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수롭지 않는 걸 가지고,
기독교 윤리문제나 성경해석학에 있어서 '아디아포라'의 논리가 있습니다.
헬라어인 이 단어의 뜻은 '대수롭지 않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해석하여 윤리적으로 적용함에 있어서
선과 악에 직결되는 것이 아니라면
죄라는 개념을 적용시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바울은 로마서 14장에서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로 교회내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이 되었을 때
이러한 원칙으로 권고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우상에게 제사했던 고기들을 시장에서 판매하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에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어느 것이 우상의 제물이 되었던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고기를 먹지 아니하는 것이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모르고 먹으면 아무 상관이 없다든가
또는 우상에게 제사했던 고기를 먹는 것이 대수로운 것이 아니라는 사람들과,
고기를 먹으면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이니까
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과의 사이에 심각한 대치현상이 대두된 것이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고기를 먹고 안 먹는 것이 죄와 직결된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각자의 양심에 따라 행하되
자기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을 판단하며 정죄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오히려 남을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도 천국을 위한 고자도 있다고 하셔서
하나님의 영광과 구원을 위하여 이것이 더 좋은 길이라고 생각하면
그 것을 행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한다고 하여 하지 않는 사람을
죄라는 개념을 가지고 판단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안식일 문제도 그렇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위기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안식일에 어떤 일이라도 행하는 것은 죄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가르치시고 행하는 것들이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눈에는 죄였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안식일 자체를 부인하신 것이 아닌,
안식일에 대한 그들의 전통적인 관념에 대한 개혁을 시도하셨습니다.
형식이란 그 형식이 존재하게 한 근본 뜻을
더 밝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디아포라'의 논리가
기독교 역사에서 많은 논란을 가져왔습니다.
종교 개혁이후에도 마틴 루터나 그의 계열에 속한 사람들과
쟌 칼빈이나 그의 계열의 사람들과의 견해가 많이 달랐습니다.
루터의 계열에서는 '아디아포라'의 논리를 적용하여
세속적 음악이나 오락을 선과 악의 개념에 접촉되지 않은 한
개인의 믿음과 선택에 맡길 일이라 하여
선악간에 판단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반면에 칼빈 계열에서는
세속적인 음악이나 오락을 용납하지 아니했습니다.
청교도 계통과 스코틀랜드 장로교 계통의 사람들은
'아디아포라'를 인정치 않거나 그 적용을 최소화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느 계통의 생각이 옳고 그르냐 하는 판단은 금물입니다.
한가지 생각할 것은
'아디아포라'는 적당주의를 용납하라는 것인가?
아니면 지금의 주의 주장이
더 밝은 빛이 이르러 올 때 수정 가능한 자세를 취하라는 것인가?
급변하며 복잡한 시대를 사는 기독교인들에게
많이 생각하게 하는 주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