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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지탱의 영수증은 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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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시골을 만들었고 인간은 도회를 건설했다.

공용만한 박테리아가 도시를 점령하고

우울증 같은 공룡의 날개가 우주를 날아 오존층을 무너트리고 있다.

도회의 발달과 모더니즘의 근간이 현대종교의 대략이다.

전통신앙인들의 고발 포즈가

과거의 휘망을 이행하기 위해 시대를 반추한다.

생활주변의 모든 업무를 컴퓨터로 처리하고

빌을 보내는 일이며,

쇼핑을 하는 일이며,

심지어 은행에 입금하는 일까지도 컴퓨터에 의존한다.

이런 현대적 문명을 추구하다가 소금기둥이 될 판이다.

우리가 하늘로 귀화하는 그날

우리는 분명히 컴퓨터를 버리고 시골로 향할 것이다.

누군가가 하늘에도 똥을 누느냐 묻는다면 나는 명백하게 대답할 것이다.

 

“응”

 

뒷간에서 응가를 할때의 응이아니다. 

긍적적인 대답으로서의 응이다.

위에 동그라미와 아래의 동구라미가 하나가되는 하늘에는

하늘도 땅도 하늘이다.

단연 <응>이다.

주검의 위기를 여러 번 거닐며

직장암으로 대소변을 인공으로 걸러냈던 그에게

나는 한편의 시를 건네주었다.

 

시; 똥은 잘 누능감유

강위덕

 

수술대 위에 누워 전신마취 당했던 한 여자를 알고 있다 일레오스토미(ileostomy) 장착으로 인공 항문을 사용하던 오랜 기간동안 어둠 속을 번쩍이며 내려왔을 구근의 암 뿌리들, 그 뿌리를 움켜쥐고 어둠을 훌쩍 뛰어 넘을 때, 용천혈*의 대침 같은 거대한 유전인자가 바코드(Barcode)에 찍혔고 위험의 독 안으로 잠입한 창조자는 오늘까지의 기적과 기적 사이의 고리를 바쁘게 연결하고 있었다 영원히 폐쇄될 뻔 했던 항문! 복벽 개구부(腹壁開口部)를 봉쇄하고 천여 개의 항문 괄약근이 일제히 작동하던 날 그 여자는 한없이 울었다 “똥은 잘 누능감유” “오늘 두 번 똥을 눴슈 똥을 눈다는 게 이렇게 좋은 건줄 예전에 미쳐 몰랐씨유” 똥을 누면서 생각하면 슬픈 운명의 원형이 몸에서 움직인다 씨잘 것 없이 생각했던 삶의 찌꺼기들, 널브러진 생각, 헛됨과 고뇌의 잔해가 앙상한 침묵 위에 무겁게 쌓이고, 그는 지금 항문으로 체온을 재고 있다 그의 체온은 일생 중 가장 붉다 그건 차라리 감격의 울음 온도이다

 

 

* 용천혈이란 생명의 기운이 솟구치는 곳으로서 가운데 발가락에서 뒤꿈치 쪽으로 3분의 1 쯤 내려간 움푹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용천혈은 생기가 떨어진 사람을 기사회생 시킬 때 침을 놓는 곳이다. 죽은 송장도 이곳에 대침을 박으면 발가락이 꿈틀거린다는 유명 혈이다.

그는 암으로 위장을 잘라낸지 20년,

전위가 아닌 또 다른 직장암으로 두 번째 수술을 받았다.

그 후  7년이 된 지금까지도

눈물의 체온기로 몸의 온도를 축정하며 힘차게 살아가고 있다.

오늘 나의 관심은 똥이다.

똥은 더러운 것의 대명사이다.

용변 후 손을 깨끗이 씻으라는 것을 보아도 그렇다.

값의 폭락을 의미할 때도 똥값이라고 말하고

망신당할 일이 있을 때에는 얼굴에 똥칠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좋은 이미지도 있다.

똥 꿈을 꾸면 길몽이라고 화자 하며

그럴 때면 은근히 행운을 꿈꾸며 복권을 사기도 한다.

이처럼 똥이 저간의 압도능력을 표현하려할 때

똥을 언급하는 것은

똥이 지닌 힘 때문이다.

옛날 사람들은 똥집으로 산다는 말을 하는 반면

요사이 의사들은 의례히 똥은 잘 누느냐고 묻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일찍이 발명한 <카타르시스>는

만고불변의 진리임을 절감하게한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똥을 너무도 깨끗하게 소문없이 처리하는 수세식 변기로 인해

똥과 관련된 이미지들이 살아질 판이다.

한편 생각하면 <숨>과 <똥>의 관계적 의미는

생명의 지엄함을 일깨워준다.

이미지의 유기적인 연결이 미흡하지만

똥에 대한 접근은 신선한 것이다.

똥이 있는 곳에는 생명이 있다.

입으로 음식이 들어가 계명이 요구하는 모든 조건을 수렴하여

소화를 잘 시켰다는 증거로 똥이 있고

똥으로 인해 생명의 연장을 보장받는다.

똥 눌 힘이 없어지면 생명이 끊어진다.

똥의 의미는 내 몸의 오장육부가 율법의 요구를 잘 소화시켰다는 영수증이다. 

어찌 보면 좋은 신앙심은 좋은 똥이다.

더 좋은 배설물은 더 좋은 창작의 밑거름이 되고

독자의 배설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우리의 몸은 성전임으로

몸속의 오장육부는 율법이다.

계명은 인간으로서는 어려워서 지킬 수 없다고 누군가 말한다면

아침에 먹은 음식을 인간의 힘으로는 소화시킬 수 없다는 말과 상관된다.

음식을 먹은 후 먹은 음식들을 소화시키기 위해

별개의 시간을 할례하지 않는다.

소화가 되는 동안 일도하고 잠도 잔다.

율법의 요구를 행하는 것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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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만선님의 댓글

no_profile 한만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참 재미있고 뜻깊은 글을 읽었습니다.  
 더러운 똥을 통하여 많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좋은 똥은 좋은 신앙심 같기도 하다는 말씀ㅡㅡㅡㅡ 그렇네요.
장로님의 글은 저같은 사람에겐 어렵고 난해한데
이 똥 예찬의 글은 이해하기가 낫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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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덕님의 댓글

no_profile 강위덕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푸른 별이 가진 뜨거움만이 시가되는 것이 아니였습니다.
무당 신 내리듯
나의 사랑하는 하나님으로부터 물려 받은 예술의 추상미가
밖으로 분출했다면, 
똥을 소재로 창작을 감행했을  땐
아예 똥을
내면으로 꿀꺽 집어 삼켰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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