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에서 소망으로--- 1888 미네아폴리스 대총회 대표자들에게 배부된 E. J. 와그너의 기쁜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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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에서 소망으로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 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 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시 40:12). 그러나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깊은데서 하나님에게 부르짖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무한하신 자비로 그 모든 것을 명하여 만드셨으므로 바로 그 깊음 자체까지도 확신을 가지게 하는 근원이 된다. 우리가 죄의 깊음 가운데 있으나 살아있다는 사실은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 상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 심지어는 저주까지도 복음을 전파한다. 왜냐하면 만물이 저주 아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죗됨은 만일 주님을 믿으면 절망의 원인이 되는 대신에 구속의 보증이 된다. 연약한 중에서 강하게 된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하나님은 사람들 가운데 증거없이 버려두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요일 5:10).
저주에서 축복으로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담당하시므로 축복이 우리에게 이르러 오게 하셨다. 그는 지금 저주를 짊어지시고 우리 앞에서와 우리 안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 그와 함께 하는 우리로 하여금 계속적으로 축복의 삶을 살도록 하신다. 그에게는 사망이 우리에게는 생명이 된다. 만일 우리가 주 예수의 죽음을 항상 몸에 짊어진다면 예수의 생명도 우리의 죽을 육체에 나타날 것이다(고후 4:10, 11 참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고후 5:21 참조). 그가 짊어지신 저주를 통하여 우리가 받는 축복은 무엇인가? 그 축복은 죄로부터 구원받는 것이다. 저주는 범법이므로 (갈 3:10 참조) 축복은 우리 개개인이 우리의 죄와 허물에서 돌아서는데 있다. 그리스도께서 저주와 사망의 고통을 받으신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복은 무슨 복인가? 본 서신의 기자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말하고 이와같이 덧붙였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6-8). 그런 다음에 이 축복은 이방인에게 뿐만 아니라 믿는 유대인들에게 임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무할례시에 이 축복을 받고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축복은 죄로부터의 자유하게 되는 것이며 저주는 죄를 행하는 것이다. 저주가 십자가를 드러낼 때에 바로 그 저주가 주님에 의하여 축복으로 선포되게 하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다. 비록 우리가 죄인이기는 하지만 살아있다는 사실은 죄로부터의 구원이 우리의 것이라는 보증이 된다. “목숨이 있고서야 희망도 있다”라고 격언은 말한다. 이 복된 소망을 주신 것을 하나님에게 감사하자. 이 축복이 모든 사람 위에 내렸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 5:18).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엡 1:3)주셨다. 그것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일이다. 어느 사람이 이 축복을 가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이 선물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었거나 혹은 고의로 내던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미 이루어진 일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이 말씀은 곧 죄와 사망에서 구속하셨다는 말씀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시고 이 사업을 이루셨으며 그리하여 우리는 죄짓는 모든 필요성에서 자유스럽게 되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받는다면 죄가 우리를 지배할 수가 없다. 이것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이나 이사야의 시대에도 똑같이 현대 진리였던 것이다. 갈바리에 십자가가 세워지기 700여년 전에 이사야는 하나님의 단에서 취한 핀 숯불로 그 자신의 죄가 정결함을 받으면서 깨달은 것들을 증거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4-6).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하였으니…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사 44:22). 이사야가 있기 오래 전에 다윗은 이렇게 썼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동이 서에서 먼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시 103:10, 12).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왜냐하면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히 4:3)기 때문이다. 우리가 받는 축복은 “아브라함의 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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