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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 치 國恥

                                                           박유동

 

분계선철조망이 남북을 가로질렀는데

가시철망을 감아쥐고 뻗디디며

끝끝내 타고 오르던 풀 덩굴

철조망을 넘어서자 자유를 찾았더냐

팔을 벌리고 바람에 훨훨 휘날리네

꽃송이를 달고 흔들어대네

 

그런데 철조망 밖에 있는 풀 덩굴도

가시철망을 붙잡고 기어올랐는데

그들도 철조망을 넘어서오더니

수양버들처럼 실실이 춤을 추고

꽃은 방실 웃음이 넘치네

아 진정 자유는 남이더냐 북이더냐

 

내가 철조망 꽃가지 부여잡고 보니

남북南北쪽 꽃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었네

누가 자유를 논 하더냐

분단의 긴 세월 원한의 철조망

부끄럽고 세상 망신하는 철조망

꽃잎은 서로서로 덮어 가리고 있구려!!!

                                              (2009년 <한중동포타운신문>160호)

.......................창작 노트...............................................................

                                                    -시 <국치>를 쓰고서

내가 중국 심양 고향집에 돌아 온지도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그동안 찾아보고 만날 분들이 있어 아침에 집을 나가선 저녁 늦게야 돌아오고 몇 번은 천리도 넘는 타현(縣) 타성(省)까지 나갔었지만 시인은 고독하여야지 너무 행복해도 시가 안 나온다더니 노는데 미처도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지 나는 시 하나 못 쓰고 말았다.

장정 실농군이 일을 안 하면 몸살이 난다지만 시인도 시를 못 쓰면 몸이 침울 해 지고 불편하긴 매 한가지인가 싶다.

요즘 들어 나의 이메일에는 많은 문우들의 편지도 보내 왔고 어떤 홈페지 운영자께서는 내가 중국에 온지 어떻게 알았는지 좋은 글 많이 가져 오라는 부탁도 하였다.

나는 회답도 못하는 처지이다. 왜냐면 내가 한국에 반년 간 나가있는 동안 집에서는 나의 낡은 컴퓨터를 없에고 며느리가 자기 새 컴퓨터를 갔다 놨는데 타자건반이 우리 한글 자모가 아니라 영어로 되어있어 가지나 자모 글자를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타자하는 수준이라 통 글조차 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작년 연말에 내가 소속한 세계문인협회 두 문학지에서 새해 1월 30일까지 작품청탁을 하였으니 한 잡지에 3편식이면 두 잡지에 6편은 준비하여야 하므로 나는 시간이 급박하여 컴퓨터건반을 바꿀 동안 기다릴 수도 없고 뭣이던 쓰려고 부득불 원고와 연필을 쥐고 반듯 뒤로 드러누웠다.

내가 게으른 탓에 습관이 되었는지 검퓨터를 사용치 않고 원고지에 글을 쓸 때는 늘 뒤로 벌렁 들어 누워 연필을 치켜든다.

빈 공간에 혼자 편안이 드러누워 창작에 몰두하노라면 정신이 맑고 집중되어 아름다운 상상이 절로 떠오르며 새로운 발견도 곧잘 된다.

만년필이나 볼펜은 거꾸로 쳐들고 쓰면 잉크물이 흘러나오지 않지만 연필은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수시로 적어 넣을 수 있어 좋았다.

내 기억이 확실한지는 몰라도 30여 년 전 내가 심양 동북여사(旅社)에서 연변의 김철 원로시인님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창작할 적에 새벽 일직 일어나서 대야에 물을 떠 놓고 발을 담그고 쓴다하였었다. 나는 그것을 실험 해 보지는 안았어도 시원한 찬물에 발을 담그면 정신이 벌컥 들 것이니 단연 좋은 방법이라 생각 되지만 나처럼 들어 누워 쓰는 게으른 창작방법은 나라는 사람이 그렇다는 의미이지 누구도 따라 배워서는 안 된다고 본다.

왜냐면 누워서는 장문을 쓸 수 없고 또 한손에 종이를 들고 한손에 연필을 공중 쳐들고 쓰다 보니 글 획이 난잡하여 며칠만 지나면 자기 필체라도 알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시 <국치>가 바로 이렇게 쓰여 진 것이다.

이 시는 내가 서울서 강화도로 가면서 한강 하구가 옛날 간첩 침투를 막기 위하여 세워진 군사철조망으로 통행금지 구역이 아직 그대로 묶기여 있는데 철조망에 풀 덩굴이 엉켜 있는 것도 보았지만 고속도로 연로에 설치한 방음벽이나 높은 담장에서도 풀 덩굴이 담벽 안팎에서 기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오를 적에는 몸을 철망에 감거나 담벽에 딱 붙어서 기어오르지만 일단 담을 넘어서 내려 올 때는 손발을 놓고 훨훨 자유 낙하하는 것을 보았었다.

식물도 신경이 있어 올라가는 것과 내려오는 것을 어떻게 아는지 생각을 한다는 신비스러운 발견이라 이것을 시로 쓰려고 작년 12월경에 초고를 메모 해 두었던 것을 오늘 궁핍한 처지에 다시 꺼 내여 수정하고 구성하는 과정에 생뚱같이 시 <국치>가 되었다.

물론 처음에는 식물도 사람처럼 생각을 한다는 신비로움을 취중 하였었다.

그러나 별로 시가 되지 않아 감옥 담장이나 철조망을 탈출하는 장면을 연상하고 남북 38분계선을 탈출하여 자유를 찾는 것으로 끌고 나갔다.

그런데 남북이 어느 쪽이 자유인지 주제가 애매모호하여 결국 자유를 논하기보다 세계에서 유일한 남북 분단국으로 나라의 부끄러움과 망신만 하는 장벽을 덮어 감추려는 의미로 시의 방향을 틀다보니 <국치>란 시가 되었다.

원래는 시 제목을 <원한의 철조망>이라 했다가 다소 미흡하나 시제를 <국치>라고 최종 결정한 샘이다.

시를 다 써 놓고 보니 사소하고 일상 생활시가 아니라 주제가 명확하고 큰 의미가 있어 보인다. 하나의 풀을 보고 민족역사와 국가란 큰 틀의 시를 썼으니 나로서는 상당이 기쁨을 갖게 되었다.

비록 짧은 시 지만 작년 2008년 12월경에 초고를 하고 새해 들어 2009년 1월 말에 와서 완성 했으니 날자 수로는 두 달이지만 햇수로는 이년이 걸쳤으니 나로서는 가장 긴 시간을 두고 쓴 시가 되겠다.

물론 많은 시인들이 자기 작품을 완성하고 감격과 격정에 차서 심지어 꼬박 밤을 밝혔다는 분도 있다는데 나 역시 그런 심정이다.

내가 오늘 자기 시에서 만족하고 기뻐하는 것은 또 다른 원인도 하나 있었다.

내가 고향에 와서 이 한 달 동안 돌아다니며 보고 들은 것도 많으련만 시 하나 못썼거니와 가는 곳마다 버스와 기차에서 내릴 때는 매번 장갑을 잊고 내렸는데 도합 장갑 4 켤레를 잃은 것이다. 한두 번도 아니고 연거푸 네 번식이나 잃었으니 많은 사람들이 내가 늙어 정신이 없어 그런 거라고 <영감 다 됫수다>한다.

싸구려 장갑 4 켤레라야 돈 몇 푼 않지만 내가 이제 늙어 두뇌에 무슨 노화가 생겨 기억이 없고 시도 못 쓰게 되지나 않나 싶어 슬그머니 걱정도 되었었는데 오늘 이만한 시를 썼으니 아직 나의 두뇌가 시를 쓸 수 있다는 자체 검증이 된 샘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내가 한국에 있으면서 추운 엄동에도 장갑을 모르고 살다보니 어언 중 습관이 된 모양이었다.

내가 이런 걱정을 심양지구 몇몇 문인들 모임에서 이야기 했었더니 중국 동포사회에서 명망 높은 이문호시인은 시인은 치매에 걸리지 않는다고 호언하며 위로의 말을 하였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시인이 치매에 걸렸다는 말을 못 들었었다. 언제나 예리한 신경으로 천문지리를 달통하고 우주를 꿰뚫고 있는 시인의 두뇌가 녹이 쓸 리 없는 것 아니겠는가.

시인이 늙어 죽을 때 까지 시를 쓴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겠다.

                                                                                                            2009년1월 24일 심양에서 박유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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