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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두 갈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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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막길

성경은 아브라함의 심정을 한마디도 말하지는 않지만
백세에 얻은 약속의 아들을 데리고 이제 더 이상은 약속이 아닌것처럼 느껴지는 모리아산이라는 장소로
아들을 제사로 드리기 위해 가는 사흘길에서 아버지 아브라함이 느끼는 감정적 처절함이
심리적으로 옮길 수 있다면 어떻했을까를 간혹식 생각하게 됩니다.
마지막엔 나뭇단을 지고 오르는 아들을 보며 가파르게 올라갈때는
그의 마음이 얼마나 가파른 고뇌의 오르막길을 갔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그 후손들이 이제는 조상의 고향이었던 갈대아가 아닌 애급이라는 무신론의 나라에서
사백년 만에 나타나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출애급을 할 때에 출애급의 목적이
단순히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성경에서 읽을 수 있읍니다.
출애급기 5장에는

"그들이 이르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라고 하였듯이 출애급의 진정한 목적은 사흘길의 제사였읍니다.
그 사흘길의 제사를 드리지 못한 사십년의 어느날 가나안으로 건너가기전에 모세가 표상적으로 세운 구리뱀의 장대가 그 사흘길의 제사였음을
우리는 성경 전체를 통해서 가늠해 볼 수 있읍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 보여 줄것이 없다고 하신이가
요나가 밤낮 사흘을 고래 뱃속에 있었던 것처럼 인자도 사흘길의 어둠속에 지내실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일이 벌어지기전에 에수님은 특별히 사랑하는 제자 셋을 데리고 소위
변화산이라는 산 꼭대기에 머무릅니다.
거기에 나타난 엘리야와 모세가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다가 사라진 후에 모세와 엘리야가 사라지고
오직 예수만 남았는데
'이 사람은 내가 택한 내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는 음성을 하늘로 부터 듣습니다.
그들의 대화의 내용은
"장차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돌아가시게 될 것을 말한" 것이었읍니다.
모리아 산으로 가기 위해서 세운 독자 이삭처럼 갈바리 산으로 가기 위해서 택한 내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갈바리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는 산에 세운 새로운 성전이 되셨읍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다시 세우리라는 예언의 성취입니다.

어찌보면 이스라엘이 애급에서 나온 시기로 부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시간이 엄청난 시간의 흐름이었지만
그것이 사흘길이었다는 의미도 됩니다.

사흘의 오르막길인 그 산으로 올라간 이들이 모세와 엘리야와 또 이삭도 있었지만 그들은 십자가에 달릴 수 없는 존재들이었읍니다.
흙에서 나온 자들이요 또 범죄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121편은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인데 시편 기자는 이렇게 소리칩니다.
"내가 눈을 들어 산을 바라보리라. 나의 도움어디서 오는가?"

사흘길의 오르막의 정상인 그 산이란  우리가 눈을 들어 도움을 바라는 성전입니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산이라는 단어는 때로는 성전하고 같은 의미로 쓰여 졌읍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저 산에서도 말고라는 말은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말고 또 사마리아의 성전에서도 말고 라는 의미입니다.
신령과 진정이라는 단어를 다시 번역하면 성령과 진리가 됩니다.
오직 성령과 진리로 오신 분 만이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십니다.

산위에 세운 등대라는 말입니다.
산의 뿌리 까지 가서도 거기서 성전을 보았고 구원은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다고 고백하는 요나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사흘길의 오르막길은 우리 모두가 함께 가야 할 산이지만 우리는 거기서 피를 흘릴수가 없읍니다.
다만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흘길의 오르막길은 성경을 통해서 또 자연을 통해서 거기 십자가에 달리시는 예수를 만나는 과정입니다.
우린 아직도 옛성전인 교회의 울타리같은 교리를 위해서 이 산을 오르는 일이 있읍니까?
사흘길의 이 제사를 보고 듣고 알지 못하면 교회는 없읍니다.
십자가는 사흘길의 오르막길에 세운 하나님의 새 성전입니다.



내리막길

예수님이 엘리야와 모세가 함께하는 그 변화산의 풍경이 얼마나 좋았던지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지어 함게 살자고 간청합니다.
우리의 구세주가 하늘에서 내려온 단 한분이시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우린
언제나 초막 셋을 짓고 싶어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됩니다.
십자가라는 진리의 핵심을 두고 표상적이던지 아니면 예언이던지 성경의 한 인물로서 연기를 하거나
예언자들로서 미리 말할 수는 있어도 정작 죽임을 당하고 피를 흘려서 구속의 열매를 맺지는 못하는
존재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만이 오직 십자가의 주인이 되십니다.
그것이 새 성전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선생님과 함께 엘리야와 모세로 더불어 상주하고 거주하기를 원하는 베드로의 기도는
들어 주지 못하는 기도였읍니다.
바로 그 산 아래에 귀신들린 자와 나머지 제자들이 씨름하는 세상이 펼쳐져 있고 십자가는 이제
그런 곳으로 흘러야 할 치료와 구원의 강이 된 것입니다.

부대안에서 선임병들이 졸병들에게 하는 못난 짓들이 군기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기합을 주는 것인데

한 선임 하사관이 술을 먹고 병영에 들어오면 어김없이 부대원들을 깨워서 집합을 시켜놓고는
자전거의 페달을 밟는 이상한 기합을 실시하곤 했읍니다.
그날도 거나하게 술에 취한 선임하사가 모두를 집합시키고는 침상에 거꾸로 눕게 한 후에 자전거 페달을 밟게 하는
기합을 실시하고 있었읍니다. 처음엔 시속 오마일로 허공을 젓게 하다가 오마일씩 올려서 점점 빨리 가속을 내도록 하고 있는데
시속 육십마일에 이르러 한 졸병이 그만 페달을 밟지 않는 것입니다. 화가난 선임하사가 졸병의 이름을 부르며 왜 움직이지
않느냐고 물었읍니다.  졸병이 심각하게 입을 열어 하는 말이 " 선임 하사님! 지금 제 자전거는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려가고 있읍니다"
라고 하는 것이었읍니다. 그 순간 선임하사가 술에서 깨어 났읍니다. 지금껏 어느 누구도 내리막길로 내려가는 자전거를 타지
않고 오직 오르막길을 낑낑대며 올라 가기만 했는데 그 졸병 때문에 선임하사는 내리막길도 있다는 것을 그날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힌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오르막길에 있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내리막길의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의 이름이나 노력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자들입니다.

자신들의 노력으로 구원을 받고 또
십자가를 보좌한다는 의식으로 이상한 방향을 만드는 자들은 오르막의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이 지키지도 못할것을 지키게 하는 자들은 연자 맷들을 목에 매어야 할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품성변화도 오르막 길에서 이룬것은 품성도 아닙니다.
분명 자신이 이룬 성품일 것입니다.
내리막길에는 넓으러져 있는 상한 영혼들이 있읍니다.
사마리아로 내려가는 길에는 상처받은 영혼들이 누워 있읍니다.

그것을 돕는일이 내리막길의 품성입니다.

왜 힘들게 아직도 올라 가려고 하십니까?

옆자리에 자리잡은 교인(이웃)에게 눈길 한번 제대로 주지 않으면서
십사만 사천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일이 정말 우습습니다.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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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경님의 댓글

no_profile 장도경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오늘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이야기 하고 싶었던 속마음이 있읍니다.
우리 재림교회는 아직도 오르막을 오르고 있는 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오르막은 사람의 길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길입니다.
성도의 길이란 내리막의 길입니다
은혜로 구원받은 자의 길입니다.
값없이 용서받은 자의 길입니다.
그 은혜와 값없음을 기스내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길은 그분이 세운 산위의 성전에서 그분을 만나고
이제는 오직 사마리아로 내려가는 길 뿐입니다.
그분을 만나기 위하여 오르는 자들은 반드시
내려가야 합니다.
교회안에는
각자가 처한곳에서 내려가야 할 길이 너무나 많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가장 필요한 곳입니다


성경공부란 우리가 어떤 무리인가를 확인하는 과정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한가를 구체적으로 배우는 것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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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효명님의 댓글

no_profile 여효명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안식으로 가는 은혜의 길을 잘 조명해주신 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전히 배우면서도 내 향방을 알지못하는 이사람의 무죄는
주님이, 실패한 시몬에게 자신의 길을 선물하신 주님의 열심때문이네요
 
종의 계단으로 내려서길 원하나
우매를 보지 못하는 안질 또한 그분의 몫이네요
다만 당신이 보는 정직을 구할 따름입니다
그것만이
올라가며 벗은 옷을 다시 입지않고
떠미는 당신의 임재를 누리는 下山이 될 터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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