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어떤 형식으로든 자기 신앙에 대한 점수를 매기며 살고 있다.
어떤 사람은 A 학점, 어떤 사람은 B 학점, 또 어떤 사람은 C 학점 등일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B학점이나 C학점 등의 점수가 허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명심해야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완벽한 100점 만점의 점수로
통과하던지 아니면 0점으로 낙제할 뿐 기타 중간 점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100점을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었다는 단 한 번의 죄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 지금
우리들은 선악과를 한두 번 정도 먹은 게 아닐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완전한 순종의 대가로 받아내던지, 그럴 자신이
없으면 은혜로 거저 받는 것,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 그리스도의 은혜로밖에 구원받을 수 없다는
가르침은,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상식적으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믿는데도 구원의 확신과 기쁨이 없다면, 그 이유는 암암리에 여전히 남과
자신에 대해 점수를 매기며 거기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누가복음 18:9-14에는 세리와 바리세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바리세인은
하늘을 쳐다보며 이렇게 말한다. "물론 다소 부족한 면이 없진 않지만
그동안 이것저것 하는 만큼 많이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저의 부족한
부분만 좀 은혜로 채워 구원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반대로 세리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불쌍히 보소서. 전 빵점짜립니다."라고
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그때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신다. 그리고
그를 인정해주신다.
이 이야기에서 바리세인은 B 플러스 형 신앙을 상징한다. B 플러스 형
신앙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의 부족한 면을 보충해주는 정도의 것으로
보는 신앙방법, 즉 자기 노력에 하나님의 은혜를 보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막연한 생각을 의미한다. 이런 식으로 믿는 교인에게는 구원도
구원의 기쁨도 없다는 것이 이 비유의 요점이다. 구원의 신선한 충격과
기쁨은 늘 빵점을 맞았다고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또 그런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대하는 사람의 몫이라는 것이다.
올 졸업식 때는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졸업식을 마치고 퇴장을 하니
제임스(가명)가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환한 얼굴로 다가와 함께 사진을
찍자고 요청했다. 나는 물론 그의 요청에 응해주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좀 미안했다. 왜냐하면 제임스는 낙제할 뻔하다 겨우 내 과목을 통과한
학생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잠시 후에 자기 동생과 모친을 데리고 와
다시 함께 사진을 찍자고 요청했다. 제임스는 그동안 내가 가르친 학생들
중 가장 행복한 것 같았다.
떨어진 줄만 알았던 과목을 통과했다고 좋아하던 제임스. 나를 부둥켜안고
환하게 웃던 그의 얼굴. 또 내게 악수를 청하면서 기뻐하던 그의 동생과
모친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전달하고자하는 의도는 파악했지만 위의 문맥은 신학 교수님으로서는 적절하지 못한 예증인 것 같다. 선악과를 먹은 행위 이전에 마음의 동기에서 죄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