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성적인가, 감성적인가, 영성적인가?
나는 막 나가려고 문지방(出口)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그 서성거림이 허탈과 일탈의 혼동을 일으킨다.
입구(入口)에 들어서던 때를 싱그러움으로만 추억되기보다
철모르고 어수룩한 삶의 한 단면으로 보인다.
입구에서 출구까지의 그 잘난 경험이란 게
오만으로 내 영혼의 시각을 흐리면서
싱그러움의 때를 어수룩한 때로 비웃고 있다, 지금.
그 들어섬의 계절에서부터
우리네 공동체를 비 지성적으로 보는 오만,
그리고 비 지성적일 수밖에 없는 문화적 환경이
내 여정을 비틀거리게 했다.
입구에서도 그렇듯 출구에서 역시
삶을 뒤틀리게 하는 그 건방짐이
내 영혼을 편안치 않게 한다.
사람이 지니고 있는 지정의(知情意) 중에
영혼의 상태를 말해주는 면은 아무래도 정(情)이다.
깨달음(知)이나 무엇을 하려는 의욕이나 결심(意)도
감정을 움직이지 않으면 죽은 것이 된다.
그래서 행복감(感)이니 만족감이니 한다.
나의 전 삶이 담겨져 있는 이 공동체가
역시 감성적(感性的)이지도 않았다.
공동체의 특징을 말하는 예배의 현장에서는
오히려 탈 감성적일 것을 강조하는 문화였다.
그래서인지 생동력(生動力)이 유약했다.
이렇게 지성적이거나
감성적이지 못한 우리네 공동체가
그럼 영성적이었나?
고민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영성이란 도대체 무엇이냐?
어설픈 학문을 들이대지 말라.
잔말 할 것 없이 하나님의 임재다.
지금 내 안과 밖에 하나님의 충만하심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니
왜 그걸 문제 삼느냐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어디에서 명백(manifest)하시는가?
순수(純粹)한 곳이다.
실재로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그분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텅 빈 마음이다.
하나님은 이런 존재의 삶을
당신의 삶으로 엮으시려는 아버지로
명백하게 나타나신다.
그래서 기쁨이 터지고 찬송이 우러나고
눈물샘도 터지는 상태가 영성이다.
지금은 순수(純粹)가 문명에게
겁탈 당하는 시대다.
몰론 어느 시대나 그랬다.
아버지는 그것을 가르치시려고
이사야나 호세야 같은 선지자들을 부르셨다.
삶의 진창을 딩굴게 하시고
하나의 깨달음을 위하여 일생 수업을 하게 하신
그들에게 목숨 걸고 말씀 전하게 하셨다.
설교를 준비할 때면 몇 권 읽지도 않은
독서력이 나를 괴롭힐 때가 있다.
몇 년 살지도 못한
그리고 별로 실적도 없는 일천한 경험이란 것이
하나님의 임재를
오히려 방해하는 말을 하렬 때가 있다.
여기서 바울의 논조를 빌린다.
그렇다고 영성은 지성과 감성을 무시하느냐?
결코 그럴 수 없다.
오직 영혼 가득히 임재하신
그 아버지의 가슴, 그 순수로
책을 읽고 신문을 읽고 고민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지성과 감성이
교회라는 하나님의 공동체의 문지방을 넘어올 땐
바로 영성의 재료가 되어야 한다.
바울이 그러지 않았나?
그러면 그것이 더욱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사랑하게 할 것이다.
실로 우린
아버지의 가슴,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좀 더 지적이 되어야 한다.
좀 더 감성의 문을 열어야 한다.
우리의 영적 문화의 중심인 예배에서도
아버지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나타내야 한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여
주여 주여 하지 말라는 문화를 엮지 말라.
아버지를 시도 때도 없이 부르는 영성이
올바른 지성과 감성을 가져오게 할 것이다.
정말이지 하나님을 아버지 되게 해야 한다.
목사들보다 일반 신자들이 더 똑똑한 시대다,
목회자들은
더 많이 지성을 쌓아야 한다.
더 인간적이어야 한다.
순수한 영혼으로,
아버지의 임재로,
영성의 충만함으로.
좀 더 지성적이지도 감성적이지도 못한 내 삶의 세월이
출구에서 서성이는 나를 초라하게 한다.
참으로 고독하게 한다.
< 내 생각에는 목회자들이
설교할 때 파워포인트를 과용하지 않았으면 한다.
잘못하면 영성 전달이기보다 인포메이선 전달이기 쉽다.
설교현장에서 어떤 때는 준비되지 않는 영감의 임재가
영혼들에게 더욱 감동을 주고 헌신케 할 때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