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힌 마음이나 열린 마음의 고민,
인간은 고뇌의 물을 먹고 자란다.
고뇌, 그것은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삶의 본질이다.
기독교나 불교 또는 여타의 종교가
모두 고뇌의 다리를 건너가는 것을 가르친다.
흔히 사람은 주관이 뚜렷해야 한다고 한다.
뚜렷한 주관이란 하나의 고착화가 될수 있다.
고착화는 또 하나의 독선이다.
독선은 아집을, 아집은 집착을 가져온다.
그것은 닫힌 마음이 되기도 한다.
고착화는
이미 가지고 있는 견해 이상
지식이나 사상이 자라지 아니한다.
정죄를 잘한다.
자신을 고독하게 만들고
인간관계를 편협하게 한다.
견해와 사상의 다양성을 받아들이지 못한 소치로
사람을 쉽게 미워하고 적대시하기 쉽다.
사람은 누구나 다 양면성이 있다.
어떤 부분은 고착화 되었고
반면에 어떤 부분은 열린 마음도 있다.
열린 마음을 가졌다고 늘 긍정적이지만 않다.
열린 마음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일종의 타협일 수 있다.
주관이 불분명한 적당주의도 될 수 있다.
목숨을 던질만한 절대적 가치관이 없다.
자칫 술에 물, 물에 술을 탄 것과 같다.
삶이 흐느적거린다.
종교에서는 이런 점을 배타한다.
결국
<빛을 지속적으로 찾아라,
빛을 받은 대로 성실하게 살아라,
깨달은 만큼의 최선을 다하는 것이
신앙이요 삶이다>라고 한다.
양심의 문제로 돌아온다.
양심이란 앎을 바탕으로 일한다.
이것이 옳은 줄 알면 이렇게 살고 싶고
저것이 옳은 줄 알면 저렇게 살고 싶다.
무엇을 어떻게 알았는가 하는 것이 양심을 좌우한다.
앎이란 살아서 움직이며 자라는 것,
고착화는 정지됨과 죽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부단 없는 구도, 진리탐구, 깨달음의 지향을
하나님은 요구하신다.
부단 없는 깨달음을 지향하지 않거나 거부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이
바로 죄요 불신이요 죽음이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소화량(消和量)을 이미 아신다.
그릇 됨을 아신다.
바울은 말한다.
큰 그릇이 작은 그릇 역할을 할 수 없고
작은 그릇이 큰 그릇 역할을 할 수 없다.
각 그릇 됨을 이해하고 존중히 여기는 것,
이런 그릇 저런 그릇이 모두 그 독특성을 다하는
삶의 조화, 역사의 조화가
이 세상의 하나님의 나라의 움직임이요
결국 저 안식에 이르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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