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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열에 불타는 행복한 여성! 샌디에고 교회 탐슨, 김 집사님의 자서전 - 진흙탕 속에서 진주를 찾으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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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열에 불타는 행복한 여성! 샌디에고 교회 탐슨, 김 집사님의 자서전 


                      진흙탕 속에서 진주를 찾으시는 하나님


           인생을 살면서 진정으로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수 있다면 얼마나 가치 있고 보람된 인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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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스러운 예수 재림 때 우리는 부활하여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 것입니다! 

We will resurrect and live together with Jesus forever!!!


내가 태어날 때에는 시절을 잘못 만나 아무런 문화 혜택도 받지 못한 채 부모님의 운명에 따라 하나님도 모르고 고생과 역경 속에서 몸부림치면서 원망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지나간 과거를 회상해 볼 때 하나님께서 나를 단련시키고 선한 길로 인도하신 섭리를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제 본명은 정금순이고 6.25 동란 때까지는 복숭아로 유명한 경기도 부천 소사에서 부모님과 세 동생 그리고 나까지 여섯 식구가 살았습니다.


저희 집에는 1,000평이 넘는 복숭아밭과 논, 밭이 있어 우리 여섯 식구가 사는 데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6.25가 나기 몇 년 전부터 아버지는 노름과 술과 여자로 모든 재산을 탕진하였고, 그로 인해 우리 식구들은 고생하기 시작했습니다.


6.25가 터지면서 아버지는 9.28 때 이북으로 끌려가시고 이리저리 피난다니면서 고생하다, 두 동생은 병들어 앓다가 죽게 되자 우리 식구는 졸지에 여섯 식구가 세 식구로 줄게 되었습니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우리 세 식구(엄마, 나, 남동생)는 1.4 후퇴 때 여러 사람들과 휩싸여 피난을 갔다가 돌아와보니 집은 폭격을 맞아 무너져 폐가가 되었지만 다행히 방 한칸과 부엌은 쓸 수가 있어 그곳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부엌 바닥에 묻고 간 재봉틀이 있어서 우리는 그 재봉틀을 팔아 그것을 밑천으로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장사라야 비누나 성냥, 담배, 치약 등의 필수품들을 봇짐으로 머리에 이고 다니면서 파는 행상이 고작이었습니다.


그 때 나이 14살, 작은 키였지만 소사에서 인천까지 가서 물건을 사오는 일은 내 몫이었습니다. 왕복 육, 칠십 리 되는 거리를 새벽에 떠나서 저녁 늦게 큰 가방에 물건들을 사가지고 돌아오게 되면 발은 퉁퉁 붓고 엉망이었지만 날마다 나는 그 일을 계속했고, 어머니는 내가 받아온 물건을 집집 다니면서 파셨고, 남동생은 시장에 나가 조그마한 좌판을 벌리고 팔면서 세 식구가 열심히 노력한 끝에 우리 집은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휴전이 되었는데 초등학교만 나온 나는 중학교 진학할 일이 막연하여 학비를 벌기 위해 소사에서 벽돌 공장을 운영하시는 주증남(동창 주영숙 아버님) 사장님의 사무실에서 1년 동안 급사로 일하면서 돈을 모았고, 다시 2년 동안 버스 차장을 해서 그때 모은 돈으로 중학교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더 배우고 싶은 열정과 포부를 가지고 종로 5가에 있는 버스회사 사무실에서 매표를 하고 안내방송을 하면서 늦게나마 서울 덕성여고를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덕성여대 약학과에 입학했지만 힘이 벅차서 1년 만에 중퇴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신문광고를 보고 '신입 간호장교 후보생' 모집에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높은 경쟁률의 시험에 신체검사와 필기시험에는 합격했지만 마지막 구두시험에서 정치, 경제 문제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고 낙방의 쓴 경험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너무나도 살길이 꽉 막히고 막연하여 낙망과 좌절감에 부모를 원망하며 세상을 저주하고 차라리 자살까지 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간호장교 시험에 떨어진 쓴 경험을 뒤로 하고 미군 부대에 타자수로 취직하기 위해서 6개월간 타자학원에 열심히 다녔습니다. 6개월 타자 학원을 마친 다음 부평 미군 부대 노무처에 타자수로 이력서를 제출했습니다.


이력서를 낸 후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어서 몇 번 찾아가 보았더니 대기 명단이 너무 많아 차라리 문산 미군 부대에 사람이 필요한 것 같으니 거기에 가보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 바람에 즉시 문산을 찾았고, 그곳에서 즉시 타자 시험을 쳐서 일차 시험에는 합격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면접시험에서 지배인인 미국인이 직접 영어로 면접을 하는데 한 마디도 대답할 수 없었고, 그래서 부풀었던 내 희망은 다시 쪼그라들고 또 한번 실망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내 남동생은 간신히 고등학교는 졸업했으나 대학에 진학을 못하였고 우리의 형편은 장사는 한다고 해도 경험이 없어서 믿고 물건을 외상으로 주었다가 말없이 떼어먹는 사람들 때문에 밑천이 딸리고 빚은 점점 눈덩이처럼 커지게 되자 살길이 막막하였습니다.

취직할 곳이란 미군부대 밖에 생각나지 않아서 미군부대에 취직이 될 것만을 희망으로 삼았었는데, 거기서 떨어지자 살길이 막막하여 울음밖에 나지 않아 실컷 울었습니다.


실컷 울고 난 다음 다시 문산 노무자 통역관을 찾아가 "사람 좀 살려주세요. 변소 청소도 좋고, 세탁소 일이건 무슨 일이든 일만 시켜준다면 열심히 일하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살길이 없으니 집에 가서 자살해 죽을 것입니다." 라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울면서 애걸 복걸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통역관은 이곳 부대에서 한 달 후 식당에서 일할 종업원을 뽑을 것 같다고 그때 와보라고 슬쩍 일러주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날 그 통역관의 말을 듣고 희미한 희망을 가지고 집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린 한 달이 지난 다음 떨리는 마음으로 다시 문산 미군부대 노무처에 가봤더니 식당 종업원을 두 사람 뽑는데 여덟 사람이나 몰려와 있었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기다리다가 내 차례가 되어서 통역관을 통해 면접을 보았습니다. 면접이 끝난 다음 그 부대의 식당 지배인이 나와 다른 한 사람, 두 사람을 불러서 학벌과 좋은 인상, 그리고 진실된 모습 때문에 채용되었다고 일러주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날 곧바로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3,000여 명의 미국 군인이 근무하는 이 부대에 여자 종업원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많은 군인들의 유혹이 있을 것을 각오하라고 했습니다. 만일 한번만이라도 어느 병사와 데이트나 영화관람을 갔다는 소문이 나면 즉시 해고할 터이니, 모든 유혹 잘 견디고 신실하게 오랫동안 일해 달라고 당부해 주었습니다.


그 때가 내 일생 중에 가장 기쁘고 행복한 때였습니다. 절벽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사경을 헤매는 나에게 튼튼한 밧줄을 내려주어 살려주는 것같은 기쁨 때문에 어쩔 줄 몰랐습니다. 살다가 이런 행운도 있을까? 나의 생애에 새출발하게 될 새로운 기회를 갖게 되어 너무도 기뻤습니다.


식당 웨이트레스의 일이나 타자수의 월급은 당시 공무원 월급과 같은 5만원이었지만 나는 부대 식당 웨이트레스의 일을 하늘이 준 직장으로 알고 정성을 다 해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여러 사람들의 칭찬도 많이 받게 되었으며, 더욱이 이 웨이트레스는 각 테이블마다 팁이 있으므로 월급보다 훨씬 많은 수입이 있어서 일한지 3년 반 만에 나는 그 많은 빚을 갚게 되었고, 동생도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으며 조그마한 집 한 채도 장만하게 되었습니다.


여자 간호장교 시험에 떨어졌고, 타자수 시험에서 떨어져서 가슴이 아팠는데, 뒤돌아보니 식당에서 일하게 된 것이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남성들만의 군대 사회 식당에서 열심히 친절하게 최선을 다 하여 일했기 때문에 나는 꽤 인기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러가지 방법으로 나에게 데이트를 신청하고 결혼하자고 청혼하는 사람 등 많은 유혹이 있었지만, 처음 채용될 때의 지배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모든 병사들의 친절과 사랑의 표시를 무시하고 열심히 일만 하였습니다.


몇 년 일하면서 얼마만큼 영어회화도 늘게 되고 직장에 편안함을 느끼게 되었고 생활의 여유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생활이 안정되니까 내 자신을 돌이켜 보는 여유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내 나이 서른이 가까웠고 나도 내 인생의 길을 찾아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습니다. 얼마 동안의 직장 생활을 통해서 미국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영어로 의사소통도 웬만큼 어려움이 없어지자 이왕이면 넓은 미국 땅에 가서 새로운 인생을 개척해 보고싶은 생각도 들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며칠 밤을 고민으로 지새기도 했습니다.


직장에서 만나는 여러 사람들 중에서 신랑감을 찾기로 결심하고 일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씩 관심을 갖고 보게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제 눈에 띄는 한 사람을 발견하였습니다. 얼마 전에 한국에 새로 배치를 받고 온 사람이었는데, 그는 군에 입대하고 바로 한국으로 발령을 받아 온 사람으로 아주 잘 생겼고 별로 말이 없었으며 특별히 술과 담배를 피우지 않는 조용한 사람이어서 관심을 가지고 그를 보게되었습니다. 그리고 보면 볼수록 신사답고 깊이가 있으며 남을 배려하는 사람이어서 그에게 더 호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그 사람과 비밀히 교제하는 중에 그가 성실하고 진실되며 착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임을 느끼고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와 교제를 시작한 지 한 6개월이 되어 그가 청혼하자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그가 본국으로 돌아가기 얼마 전 직장을 그만두고 그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의 전속과 함께 남편을 따라 1966년 2월 5일 남편이 사는 이곳 샌디에고를 향해 겁도 없이 용감하게 태평양을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세계에서 아주 작은 나라 한국 소사에서 태어나고 자라 어떻게 하다가 미군 부대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미국 군인 탐슨을 만나 생각지도 못했던 결혼을 하게 되어 어머니, 동생 그리고 정든 친척 친지들을 등지고 내 잔뼈가 굵은 고향 산천을 떠날 때 과거의 모든 고생과 눈물이 앞을 가려 한없이 울었습니다.


이제부터는 꿈과 비전, 새로운 기대와 새 희망을 가지고 내가 선택한 길이라 모든 운명을 하나님께 맡기고, 낯설고 물설고 언어와 풍속이 다른 이 미국에서 남편과 시어머니를 모시고 잘 살 것을 거듭 결심했으나, 한편으론 두렵고 떨림을 피할 수 없었으며 만감이 교차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미국에 도착해보니 시어머니는 그렇게 마음씨가 착할 수가 없는 분이셨으며, 남편은 바다보다 더 넓은 아량을 가지고 모든 실수와 잘못을 용납해주며 참아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샌디에고가 세상에서 가장 일기가 좋고 경치가 아름다운 곳임을 와서 살면서 알게 되어 더욱 기뻤습니다.


딱 아들 하나만 낳아 키우신 시어머니는 낯설고 서툰 영어를 하는 조그마한 동양여자를 며느리로 맞아 모든 친절과 사랑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시어머님께서는 내가 미국에 오던 다음 날부터 나에게 영어를 배우게 하기 위해서 아침에 나를 성인 학교(Adult School)에 태워다 주시고 오후가 되면 나를 데리러 오시기를, 내가 자동차 운전면허증을 딸 때까지 근 1년 동안 그렇게 정성을 쏟아주셨습니다.


또 한 내가 낳은 당신의 세 손녀딸들도 정성껏 키워주셨으며, 학교 가기 전 아침 식사 준비와 점심 도시락까지 챙겨주시고, 저녁에는 세 손녀딸들 목욕까지 시켜주셨으며, 자기 전에 각 침대에 찾아가셔서 기도해주시는 시어머님이셨습니다. 13년 간 한 집에서 함께 살면서 한번도 고부간에 마음 상한 일이 없었던 그토록 자상하시고 배려 깊으셨던 세상에서 둘도 찾아볼 수 없는 시어머님이셨습니다.


물건은 품질에 따라 가치가 정해지고 사람은 품성에 의해 인격이 정해진다고 하는데, 우리 시어머님의 아름다운 품성은 돌아가신지 34년이 흘렀어도 지금도 여전히 내 마음 속에 간직되어 있으며, 그 인자하신 시어머님을 아직도 그리워하며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마음씨 착한 남편도 그의 착하고 너그러운 마음씨로 나의 인생길을 완전히 바꾸어놓았습니다.


미국에 도착한 이후부터 한국에 계신 어머니와 동생에게 나의 행복한 미국 생활을 전하고 싶었지만, 47년 전 그 당시에는 한국에 각 가정마다 전화가 없었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번씩 앞장 뒷장 가득히 나의 일기장을 써서, 어머니가 미국에 오실 때까지 만 5년 동안 한번도 빠진 일 없이 써서 보내드렸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렇게 했을까? 다만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던 마음에서 생긴 것이겠지요.


생활비도 매달 보내드려야 하는데, 1년 동안은 직장을 안잡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그로서리 shopping을 할 때마다 $10씩 떼어서 모았다가 매달 $50씩 부쳐드렸고, 1년 후부터는 job을 갖게 되어 매달 $100씩, 4년 동안 미국에 오실 때까지 생활비를 보내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시어머님이 사랑으로 기쁘게 봉사하시는 아름다운 품성과 딸들이 자라가는 과정과 너그러운 남편의 마음씨 등등, 나의 일기장을 써서 보내면 이웃 아줌마들이 미국의 소식을 듣기 위하여 놀러오신다고 하시면서, 나는 너 때문에 살 맛이 난다고 하시면서 돈 받으실 때마다 답장을 보내주셨습니다.


이곳 샌디에고는 군사 항구 도시여서 각 나라에서 해군과 해병대 연수교육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는데, 우리 시어머님께서 다니시던 침례교회에서는 각국에서 연수교육을 받으러 오는 여러 외국 군인들을 초청해서 함께 예배드리고, 예배 후에는 각 가정에 초청해서 음식을 대접하는 일들을 자주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시어머님께서도 외국 군인들을 대접하시기를 좋아하셨는데, 나도 우리 시어머님을 돕다가 우연히 한국에서 장기(8개월-1년) 연수교육을 받으러 오신 한국 군의관과 장교들을 대접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온지 한 1년이 되어서 만나는 한국 사람이라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 뒤부터는 나도 시어머님과 남편의 허락을 받고, 한달에 두어번 씩 주말에 한국 군인들을 우리집으로 초청해서 한국 음식을 대접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살 때는 여유가 없어서 한번도 남을 대접해 보지 못한 것이 한이었는데, 지금은 약간의 여유도 생겼고 교포들을 만나는 기쁨과 또 해외에 나가 있는 조국 동포들에게 한국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 자그마한 나의 조국에 대한 충성이라고 생각되어, 근 삼 년 동안 한국 군인들을 모셔다가 대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리하여 한국 장교 분들이 이곳 샌디에고로 교육 받으러 오는 부대에 가서 저의 남편이 20 여 miles 되는곳에 가서, 낮 12 시 경에 5 사람 또는  6 사람을  큰 차로 모셔오고,  저는  이곳에 살고 계신 분들을 초청하여 10 여 명이  함께  점심 식사를 나누고  난후에는 노래자랑,윳놀이  등등  재미 있게 노는 동안,  남편은 자기 방에서 SPORTS  TV 를 보다가, 저녁 식사하고 8 시경에 태다 주면서 한번도  불평 한번 하지 않은 너그러운  남편과 시어머니를 생각 하면 정말 고개가 숙여지고 감사 합니다. 


한국 분들을 대접하기 위해서 시어머니와 저는 전날부터 집안 청소를 하였고, 한국 음식을 장만할 때마다 시어머님께서는 콩나물과 시금치를 다듬어 씻어주시고 일일이 나를 도와주셨십니다. 또한 시어머님께서는 손님들이 오면 자기 때문에 불편할까봐 손님들이 오시기 전 친구 집에 가셨다가 잔치가 끝난 다음에 늦게 오시면서도 한번도 불편한 심기를 보이시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기뻐하는 일은 무조건 같이 따라해 주셨으며, 내가 미국 실정에 조금씩 익숙하게 되자 바로 가정의 경제권을 제게 넘겨주셨습니다. 그 후로 남편은 직장에서 주는 봉급을 꼬박꼬박 나에게 맡기고, 자기는 매달 얼마의 용돈을 타다 썼습니다. 그래서 미국 온지 1년 후부터는 우리 가정의 모든 가계를 제가 맡아서 처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가정에서 새로운 비즈니스를 연다든가, 집을 산다든가. 딸 셋을 기독교 교육을 시키는 일 등, 중요한 경제권을 모두 나에게 맡겨서, 내가 원하는대로 처리했습니다. 세 딸의 교육은 기독교 사립학교에 보내는 바람에 적잖은 비용이 들어가서 남편과 나는 그 흔한 여행 한번 가지 못하였지만, 세 딸이 모두 착실하게 공부를 잘 해서 좋은 그리스도인들이 되고, 착한 신랑들을 만나 행복하게 살게 되어 여한이 없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내가 미국 온지 3년 만에 미국 시민권을 얻게 되었고, 시민권을 받던 날 그 시민권을 들고 즉시 이민국으로 달려가서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어머니와 동생을 초청하는 초청장을 보내어, 그로부터 만 2년 후에 어머니와 동생 식구들이 이곳 샌디에고로 오게 되었습니다.


당시 남동생은 이미 한국에서 결혼을 해서 두 딸이 있어 네 식구가 되었으며, 어머니와 함께 다섯 식구가 함께 오는 바람에 우리집 식구 여섯에 동생네 식구 다섯, 도합 열한 식구가 한집에서 살았지만, 남편이나 시어머니께서 조금도 싫은 기색없이 두 달을 참아주셨습니다. 남편은 내 동생의 직장을 잡아주었고, 시어머니께서는 우리 친정 식구들이 분가하는 날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새집 살림을 장만하여 내보내주셨습니다.


제 남편은 군에서 제대한 후, 37년 동안 트럭 운전수를 했습니다. 그러던 남편이 2001년도에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을 집례한 미국 담임 목사님께서 "Mr. 탐슨은 오직 하나밖에 모르는 사람"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셨습니다. 자기 일생에 오직 한 여자만 알고, 그것도 조그마한 한국 땅에 나가서 한국 여자와 결혼해서 죽을 때까지 그 여자하고만 살고, 또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에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10년 전에 침례를 준 그 목사가 가는 교회를 따라 한 목사만 섬겼고, 직장도 처음 들어가서 37년 동안 퇴직할 때까지 오직 한 직장에서만 근무한 성실한 사람이라고 칭찬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 좋은 남편을 만나 미국 땅에 와서 어려움없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가 태어난 삶의 목적을 깨닫게 된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머님과 동생 식구들을 모두 미국에 초청해서 내가 미국에 온지 5년만에 함께 살게 되고, 모든 것들이 내가 원하는대로 다 이루어졌지만, 늘 마음 한 구석에는 무엇인가 갈급하는 허전함이 내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적인 갈급함이었습니다.

미국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교회에 나가 서툰 영어로 예배드리는 것이 마음에 닿지 않고 영어가 이해가 되지 않아 한국말로 시원하게 예배드릴 한국교회를 찾았지만 당시 이곳 샌디에고에는 한국교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한국에서 사가지고 온 성경책에서 잠언과 시편을 읽으면서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갈급하듯이 말씀을 갈급하고 한국교회가 생기기를 한동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샌디에고에 새로 이민오신 김상철 장로님이란 분을 만났고 그분과 매주 토요일 오후 2시에 시간을 정해서 우리 집에서 정규적으로 성경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평소에 성경에 대해 가졌던 모든 질문들을 물어보면 김장로님은 꼬박꼬박 성경을 찾아서 막힘없이 시원시원하게 대답해주시는데 참으로 놀랐습니다.


창세기 인간의 시작으로부터 죄악의 기원과 사단의 활동,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예수님의 전 생애, 마침내 십자가에 죽으심의 모든 역사를 구약의 역사를 통해 말씀하실 때 참으로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의 말씀인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3일 만에 부활하시고 40일 후 하늘로 승천하시고, 아울러 재림의 약속과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지성소에서 대제사장의 일을 하고 계심을 배울 때에 가슴이 떨림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런 엄청난 하나님의 계획 속에 나같은 보잘 것 없는 인생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 감격하여 주님을 받아드리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렇게 성경공부를 1년 동안 한 후, 1973년 5월 26일 그의 자녀가 되는 표징으로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 미국 목사님의 집례로 제 큰 딸과 함께 침례를 받고 하늘 생명책에 내 이름이 기록되는 영광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내 생애에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 때 저는 한국에서 왜 내가 간호장교 시험과 타자수 시험에 떨어지고, 하필이면 문산에서 일하게 되었던가 생각하면서 나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크심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움에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41 년 전 하나님을 모르고 어둠에서 살던 나를 기이한 방법으로 샌디에고로 불러주셔서 김상철 장로님을 만나게 해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김상철 장로님을 통해서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그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하며 영적으로 육적으로 재정적으로 축복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감사해야할지 몰라 먼저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제 가 참 진리를 받아 드리고  10  여년 동안 남편에게 전도 하고 싶어서  교회 가자고 하면  하나님이 계시다는것을 증거해 주면 믿겠다고 하여  창조하신 자연을 보라,누가 만들었는가?  그리고  성경에서  영생을 (요 5:39)얻는다, 약속의 말씀을  읽어주고  그러다가 큰  딸에게 부탁 하여  단 2 장의  2500년 전 예언의 말씀을 역사책과 비교 하면서 지금까지 세상 역사가 흘러내려온 것을 증거 할때,  저의   남편이 감동을 받고  참으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것을 깨닫고,  그때 마침 미국   SDA  교회에서 열린 전도회에  3 주 동안  참석 하고, 거기서 침례를  받은 후, 15  여년 교회에 열심으로 다니다가 64세에 주님 안에서 잠드셨습니다.    


제 가 시어머니와 같이 사는 동안, 하나님의 첫 사랑에 반하여 예언의 신 책들을 여러 권 읽어가니까, 나도 모르게 전도하고  싶은 열정이 생겨서, 부족한 영어 실력으로  시어머니 앞에 앉아서 안식일의 진리를 성경을 펴 가면서 창2: 3, 출20:8,   신5:12,  겔20: 12,20,  겔 22:26,   사 58:13, 눅4:16,  마 5:17, 행13:14  등등 설명 할 때, 열심히 들으시다가 빙긋이 웃으시면서, "그런 열정이 어디서 생겼느냐"고 하시면서  그 다음 주 안실일 부터  아들 (저의 남편) 따라 교회의 나갔지만,  침례는 못받고  76세에  주 안에서 잠드셨습니다. 


저의 친정 어머니께서는 미국에 오시자 마자 저를 따라 교회는 따라 다니셨지만, 십일금을 내고 있는 나를 보고  그 돈을 나를 달라고 까지 하셨는데, 차츰 믿음이 자라신 후에  침례를 받고, 돌아가실 때까지 철저하게  십일금을 내시고, 매일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하시면서, 기쁘게 아들 가족과 함께 사셨는데, 우리 시어머니 돌아가신 후에는 내가  모시고 살 수 있는 특권을 주신 우리 하나님께 또 감사 합니다.  그러다가  병환으로 2 년 동안  우리 집에서 내가 간호  할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돌보면서 저의 앞에서 조용히 90 세로 맑은 정신으로  주님 안에서 2006에  잠드셨습니다. 한국에서 우리 어머니 같이 고생하신분 이 없을 것 같습니다.그러나 우리 어머니 얼굴  모습에서는  항상 웃음이 가득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동생 가족과 저의 딸들도 다 침례 받고 잘 살고 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행 16:31)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믿고,  매일 기도 하며 머지 않아 오실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 하는 우리 가족들과 여러분이 되시기를 빌면서, 하나님께 다시 한번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드립니다.  할롈루야!


성경 말씀 읽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어서 나는 성경책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안식일에 대한 진리를 배운 그 순간부터 나는 한번도 의심하지 않고 지금까지 안식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성경은 물론 교회지남이나 월간 시조를 탐독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책이면 무엇이든지 읽었고, 읽으면 은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는 집회가 즐거웠습니다. 일년에 한번씩 하는 장막 집회, 여름 야영회와 성경을 공부하는 사경회, 부흥회와 모든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듣는 시간이 감사하고 즐거워 마음을 다하여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성경 말씀대로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닮기 위해서 새벽 몇 시간을 말씀과 기도로 보내면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경험은 참으로 내게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을 골라서 외울 때 성경말씀의 의미가 더 깊어져 은혜와 기쁨이 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성경 1000절 암송대회에서 1등을 한 한국에서 살고 있는 하경선 집사를 13년 전에 미 국에서 만났는데, 뜨거운 선교열로 한국, 일본, 중국, 미국의 여러 교회에서 초청받아 머리 속에 있는 성경 말씀으로 각본 없이 간증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그때부터 성경 암송을 시작하여 감사와 기쁨으로 살 수 있는 보약이 되었습니다.


나의 생애에 지침이 되는 시편 1장, 23장, 마태복음 5장 팔복, 고전 13장, 롬 12징, 빌 2:1-16, 그외 성경절들을 외우면서 삶의 놀라운 변화를 체험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외우는 동안, 현미밥을 꼭꼭 씹으면 단맛이 나오듯이 더 깊은 뜻을 깨닫게 되고, 감사와 기쁨이 용솟음칩니다. 그리고 기억력이 소생되고, 잡념이 없어지고, 이기심과 교만심이 사라지고, 다른 사람의 실수를 이해하게 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온 생애가 하늘을 향하게 되고, 매사에 기쁨과 감사가 넘치고, 하나님께 더 충성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올 여름 방학부터는 어린 손자들에게 이 축복을 나누어주기 위하여 숙제를 내어주었습니다. 성경절을 외우면, 성경 말씀 한 절에 1불씩 주겠다고 상금을 걸고, 시동을 걸고 있습니다.

쉽고 중요한 성경절들을 뽑아보았습니다.

요 3:16, 마 4:4, 요 1:12, 요 17:3, 요 14:6, 여호수아 1:8, 마 6:33, 시 119:105, 롬 10:17, 딤전 6:18, 19


하경선 집사님처럼 많은 성경절을 외우기 위해서 지금도 계속 노력하고, 아침마다 걸으면서 성경절을 외우고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십일조를 바쳐야한다는 것을 배우면서 곧 십일조 헌금을 철저하게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40여년 동안 십일조 헌금을 드리면서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10)는 말씀대로 많은 축복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 바치면 부족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풍성해지는 경험이었습니다.


제 남편이 벌어다주는 월급과 나에게 생기는 모든 수입에서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남편은 군에서 제대한 후 37년 동안 트럭 운전사로 일했지만 아무 사고없이 은퇴하게 되었고, 나도 한 13년 동안 옷가게를 경영하면서 매주 그 번화한 로스앤젤레스까지 물건을 사러 다녔지만 한번의 사고도 없었던 것은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면서 특별한 하나님의 보호를 받은 것으로 여겨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또 하나의 경험은, 저희 샌디에고 한인교회가 1991년에 새로 교회를 구입하기 위해 건축 모금을 하고 있을 때 저희에게는 두 채의 집이 있어서 그 중에 한 채를 팔아 교회 건축헌금을 드리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집은 아이들을 학교 다니기 편하게 하기 위해 학교 가까이 있는 집을 한 15년 전에 산 것이었습니다. 그 집을 사는 것은 좀 무리였었고, 그 집을 사느라고 남편과 여러번 의견 대립도 있었지만, 여러 해가 지나 아이들이 학교를 마치게 되어서 그 집을 팔게 되었는데 12만불이라는 큰 돈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그 이익으로 남긴 12만불 중에 먼저 교회건축헌금으로 5만불을 바쳤고, 2만불을 북한 선교, 일본 선교, 방글라데시 선교, 그리고 고학생들의 장학금으로 바쳤고, 남편과 두 딸에게 자동차 한대씩을 사주고 났더니, 딱 800불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때 또 한번 십일조 헌금 생활의 축복을 경험하면서 "너는 네 식물을 물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 11:1)는 말씀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웃에게 나눠주면 결코 손해보는 법이 없다는 것을 체험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후부터는 어디서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를 들으면 조금이라도 가진 것이 있으면 그냥 지나쳐본 기억이 없습니다. 몇 년 전 교회지남을 통해서 '이북 동포 난민 돕기 운동' 광고가 나온 일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나는 이름없이 빛도 없이'를 쓰신 유영길 목사님이 쓰신 탈북자들의 처참한 참상을 읽었습니다. 배가 고파 살길을 찾아 목숨을 걸고 나오다가 잡혀서 짐승보다 더 심한 고문과 굶주림을 당하며 고생한다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 때 제 마음 속에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잠 3:27)라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즉시 제 마음이 변하기 전에 이북의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써달라고 시조사로 보내기로 약속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시조사에 만불을 보내기로 약속한 후  3일도 못되어 후회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돈 쓸 일도 많고 내 자동차도 점검해야 하고 여기저기 쓸 곳이 생각나기 시작했습니다. 침착하게 생각하고 차분하게 처신하지 못한 자신이 밉고 마음이 불편해지고 혼자서 어리석은 자신을 자책하면서 할 수없이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런데 참으로 기이한 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한 10여 년 전에 어느 기관에서 요양원을 산다고 할 때에 저도 관심이 있어서 투자 겸 한 만불을 바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관을 다시 파는 바람에 내가 투자했던 돈을 다시 돌려받게 되었습니다. 제가 자책하고 고민할 때 하나님은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 문제를 즉시 해결해 주셔서, 물 위에 던진 빵은 언제든지 도로 찾게된다는전도서 11장 1절의 말씀을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47여년 동안 살면서 가진 것이 별로 없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따르며 살아가면서 많은 산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삼육대학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을 위한 장학금을 보내주는 일이나, 내 주위에 개인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와주었을 때, 그렇게 도와주고도 내 생활에 결코 궁핍함이 없이 풍족하게 해주신 하나님께서 몇배로 부어주시는 축복을 경험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성도들의 헌신으로 구입한 교회에서 20여년 동안 예배보다가, 교인 수가 많다보니 파킹 랏 문제 때문에 그 교회를 팔기로 합의되어 150만불에 팔고, 새로 교회를 구입하기 위해 기도하던 중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인도하여 주신 섭리로 Poway 교회와 합병이 되어, 다시 건축 헌금 서약을 쓰는 안식일이 되었습니다. 2011년 12월이었습니다.


그 동안 저는 혼자서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나는 도저히 여유가 없는데, 그리고 생각하기를 20년 전에 55만불로 교회를 살 때에 나는 10%인 5만불을 바쳤고, 그 교회가 150만불에 팔렸으니까 10%인 15만불을 바친 가격이 되었으니, 더 이상 고민하지 말고 조용히 쉬어라 하는 생각으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2011년 12월 첫 안식일에 교회의  건축 헌금에 대한 우리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들으면서 저의 마음은 깊은 영적 감동을 받고 그 동안 생각했던 것을 회개하였습니다.


교회 건축은 영적 믿음을 통하여 지어져야 하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앞으로 주실 것을 믿음으로 실천할 때 물 위를 걷는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음으로 붙잡고 경험하셨던 목사님의 부친께서 서약하시고 난 후부터는 비지니스 하시던 것이 넘치도록 축복받으셨던 경험담을 들으면서, 그리고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데 성도들이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주님께서 나를 통하여 역사하시도록 사랑의 한 그루 나무를 심자는 말씀에, 나는 하나님께 더 충성할 것을 마음 속으로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건축 헌금 서약의 종이가 내 앞으로 왔을 때, 나도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매달 500불씩 3년간 바치기로 서약을 쓰고 왔습니다.


그러나 그날 안식일에 집에 오면서, 운전하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내가 왜 그렇게 서약을 했지? 내가 지금 불가능한 상태인데 어떻게 이루어질까?

(1) 딸들 비지니스에 파트 타임으로 job을 달라고 할까?

(2) 또는 우리 집에 룸메이트 한 사람을 인터넷으로 찾아볼까?

생각하면서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왠 일입니까? 낯선 여자 분이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 분이 어느 친구로부터 우리 집을 소개받고, 그날 당장에 방이 필요하여 이사오겠다고 나를 기다리고 앉아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마음 속으로 하나님께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께서 이렇게 빨리,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즉각 응답해주시는 경험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65:24)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그리고 또 감사한 것은 그분이 우리 집에 와서 발 수술을 하고 외출도 못하고 앉아 있었으므로, 매주 일요일 저녁마다 구역반 김도식 장로님의 지도하에 성경공부도 같이 하고, 그리고 나와 같이 매일 저녁 성경공부도 하고, 또 내가 가지고있던 대쟁투 총서(엘렌지 화잇 저서) 10권 중에서 1권부터  읽어보라고 권하여 6권째 읽으면서 많은 감동을 받고, 그 책을 자기도 사겠다고 하여, 그 책을 새로 사서 선물로 주었습니다.


발수술 후 5개월 만에 걷기 사작하자 우리 교회에 데리고 다니면서 2개월 동안 침례 공부를 하고 진리를 받아들인 후, 2012년 6월 2일 안식일에 손새라 자매님이 우리 김휘명 목사님으로부터 침례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탄생하는 기쁨의 경사가 일어나는 안식일을 맞이하여 온 교우님들의 환영 속에 꽃다발을 받으며 주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손새라 자매님이 육체적으로 꼼짝 못하고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말씀으로 키워주시고, 그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길을 열어주시고, 나에게는 교회 건축 헌금을 낼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두 사람에게 축복의 길로 역사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손길에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고 나의 두 딸 가정에게도 축복받을 준비를 시키기 위하여, 우리 교회 건축을 하는데, 헌금에 참여해달라고 부탁하였더니, 기꺼이 매달 100불씩, 두 딸이 $200씩을 3년 동안 헌금하겠다고, 미리 3개월씩  check를 써주는 모습을 보면서 또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나의 필요를 채워주시기 위해 딸들을 통하여 역사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10 여년 전에 큰 딸이 새 차를 사주었는데 , 이번에는 두 딸들이 또 새 차를 사주었고, 미장원에도 매주 금요일마다 머리를 할 수 있도록 몇년 전부터 해주었기 때문에 안식일마다 머리를 아름답게 꾸미고 교회에 갈 수 있고, 집안 청소도 매달 사람을 보내주고, 정원도 아름답게 관리하도록 도와주고, 하경선 집사님과 텍사스, 시카고, 네쉬빌, 뉴욕, 메릴란드 등, 한 달동안 동부 선교 여행하도록 여행경비를 부담해주고, 다음 달에 필립빈 선교여행비도 부담하겠다는 딸들의 효성스러운 마음 으로 인해 또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딸들 두 가정이 5년 전에 양로원을 경영하고 난 후부터 나(엄마)에 대하여 더 효도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은 노인들 100여명 이상의 자녀들 중에 효성스러운 자녀들을 보면서 감동을 많이 받고 효성스러운 마음이 더 생기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이것도 또 하나님의 은혜로 감사가 넘칩니다.


이렇게 축복을 많이 받은 내가 어떻게 앞으로 더 의미있고 보람된 생애를 사는 방법이 무엇인가 기도하면서 생각하던 중에, 도움이 필요한 곳에 나누어주며 사는 것이라고 예언의 신 책에서 성령님이 나의 마음에 감동을 주어 10여년 전에 마침내 답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실제적 선교사업을 위해 돈을 모아서 사용하는 방법의 생각이 들자, 즉시 한미은행에 가서 매달 270불씩 적금을 들어, 3년 동안 모아서 만불($10,000)을 찾아서 도움이 필요한 곳에 주기 위하여 나의 check에서 직접 돈이 빠져나가도록 만들어놓고 돌아오는 길에 얼마나 나의 마음이 흐뭇하던지요.


그래서 3년 동안 그날을 고대하면서 모아진 적금 $10,000를 어디다 유용하게 쓸 것인가? 기도하면서 2005년도에 은행에 가서 $10,000을 찾아서 즉시 $5,000을 이북의 배고픈 고아들을 위하여 쓰도록 시조사에 보내고, 또 $5,000은 사도 바울처럼 선교하시는 유영길 목사님께 보내고, 집에 오면서 할렐루야!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찬양이 쏟아져나왔습니다.


그리고 또 3년 후인 2008년에도 은행에서 적금 $10,000을 찾아서 선교비용으로 과테말라와 페루에 직접 가서 교회건축을 돕고 선교 활동을 하는 축복을 체험하고, 벵글라데시 대학 건축을 위해 $2,000을 헌금하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또 3년 후인 2011년에도 은행에서 적금 $10,000을 찾아서 도움이 필요한 선교지들과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믿음의 형제자매들, 모두 20곳을 찾아서 $500씩 나누어주는 기쁨을 체험했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저에게 이런 기회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내 생명이 계속 될 때까지 나의 마음의 부흥과 개혁을 계속하며 주님 오실 때까지 도움이 필요한 곳에 나누어주는 기쁨이 계속되도록 기도하면서 실천하기로 계획하고 결심했습니다. 이것은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실천할 것입니다.


(마태 25:32-40)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여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오른쪽에 모든 자들에게 내 아버지께 복받은 자들이여 예비한 나라를 상속하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40 여년 전에 복음을 받아들인 후 하나님의 첫 사랑에 반해서 복음을 전하며 만난 여인이 한숨을 쉬면서 도움을 요청하며 말하기를 한국에 사시는 어머님이 교통사고를 당하셔서 팔 한짝이 떨어져 나가는 형편이 되어 딸에게 돈을 급히 보내달라는 소식을 듣고 나에게 돈을 꾸어달라고 함으로, 나는 지금 당장 돈이 없지만 남편과 의론해서 도와줄 마음이 있으니까 기다리라고 하고, 집에 와서 남편에게 그 사정을 다 이야기하고, 남편이 결혼할 때 선물로 준 다이야몬드 반지를 빼어서 그분에게 치료비로 쓰라고 주었더니, 감사의 눈물을 흘리면서 그 반지를 팔아서 어머님이 병원에서 수술하시고 몇달 후에 고침을 받고 잘 사신다는 소식을 듣고 저와 남편은 보람괸 일로 기쁘고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20여년 전에 한국에서 전도왕으로 활동하시는 하현일 장로님을 우리 샌디에고 교회에서 초청하여 컴퓨터를 통하여 전도하는 방법을 배우는 세미나를 일주일 동안 갖게 되어서 이웃 교회에서 성도님들도 오셔서 같이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저도 $2,000짜리 컴퓨터를 사서 배우면서 1주일간  교육을 받다가 바로 서부 야영회가 있어서 일주일 동안 참석하고 돌아와서 다시 배운 것을 복습할려고 하니까 많이 잊어버려서 우리 교인 중 젊은 김집사님 비지니스 하는 곳으로 찾아가서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집사님은 나와 같이 산 컴퓨터가 보이지 않아서 물어보았더니, 어제 저녁에 상점에서 밤 사이에 도둑을 맞았다고 하면서 지금 형편이 너무 어려운 지경에 컴퓨터를 또 살 수도 없고 고민 중이라는 말을 듣고 나는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잠언 3:27에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라는 말씀을 생각하며 

"이분이 바로 마땅히 받을 자 입니까?" 

"그러니까 바로 너를 이곳으로 보내지 않았니?" 

"그러면 나는 컴퓨터 배우는 것을 포기하라는 말씀입니까?" 

"이 사람은 지금 신학대학을 다니고 있으니까 꼭 필요한 사람이고, 너는 은퇴한 사람이니 포기해도 된다."라는 성령의 음성이 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즉시 컴퓨터 배우던 것을 중지하고, "잠간"하고 그분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바로 꼭 필요한 사람에게 이 컴퓨터를 주라고 나를 이곳으로 보내신 뜻을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하면서, 잘 배워서 전도를 많이 하라고 하면서, 나의 컴퓨터를 기쁜 마음으로 선물로 주겠다니까, 그분이 너무 고마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기쁨과 삶의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분이 나성 삼육대학을 졸업하고 장로가 되어 지금은 한국에 나가서 요양원 목회를 하면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저도 새벽성서학교에서 필요하여 늦게나마 3년 전에 컴퓨터를 다시 사서 조금 배워서 SKYPE에 팀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12년 11월 한달 동안 동부 선교여행을 다닐 때, 동행하던 집사님이 갑자기 전화를 받고는 울고 있기에 사연을 물어보았더니, 친언니가 몇년 전에 암으로 고생하다가 NEWSTART 치료를 받고 암이 다 사라졌는데, 비지니스 하던 것이 완전히 실패하여 빚더미에 앉았으므로, 밤 9시부터 아침 9시까지 밤새도록 김밥을 만들어서 파는 작업에 취직하여 너무 무리하게 쉼없이 스트레스 속에서 일했으므로 암이 다시 재발되고, 이제는 현미쌀 살 돈도 없어서 동생에게 하소연하여 마음이 아파서 울고 있는 동생의 입장이나 언니의 입장을 생각해보니, 또 잠언 3:27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라는 말씀이 나의 마음을 괴롭혀서, 여행 중이지만 가까운 은행을 찾아가서 $1,000을 찾고 보니, 나의 은행 잔고가 겨우 $300 미만이 남게 되어, 몇달 후 4월에는 가옥세롤 수천불을 내야 되고, 돈을 모아야 되는데 하면서도, "우선 쓰고보자" 하면서 도와주었는데, 그때 그때 필요할 때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귀한 방법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지만, 혹시라도 이 간증을 읽고 돈을 쓰는 법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활들이 된다면, 축복의 통로를 통과하는 길이 되겠지요.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혜요, 결코 저의 자랑이 아님을 이해해주시기를 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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