갓난 아기들의 영혼들을 위해

그런 원죄론적인 가정이 해결해 주는게 도데체 뭐가 있습니까?

 

솔직히 로마천주교는 "유아세례"의 의식과 "연옥"이라는 개념을 통해

그 갓난아기를 구원해 준다는 그들나름대로의 해결책이라도 제시하고 있습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예정설"이라는 일종의 그들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그렇다면, 칼빈주의적 원죄론을 주창하는 재림교인들이

이 갓난 아이들과 그 부모들을 위해 제시하는 해결책이 있습니까?

난 아직 그런걸 들어본 적 없습니다.

이런 갓난아기들도 영멸로 정죄된 죄인으로만 치부해 버린후 방치합디다.

이런 처사가 정말 이해되는 답일까요?

제가 매일 함께 일하는 명석한 불가지론자 친구들과 같은 세인들에게

이런식의 엉성한 죄론과 구원론을 하나님의 섭리로

제시한다면 정말 그들이 납득하고 받이들일 수있는 것일까요?

저도 이런걸 이해할수 있는 해결책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실제적인 분이요, 처음과 끝이 분명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도 미성년의 어린이들에 대한 법적 및 도의적 책임은

부모가 지게 되어 있습니다. 아주 상식적이고 합당한 관례이지요.

그렇다면 어린아이들의 구원에 관한 부분에서도

부모가 책임을 진다는 개념이 사실 따지고 보면 상식적인 개념이라고 생각됩니다.

 

사실 유아(幼兒)들과 매우 어린 아이들이 죄의 행위들을 범할 수 있는가,

혹은 그 아이들이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많은 논쟁이 있어 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영감의 말씀이 계시한 것 이상의

불필요한 추측을 일삼는 충동을 자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주제와 관련된 많은 부분은 오직 하나님만 아시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어, 사람이 정확히 어느 나이가 되면 책임 적령기에 이르게 되는지

알려주는 영감의 말씀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명백한 계시가 없는 상황에서는,

이러한 책임 적령기의 도래가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거라는 결론밖에 우리가 내릴 수 없습니다.

한 어린아이의 생애 중 어느 시점에서

이 아이에게 책임성과 영적 이해가 계발되기 시작하는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하기에 예언의 신은 멸망받는 어린아이들에 대해서도 언급한 곳이 있고

또 구원받아 재림때 부활하는 어린아이들에 대한 이상을 적은 부분도 있는 겁니다.

 

다음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대는 그대의 어린 자식의 구원에 관하여 질문하였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곧 그대가 받을 응답이다.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눅 18:16). 다음의 예언의 말씀을 기억하라.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 소리를 금하여 울지 말며 네 눈을 금하여 눈물을 흘리지 말라 네 일에 갚음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의 최후의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경내로 돌아오리라’(렘 31:15-17). 이 허락의 말씀은 곧 그대의 것이다. 그대는 주님 안에서 위로를 받고 신뢰하여야 한다. 주님께서는 환란의 때 이전에 많은 어린이들을 미리 잠재우신다는 말씀을 나에게 가끔 지시해 주신 적이 있다. 우리들은 죽은 자식들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들은 죽은 자식들을 만날 것이며 하늘나라에서 저들을 알아보게 될 것이다. 그대의 신뢰심을 주님께 두고 두려워하지 말라” (서신 196, 1899).

“우리들의 가장 간절했던 소망이 가끔 꺾이는 때가 있다. 우리들이 사랑하는 식구들이 죽음으로 헤어지게 된다. 우리들은 영원히 잠든 저들의 눈을 감겨주며 무덤에서 장사하고 다시는 저들을 못보게 된다. 그러나 소망은 우리들의 정신을 버티게 한다. 우리들은 영원히 헤어지는 것이 아니며 예수님 안에서 잠든 사랑하는 식구들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저들은 원수의 땅에서 부활하게 될 것이다. 생명을 주시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다......갓난 아이들이 불멸의 모습으로 땅속에서 나오게 될 때에 저들은 즉시로 나아와 어머니의 팔에 안기게 될 것이요, 저들은 다시 이별이 없는 재회의 기쁨을 맛볼 것이다. 그러나 많은 어린이들이 그 곳에서 어머니를 찾지 못할 것이다. 우리들은 어머니의 열광적인 승리의 노래를 듣지 못할 것이다. 천사들은 어머니가 없는 갓난 아기들을 받아서 저들을 생명 나무가 있는 곳으로 데려간다. 예수님께서는 갓난 아기의 작은 머리 위에 빛의 황금테로 만든 면류관을 씌우신다. 하나님께서는 ‘에버’(화잇 여사의 조카딸의 이름)의 사랑하는 어머니가 그 자리에 설 수 있게 하심으로 그의 아기가 작은 날개를 접고 어머니의 품에 안기는 것을 허락하실 것이다” (청년지도자, 1858.4).

생명강

2009.09.26 03:45:23
*.168.46.106

김명호 목사님의 글에 대한 김정대 선생님의 댓글, 그 설명이 정말로 훌륭합니다!  재림 교회 안에 스며들고 있는

바벨론의 복음을 막아 싸우는 일에 충성하심을 감사해야겠네요.  그리고 김명호 목사님의 가르침이 정말 원죄설을

기초한 것이라면, 김 목사님 정신차리셔야 겠네요.

christian

2009.09.26 12:57:47
*.102.22.166

어린 아이들이 하늘나라에 가는 것은 예수님이 없어도, 아이들 자신이 죄가 없어서 가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의 공로  때문에 가는 것입니까?

 

김정대님 글 대로는 예수님과 상관없이 아이들 자체에 죄가 없기 때문에 하늘나라 가는 것 같은데요.

 

정말 그렇습니까? 그러면 정말 구주 예수님이 필요없는 사람들이 있군요.

은빛 날개

2009.09.26 21:44:24
*.215.17.183

바벨론 복음??

와우~~~

어떻게 그런 단어를 그렇게 확정적으로..??

한 사람의 댓글을 읽고 그렇게 금방 참 진리라는 확신이 드신다니..

아무 의문도 없이??

생명강님의 믿음이 참 부럽네요(진심으로요)

근데 진짜 믿음이 있는 분들은 다른 쪽을 그런 말로 일축하진 않던데.

좀 보기가 ~~그래서요.

 

 

은빛 날개

2009.09.26 21:51:47
*.215.17.183

참! 인사를 잊었네요

제 질문에대한 김정대님의 성의 있는 답글

감사합니다

아직도 질문은 많지만 제가 기도하면서 말씀을 좀 더 읽어보구요.

박진용

2009.09.26 23:24:57
*.231.216.54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화잇 선지자의 기록이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화잇 선지자의 글을 보관, 연구, 조사하는 일을 하시는 분의 글을 읽어 보시면 해답을 얻으 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성은 우리와 분명 다른 죄 없으신 인성이십니다.   

김명호 목사님의 견해가 성서적이며 선지자의 글과도 일치합니다.

 

Sources clarify Ellen White's Christology

저술 자료들을 통해 보는 화잇 부인의 기독론

팀 포이리어(Tim Poirier)

Tim Poirier, an assistant secretary of the Ellen G. White Estate,

serves as archivist and researcher.

Passages from books Ellen White used

throw light upon her view of Christ's human nature

(Ministry 1989년 12월호)

화잇 부인의 저술 자료의 사용에 대한 최근의 연구는 계시와 영감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증진시켜 주었다. 또한 그것은 독자로서, 그리고 작가로서의 화잇 부인의 관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었다. 그녀의 책들에 대한 조사 연구는 그녀가 임의로 광범위한 신학적 사색을 가졌음을 보여 주고 있지만, 그녀의 저술에서 나타난 사고의 일관성은 그녀가 자료를 인용하는데 있어서 매우 신중했었다는 증거를 제공한다.

그녀의 신중한 자료의 사용에 대한 주목할 만한 예는 수년을 걸쳐 상당한 논란을 일으켰던 한 주제에 대하여 어떤 빛을 비추어 주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의 본질에 관한 문제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타락 전의 아담의 죄없는 인성을 취하셨는가, 아니면 타락 후의 우리와 같은 본성을 취하셨는가? 혹은 그분께서는 아담이나 우리와 같지 않은 다른 독특한 본성을 지니셨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주제에 관한 화잇 부인의 언급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들도 주로 그녀의 “성향”(propensity)과 “경향”(tendency)이란 단어의 사용에 집중되어 왔다.

과거에는 이러한 단어들을 통하여 화잇 부인이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가를 이해하려는 시도들은 그녀가 그녀의 저술들을 통하여 각기 다른 배경에서 그것들을 사용한 방법들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화잇 부인이 읽고 사용했던 저서들 사이에서 이 문제 대한 논의는 그녀가 쓴 명백히 모순되는 것들에 대한 중요한 빛을 던져주고 있다. 바울의 글들을 연구하는 학생은 그의 서신들을 주의깊게 읽으므로 그의 기별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예를 들어, 유대주의에 대한 이해는 바울이 그 유대주의적 어휘로부터 빌려온 특별한 단어나 개념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높여 준다. 이와 같이, 화잇 부인의 글들 뒤에 있는 출처에 대한 연구는, 비록 그것이 그 연구 기별을 이해하기 위한 필요조건은 아니지만, 그녀의 신학적 정황과 작가로서의 관심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를 제공하는 것이다.

화잇 부인이 빈번히 인용했던 그녀의 마음에 드는 작가들 중 한 사람은 헨리 멜빌(Henry Melvill, 1793∼1871)이라는 성공회 설교가였다. 런던에서 수년 동안 가장 유명한 설교자로 인정되었던, 멜빌의 설교들은 여러 다른 책들로 수차례 출판되었다. 화잇 부인 유산관리위원회는 화잇 부인이 개인적으로 소장했던 1844년에 출판된 멜빌의 설교집들을 보관하고 있다. 이 화잇 부인이 소장했던 설교집에 들어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굴욕(The Humiliation of the Man Christ Jesus)”이란 설교는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화잇 부인의 글들 가운데 나타난 명백한 갈등을 해소하는데 있어서 특별히 가치 있는 정황을 제공한다. 1887년 7월 5일자 리뷰지에 실린 “그리스도 인간의 모본(Christ Man's Example)”이란 기사에서, 화잇 부인은 이 멜빌의 설교를 광범위하게 인용했다.

이 설교 가운데서, 멜빌은 지엽적으로 그리스도의 인성의 문제를 숙고하고 있다. 비록 우리는 화잇 부인이 멜빌의 이 설교 부분에서 직접적으로 어떤 자료를 빌려왔다는 사실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유사하게 보이는 많은 그녀의 글들은 멜빌의 글을 담고 있다는 논쟁을 초래하는 것처럼 보인다.

멜빌에게 있어서, 타락은 두 가지 주요한 결과를 가져 왔는데, 그것은 1) “흠없는 연약함(innocent infirmities)”과 2) “죄된 성향(sinful propensities)”이라는 것이다. 그는 “아담의 인성은 범죄 전에 이 두 가지로부터 자유로웠으며, 범죄 후에 이 두 가지를 지니게 되었다.”고 말한다. (C. P. Mcllvaine, ed., sermons by Henry Mevill, B. D.(New York: Stanford and Swords, 1844, p. 47.)

멜빌은 “흠없는 연약함”이란 말로 배고픔, 고통, 약함, 슬픔, 그리고 죽음 같은 것들을 나타낸다. 그는 “완전하게 죄가 없는 죄된 결과들이 있다. 죄는 고통을 가져왔으나, 고통 그 자체는 죄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C. P. Mcllvaine, ed., sermons by Henry Mevill, B. D.(New York: Stanford and Swords, 1844, p. 47.) 다른 한편으로 멜빌은 “죄된 성향”이란 말로 죄에 기울어지기 쉬운 혹은 죄에 대한 “경향(tendency)”을 언급한다.

그의 논의를 요약한다면, 멜빌은 타락 이전 아담은 우리가 가지고 타고 나는 “흠없는 연약함”이나 “죄된 성향”도 지니지 않았으며, 예수님께서는 “흠없는 연약함”을 취하셨지만 “죄된 성향”을 지니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비록 그분이 흠없는 연약함을 지닌 인성을 취하셨지만, 그분은 죄된 성향을 가진 인성을 취한 것은 아니었다. 바로 여기에 신성이 개입된 것이다. 성령께서 그 처녀를 덮으시고, 그녀로부터 나온 연약함을 허락하셨으나 사악함을 금하셨다. 그로 인하여 슬퍼하고 고통 하는 인성을 가진 채 태어나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결하고 흠없는 인성을 지니셔야 했다. 그것은 눈물을 가지신 인성이지만 흠이 없는 것이며, 심신의 격통 가운데 빠질 수 있지만 죄를 범할 수 없는 것이며, 나타난 불행과 가장 가깝게 동참하지만, 불행의 원인을 일으키는 것으로부터 무한히 떨어진 그런 인성인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믿는 정통 교리로서 그리스도의 인성은 아담의 인성이 아닌, 타락 이전의 아담의 인성이며, 그것은 모든 면에서 타락 이후 아담의 인성인 타락한 인성이 아니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리스도의 인성이 아담의 인성이 아닌 것도 그것이 타락으로 인한 흠없는 연약함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코 도덕적으로 불결하다고 할 만큼 타락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타락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인성은 거의 우리의 인성과 같지만 죄는 없는 것이다.” (C. P. Mcllvaine, ed., sermons by Henry Mevill, B. D.(New York: Stanford and Swords, 1844, p. 47.)

화잇 부인이 소장했던 옥타비우스 윈슬로우(Octavius Winslow)의 책, “구속자의 영광(The Glory of the Redeemer)” (London: John Farquhar Shaw, 1855.) 역시 그리스도의 인성의 본질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한 윈슬로우의 설명과 화잇 부인의 글들은 많은 부분에 있어서 서로 일치했다. 이것은 화잇 부인의 글들이 그의 글들을 많이 인용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인다. 화잇 부인의 윈슬로우의 언어 사용은 그녀가 멜빌의 경우와 같이 그가 사용했던 같은 방법으로 성향(propensity), 또한 경향(tendency)과 같은 용어들을 이해했음을 보여준다.

더우기 이 점을 다루고 있는 또 다른 화잇 부인의 글은 이러한 관점과 분명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대쟁투(The Great Controversy)에서 창세기 3장 15절의 예언을 논의하면서 화잇 부인은 뱀과 여자 사이의 놓여진 “원수됨”(enmity)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주석하고 있다 : “이 원수 관계는 선천적으로 되지 않는다. 인류가 하나님의 율법을 범했으므로 그의 본성은 약해졌다. 그리하여 그는 사단과 조화되고 불목하지 않게 되었다. 죄인과 죄의 창시자인 사단과는 본질상으로 아무런 원수 관계가 존재치 않는다.” (Mountain View, Calif.: Pacific Press, 1911, 505.)

흥미롭게도, 다른 관점에서 화잇 부인은 그리스도에 관한 이러한 관찰을 첨가하고 있다.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사이에 생긴 원한은 초자연적인 것이었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이 원한은 일면 자연적인 것이었고 다른 면에서 볼 때 인성과 신성을 겸하신 주님께 초자연적인 것이기도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의 거주자로 나타나셨을 때처럼 원한의 감정이 극도로 악화됐던 적은 결코 없었다.”

(Selected Messages(Washington, D.C.: Review and Herald, 1958), book 1, p. 254.(italics supplied.))

부연한 것 없는 이러한 글들은 멜빌의 “첫 번째 예언”(The First prophecy)이란 설교에서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멜빌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 “이 원수됨이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계셨을 때보다 더 큰 적이 없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원한은 일면 자연적인 것이었으며, 다른 면에서 볼 때는 초자연적인 것이었다. 그분은 죄에 대한 타고난 증오심을 가진 채, 순결하게 태어났다. 그분의 본성이 죄를 미워하도록 그분은 초자연적으로 태어났다.” (Mcllvaine, p. 13.(italics supplied.))

비록 화잇 부인의 기독론이 이 두 사람들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넓은 것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녀가 사용한 용어에 대한 어떠한 해석도 그녀의 글의 출처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연구가 화잇 부인의 자료의 차용의 범위에 관한 문제를 넘어서 이와 같은 그녀의 자료의 사용법을 찾으려는 것으로 진행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전달하시는 그 과정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으며, 더욱 깊이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김정대

2009.09.27 06:15:40
*.82.200.26

예수님의 인성론에 관해 엘렌 화잇을 비롯한 거의 모든 재림교회의 선구자들이 취한 입장이 무엇이었는지는 이 문제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담은 연구서들을 읽어 보면 분명해 집니다. 최근에 들어 이 문제를 새로 조명하고 분석하는 여러 신학자들의 논문과 연구서들이 나왔습니다. 솔직히 이 주제에 대해서는 이런 게시판을 통해 의견을 충분히 발표한다는게 쉬운일은 아닐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하게 밝히고 싶습니다. 화잇부인이 멜빌의 서적들을 참고하거나 그 책의 일부용어를 사용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이 그 저자의 사상을 인준하였다고 추론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녀가 인용한 다른 모든 저자들의 사상에도 그렇게 적용이 되어야 할 것인데, 우리는 그렇지 않음을 압니다. 그리고 화잇부인의 글을 총체적으로 읽어보면 그것이 들어나기 때문입니다. 이런식의 논리라면 산상보훈중 마태 7:12에서 예수님이 언급한 골던 룰 (Golden Rule)은 힐렐 랍비의 글에 있는 용어를 빌린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이 골던 룰의 모든 측면에 대해 힐렐 랍비의 가르침을 다 인준하였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교 요한이 말씀이 육신이 됨을 언급하면서 헬라인들의 사상을 나타내는 용어인 로고스(logos)를 사용하였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 말에 담겨진 헬라인들의 사상을 요한이 모두 인준했다고 주장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포리어씨어 글을 인용하여 김명호 목사님의 주장이 성서적이고 예언의 신과도 일치한다고 주장하셨는데, 그 화잇재단의 이사장인 케넷 우드 박사는 김명호 목사님이 견지하시는 pre-fall 입장이 비성서적이고 예언의 신과도 완전히 충돌하는 견해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는데, 그렇다면 팀 포리어보다는 케넷 우드가 상사이니, 계급으로 따지면 박진용님의 주장이 지는게 됩니다. 이 얼마나 빈약한 주장의 기반이 됩니까? 이런식의 주장은 지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신학자들이나 이런 사람들의 글은 참고는 할 수 있지만). 참고로 저는 얼마전 바로 이 팀 포리어씨로 부터 케넷 우드박사가 1978년에 대총회 지도자들 회의에서 발표하였던 그의 post-fall 입장에 근거하여 어지러운 교회의 풍정을 조명 분석한 연구서인 「HOW WE GOT WHERE WE ARE: A Review of Some Aspects of Adventist History Since 1955」를 전해 받기도 하였습니다. 요지는 그가 박진용님이 여기 인용한 그런면만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지요.

 

화잇 부인은 분명히 post-fall 입장을 견지하였습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도 증명될 수 있고 그녀의 글속에 나타난 일관된 용어의 체계를 파악하여 그대로 적용해 보면 나타납니다. 이 문제에 대한 여러가지 혼동은 그녀의 글을 읽는 사람들이 그녀의 글로 해석하는것이 아니고 자신들이 가진 선입견을 그녀의 글에 주입하여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김명호 목사님의 책을 보면 그러한 면이 많이 나타납니다.  위에 쓰여진 김명호 목사님의 컬럼에서 그분 자신의 원죄론적인 선입견을 지지하기 위해 인용한 화잇부인의 글을 화잇부인이 의미한 것과는 완전히 반대로 해석하고 있는 것과 같은 예들 말입니다.

 

이 예수님의 인성문제와 재림교회내의 기독론 역사를 논한 최근의 논문들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남주혁 박사의 논문, 제리 문 박사의 논문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2년전 앤드류스 대학에서 있었던 QOD 50주년 학술회의 여러 논문들이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인 재림교인들 사이에서 pre-fall입장을 주창하는 이들에 의해 이 문제에 대해 너무나 지나친 역사적 곡해들이 횡행해 왔는데, 우리 이제 이 문제에 대해 좀 정직하게 조명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 이 주제에 대하여 여러 논문들을 점검해 보며 번역도 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발표할 겁니다.

 

여기서 원죄론적인 복음주의파 복음론이나 예수님의 pre-fall 입장을 주창하는 분들에게 한가지 좀 정중하게 부탁드려봅니다.

여러분들의 견해가 예언의 신 말씀과  그 사상과 조화된다고 주장하며 그것을 예언의 신으로 증명코자하는 그러한 pretense를 이제는 좀 그만두시고, 차라리 (지난달 미주 지남에서 밝힌대로) 남주혁 박사처럼 이제는 옛날에 엘렌 화잇을 포함한 우리 재림교회 선구자들이 견지하던 그러한 입장을 바꾸고 변하여 새로 발전된 입장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식으로 주장하심이 어떨지요? 오히려 그것이 지적으로나 영적으로 기본적으로 정직한 입장이 될 것입니다. 저는 남주혁 박사가 요사이 밝히는 그의 견해에 대해서 많은 이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지만, 이런면에서 그의 integrity를 높이 평가하고 있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하여튼 이 문제뿐만 아니고 어떻게 칼빈주의적 원죄론이 재림교회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읽어보시고 싶은 분들은 다음 웹사이트로 가서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이 저자의 책은 PUC에서 신학과 과목의 한 참고서로 사용되고 있는걸 보았습니다).

 

http://www.greatcontroversy.or.kr/bbs/zboard.php?id=gck_content_all&no=58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선 여기서 자세히 제 의견을 밝히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인성에 관한 화잇부인의 글을 올바로 이해할 수있는 가이드적인 원칙이 있습니다. 화잇부인의 글속에 일종의 체계가 있지요. 그러한 원칙을 보여주는 제 친구인 미국인 목회자의 글을 한번 인용해 보겠습니다:

 

저등 본성과 고등 본성

 

영감의 일치된 가르침은 우리 인간의 본성 속에 저등 세력과 고등 세력이 동시에 존재함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다른 어떤 점들보다도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러한 영감의 가르침은 인간에게 존재하는 죄의 정확한 본질에 대해서는 물론,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엘렌 화잇의 상충하는 듯이 보이는 몇 글들에 대해 우리가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하도록 도움을 준다. 엘렌 화잇의 이러한 증언은 성경의 가르침과도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도 인간 본성 속에 내재한 두 세력의 존재에 대해 제자들에게 "참으로 영은 원하지만 육신이 연약하도다"(마태 26:41)라고 지적하셨음을 보게 된다. 그리고 사도 바울도 또한 "내가 내 몸을 억제하여 복종하게 한다"(고전 9:27)며 동일한 개념을 전하고 있다.

 

엘렌 화잇도 이와 비슷한 표현으로, "의지는 취향이나 경향이 아니고, 사람들에게 역사하여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불순종을 결정하는 능력이다"(5 증언, p. 513) 라고 기술하기도 했는데, 다른 여러 글에서 이 점에 대해 좀 더 명확한 구분을 내리고 있다:

육체는 반드시 지배를 받아야 한다. 보다 높은 능력이 그것을 지배해야 한다. 감정은 의지에 지배되어야 하고, 의지는 하나님의 지배 아래 놓여야 한다. (치료, p. 130)

계발된 지력이 지배권을 잡아 동물적 습성을 통제하고 이를 도덕의 힘에 복종시킬 때에는 유혹을 가지고 정복하려 하는 자기의 힘이 심히 적어질 것을 사단은 잘 알고 있다. (청년, p. 237)

어떤 종류의 부절제든지 감각 기관을 마비시키고 뇌신경의 활력을 약화시켜 영원에 속한 사물을 분별하지 못하고 평범한 것과 같은 차원에 놓도록 한다. 향상된 목적을 위해 고안된 정신의 고등 능력은 비열한 정욕의 노예로 전락한다. (영문 시조, 1887년 8월 11일)

이렇게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두 세력을 구분하면서, 엘렌 화잇은 또한 다음과 같이 육적인 본성 그 자체는 죄를 지을 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

저속한 욕정은 체내에 자리를 차지하고 그것을 통하여 일한다. "육체" (flesh) 또는 "육체의" (fleshly) 또는 "육체의 정욕들" (carnal lusts) 이란 말은 그 저속하고 타락한 본성을 포함한다. 육체 그 자체는 하나님의 뜻에 배치되는 행위를 할 수 없다. (가정, p. 127)

한마디로 우리의 고등 능력을 통하여 도덕적이고 영적인 선택이 내려지게 된다. 이러한 고등 본성의 개입이 없이는 죄나 의가 절대로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악한 욕정과 죄스러운 경향들은 위의 글이 분명히 밝혔듯이 그 자체로는 죄를 지을 수 없는 저등 본성 속에 그 일부로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악한 욕정과 경향들은 의지와 성품을 포함하는 인간의 고등 본성으로부터 추방될 수 있는데, 다음의 증언 말씀이 그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참된 화평을 창조하시고 영속시키실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은 그리스도의 은혜이다. 이 은혜가 마음에 심기워지면 그것은 분쟁과 불화를 일으키는 악한 정욕을 내쫓을 것이다. (소망, p. 305)

정욕으로 인해 세상에 있게 된 타락을 피하고 하나님의 품성에 동참하는 자가 되는 것이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얻는 우리의 특권임을 깨달아야만 한다. 그러하면 우리는 모든 죄와 성품의 결함들로부터 정결케 된다. 단 하나의 죄스러운 성향(one sinful propensity)도 우리는 간직할 필요가 없다. (SDA Bible Commentary, vol. 7, p. 943)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인식할 바는, 엘렌 화잇이 위에서 악한 정욕을 내쫓고 죄스러운 성향을 간직할 필요가 없음을 언급했을 때, 그녀가 1900년대 초에 있었던 거룩한 육체 운동 (Holy Flesh Movement)의 교리를 가르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녀는 다른 곳에서 "식욕과 욕정은 성령의 지배 아래 두어야 한다. 영생 이전인 이생에 있을 동안은 전쟁이 끊일 새 없이 있을 것이다"(교사, p. 20)라고 또한 말하였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한편으로 예수께서 악한 성향들이나 우리와 비슷한 욕정들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는 엘렌 화잇의 글들과 (2 증언, pp. 201-202, 509; SDA Bible Commentary, vol. 5, p. 1128) 또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것들을 예수께서 지니고 있었다는 글들 (In Heavenly Places, p. l55; Christ Triumphant, p. 260; 영문 시조, 1896년 4월 9일; 영문 시조, 1900년 10월 17일) 사이에 있어 보이는 상충함을 해결하는 열쇠를 발견하게 된다. 한편의 글들은 의지와 성품의 선택이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고등 본성을 묘사하는 글이며, 다른 편의 글들은 "그 자체는 하나님의 뜻에 배치되는 행위를 할 수 없다"(가정, p. 127)라고 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저등한 육적 본성을 묘사하는 글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본성에 내재하는 저등 및 고등 세력들에 대한 이러한 구분이 어떻게 재림교회 안에 지금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논쟁점을 해결해 줄 수 있는지 더 연구하기를 원하는 독자들은 영문 대쟁투 사이트에 게재된 필자의 연구서, 「저등 본성과 고등 본성: 재림교회 안의 기독론 논쟁을 해결하는 열쇠」를 참조해 보도록 초청하는 바이다.

 

말석

2009.10.20 21:11:54
*.166.44.203

애의 빛(미국의 자영 독립기관 : 일명 견고한 토대)에서 발행한
[마지막 세대 제35호]의 제목이
"예언의 신을 따라야 합니까? 사람을 따라야 합니까?"이다.
'사람의 말보다는 선지자의 기별에 더욱 충실해야 한다'는 뜻을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더더욱 정확한 정답은 "오직 성경만"으로가 아닐까 한다.
그 다음은 그 큰 빛을 더욱 확실히 조명해 주는 작은 빛인
예언의 신이 뒷받침이 되어야 함은 너무도 마땅하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제목은
'예언의 신을 따라야 하는가? 사람을 따라야 하는가?'라고
해 놓고도 정작 자신들은 그 글의 바로 옆 란에
"생애의 빛과 같은 신학적 노선에" 있는 재림교단의 유수한(?)
전 현직 목사와 석학들 19명을 나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예언의 신"이나 "사람" 이전에 "성경"은
그들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정확한 해답이 될 것 같다.

먼저, 생애의 빛에서 반복하여 크게 강조하는
[그리스도의 인성 문제]의 단초가 될 수 있는
[죄의 정의와 원죄설]에 대한 [생애의 빛]의 주장과 함께
성경과 예언의 신의 진정한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생애의 빛 측에서는 자신들의 죄와 원죄에 대한 주장만이
재림교단이 본래 가졌던 순수한 빛이며, 선지자 엘렌 지 화잇의 정통적 주장이고
그 반대의 개념은 모두 1950년대 이후 재림 교단에 스며 든
신신학의 영향과 결과라고 힘 있게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과연 그러한가?

1.죄의 정의에 대한 생애의 빛의 주장

생애의 빛 측은 "사망으로 태어난 상태 자체가 죄가 아니다.
아담과 하와의 본성이 사망과 죽음이 된 것은 죄를 범한 결과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의 삯이 사망이지, 사망 자체,
곧 죄의 형질을 가진 자체가 죄라고 말하지 않는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범함으로 의의 옷을 잃게 되었고
그 결과로 타락한 본성을 갖게 된 것이다"
라고 했다.

그리고 로마서5:12를 인용한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인다.
다소 긴 내용이지만 그대로 옮겨 싣는 것은
그들 주장의 정확한 내용 파악과 함께
그 글 들 속에 나타난 모순점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이 말씀을, 한 사람이 범한 죄 때문에 인류 전체가 유황불의 정죄를 받는 죄인으로 태어난다고 해석해야만 하는가?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
"로마서 5장 12절에서 몇 절 내려가면 이 말씀에 대한 분명한 설명이 나온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 5:18) 여기에서 한국어 성경 번역은 “모든 사람”이라는 표현 대신에 “많은 사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KJV 성경과 헬라어 원어는 “많은”이 아니라, “모든”이라는 단어로 기록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대목에 있어서는 오히려 한국어 성경이 그 의미를 더 잘 전달해 주는 것 같다. 사도 바울이 말하려고 한 의미는, 아담 한 사람이 범죄 한 것처럼 모든 사람이 각기 다 범죄 하였으므로 정죄와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현재도 살아 계시기 때문에 그분의 의의 능력과 은혜를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는 언제든지 그의 의로 모든 사람이 의의 선물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이 죄를 지은 것과 같이 모든 사람이 다 각기 죄를 범하여 죽게 된 것처럼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의의 선물, 성령의 은혜의 역사를 받아들이면 누구나 의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모든 사람이 의와 생명의 선물을 받지 못하는가?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에게 의와 생명의 선물이 이미 와 있음에도 말이다. 그러므로 로마서 5장 15절과 19절은 다음과 같이 정확한 포인트를 지적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many)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many)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many)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many)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롬 5:15,19) 여기서는 KJV 성경과 헬라어 원어 성경에서 “많은”(many)이라는 뜻의 단어를 사용하였다. 만일 한 사람의 죄로 모든 사람이 자동으로 죄인 되는 것이라면 예수님을 통하여 모든 사람이, 믿든지 안 믿든지 자동으로 다 의인 된다는 말인가? 믿지 않고 굴복하지 않는 악인들도 자동으로 의인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 심판받고 멸망 받는 것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의롭게 되는 일에는 “나의 선택”이라는 조건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아담의 죄 때문에 자동으로 모든 사람이 정죄를 받은 것이며, 인간이 아기로 태어나는 그 자체가 죄라고 한다면 얼마나 모순되는 말이 되는가? 자기가 각각 죄를 지어 사망에 이르고 자기가 각각 예수님의 의를 받아들여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생애의 빛 출판 잡지 '마지막 세대' 35호에 실린 글)

생애의 빛의 '죄'에 대한 결론은 "죄란 의지력의 행사에 의한 불순종이다"
그러므로 "갓 난 아기는 죄 된 본성은 가지고 태어나지만,
정죄 받은 죄인은 아니며 의도적인 불순종을 할 때까지는
정죄를 받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2.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1)죄와 죄인 그리고 의와 의인의 성경적 정의

생애의 빛 측은 '죄를 행위'로
혹은 '도덕적인 개념'으로만 정의하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죄에 대한 유일한 정의는
‘죄는 불법이라.’(요일 3:4)는 말이다."(쟁투, 492)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일 3:4)

말씀만을 '유일한 죄의 정의'의 성경 구절로 인용한다.
그러니까 생애의 빛 측은 '죄는 행위'이기 때문에
'행위로 죄 짓지 않은 아기들은 정죄가 없는 죄인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죄인이 되는 시작점은
'행위적인 것으로 죄를 짓는 순간부터'라는 공식이 세워진 셈이다.

과연 성경은 우리의 죄와 죄인의 개념을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또 다른 성경의 죄에 대한 정의를 찾아보자.
“모든 불의가 죄로되”(요일 5:17)
의롭지 못한 모든 것이 죄이다.
우리는 의로운가?
갓 난 아기는 참으로 의로운가?
아담의 범죄 이후 이 땅에 태어난 사람 중 '사람으로 오신 예수'외에는
그 어느 누구도 의롭지 못하다.

갓 난 아기도 사람이다.
사람은 아래(땅)서 곧 흙에서 났고 예수님은 위(하늘)로부터 나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요 8:23)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전 15:47)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인간은 근본 자체가 다르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의가 되신다(고전1:30참조).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딤후 4:8)


반면에 우리 인간의 의는 어떠한가?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사 64:6)

"사람은 의인인가?"에 대해 성경은 쐐기를 박듯 명확한 입장을 견지한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다.
성경이 정의하는 의인은 다음 성경절에서 더욱 명확해 진다.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전 7:20)
"의인이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다"는 이러한 분명하여
오해의 여지가 전혀 없는 성경절들을 놔두고 어찌 그리 공론을 일삼고 있는가?
성경은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 (왕상 8:46)다고 선언하고 있다.

성경은 '죄를 한 번도 죄를 짓지 아니하거나
죄 없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정의하지 않고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잠 24:16)는
사람이라고 확언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은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히 10:38)고 했으며,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롬 1:17)다고 한 것이다.


방금 태어나 도덕적으로나 행위적으로 죄 짓지 아니한 어린 아기나
살면서 율법에 흠이 없는 자가 의인이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사는 사람"을 성경은 의인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벧전 2:22)신 예수!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히 4:15)신 예수!
그 홀로 의로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어떤 사람이 감히 죄 없다 할 수 있겠으며 의롭다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빌 3:6)였던 사울(사도 바울)도
다메섹 노상에서 의로우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는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
(행 9:8-9)할 수 밖에 없었고,
바벨론의 총리들과 방백들이 “고소할 틈을 얻고자 하였으나
능히 아무 틈, 아무 허물을 얻지 못하였”
(단 6:4)던
믿음의 거장, 성화의 모본으로 제시된 다니엘도
계시 중에 예수님을 뵈었을 때에는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다"(단10:8)
고 고백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뿐이랴?
얼마나 의로운 생애를 살았는지 자신조차도
'일생에 처녀에게 눈 한번 주목한 적 이 없고
여인에게 유혹된 적 없으며
행위가 한 번도 허탄하거나 궤휼에 빠지지 않았고
자신의 수하의 종들에게까지 한 번도 억울하게 한 적이 없고
과부들의 인도자가 되고
고아와 가난하고 빈궁한 자들의 아비가 되어'(욥31:1~22참조)
“내가 스스로 의로운 줄 아노라”(욥 13:18)고 하면서
“내가 의로 옷을 삼아 입었으며
나의 공의는 도포와 면류관 같았었느니라”
(욥 29:14)고
자신만만했고 그래서 “스스로 의롭게 여기”(욥 32:1)었던 욥,
그래서 성경은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 1:1)고 기록했고,
하나님마저도 그에 대해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욥 1:8)고
사단에게 자랑하셨던 욥!
그 욥기의 생애의 결말, 그의 마지막 간증은 무엇이었던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

이 땅에서 우리 인간의 행하는 선(善), 의(義)...
선행과 의로움과 착한 일 등이
진정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마 19:17)신
그 하나님 그 예수 그리스도 앞에
'티끌과 재'일 뿐이며, 한 낱 "배설물"(빌3:8)일 뿐이다.
누가 감히 어찌 그 하나님 앞에 선하다고 할 수 있으며
누가 감히 의롭다고 할 수 있으리요?
갓 난 아기는 위에 인용된 모든 성경절들에서 예외인 '사람'이 아닌
'사람'이란 말인가?


2)인간의 본질적 '죄인'의 신분

이제 성경은 우리의 본질적 신분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지를
면밀히 살펴보면서 [생애의 빛]측에서 잘 못 해석하고 있는
로마서  5장의 진정한 의미를 상고해 보기로 한다.

성경은 전반적으로 범죄 하여 죽게 된 아담의 모든 후손은
죄인 혹은 죽은 자로 정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마 8:22)

태어날 때부터 죄악으로부터 잉태된 자로 '죄의 삯은 사망'(롬6:23)의
공식에 따라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죽은 자]라는 것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아기로 태어난 인간이 자라면서 범죄를 행하여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본질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죄인적 신분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이다.
“전에는 우리도 다 .....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 8:44)
이 보다 더 확실한 성경적 선언이 어디 있는가?


이와 같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성경적 사실 앞에
그 누가 왈가왈부할 수 있겠는가?
태어나기 전인 잉태 순간부터 '죄악 중에' 있었으며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으며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는
이 보다 더 정확한 그 어떤 증거를 찾으려는가?

3)로마서 5장의 해석

이제 이런 성경적의 근본적인 [죄인]에 대한 명제를 사실로 하여,
로마서 5장을 이해해 보도록 하자!

로마서 5장의 문제가 되는(사실은 문제가 될 것도 없지만 문제를 삼은)
12절에 앞서 로마서 5장의 전체에 흐르고 있는 다음의 사실에 주목하자.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6)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롬 5:10)

첫째,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예수께서 '경건치 않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
둘째,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
셋째,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되었다'는 것!
이 세 가지는 로마서 5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주요 열쇠이다.

생애의 빛 측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만일,
'죄는 범죄의 행위이기 때문에 갓 난 아기는 죄인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적어도 예수님은 갓 난 아기들을 위한 구주는 되실 수 없다.
예수는 모든 인류를 위한 "복스러운 소망"(딛2:13)이 되실 수 없다.

예수께서 "창세전에 죽임 당한 어린양"(계13:8)이 되신 것은,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기도 전이다.
예수님은 범죄 하여 죽게 된
아담의 후손인 아닌 "여자의 후손"(창3:15)으로
이 땅에 오실 것이 예언된 직후부터 '죽임 당한 어린양'이 되셨다.

“타락한 인류를 위한 신비스런 의논-
“평화의 의논”(슥 6:13)은 오래 계속되었다.
구속의 경륜은 지구의 창조 전에 이미 세워졌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창조함으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계 13:8 구역)이시기 때문이었다”(부조, 63)

“구속의 경륜은 아담이 타락한 후에 세워진
사후 고안(事後考案)이 아니었다.
이 경륜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
알게 하신 그 비밀”(롬 16:25)의 계시였다.
이것은 영세 전부터 하나님의 보좌의 기초가 되어 온
원칙을 공개한 것이었다.
태초부터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사단이 반역할 것과,
그 반역자의 기만적인 권세를 통하여 인류가 타락할 것을 아셨다.
하나님께서 죄가 존재하도록 정해 놓지는 않으셨으나
죄가 존재할 것을 내다보시고 그 두려운 비상사태를 위하여
대비책을 세워 놓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셔서
당신의 독생자를 주시기를 언약하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요 3:16) 었다.”(소망, 22)

명백한 사실은, 범죄 한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계획은
'사후 고안이 아니라 사전(事前)적인 고안 이었다'는 것이다.
즉, 로마서 5장의 서두에 언급된 대로
"우리가 연약하여 경건치 않고,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희생 제물이 되실 것이 결정되고 확정되었으며
창세전에 죽임 당한 어린양으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이 확증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분명하고도 명백한 성경과 예언의 신의 기록 앞에
어찌 '죄는 단지 행위적인 것이며 고로 갓 난 어린 아기는
죄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히 11:32)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롬 9:14)

그렇다면 생애의 빛 측에서는
왜 로마서 5장 12절을 억설하여 해설할까?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죄의 정의를 본질이나 근본이 아닌 과정과 결과에만 치중한 나머지,
로마서 5장이 명백히 선언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이 구절을
'모든'이 아닌 '많은'이라고 해석해 버리는
크나 큰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을 다시 한번 옮겨 상기해 보자!

"여기에서 한국어 성경 번역은 “모든 사람”이라는 표현 대신에
“많은 사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KJV 성경과 헬라어 원어는 “많은”이 아니라,
“모든”이라는 단어로 기록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대목에 있어서는 오히려 한국어 성경이 그 의미를
더 잘 전달해 주는 것 같다"
(생애의 빛 출간 '마지막 세대' 35호)

제목이 '사람의 말을 따르지 말자'고 한 분들이
정작 자신들이 의도한 대로 성경절을
자의적으로 억지 해석하는 이 부분에서
나는 아연실색[啞然失色]할 수밖에 없다.
"KJV 성경과 헬라어 원어는 '많은'이 아니라,
'모든'이라는 단어로 기록된 것은 사실"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오히려 한국어 성경이 그 의미를 더 잘 전달해 주는 것 같다"
이 해괴한 논리는 도대체 어떻게 정당화 할 수 있는가?

로마서 5장 12절 한 절 뿐만이 아니다
다음 성경절을 주목해 보자.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롬 3:4)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9-10)

"사람은 다 거짓되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
"인간은 누구든지 다 죄 아래 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언하는 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누가 감히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로마서 5장은 간단명료 명약관화하다
결코 복잡하거나 혼란스럽지 않다.
"한 사람" 곧 '첫 사람 아담'으로 인해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그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고
그 결과로 "모든 사람"(all men)
"죄를 지었고"(for that all have sinned)
"모든 사람"에게
"사망이 이르렀"(“so death passed upon all men)다는 것이다.

이런 말씀은 또 다시 다음의 성경절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For as in Adam all die)”(고전 15:22)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아담으로 인하여 죽어 버린 '비존재'가 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 하는 대로' 이루어지고 성취된다.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시 33:9)
하나님이 첫 사람 아담을 창조하실 때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는
말씀이 선언 되는 순간에 '아담의 허리 안에' 인류 모두가 창조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의 아버지시며 곧 우리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히 1:5)

즉,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히 7:10)는 말씀처럼,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실 때에 인류 모두,
우리 모두는 그 아담의 허리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죽음은
그 허리에 있었던 우리 인류 모두의 죽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철저히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을 '죽은 자들'로 명시한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좀 억울하지 않은가?"이다.
왜 우리 자신의 '선택'(생애의 빛 측에서 너무도 많이 강조하는 단어)과는
전혀 관계없이 우리가 죄인이 되고
사망에 이르는 존재가 되는 억울함을 당해야 하는가이다.
이런 논리가 일단의 이유는 있겠으나
로마서 5장과 더불어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참된 복음, 진정한 복음을 깨닫는 순간에
그와 같은 '억울한 생각'이 얼마나 부질없고 쓸데없는 것이었는지를
금방 아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로마서 5장에서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해
모든 인류가 죄인이 된 사실을 명제로 전제하고는,
그 다음 또 한 사람 곧 "마지막 아담"(고전15:54)을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한가지 사실은,
둘째 아담 곧 마지막 아담으로 명명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설명하면서 "더욱"이라는 단어를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롬 5:15)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롬 5:17)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롬 5:18-20)

생애의 빛 측에서는 이 구절들에 사용된 '많은'이라는 한글 문자를 이유로
그 앞 절 12절에서 '모든'을 부정하고 어찌 되었든 '행위적인 완전'과
'도덕적 행위를 전제로 한 죄'의 정의를 내리려는 무리수를 두다 보니
그 뒤의 구절들에 사용된 '많은'에도
많은 강조를 하면서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해 '모두'는 아닌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는 이론을 전개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그들의 설명은 로마서 5장 18절의 한글 성경에는
"많은 사람"이란 단어가 KJV이나 헬라어 원어에도
"모든 사람"(all men)으로 되어 있음을 간과한 억설에 불과하다.
로마서 5장 12절과 18절에서 즉 서론과 결론에서 '모든 사람'이라고
명백히 밝히고 있음은 우리가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로마서 5장에서 진정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다음이다.
"더욱"인 것이다.
한 사람 아담 때문에 우리 인류 모두가 억울하게 죽어
신분적인 죄인이 되었지만,
우리가 절대 억울하지 않도록 사랑의 하나님은 "더욱" 넘치는
은혜와 선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셨다는 것이다.

그 "더욱" 넘치는 선물이 무엇인가?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롬 5:16)다는 말이 중요함을 더해 준다.
그것은 바로 첫째,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롬 5:17)는 것이다.
둘째,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롬 5:18)는 것이다.
여기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를 "많은 사람"도
역시 KJV에는 "모든 사람"이다.

“even so *by the righteousness of one the free gift
came upon [all men] unto justification of life.”(Rom 5:18)
셋째,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롬 5:19)는 것이다.
넷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롬 5:21)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감사한 것은, 주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 것은,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고,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고,
우리를 의인 되게 하고, 우리를 영생에 이르게 하는 그것은
“더욱 넘”(롬 5:20)치게 해 주신다는 약속이다.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롬 5:17)게 해 주시겠다는 맹세이다.
“많은 사람에게 넘”(롬 5:15)치게 해 주시겠다는 은혜이다.

그래도 억울한가?
그래도 하나님은 불공평하신가?

그래서 공의로우시고 사랑과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은
아담 안에서 우리의 선택과는 전혀 관계없이 죽어 버린, 죄인이 되어 버린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 주시기 우리를 위해 신원하시기 위해
역시 우리의 선택과는 전혀 관계없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사 9:6)이라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으로 '아들'로 '종'으로 이 땅에 보내시기로
작정하시고 그 아들을 창세전에 죽임 당한 어린양이 되게 하사
하나님과 원수 되고, 아직 우리가 죄인 되었고 연약하고 경건치 않을 때에
“기약대로”(롬 5:6)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롬 5:8)여 주신 것이다.

우리는 첫 사람 아담 때문에 죄인 되었으나,
우리는 마지막 아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의인'되었고
더욱 풍성하고 넘치는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는 영생을 얻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롬 4:5)

'더욱 넘치는 은혜'를 누리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롬 10:11)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요 3:16)하신 것이다.
이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인가?

생애의 빛 측에서의 주장처럼 갓 난 어린 아기는
도덕적인 행위로 죄를 짓기 전에는 죄인이 아니며,
죄란 행위적인 것과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류는 아담의 범죄 직후 모두가 그 아담 허리 안에서 함께 죽은 자가 되었으며
마지막 아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선택과는 전혀 관계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이처럼 '경건치 않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일방적으로' 의롭다고 하시는 그 하나님을 '믿는'
그 우리의 '믿음'을 의로 여겨 주시겠다는 것이
영원한 복음의 본질인 것이다.

우리 인류는 아담으로 범죄로 인해 받아야 할
"둘째 사망"(계20:6,14)에서 영원히 벗어나 형 집행이 유예되고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 더욱 넘치며
더욱 풍성한 은혜의 선물을 받게 된 것이다.

다음 성경절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위의 모든 말씀의 결론을 유추해 낼 수 있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1-22)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 15:45)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7-49)

말석

2009.10.28 15:29:21
*.54.15.170



 

 

이번 회에서는
[생애의 빛](견고한 토대)에서 발행하는 [살아남는 이들] 제123호 2부
"첫째 아담의 죄 때문에 내가 죽어야 하는가?"라는 내용 중,
일부 주장에 대해 성경과 예언의 신으로 반증해 보고자 한다.

이 글의 필자는 '성경을 바르게 연구하는 방법'에 대해 다음과 같은 언급을 했다.
"성경을 바르게 연구하는 방법은, 강조되어 쓰인 한 성경 절만 보고
그 구절에서 어떤 신학적인 사상을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사상과 흐름과 성경 전체가 말하는 총체적인 진리를 보며
그 범위를 벗어나지 않도록 연구하는 것이다"

참으로 내가 [생애의 빛](견고한 토대)측의 필자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살아남는 이들] 123호에 쓴 글 중 대부분이
자신들의 의도하는 방향으로 성경과 예언의 신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전혀 성경이나 예언의 신의 전체적 흐름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생애의 빛 필자는 로마서 5장 12~18절을 인용하고는,
"사도 바울이 기록한 이 성경 절의 주제는 무엇이며,
어떤 주제를 설명하기 위해 이렇게 기술해 놓았는가 하는 것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물론 여기에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라든가,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이라는 구절들이 등장하지만,
이 성경 절이 시사하는 바는,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다 죄인이 되었다는 것이나, 또 그 사실을 강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죄 때문에 야기된 사망의 힘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은혜의 선물의 능력과 힘이 더 크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기술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앞서의 글에서 말했듯이 로마서 5장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너무도 명백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다.
먼저 바울이 로마서 5장의 본론과 결론을 내리기 전의 서론적 서술을 살펴보자.

첫째, 예수님은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의 '행위'나 '선택'과는 전혀 관계없이
"창세전에 죽임 당한 어린양"(계13:8)으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이다.

1.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롬 5:6)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롬 5:8)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롬 5:10)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롬 5:6)다는 것이다.

2.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롬 5:8)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롬 5:10)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행위나 도덕적인 선택과는 전혀 무관하게
바로 우리가 '연약할 때' '죄인 되었을 때' '경건치 않았을 때'
그래서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였다는 것이다.

다른 바울의 표현으로 “허물과 죄로 죽었던”(엡 2:1) 우리를 위해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악이...사이를 내었”(사 59:2)던 그 '사이'의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엡 2:14)
“둘로 하나를 만드”(엡 2:14)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명하고도 명백한 전제 아래
바울은 “이러므로”(롬 5:12)라는 말로 앞서의 서론에 대한 본론,
곧 주제를 설명하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둘째, '한 사람' 곧 '아담의 범죄'로 아담으로 인해 아담의 후손인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all men)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롬 5:12)다는 것이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all men)이 정죄에 이른 것”(롬 5:18)이라는 것이다.

너무도 명백한 성경적 기록이며 너무도 확실한 문자적 사실 아닌가?

[생애의 빛]측은 "물론...그러한 구절들이 등장하지만"이란 표현으로
이러한 명백한 성경적 기록을 일부 인정하면서도,
"많은"(many)이라고 사용된 로마서 5:15,16,19 등을 인용하면서
12절과 18절에 명백히 "모든 사람"이라고 기록한 한글 단어, 영어 단어,
헬라어 원어까지도 송두리째 부정하고 자신들의 '선택적 죄인'의 교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사람의 말'로 억지 해석하는 모습에
참으로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다.

셋째, 바울은 '한 사람' 아담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죽었으나
다른 '한 사람' 예수님을 통해 더 큰 은사와 선물이
범죄하여 죽어 버린 인류에게 더욱 넘치도록 주어졌다는 것이다.
'한 사람' 아담의 죄로 '모든 사람' 죽었으나
또 다른 '한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고 구원 받고 영생 받게 될 것이라는 복음이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롬 5:15)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롬 5:17)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 5:18)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

핵심은 앞서의 글에서도 반복하여 강조하였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와 선물은 "더욱"이며 "더 넘쳤다"는 것이다.
아담의 후손으로 이 땅에  존재하게 된 모든 인류는
이미 “허물과 죄로 죽”(엡 2:1)었 었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고 "마귀의 자녀"(요8:44)였고
“흑암에 앉은 백성이 (었)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마 4:16)이었다는 것이고
'경건치 않은 자'이었고 '연약한 자'였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선택과는 전혀 무관하게 된 우리의 억울한 입장을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엡 2:4)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엡 2:5)는 것이다.
그것을 '더욱' '넘치게' 주시겠다는 것이
로마서 5장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이다.

만일 이러한 바울의 기록이 문자 그대로의 뜻이 아니고
[생애의 빛]에서 억설하여 풀어내는 뜻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은 창3:15의 "여자의 후손"이 되어 오실 필요도 없으셨다.
예수님이 마땅히 창조의 법칙에 따라 '남자의 씨'를 통해
즉 아담인 남자의 후손이 아닌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우리 모든 인류의 시조인 첫 사람 아담이
범죄 하여 죽으므로 더 이상 죄 없는 아기나 생명이
그를 통해서는 결단코 나올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생명의 근원을 하나님이 '여자의 후손'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겠다고 원초적인 복음을 인간의 범죄 직후
온 우주 앞에 선언하신 것이다.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는 말씀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 이니라”(창 3:19)는 선언과 함께
아담의 허리 속에 함께 창조된 인류는 아담과 함께
그 순간 죽었기에 아담의 후손은 그 어떤 누구를 막론하고
태어나는 순간부터 '허물과 죄로 죽은' 자였고 비존재, 비 생명이었는데
누가 감히, 어떻게, 무슨 논리로 태어난 아기는 자신의 선택으로
죄를 짓기 전까지는 죄인이 아니며 사망이 그에게 왕 노릇 할 수
없다고 단언하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여자의 후손'이란 말 자체가 아담의 모든 후손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죽은 자'였음을 반증하고 있지 않는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 이니라'는 하나님의 선고는
완전한 생명의 파멸을 알려 준다"(대쟁투 533)

아담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정죄 받는 것이 아니라면,
그래서 태어난 어린 아기는 죄인이 될 수 없다면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거짓이 되고 만다.
아담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그 안에서 이미 죽었기 때문에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요 3:5)다고
너무도 명백하게 선언 하신 것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요 3:6)이라는 말씀처럼,
아담을 통해 태어난 그 어떤 생명일지라도 '육'일 뿐이다.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전 15:50)는 것이다.

이제 바울이 로마서 5장에서 말하고자하는 결론은 무엇인가?
마지막 구절에서 명백히 나타난다.

“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 5:20-21)

[생애의 빛]측의 주장대로 '태어난 아기는 죄인이 아니고
그의 선택에 따라서 의인과 죄인이 결정 된다'면,
그것은 결코! 아니 결단코! '은혜'가 아니다.
그것은 '삯'일 뿐이다.
그것은 '긍휼에 풍성한 하나님의 큰 사랑이' 절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제 [생애의 빛]측이 가장 강조하는
선지자 엘렌 지 화잇은 무엇이라고 영감의 펜으로
이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가?
[생애의 빛] 월간지 마지막 세대 제 35 호의 제목으로 사용한 글귀가
바로 "예언의 신을 따라야 합니까? 사람을 따라야 합니까?"이다.
제발,
'사람을 따라 가지 말고' '예언의 신을 따라 가길 바라는 심정'으로
다음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고자 한다.

“인간이 잃어 버린 바 되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이
비애와 질병과 죽을 운명에 처한 인간들로 가득 차게 되었을 뿐 아니라
범죄자들을 위하여 피할 길이 마련되어 있지 않음을 보고
온 하늘은 슬픔으로 가득 찼다.
아담의 모든 후손은 반드시 죽어야만 했다. ”(초기, 149)

마지막 문장에 주의하자!
'아담의 모든 후손은 반드시 죽어야만 했다'이다.
"모든 후손"이 "반드시 죽어야만 했다"는 로마서 5장의 주제와 똑 같은
표현이며 기록이며 언급이다.
이보다 그 어떤 더 확실한 문구가 더 필요할까?
그야말로 쐐기를 박는 닻이 아니던가?

또 다른 예언의 신의 영감적인 기록들을 살펴 보자.

“첫째 아담과의 관계에서 인류가 그에게서 받은 것이란
죄와 사형 선고밖엔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아담이 실패한 곳에 들어오시고
인간을 대신하여 모든 시험을 견디셨다”(자녀, 475)

그 다음 영감의 글은 다소 길지만,
로마서 5장의 핵심을 명백하게 조명해 주는 것이기에
독자들은 주의력 깊이, 유심히 정독하길 바란다.

“아담이 범죄함으로 사망이 온 인류에게 이르렀다.
모든 사람은 빠짐없이 무덤으로 내려간다.
그러나 구원의 계획으로 모든 사람은 그들의 무덤에서 나오게 되어 있다.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행 24:15).
“아담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그러나 이렇게 부활하는 자들 중에는 뚜렷이 구별되는 두 부류가 있다.
“무덤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 29).

생명의 부활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계 20:6)다.
그러나 회개와 믿음으로 죄의 용서를 받지 못한 자들은
범죄의 형벌, 곧 “죄의 삯”을 받아야 한다.
그들은 “자기 행위를 따라” 형벌을 받되, 그 기간과 정도는 다르나
최종적으로 둘째 사망을 당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공의와 자비에 모순되도록 죄인을
죄 있는 그대로 구원하실 수 없기 때문에
죄인이 죄를 범함으로 스스로 간직할 자격이 없음을 입증한
그 생명을 하나님께서는 그에게서 취하신다.
한 영감의 기자는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시 37:10)고 말한다.
또한 사람은 “본래 없던 것같이 되리라”(욥 1:16).
그들은 오명(汚名)으로 덮인 채
소망없는 영원한 멸망으로 빠져들어간다.”(쟁투, 544-545)

위 말씀에서 중요한 사실은,
첫째, 아담이 범죄 함으로 [사망]이 [온 인류]에게 이르렀다.
둘째, [모든 사람]은 [빠짐없이 무덤으로 내려간다].

이보다 더 확실하고 명백하고 분명하고 정확한 설명이 더 필요할까?
로마서 5:12,18절은 물론 선지자 화잇의 영감된 글도
너무도 확고히 "아담의 범죄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고 하지 않는가?
화잇 선지자의 글은 상징도, 묵시도, 표상도 아니다
그저 단순 무식한 사람도 읽으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자일 뿐이다.
이런 문자적 설명에 '사람의 생각과 사상, 상식, 이론'을 짚어 넣어
짜집기하는 것이 바로 [생애의 빛]측에서 자주 사용하면서
스스로 정의한 "정통적인 가르침을 떠난 새로운 사조'인 '신신학'인 것이다.

셋째, 그러나 [구원의 계획]으로 [모든 사람]은 그들의 무덤에서 나오게 되어 있다
넷째, 모든 인류가 의인이든 악인이든 반드시 부활하는데
그래서 부활에는 '생명의 부활'이 있고,
'심판의 부활'이 있다는 것이다.

다섯째, 인류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첫째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은
그 인류의 시조인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한 것이지만,
둘째 사망 곧 영원한 소멸적 죽음을 당하지 않는 기회와 은혜를
받은 것은 또 한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섯째, 그러므로 아담의 죄로 인해 '모든 사람'이 죽었으나
예수님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삶을 얻었고,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둘째 사망인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다"는 것이다.

결론은 이미 바울이 4장 서두에서 선언한 대로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4-5)이다.

첫 사람 아담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죽었으나
둘째 사람 곧 예수님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더욱 넘치는 은혜와 선물이 주어졌는데
그것은 바로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일방적으로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 그의 믿음을 의로 여겨" 주시사
아담으로 인해 상실한 영생의 복을 회복 시켜 주시겠다는 것이
로마서 5장의 결론인 것이다.

이제 선지자의 말씀을 상고하여 볼 때
바울이 로마서 5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복음의 핵심과 본질, 주제가
너무도 견고하게 선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화잇 선지자의 글 하나를 더 살펴 보자.
"순종을 조건으로 사람에게 약속된 불멸(不滅)은
범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바 되었다.
아담은 자신이 소유하지 못한 것을 그의 후손에게 전해줄 수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의 희생으로 불멸을
그들의 손에 닿는 곳에 두지 아니하셨을 것 같으면
타락한 인류에게 소망이 없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대쟁투 533)

그렇다!
이것이 로마서 5장 12절의 화잇 선지자의 직접적인 설명이다.
첫 사람 아담에게 '불멸' 곧 '영생'은 '순종을 조건'으로 였다.
이제 또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값없이 더욱 넘치는
은혜와 선물로 주어진 의로움, 거룩함, 구원과 영생,
에덴으로의 회복, 신령한 몸으로의 구속은
철저히 '믿음을 조건으로 한' 하나님의 변치 못할 약속이요 맹세이다.
내가 예수님을 믿기도 전에, 내가 이 땅에 태어나기도 전에,
내가 주님을 알기도 전에,
주님이 먼저 나를 부르셨고 나를 택하셨고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갈 2:20)셨다.

이 놀라운 넘치는 은혜와 선물을 받는 것은 철저히
자신의 자유 의지를 통한 선택과 믿음의 결과인 것이다.
그것은 맨 처음 완전한 자, 영생하는 신령한 몸으로 창조된
아담이 생명과와 선악과 앞에서의 선택과도 똑같은 이치이다.

내가 다음 편에서 철저히 해부하여 밝히겠지만
[생애의 빛]측에서 인용하고 해석하는 모든 성경절들이나
예언의 신 구절들은 죄에 대한 근본을 다루는 문구들이 아닌,
죄의 과정과 결과를 다룬 것들에 대한 오해이며 곡해이며
억설인 것이다.
즉, 그들은 첫 사람 아담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죽은 것처럼,
다른 한 사람 곧 예수님을 통해 모든 사람이 더욱 넘치는 삶을 얻게 된
그 은혜와 그 상태 이후의 문제를 언급한 구절들을 가지고
죄의 근본과 본질을 설명하려고 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생애의 빛]측에서 너무도 자주 재림교단과 교단의 목회자들을 향해
'신신학에 물 들었다'고 비난하곤 하는데,
대체 신신학이 무엇인가?
말 그대로 '새로운 신학'이란 말인데,
1888년 존스와 와그너를 통해 재림교단의 율법주의적 경향의
신앙을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신앙'으로 재정립한 것이
'새로운 신학'이며,
혹 재림교단이 그 이전의 화잇의 명백한 기록들(위에서 인용하면서
살펴 본 것처럼)에도 불구하고 잘 못 이해하고 곡해하여
이제 마지막 세대인 우리가 성령의 깊은 조명 아래
로마서 5장의 바울이 전달하고 했던 복음의 본질과 주제, 목적
그리고 엘렌 지 화잇 선지자가 영감의 펜으로 기록하여
우리에게 밝히 깨닫게 하고자 했던 본래의 의미를
이제라도 우리가 새롭게 정립하여 설교하고 가르치고
전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신신학' 곧 이전의 것들을
새롭게 한 신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고로 나는 신신학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를 신신학에 물든 자라고 하는 비평과
비난은 얼마든지 기쁨으로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

왜냐하면 내가 말하는 '새로운 신학'은
성경과 예언의 신에서 '처음부터 계시한' '옛 신학'이며
그 '옛 신학'은 우리가 재림교회 초기부터
'읽고 보고 듣고 기록되었던 말씀이거니와'
내가 다시 이렇게 새로운 신학을 쓰는 것은
그 신학이 참되기 때문이다.
이제 의미를 새롭게 한 이 신 신학의 환한 "비췸"으로 인하여
율법 주의적 행위를 근거로 한 구원론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 긍휼과 더욱 풍성한 은혜가 아닌,
인간의 행위와 사람의 선택을 근간으로 하는
완전론의 어두움이 지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요일 2:7-8)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요일 2:24)


*다음 편에서는 [생애의 빛] 측이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식으로 인용하여 해석한
에스겔서 등의 기록들을 근거로 반증하고자 한다*


말석

2009.10.28 15:32:21
*.54.15.170

지난봄에
갑자기 장모님께로부터 전화가 왔다.
평소 아내와 통화하시고 나한테는 거의 전화를 하시는 분이
아니신데, 뜻밖의 전화에 '큰 일'이라도 난 줄 알고
마음을 다스리면서 전화를 받았다.
갑자기 장모님은 평소와는 전혀 달리 소리를 높이시면서
하시 말씀은 다음으로 요약된다.

'일요일 휴업령이 곧 내린 다는데 그 때 되면 사고파는 일도
못하고 시골로 도망을 쳐야 하니 사위인 내가 우리 가족을 위해
장모님 사시는 시골 근처에 토지를 미리 매입해야한다'는 것이었다.
당신이 소유한 3천여평 정도로는 자급자족하기에는
어림도 없기에 동네 이장에게 알아 봐 처갓집 근처에
아주 좋은 토지가 있으니 속히 매입하라는 것이었다.

너무도 간곡히 말씀 하셔서 그 자리에서 냉정히 거절을 못하고
웃으면서 '알았다'고 간단히 답변을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 다음날 다시 전화가 왔다.
우선 장모님께서 가지고 계신 돈으로 계약을 할 것이니
나머지는 나보고 내려 와서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장모님께 이리 저리 잘 설명을 하면서
그 일을 중단해 줄 것을 말씀 드리고는 전화를 끊었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과거에 몇 차례 견고한 토대(생애의 빛)
한국 집회에 참석을 하신 모양이다.
그리고 그 후부터 지금까지
우리 처갓집에는 정규적으로 [생애의 빛] 한국 지부에서 보내는
월간지(magazine)와 설교 테이프들이 우송된다.

그동안도 명절 날 등에 처갓집에 가면
그 수북이 쌓여 있는 잡지들의 옛 것들로부터 해서
CD로 된 설교와 책들을 찬찬히 듣고 살펴보곤 했었다.
장모님이 사위인 나를 위해 황급히(?) 보내 준
생애의 빛 테이프들에서 세계 경제 공황에 대한 다급한
경고와 임박한 일요일 휴업령 등에 대한
K목사의 설교들이 쏟아져 나왔다.
장모님이 그 영향을 받으셔서 '이번 세계 경제 공황은 이제
돌이 킬 수 없는 마지막 위기'라고 하시면서
서두르신 까닭을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내가 그들의 종말론에 대한 돌고 도는 repertory를
훤히 꿰고 있음을 장모님은 잘 모르시는 것 같았다.
그들이 한국에서의 활동을 처음 막 시작할 무렵인
1990년대 초, 그들이 그 당시 했던 설교와 주장대로라면
1994년 쯤 미국에서의 경제 공황은 반드시 내렸어야 했고
곧바로 일요일 휴업령이 내리고 벌써 주님은 오셔야 했다.
그들은 그 당시 자신들과 가까운 측근들에게는
다니엘 12장의 1335일과 1290일의 이중적 적용과
문자적 적용을 통해 일요일 휴업령에 대한 시기까지
도표로 그려 내면서까지 급박하고 절박한 종말을 외쳤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또 다시 똑같은
절박한 일요일 휴업령과 임박한 재림에 대한 레코드판을
되돌리면서 그들만이 진정한 재림 성도임을 자처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혹 그들은 내가 일요일 휴업령에 대해 부정하거나
임박한 예수님의 재림을 주장하지 않는
성도들을 깊은 잠이나 재우며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외치는
그런 거짓 목자쯤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를 그들 스스로가 정의하여 너무도 자주 반복하여
사용하는 신 신학 즉 바벨론 신학에 물든 세속 주의적 신앙인이라고
공박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이 유대인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 3:4-6)

나도 바울의 심정으로 그들에게 말하고 싶다.
나도 육체를 자랑하면,
나는 모태 재림교인이며
그 어느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재림을 간절히 사모하고
그 날에 서기 위해 늘 깨어 기도하며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 전도에 최선을 다하며
내 주변에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이웃들과 교회들을 도우며
매일의 삶 속에서 생각과 동기로라도 죄 짓지 않기 위해
"피 흘리기까지 싸우며"
재림의 최종적 징조로 주님이 친히 말씀하신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게 되는' 일요일 휴업령을 예의주시하면서
백성들에게 늘 경각심을 주고 깨어 근신하여 예비할 것을 당부한다.
품성 변화를 위해 그 어느 누구에게 뒤지라면 서러울 만큼
한 달에 열흘씩의 금식을 2년 동안 해 보았고,
1일 2식은 물론 새벽 기도회며 각종 모든 말씀의 집회들을
한 번도 빠지지 않는 경험을 무수히 해 왔다.

요즘도 나의 삶은 새벽부터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다.
길을 걸을 때나 운전할 때 심지어 화장실에 앉아 일을 보는
순간에도 늘 주님과 묵상으로 대화하고 동행한다.
그러고도 늘 주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되면
홀로 의로우시고 거룩하시고 사랑과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주님 앞에 나의 죗되고 더러운 모습으로 인해
감히 우러러 하늘을 바라 볼 수 없는 죄인임을 고백하게 된다.

나는 요한계시록 10장과 12장에 역사적, 신학적 뿌리를 두고
태동적 근거를 두고 있는 재림 교회를 사랑하고
이 교회를 사랑하사 참으로 영감적인 여 선지 엘렌 지 화잇을
선물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선지자를 통한 귀한 영적 유산인 예언의 신을
그 누구 못지않게 사랑하여 매일 읽고 묵상하고 연구한다.

그리고 라오디아 교회 형편을 확실히 알면서도
"하루를 천년같이 천년을 하루같이" "오래 참으심으로"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벧후 3:9)는 하나님의 심정으로,
이 교회 안에 신실한 소수의 엘리야들 뿐 아니라
더 많은 형제자매들이 마지막 구원의 대열에 참예하고
비록 유형적 조직체에는 없을지라도 모든 교파, 교단, 종교를
망라하여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고 경외하면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참 사람을 실천하는 많은 무리들이
잠재적 구원 받은 하늘의 백성이 되기를 날마다 기도한다.

그런데,
생애의 빛(견고한 토대)측에서 발행되는 잡지들이나 설교들을
가만히 읽고 들어 보면,
이 세상에서 구원 받고 살아서 예수님 영접할 유일한 무리는
그들 자신들 뿐이라는 주장들이 너무 자주 반복하여 보여 진다.
그들 외의 기존 재림 교인들이 구원 받을 확률은 거의 없어 보인다.

잠자는 교회를 깨우고 라오디아 교회 상태에 머물러 있는
마지막 교회의 백성들을 정신 차리게 한다고 하는
그들의 주장까지는 얼마든지 인정한다손 치더라도
그들의 글들과 설교들에서 오직 그들만이 유일하게 품성이
변화되고 유일하게 신신학에 물들지 않은 정통적인 재림 교인들이고,
그들만이 일요일 휴업령과 야곱의 환난을 통과하여
살아서 예수님을 맞을 것이라는 독선적 믿음과 영적 교만이
지나칠 정도로 강하게 감지되는 것은
비단 나만의 예민한 판단이고 생각일까?......

물론,
그들이 목 터져라 주창하는 재림 교회의 현재의 영적 모습들에
대해서 나도 부정하는 바는 아니다.
지금 라오디아 교회 상태에 있는 마지막 이 교회는
흔들릴 수 있는 것은 모두 흔들리는 시대에 머물러 있으며
많은 백성들이 영적인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도 사실이며
우리가 카스다(미주한인재림교회 게시판)나 이곳 재림 마을
자유게시판에서 의사, 교수, 장로, 목사 등등의
지도급 인사들마저도 너무도 노골적으로 자신들이 속해 있는
재림 교회의 기본적 교리들과 신조들은 물론,
재림 교회의 태동의 역사와 신학의 근간을 이루는
2300주야에 대한 불신과 부정, 선지자에 대한 공개적인 조롱 등은
이미 도를 넘어선지 오래다.

이러한 교회의 영적 상태를 한탄하고 백성들의 죄들을
낱낱이 고하는 엘리야의 소명 의식까지는 얼마든지 이해하고
좋으나, 생애의 빛 측의 거의 모든 설교와 잡지에 기고된 글들은
오직 자신들만이 유일하게 의롭고 거룩하고 품성이 변화되고
정통적인 재림 신앙인이라는 독선적 주장들이 가득한 것은
다시 한 번 심각히 짚고 넘어 가야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사람의 생각이 말'을 따르지 말고
'오직 선지자의 기별'에 충실해야 한다고 하는 그들이
선지자의 문자적이고도 너무도 쉽게 설명된 말씀들마저도
자신들의 의도한 방향에 꿰어 맞추어 재해석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을뿐더러, 성경도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식의 해석과
장님이 코끼리 다리 만져 보는 식의 방식으로
그들만의 특유의 '행위적 완전론' 등을 강조한다.

생애의 빛 측에서 가장 크게 실수하는 성경 해석법은,
죄의 본질이나 근본을 성경을 통해 정의하지 않고
죄의 과정과 결과를 다룬 성경절이나 예언의 신의 문맥들을 가지고
근본적인 죄를 정의하려는데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
또 다시 그들이 주장하는 바를 정확히 인지하기 위해
그들이 인용한 에스겔서를 비롯한 설명 전부를 먼저 살펴보자!
[생애의 빛](견고한 토대) 월간지 [살아남는 이들] 제123호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  신앙: 2부-첫째 아담의 죄 때문에
내가 죽어야 하는가?"라는 제하에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에스겔과 사도 바울은 서로 상반된 의견으로 싸우고(?) 있는가?
위에서 언급했듯이, 어떤 성경 절에서 신학적인 사조와 교리를 추려 내려면, 그 사상이 성경 전체가 말하는 진리와 들어맞는가 하는 것을 추리해 내야 한다. 만일, 신학자들이 바울이 말한 로마서 5장 12~18절에 의해 아담의 원죄가 우리에게 전가되었으므로 우리가 죽게 되었다고 한다면, 성경 에스겔 18장 20~24절이 시사하는 것은 무엇인가? 똑같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성경의 저자인 에스겔 선지자와 사도 바울이 서로 교리를 놓고 싸우는 것인가? 에스겔 18장 20~24절에는 분명히 이렇게 언급되어 있다.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에스겔 18:20). 성경은 모든 사람은 자신의 죄로 멸망을 하는 것이지, 조상의 죄로, 아버지의 죄가 전가되어 죽는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또 다른 구절을 보자.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법과 의를 행하면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 행한 의로 인하여 살리라”(21,22절).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하고 악인의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죽으리라”(23,24절).
만일, 신학자들이 말하는 대로, 오래전부터 가르쳐져 온 교회의 교리대로, 아담의 죄가 전가되어서 우리가 죽는다면, “범죄한 그 영혼은 그 사람만 죽으리라.”, “아들이 아비의 죄를 담당하지 않으리라.”는 에스겔 선지자의 말은 하나님의 영감이 아닌 거짓말이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성경이 모순투성이란 말인가? 에스겔 18장 2절에는 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찜이뇨.” 이 구절은 조상 탓을 하며 죄를 짓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버지의 죄가 아들에게 전가되지 않는다는 것을 교훈하기 위하여 에스겔 선지자가 시사한 것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이 문제에 대하여 언급하였는데, “그때에 그들이 다시는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렘 31:29)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성경을 연구할 때에는 전체적인 사상과 진리를 포괄적으로 다루어야 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 적절한 연구법이 되는 것이다."

정리를 해 본다.
생애의 빛 측의 위 주장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1.로마서 5장 12절의 주장처럼 아담 한 사람 곧 조상 때문에 우리 모두가
죽어야 한다면, 같은 영감으로 글을 쓴 에스겔 선지자의 글들이
그 로마서 5장과 다른 말씀을 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사도 바울과 에스겔 선지자가 서로 싸운단 말인가?

2.에스겔 선지자는 분명히 "범죄 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인류가 죽었다는 것은 전체적인
성경과 조화되지 않는다.

3.만약 재림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아담 한 사람의 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죽었다면 에스겔은 거짓말 장이가 되고
성경은 모순투성이가 된다.

4.예레미야 선지자도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찜이뇨"라고 하므로 에스겔과 같은 사상을 말씀하고 있으며,
이렇게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 "전체적인 사상과 진리를 포괄적으로
다루'는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적절한 연구법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과연 생애의 빛 측에서 진술한 위의 내용들이 객관적이고
성경과 예언의 신과 조화되는 설명인가?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같은 성경과 같은 예언의 신을 보고 읽고 인용하고
해석, 설명할 때 '같은'이라는 '인식' 때문에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전제가 잘 못 되었거나 논하고자 하는 본질에서 벗어난
무조건적인 인용이나 해석, 설명의 인식의 차이는
극과 극이 될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전제'가 잘 못 되었거나 '본질'에서 벗어난 상태에서는
아무리 많은 성경 절을 인용하고 예언의 신의 기록을 나열해도
결과는 전혀 엉뚱할 수 있는 것이다.

생애의 빛 측에서 로마서 5장과
엘렌 지 화잇 선지자의 몇 몇 기록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증거와 근거로
"아담 한 사람의 죄"로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
입증되고 남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이미 설정해 놓은 "아담의 죄로 모든 사람이 아닌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전제 아래 '금방 태어난 아기는 자신이
선택한 행위로 범죄 하기 전까지는 죄인이 아니다'라는
대전제를 충족시키기 위해 전혀 관계도 없는 구절들을
인용하여 죄에 대해 과정과 결과를 설명하고 있는
성경 구절들을 마치 근본과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인양
'사람의 말'로 억지 꿰어 맞추기식 설명을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생애의 빛 측에서 주로 인용한 것은 에스겔 18:20~24절이다.

우리가 굳이 에스겔 18장의 주제를 정한다면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겔 18:4)는 것이다.
누구든지를 막론하고 '범죄 하면 죽는다'는 것이다.

이 주제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완전하게 창조되었던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졌던 똑같은 영생의 조건이었으며,
그 누구를 막론하고 첫 사람 아담으로 인해 "허물과 죄로 죽었던"
그러나 다른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더욱 넘치는
은혜와 선물을 받은 모든 인간, 모든 사람, 모든 인류에게
여전히 똑같은 영생의 조건인 것이다.

에스겔 18장은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 주어진 기별이 아니며
하나님의 백성들인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이미 하나님을 알고 믿는 이스라엘 중에,
첫째, “사람이 만일 의로워서 법과 의를 따라 행하며
...우상에게 눈을 들지 아니하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지 아니하며
....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며 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며
.... 스스로 손을 금하여 죄악을 짓지 아니하며 ...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진실히 행할진대
그는 의인이니 정녕 살리라 ”(겔 18:5-9)는 것이다.

둘째, 그렇게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사는 자가
“가령 그가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아들이 이 모든 선은 하나도 행치 아니하고
이 악 중 하나를 범하여 강포하거나 살인하거나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거나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학대하거나 억탈하거나  
...우상에게 눈을 들거나 가증한 일을 행하거나
... 할진대 그가 살겠느냐 살지 못하리니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은즉 정녕 죽을지라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 돌아가리라”(겔 18:10-13)는 것이다.

셋째, 그런데 그 악한 아들이 또 다시
“가령 그가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아들이 그 아비의 행한 모든 죄를 보고 두려워하여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족속의 우상에게 눈을 들지도 아니하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지도 아니하며
...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며 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며
..내 규례를 지키며 내 율례를 행할진대
이 사람은 그 아비의 죄악으로 인하여 죽지 아니하고
정녕 살겠”(겔 18:14-17)다는 것이다.

이것이 에스겔 18장의 서론적 부분이며
생애의 측이 로마서 5장 12절을 억지 해석하기 위해 인용하면서
'바울과 에스겔이 싸운다'며 자신 있게 제시한 유일한 성경 구절인
에스겔 18장 20~24절까를 확실하게 이해하게 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에스겔 18장은 전체를 아무리 읽어 봐도
죄의 근원적인 문제를 다루거나 아담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죽은
죄의 본질적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죄의 근본적인 문제가 아닌 죄의 과정들과 결과들을 설명하고
있는 그리 어렵지 않은 평이 한 기록들일 뿐이다.

에스겔 18장의 결론은 하나님은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지 않으시며
악인이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겔 18:23)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하고
악인의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죽으리라”(겔 18:24)는 것이다.

이미 "허물과 죄로 죽은" 과거든 현제든 이스라엘 백성들 중,
예수 그리스도의 더욱 넘치는 은혜와 선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구원을 받은 백성들이
지속하여 믿음을 통해 선을 행하면 영생 받고
지속하여 불신을 통해 악을 행하면 죽는다는 것이다.

죄의 [과정]과 [결과]를 철저히 설명하고 있는 이상이하도 결코 아니다.
이러한 구절들이 어찌,
로마서 5장 12절의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롬 5:12)다는
말씀의 반박할 수 있는 대안적 성경절이 될 수 있겠으며,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는
명백하여 오해의 여지가 조금도 없는 말씀을 반론하는
반박 성경절들로 이용될 수 있는지
성경을 조금만이라도 폭 넓게 보는 이들에게서는 결단코
찾아 볼 수도 없는 억지 해석과 설명임을 단번에 알 수 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대하 20:20)는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자!

"“아담이 범죄함으로 [사망]이 [온 인류]에게 이르렀다.
[모든 사람]은 [빠짐없이] 무덤으로 내려간다"(대쟁투 544)는
결코 달리 해석하거나 오해할 수 없는 명백한 선지자의
기별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드리고 수용하자!
그것이 선지자를 신뢰하는 것이다.

그 외의 사람의 말로 성경을 해석하고
예언의 신을 덧 붙여 설명하는 것이야말로
생애의 빛(견고한 토대)측에서 입만 열면 재림 교단과
재림 교회 목회자들을 향해 비난하고 비평하는
'정통과 옛 가르침에서 벗어난 신신학적 주장'이 될 것이다.



말석

2009.11.03 15:4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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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sis(위기)를 보지 말고 Christ(그리스도)를 보라!"
내가 우리 교인들에게 종말론 설교 할 때 자주 써 먹는 멘트이다.

올해 초쯤에,
나에게 두툼한 우편물 하나가 배달되었다.
안을 열어 보니 "경고"라는 큰 글귀가 첫 눈에 들어 온다.
그리고 여러장들에 걸쳐 '경제 위기'와 '666' 등에 대한
기사들, 신문 잡지 복사물들, 예언의 신 인용구 등이 적힌
서류들이 들어 있었다.
여의도 독립 교회와 개혁교회 집회 등 교단을 등지고 있는
그룹들을 이러 저리 찾아 다니면서 80이 넘은 연세에도
여전히 방황을 거듭하고 계신 한 원로 장로님이
나를 생각하시어(?) 보내 주신 것들이다.

지난 글에 언급한대로 장모님께서
나에게 참고하라고
보내 준 생애의 빛(견고한 토대)측의 책자와 설교 CD 등에서의
K목사의 최근 설교는 역시 예상한대로
올해 초 진행 중인 미국을 위주로 한 세계경제 위기와
그 위기를 통해 오는 일요일 휴업령과 절박한 재림을
과거와 다름이 없는 큰 목소리로 설파하고 있었다.

그 설교는 내가 1980년대 후반에 그에게 직접 들었던 내용들의
재판과도 같았고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 당시에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던
프리 메이슨 등의 활동 상황과 미국 달러에 새겨진 피라미드 그림 등을
시작으로 해서 온 갖 그림들, 조각물들, 형상 들을 컴 프로젝트를 통해
보여 주면서 상세히 설명하고 있었다.
한 시간 내내 성경의 내용보다는 거의 모두 그런 것들을 설명하고 있었다.
내가 모두 다 들어 본 그 수많은(헤아릴 수 없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그림들과 이어지는 설명은 한마디로 성경과는 전혀 관계 없는
'잡다한 강론' 이상이하도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과거 시기파의 거두였던 고 전혜심씨가 단골로 사용해 먹던
거의 똑같은 방식의 설교와 강론이 21세기에 재현되고 있는 듯한
착각마져 들었다.
내가 과거 여러번 직접 전혜심씨의 강론 현장에서
가장 먼저 보고 들었던 것이 있다면,
바로 전씨의 손에 들려져 있던 미국 달러 한장과
그 달러에 새겨진 피라미드 그림에 대한 설명,
그 속에 담겨져 있다고 하는 비밀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생애의 빛 K목사의 강론이 고 전혜심씨의 것과 다른 것이 있다면,
좀 더 세밀해지고 좀 더 현대화된 기기들을 통해 그 그림들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 뿐이다.

나는 그런 저런 잡다한 내용의 것들만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성경의 말씀들이 퇴색되어 버리는 즉 주객이 전도된
그런 위기설이나 내용들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리고 그런 내용들이 자신들이 성경과 예언의 신을 연구하다가
발견한 것들이 아닌 타교파에서 연구 해 놓은 것들을
거의 모두 빌려다가 설명하고 있는 것도
내가 성경과 예언의 신을 연구하는 방식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또한 과거 그들이 하는 집회에 성실히(?) 참석하고
그들과 함께 동행하기도 하면서 느끼고 깨달은 것이 있기 때문에
나는 이제 그들의 판에 박힌듯한 그런 설교 내용이나 위기설에
별 관심이 없다.

한 마디로 그들이 하는 집회에 참석하여 그들의 설교들을 듣다 보면
그야말로 Christ(예수)가 아닌
Crisis(위기)만을 강조하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그들의 설교를 다 듣고 나면 남는 것이라곤,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나를 위해 하늘 지성소에서 대언하시며
장차 나를 영원히 구속하기 위해 이 땅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가 아닌 경제 위기설과 절박한 재림,
그리고 그 날을 위해 준비되지 못한 인간적 두려움만  남게 된다.

생애의 빛 측의 설교와 강론을 듣고
하루라도 빨리 토지를 더 매입하여 사위 가족들이
곧 다가올 환란의 때에 자급자족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나의 장모님의 그 심정을 나는 충분히 이해한다.
아주 충분히 말이다.....

대개 교단을 등지면서 교단의 영적 타락, 세속화
그리고 교회 안에 들어 온 신신학과 타협한 교단의 바벨론 가르침을
강조하면서 급박한 위기설을 강조하는 그룹들이나 단체들의
집회들에 참석하는 분들의 성향을 보면 언제나 한결같다.

그들의 공통점과 유사점은 자신들의 교회에서는 여러가지
문제점들로 일반 교인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거나
특히 목회자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 분들이 많다.
자신들은 높은 영적 경지에 있고
벌써 먹는 것 부터 철저한 채식이나 하루 이식(2식) 등의 생활,
선지자가 권면한 시골 생활 실천 등으로 영적 차원이 다른데,
목회자들은 깊은 영적 잠에 빠져 있고
선지자가 강조한 먹는 것 하나도 해결하지 못한
타락한 목회자들로 여겨 설교 시간에는 아예 눈을 감고 있거나
예언의 신을 펼쳐 놓고 읽는 진풍경도 연출하는 분들도 있다.

십일조도 교회에 잘 내지 않고 교회 출석도 잘 하지 않거나
그들 가정에서 따로 예배 보면서
아주 거룩한 경건을 유지한다고 자부하는 분들도 계시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스스로 정해 놓은 영적(행위적) 표준에
못 미치는 교인들에 대해서는 언제나 정죄 의식을 갖고
비평하거나 비난하는 일은 다반사다.

한국의 경우 1980년대 여의도 독립교회를 줌심으로 일었던
희년 운동 때 논 밭 가산 다 팔고 예수 기다렸던 분들이나
1990년대 초 미국 경제 공황설을 시작으로 하여
일요일 휴업령의 도표를 년대별로 그려 내면서
급박하고 절박한 위기를 말했던 생애의 빛(견고한 토대) 측이나
새천년을 맞으면서 Y2K 문제 등에 대한 위기설 등을 강조한 분들의
공통점은 바로 Christ가 아닌 Crisis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1989년 9월 2일 안식일에 한국의 여의도 독립교회에서부터
미국 경제 위기설과 그로 인한 절박한 일요일 휴업령을
아주 힘있게 강조하고 외쳤던 생애의 빛측 강사들은
당시 견고한 토대의 재무담당이었던 Lee장로와
주강사이며 현재도 생애의 빛 주 책임자인 k목사,
그리고 한 때 생애의 빛 측과 함께 하다가 다시 본 교회
목회로 돌아 선 A목사,
그리고 미국인 목사 Marshall Grosboll 등 이었다.

이 분들은 칠판에 도표까지 그려가면서
미국의 경제상황으로 볼 때 1990년경 경제공황이 내리고
1991년경에 일요일 휴업령이 내리면 그 때로부터 후3년 반 기간이
성취가 되는 년도가 1994년경이라고 하였다.
또한 k목사는 미국은 큰 부채국가라면서 1987년 주가가 대폭락했는데
미국의 경제 공황 주기는 30년의 주기라고 하면서
1870년, 1900년, 1930년, 1960년이었는데 그 다음이 바로
1990년인데 이 1990년의 공황은 1930년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파멸적인 공황이 된다고 경고하였다.
(이 때 30년 주기설을 강조했던 K목사의 말대로라면,
아직 그 주기가 10년이나 더 남은 지금은 해당 사항이 아닐텐데
또 다시 현재의 경제적 위기를 가지고 급박한 위기를 강조하는
이 모순을 그들은 무엇이라 설명하질 자 못 궁금하기 짝이 없다)

그 당시 K목사 등이 큰 목소리로 강조했던 이어지는 설명은
경제공황이 내리면 전세계가 안식일을 지키는 무리들을 미워하고
거짓 각성 부흥운동이 퍼지면서 일요일 휴업령이 내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 미국 국회에  HR746 법안이 상정되었는데
이 법안은 대통령이 7명, 국회가 4명을 선정하여
위원을 구성하는데 그들이 결정하여 대통령에게 주어 대통령이 사인하면
그것이 곧 일요일 휴업령이 되는데
1990년 1월 말이나 2월 중에 국회에 상정하고
청문회를 열어 10월경부터 시행할 예정이라고도 하였다.
그러면서 아마 1990년도 말이나
1991년 초에 시행될 가능성이 크다고 역설하였다
(위의 내용들은 그 당시 그 집회에 참석했던 내가 직접 받아 쓴
  기록 노트에 도표와 함께 그대로 담겨져 있으며
  그 노트는 현저한 증거물로 지금도 내 서재에 보관 중이다)

물론 그들이 주장하던 위기설들은 다 빗나갔다.
그 후에도 그들은 계속 이어지는 위기설들을 예견하였고
'결코 인류는 새천년을 맞이하지 못한다'고 까지 호언장담하였었다.
그러나 지금 새천년에서 우리는 거의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쯤에 와 있다.
이제 최근에 그들은 또 다시 호기를 맞았다.
왜냐하면 현재의 세계 경제 위기는 그들의 그동안 앵무새처럼
반복한 내용들에 아주 적절한 환경이 조성된 것이기에 그렇다.

생애의 빛 기관은 물론 과거 시기파 등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일요일 휴업령은 단순히 경제적 위기만을 가지고 내려지지 않는다.
인간으로서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지구 멸망의 위기를
모든 이들이 한결같이 절감하는 천재지변이
반드시 수반된 후에 오는 것이 바로 일요일 휴업령이다.(대쟁투 590참조)

그리고 분명한 것은 성경이 말하는 666이란 숫자는
절대로 '거짓 안식일'인 일요일 휴업령을
강제적으로 선언하는 로마 카톨릭의 정체를 밝혀 주는
숫자 이상 이하도 아니다.
계시록과 예언의 신을 통해 너무도 확고히 밝혀진 666을 가지고도
그들은 온갖 그림들과 사진, 글자 등으로 재해석하면서
위기설의 단골 메뉴로 연결시키고 있는
종말론 그룹들을 볼 때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나도 예수님을 애타게 기다리고
그 누구 못지 않게 임박한 재림을 고대하고 설교한다.
그러나, 주의 오심을 간절히 사모하는 것과
시기마다 경제 위기설을 무기로 위기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백성들이 주님을 사랑하고 사모하여 기다리는 것이 아닌,
일요일 휴업령을 기다리고 사건을 기다리고 위기를 기다리는
그런 절박함으로 내 모는 그런 기다림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두려움에 쌓여 영원한 형벌이 두려워서 예수를 믿는 신앙은
잘 못 되도 아주 크게 잘 못 된 것이다.
'지금 헌신하지 않으면 위기가 닥치고 은혜의 기간이 끝나면
국도 밥도 없다'는 뉘앙스식의 위기 의식만을 고조시키는
그들의 설교와 강론, 가르침에 도박하듯이 헌금을 하고
재산을 내어 놓는 것은 절대 바람직하지 않을 뿐더러
좀 심한 표현으로 일종의 종교 사기이다.
그래서 그런 기관들의 집회에 참석하는 대개의 분들이
십일조 등을 자신들이 속한 본 교회에 내지 않고,
그 기관들에 '헌금' 명목으로 내는 것은 이미 관례화되다시피 했다.

위기를 바라보면서 어떤 사건만 일어 나기를 학수 고대하면서
정작 바라보아야 할 예수를 놓치는 것은 정말 비극이다.
또한 자신들은 높은 영적 수준에 있다고 착각한 나머지
자신들의 생활 방식과 다른 이들을 비평, 정죄하고
'예수 올 때 너희들 두고 보자'는 듯한 식의 뉘앙스가 풍기는
말투와 행동들은 그야말로 그들이 기다린다고 하는
예수와는 전혀 상관 없는 것들이다.

진정한 재림 성도들은,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재림의 총체적인 징조들을
주의 깊이 살펴야 한다.
그러나 결코 그 사건들이나 위기만을 기다리면서
해가 지기를 기다리는 어리석은 삯군들이 되어서는 안된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고 성경에 기록된 임박한 재림을 알리는
징조들을 보면서 더욱 깨어 근신하여 기도하면서
부지런히 일하는 종들이 되어야 한다.
급박하게 성취되는 재림의 징조들을 보면서
무섭고 두려워 교회에 충실하고
주님께 헌신하는 영적 도박꾼들이 아니라,
나같은 죄인을 사랑하신 주님의 은혜가 감사하고
강림하실 주님 만날 생각에 사무쳐서 감사와 기쁨으로
모든 것 다 바쳐 충성하고 헌신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말석

2009.11.13 12:35:28
*.166.44.200

 

* 생애의 빛 기관의 "어린 아기는 죄인이 아니다!"라는 주장에 대한 반론

생애의 빛 기관(구:견고한 토대)은 [원죄설]에 대한 문제에 대해
[1950년대 이전의 정통 재림 신앙]과 [1950년대 이후의 재림교회의 신신학]
그리고 [개신교의 통속적 복음]을 비교하면서,
현재 대부분의 재림교회의 가르침은 1950년대 이후 변질되고
세속화된 로마 천주교의 [원죄설]을 가르치고 믿고 설교하고 있다고 강변한다.
그러니까, 재림교회의 정통적 복음을 떠나 세속화되고 바벨론적인
개신교의 통속적 복음을 현 재림교회가 가르치며 타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원죄설이란 제목하에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갓 난 아기는 죄 된 본성은 가지고 태어나지만, 정죄 받은 죄인은 아님.
의도적인 불순종을 할 때 까지는 정죄 받지 않음"

생애의 빛 측이 이렇게 주장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죄에 대한 정의를 "죄란 의지력의 행사에 의한 불순종이다"라고
전제한데 따른 필연적인 것이다.

생애의 빛은 현 재림교회가 죄란 "태어나면서 갖게 되는 사망의 상태"
혹은 "태어나면서 갖게 되는 타락한 본성"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그들 나름대로의 정의가 바로 "의지력에 행사에 의한 불순종"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갓 태어난 아기가 어떻게 죄인일 수 있느냐?"는 것이다.
무엇인가 행위로 죄를 짓고 선택을 통해 범죄 행위가 있어야
죄가 성립되는 것이지, 금방 태어나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아기가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도덕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맞지 않을
뿐 더러 하나님의 성품에도 어긋난다는 것이다.

그들이 죄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하는 것은,
죄를 성경적 차원, 구속의 경륜의 입장에서가 아닌,
지극히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도덕적인 문제로 보는 시각에 따른 것이다.

나는 여기서 1950년대 전후의 재림 교회의 죄에 대한 정의나
원죄설에 대한 입장을 비교, 설명, 반증하기를 원치 않는다.
오직 성경과 예언의 신을 통해 하나님이 이 문제에 대해 성경에
무엇이라 기록하셨으며 마지막 세대를 위해 세우신 엘렌 지 화잇 선지자가
어떻게 영감의 펜으로 기록했는지를 살펴 보면서,
누가 과연 정통적인 성서적 입장, 정통적인 재림 교회의 입장에
있고 누가 과연 변질되고 세속화된 신신한적 입장에 있는지를
상고해 보고자 한다.

먼저 다시 한 번 이 문제에 대해 쐐기를 박는 두 성경절을 인용한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사실 이 두 성경 절 만으로도 "마지막 아담"(고전15:45)이시며
창3:15에 원초적 복음으로 선포된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첫째 아담을 통해 태어난 모든 인간, 모든 인류,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사망적 존재'였음이 넉넉히 증명되고도 남는다.
내가 무엇을 더 말하리요? “what shall I more say?”(Heb 11:32)

생애의 빛 측은 자신들이 [신학적 이슈]라는 제하에
"예언의 신을 따라야 합니까? 사람을 따라야 합니까?"라고 했고,
[살아남는 이들] 제123호 2부에서는
"첫째 아담의 죄 때문에 내가 죽어야 하는가?"라는 내용 중,
"성경을 바르게 연구하는 방법은, 강조되어 쓰인 한 성경 절만 보고
그 구절에서 어떤 신학적인 사상을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사상과 흐름과 성경 전체가 말하는 총체적인 진리를 보며
그 범위를 벗어나지 않도록 연구하는 것이다"라고 못 박았다.

내가 다시 한 번 생애의 빛 기관에 간절히 바라 건 데
제발.... 그들 스스로 못 박아 전제한 것처럼,
사람의 말이 아닌 오직 성경과 예언의 신의 가르침을 따르고
어느 성경절 한두 개를 인용하여서 전체를 설명하고
결론을 내리는 우를 범치 않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 스스로 '사람이 아닌 오직 예언의 신을 따르자'고
해 놓고는 그들의 그 글에는 자신들의 입장을 지지하는
현재 재림 교회의 유수한 신학자들과 목회자들과 중책을 맡고 있는
목사들의 이름을 무려 십 수명이나 열거하고 있을 뿐 더러,
2009년 제2기 안교 교과, 92페이지의 한 문장을 인용하면서
안교 교과 저자의 말을 마치 정설인양 설명하는 곳에서는
아연실색(啞然失色)할 수밖에 없다.
왜 그들은 '사람을 따르지 말자'고 전제한 그들의 글자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사람의 말들을 인용하고 사람들을 내 세우는가?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된 첫 사람 아담에게
선악과에 대해 말씀 하실 때,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고 명백히 선언하셨고,
범 죄 직후에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고
확실하게 말씀 하셨다.

위 두 말씀에서 아담은 범죄 직후에 명백히 "죽었으며"
본디 “취함을 입”(창 3:19)은 "흙"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미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7-28)는 말씀을 하실 때
아담의 허리 안에 함께 창조된 것과 마찬가지인 모든 인류는
첫 조상 아담의 사망으로 인해 함께 사망적 존재가 된 것이다.

처음 범죄 전의 아담은 '육'이 아닌 "영적 존재"였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고전 15:45)

그러나 범죄 직후 죽어 버린 아담은 "육체가 되었다"
노아 홍수 당시 범죄하여 멸망 받게 된 “하나님의 아들들”(창 6:2)에 대해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창 6:3)고 하신 것과 동일한 경우이다.
성령으로 거듭난 영이 된 그리스도인도 에스겔서의 말씀처럼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하고 악인의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죽으리라”(겔 18:24)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명백하게도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롬 8:13)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전 15:50)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스라엘 선생으로 존경 받던 유대 관원 니고데모,
바리새인으로 철저히 율법을 지키면서 하나님을 경외했던 그에게
만나자마자 일성이 '네가 거듭나야 하리라'는 것이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앞서 글에도 언급했지만,
자타가 인정하고 하나님 스스로도 사단에게까지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욥 1:8)라고 자랑하셨던
욥 마저도 종국에는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욥 42:6)할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사 64:6)기 때문이다.

도덕적으로 아무리 정결하게 살아도,
아무리 우리의 외적인 행위가 온전하게 보여도
홀로 의로우시고 홀로 선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스스로 한하고 회개할 수 밖에 없는 죄인인 까닭이다.
“살려 주는 영이 되”(고전 15:45)신 [마지막 아담]
곧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은혜, 사랑이 아니라면
갓 난 어린 아기가 아니라 그 어떤 성인이라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두 번째 다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고 재삼 강조하셨다.
그리고 곧 바로 의미 심장한 말씀을 하셨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6)

이 말씀은 그 다음 침례 요한의 말한 뒷 구절과 연결 된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요 3: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땅에서 난 이'는 침례 요한이며 첫 사람 아담을 통해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인류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요 8:23)고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방금 막 태어난 갓 난 아기는
"육"이 아닌가?
'먹는 날에 죽어 버린" 그래서 "흙으로 돌아 가게 된"
첫 사람 아담의 후손이 아니란 말인가?
어린 아기는 땅에 속한 자가 아닌가?
아기가 범죄 하기 전까지는 하늘에 속한 자라도 된단 말인가?

자신들의 의지를 활용하여 죄를 선택하기 까지는
'정죄 받지 않는다'고 선언한 생애의 빛 말대로라면
어린 아기는 범죄 전까지는 '여자의 후손'인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 되어 아기 예수로 태어난 것과 동일한
그런 죄 없는 상태로 태어났다는 말인가?
갓 태어난 아기가 만약에 공자나 석가모니처럼 성인으로 살면
그래서 자신의 선택으로 범죄치 않으면,
그는 죽지 않고 영생할 수 있는가?

이 질문들에 생애의 빛 기관은 분명하고도 명백한 답변을 해야 한다.
얼렁 뚱땅 슬그머니 넘어갈 문제가 아닌 것이다.

다시 질문해 보자.
갓 태어난 아기들은 죄인인가, 아니면 의인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그 중간 지대라도 있단 말인가?
견고한 토대 측의 주장대로라면,
갓 태어나서 자신들의 의지 활용으로 선택하여 범죄 하기 전까지는
아기들은 정죄를 받지 않는다고 하니,
그렇다면 그 아기들은 예수님이 구주로 필요한가 필요하지 않은가?
왜냐하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롬 8:1)다고 했는데,
금방 태어난 아기들에게 정죄가 없다는 생애의 빛 측의 주장대로라면,
아기들은 예수가 필요 없이 의인이 된 자들이든지,
아니면 태어날 때부터 자동적으로 의인이 된 자들이지 않겠는가?

무엇인가?
생애의 빛은 이러한 우리의 질문들에 성경과 예언의 신을 통해
명백한 답을 해야 할 것이다.

왜 생애의 빛 기관은 별로 복잡하지도 않고 헷갈릴 것도 없는
성경의 명백한 사실과 진리에 대해
이처럼 무모한 억설과 억지 주장으로 비성서적이며
예언의 신과도 전혀 조화될 수 없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그들은 성경에 나타난 죄의 본질과 근본을 간과하고
죄의 과정이나 결과(그러한 성경절들)에만 주목하면서
무모하게 죄의 정의를 내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덕적이고도 행위적인 인간의 완전'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영생과 영멸, 구원과 멸망, 죄와 의(義) 이런 모든 주제들에 대해
하나님의 일방적인 범죄한 인간을 향한 무궁한 사랑과 자비,
은혜, 긍휼을 망각하고 인간의 선택과 행위, 죄 짓지 않는 생애만이
의인의 정당한 생애라고 오해하고 곡해하기 때문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범죄한 아담은 그 날 바로 '사망적 존재'가 되었다.
그것이 하나님이 선언하신 정당한 죄의 값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바로 그 사망의 선언이 선포된 그 같은 창세기 3장에
사망적 존재가 된 아담과 그 후손들에게 소망적 복음이
더욱 넘치게 선포 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사망적 존재가 된 아담이 아닌,
새로운 생명의 근원을 만드신 것이다.
그 것이 바로 "여자의 후손'으로 명명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첫 사람 아담을 통해 태어나는 모든 인류는 이미 죽어 버렸기 때문에
그를 통해서는 더 이상 그 어떤 의인이나 영생할 생명이 태어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담의 죽어 버리고 썩어 버릴 씨가 아닌,
새로운 생명의 씨앗을 처녀 마리아를 통한 아기 예수의 탄생을
복음으로 선포하신 것이다.

왜 성경이 예수님을 "마지막 아담"으로 표현했는가?
첫 아담의 씨를 통해 태어나는 그 어떤 아기도, 그 어떤 위인도,
그 어떤 성자도 절대, 결코 산 생명이 아니기에
그들을 통해 그 어떤 정죄 받지 않는 의인이나
영생할 사람이 결코 있을 수 없기에,
오직 예수님만이 새로운 생명의 씨, 영생의 씨를
주실 수 있는 분이시기에 '마지막 아담'이란 표현을 한 것이다.

예수 외에 그 어떤 메시야나 구원자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박명호도, 박태선도, 문선명도, 조희성이도 그 밖에 그 어떤
사이비 교주들도 결코 재림 주나 메시야가 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아래서"(땅에서) 난 마호메트나 석가모니나 소크라테스나 공자도
결코 우리 인간의 구주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만이 첫 아담 대신에 새로운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둘째 아담"이시면서 "마지막 아담"이신 것이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벧전 1:23)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는
말씀은 방금 태어난 아기를 포함한 모은 사람에게 주신 말씀이다.
물론 그 어린 아기들이 성장하고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 은혜를
깨닫고 이해하여 오직 믿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할 때
그들도 거듭남을 경험하고 영생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다음 회에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이 땅에 태어나 늙고 병들고 결국 죽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죄인이며 태어날 때부터 사망적 존재였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처럼 더 넘치는 은혜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넘치도록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그래서 성경은 철저히 우리가 이 땅에 살다가 죽는 첫 번째
죽음을 무조건 '잠'(수면 상태)으로 묘사하고 있다.
아니 묘사가 아니라 사실이다.
첫 사람 아담과 함께 사망적 존재가 되어 버린 우리 모든 인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잠자다 깨어 날 수 있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통해 주신 넘치는 은혜 덕분이다.
그 은혜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사실은 성경에 둘째 사망으로 묘사된
그 영구한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첫 사람 아담으로 인해 사망적 존재가 되었으나
마지막 아담 예수를 통해
아담이 창조되어 온전한 사람으로 영생과 사망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과 똑같은 입장에서
영생과 영멸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사망적 존재로 태어났기에 비록 이 땅에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는 말씀에 따라,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롬 10:11)
죽었던 첫째 사망의 잠에서 홀연히 깨어나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벧전 1:4)
곧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고전 15:53)는
“신령한 몸”(고전 15:44)으로 일어 나는 것이다.
그것이 첫째 부활이요 의인의 부활이요 생명의 부활이다.

첫 사람 아담 때문에 비록 우리는 사망적 존재로 태어나
잠으로 묘사된 첫째 사망을 당하는 존재가 되었으나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더욱" "넘치는 은혜"를 통해
“둘째 사망이 ..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계 20:6)는 영광을 세세토록 얻게 된 것이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4-49)

mslee

2009.12.19 00:40:37
*.94.94.31

감사합니다. 생애의 빛에서 보내주는 책자를 정독하지는 않았지만 가끔은 읽다가 그들이 제목과는 다른 목사님의 책내용을 비판하는  내용을 읽으며 그 책자를 보내지 말라고 부탁했습니다. 왜냐면 신학적으로 논리적으로그들을 반박할 학식이 없는 저같은 이들이게 그들의 글은 교회를 비판하고 지도자들을 불신하도록 조장하는 듯한 ..결코 제 신앙에는 도움이 되지않으므로....그러나 제가 반박하고 싶은 내용을 이처럼 명쾌하게 글로 표현해 주심을 읽고는 답답했던 제 마음이 조금은 풀리는 군요. 아직도 저는 신학적인 것은 모르나 김명호 목사님의 말씀은 저를 하나님의 은혜를..성경으로 이끌어 주시기에 그들의 주장보다 더 따르고 믿습니다. 말석님의 명쾌한 글(저게게는) 다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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