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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망에서 생명으로 - 박옥종

 

       40여 년 전 나는 부은암(父恩庵)에서 휴양한 적이 있다. 병약햔 몸과 심한 우울증에 시달려 사물을 명확하게 판단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짙은 안개 속에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한 달 동안 그곳에 있는 동안  거의 매일 마당바위에 올라가 그 아래 깊은 계곡을 내려다보며 안개가 자욱한 신비스럽도록 깨끗하고 조용한 환경 속에서 새 소리를 들으며 지났다. 때는 5월에서 6월에 걸친 찔레꽃 향기가 그윽하게 풍겨오고 산딸기가 익어가고 꾀꼬리가 노래하는 계절이었다.


       어느 날 이른 아침,나는 마당바위에서 내가 읽은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떠올리며 불교와 기독교를 대조하며 깊이 명상하였다. 나는 아직 기독교인이 아니었지만 반야심경을 통하여 불도(佛道)는 자신이 수양하여 득도하는 길이고 기독교는 스스로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깊디 깊은 계곡을 내려다보며 나는 생각하였다.


만일 내가 저런 현애(낭떠러지)에서 떨어졌다면 과연 내 힘으로 올라올 수 있을까? 내가 불도를 따른다면? 기독교를 믿는다면?’


       나는 내 자신의 처지가 천애 낭떠러지에 떨어져 있는 줄 알고 있었기에 자력으로는 생명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구원의 밧줄을 내려주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리며 자신의 마음에 깊이 사무치고 있는 한(恨)을 풀어야 함을 깨달았다.


       하나님의 사랑이 조수처럼 내 마음에 밀려들어와 나의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 찼다. 나에게 아픔을 준 그 송곳 같던 말들이 남긴 상처가 내 가슴에서 제거되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 사랑 앞에 굴복하고 그 사랑을 배우기 시작했다. 마치 찔레꽃이 그 순백의 꽃잎을 그 향기와 함께 선사하며 미련없이 지는 것처럼 자아가 죽는 순결한 생애를 사는 입문의 과정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바로 생명길, 곧 인류를 위하여 희생제물이 되신 분이 가신 자아희생의 생애 들어가는 길임을 배우는 초보의 걸음이었다.


***그 영광의 빛 속으로!!!-6.25로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불치병과 가난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구세주를 만난 여인의 파란만장한 삶의 이야기(박옥종 Lilian Chung)***


*아래에 있는 1부, 2부, 3부, 4부, 5부를 클릭하시면 계속되는 흥미진진하고 교훈적인 유익한 스토리를 읽으실 수 있습니다.


18 그 영광의 빛속으로 제 5부 감사의 노래 - 박옥종 정무흠2013.10.1140
17 그 영광의 빛속으로 제 4부 침례! 새출발! 인생역전! - 박옥종 정무흠2013.10.1131
16 그 영광의 빛 속으로! 제 3부 한국 동란! 고난의 세월! 가난 속에 핀 꽃! 박옥종(Lilian Chung) 정무흠2013.10.1135
15 그 영광의 빛 속으로!!! 제 2부 행복한 결혼! 해방! 아들, 딸의 출생! 박옥종(Lilian Chung) 정무흠2013.10.1135
14 그 영광의 빛 속으로 제 1부 출생과 배경 - 박옥종 update정무흠2013.10.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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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진하

    2013.10.19 13:55



  • 정무흠 목사님.

    제가 오늘은 우리 아이들이 일찍 함께 잠을 자자고 조르는 바람에 저녁 9시 반쯤 잠자리에 들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새벽 1시쯤 잠에서 깨어

    정목사님이 올려 놓으신

    어머님의 자서전같은 글들을 4시간여 읽었습니다.

     

    구구절절.... 진심과 정직, 하늘을 향한 끊임없는 믿음,

    윗 어르신들에 대한 예의와 자녀들에 대한 지극함,

    하나님과 사람 앞에 언제나 반듯하게 살아 오신

    어머님의 삶이 저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최근 들어 이렇게 오랜 시간을 남의 글들을 읽은 적이 없었는데

    정말 정목사님의 어머님의 글은

    결코 중간에 멈출 수 없는 진지함과 더불어 흥미를 갖게하는

    놀라운 힘이 있었습니다.

     

    훗날,

    하늘에서 정목사님의 어머님을 뵈올 것을 생각하며

    이 새벽 어머님을 사랑하시고

    정목사님의 가족들을 사랑하신

    그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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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무흠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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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딸아! 내가 여기 있노라!!! 2008.03.11 23:07
정무흠 조회 수:9341 추천:58 

    

나는 가장 연약한 사람이었다
 몸도 마음도 불면 날아갈 듯
 이 세상에서 살기에 지쳐 쓰러져가는 인생이었다

 가장 연약하고 가장 못난
 이 인생을 불쌍히 여기사
 주님께서 이끌어 내셨다

 천애 낭떠러지 밑에서
 구원자만 애타게 기다릴 때
 절망은 가슴을 짓눌렀었나니

 오 주여, 희미한 빛조차 없던
 그 캄캄한 밤
 신음하며 오열하던 그 슬픔의 날들

 누구에겐지도 모르게 내 팔을 뻗고
 떨리는 손끝으로 더듬었을 때
 불쌍한 딸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인자한 그 음성이 음악처럼 들렸네
 너는 이 밧줄을 꼭 잡아라.
한줄기 생명의 빛과 함께 내려진 밧줄

 매달리며
 매달리며
 나는 흐느껴 울었노라.

 (박옥종 著, 영원을 걸으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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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일보 시카고 기사! "끝없는 감사와 찬양의 삶" "시선 [영원을 걸으며] 펴낸 박옥종 여사]"
"[청상의 망부석] 40년의 한과 고통 2백편의 신앙시로 승화시킨 역작"



25살의 아름다운 나이에 6.25 사변으로 남편이 행방불명, 40년간 [청상의 망부석]이 된 박옥종 여사(69세)가 최근 [영원을 걸으며]란 시선을 펴내고 기뻐하고 있다.


[시조사]에서 발간된 동 시선에는 [엔학고래], [소망의 별], [나의 기도]등 험한 인생의 여정 속에서도 구원의 밧줄을 놓지 않고 기쁨과 탄원, 슬픔과 고통을 줄줄이 꿰어 하나님께 바친 2백편의 주옥같은 글들이 3백여 페이지에 가득 차 있다.


시카고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 담임 정무흠 목사의 어머니인 박옥종 여사는 경남여고 출신으로 대구 청구대 국문과에서 수학했으며 1991년 레익 미쉬간칼리지에서, 도 삼육대 신학과에서도 공부의 근을 놓지 않고 배움의 집념을 불태우며 수많은 시들을 써왔다가 이번에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경북고교 출신의 남편을 맞아 모든이의 선망의 대상이 된 행복한 결혼생활이 전쟁으로 7년만에 끝이 나고 온실속의 꽃이 냉혹한 바깥 땅에 내동댕이 쳐진듯 밤마다 단말마의 고통에 시달리다가 [복잡다기 요급심장치료]라는 진단을 받게된 어느날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이 가슴을 비수로라도 열어봤으면"하고 몸부림쳤다는 박옥종 여사.


그러나 부처도, 육신의 부모도 살려줄 수 없었던 생명의 외경 앞에서 빈사의 상태에서 드린 기도와 탄원이 하나님께 상달되어 오늘의 행복한 삶을 얻게 되었다는 것.


"가랑잎 굴러가는 소리에도 사랑하는 남편의 발자국 소리인가 방문을 여시고 한밤중에라도 아버지가 오시면 즉시 문을 여러드려야 된다시며 옷입은채로 주무시던 어머니, 아침 식사 때면 제일 먼저 밥그릇 떠서 아랫목에 묻어두시던 너머님이, 요즘은 자식들과 손자, 손녀, 외손자들까지 다 믿음안에서 공부 잘하고 건강해서 무척이나 행복하시다"고 정무흠 목사는 말한다.


"이제는 남편 잃고 잠안오는 밤의 말할 수 없는 번뇌를 쏟아놓는 글을 쓰지 않고 나의 생명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께 끝없는 감사의 찬양의 글을 바치며 이 넘치는 은혜를 이웃에게 나누고자 살아가고 있다"고 박여사는 최근의 심경을 고백하고 있다.


"안된다. 죽어서는 안된다. 너는 두 어린 생명의 너머니가 아닌가. 네가 죽으면 두 아이는 고아가 될 것이다..."


그 고통스런 죽음의 순간에 어른거렸던 한살짜리와 세살짜리 아이들이 커서 어엿한 정신과 의사 출신의 목사가 되었고, 한국의 미 공군 병원 부원장 김영섭 장로의 부인도 되었다.


시집출판 못지 않은 인생의 또다른 역작이 된 것이다.


또한 손자, 외손자까지도 로마린다 의대에 진학, 학교 부근에서 그 핏줄들을 돌보며 남북통일의 소원을 품고 [도르가]와 같이 어려운 이들을 구제하며 성경대로 실천하려 애쓰는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다.


"나 낙심되어 주저앉았을 때
내 귀에 안위의 말씀을 주셨으며

슬픔에 싸인 내게
주의 사랑으로 가득 채우셨기에



아아 주님,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내 곁을 떠나가도 
주는 영영 나와 함께 하시리니...."



시집의 제목처럼 [영원을 걸으며] 함께 동행하실 이가 있는 행복한 그 길을 박옥종 여사는 이제, 기쁨에 겨워 편편의 자작시로 남기면서 살아가고 있다.


배미순 기자 (한국 일보 시카고 1993.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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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무흠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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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LA 기사 - "시집 [영원을 걸으며] 발간한 69세 박옥종 여사"
"청소년 위한 작품 쓰고싶어" "인생의 희비, 신앙심 섬세히 그린
30여년 틈틈이 쓴 2백여편 수록"

"꿈인양 녹의 떨쳐
소리 없는 환호 속에 
태양은 부신 깃발
태고와 의연하다
무수한 깃발 너와 나
바람으로 얻어진 날

한풍 매선 채찍
남은 날 헤어가며
언젠가 꿈은 진정 이루리 믿던 마음
오늘사 성의 떨치고 햇님 맞아 웃으리

갈라디아서 5장 5절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이 글은 칠순을 바라보며 그동안 겪어온 인생의 희비와 깊은 신앙심을 결집시켜 책으로 펴낸 박옥종 여사의 시집 [영원을 걸으며]에 수록된 [녹의]라는 시조다.

1959년부터 1991년까지 틈틈이 눈앞에 떠오르는 시상을 노트에 적어놓았던 글중 2백여편을 골라 시집을 발간한 박여사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의 건강과 여유, 그리고 섬세한 표현력을 보여주고 있다.

1924년 경북 영천 태생인 박여사는 20세 되던 해에 결혼하고 남매를 얻었으나 6.25때 석탄공사에 근무하던 남편을 잃는 슬픔을 맛보아야 했다.

생사조차 알 수 없는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은 박여사의 글중에도 자주 나타나고 있으며, 때문에 [통일]을 염원하는 한국현대사의 비극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후 자녀들을 고아로 만들 수 없다는 일념으로 일제때 획득했던 교사자격증을 이용, 남천국민학교 등에서 잠시 교단에 서기도 했던 박여사는 [만성신장염]으로 인해 더욱 어렵고 힘든 생활을 살아야만 했다.

그러나 험한 인생의 격동 속에서도 남다른 향학열을 불태우기도 했던 박여사는 37세 때 대구 청구대학 국문과에서 공부하기도 했으며, 1979년 도미이후 1991년에는 레이크 미쉬간 칼리지에서 수학할 정도였다.

신문 및 잡지등에 자신의 작품을 싣기도 했는데 서두에 쓰여진 시조 [녹의]는 가람 이병기 선생의 추천으로 [여원]지에 실렸던 작품이다.
박옥종 여사가 쓴 글은 6.25의 생생한 기록이 담긴 2천5백매에 달하는 장편소설을 비롯해 큰 상자에 넘칠만큼 많은 양이 있었으나 미국으로 이주하는 준비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태워버렸다고 하면서 "나의 글이 불속에서 사라질 때마다 아깝고 안타까와 쳐다볼 수가 없었지요"라고 회고했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하고픈 일이 많다는 박여사는 새벽 4시에 일어나 기도와 함께 산책을 즐기고 대부분의 시간을 독서에 할애하고 있다.

김소월, 이광수의 작품을 좋아하고 도산 안창호선생을 가장 존경한다는 박여사는 "요즘은 내가 영어를 잘 했으면 참 좋을 텐데"라는 아쉬움과 함께 한인 청소년들을 위한 글을 쓰고 싶다고 말한다.

시집을 발간한 후 변화에 대해 박여사는 독자들에게서 호평의 전화가 걸려오고 때로는 직접 만나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며 독자들이 좋아하는 모습에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황성락 기자 - 한국 일보 LA 1993.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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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무흠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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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옥종 여사의 시집 출간을 기리며 - 신계훈 목사 (삼육대학교 총장, 한국 연합회장)


그 숱한 민족의 비극이 시작되던 그 해 6월 25일, 그 길고 지루했던 여름, 가녀린 망부석 하나가 외로운 모습을 다듬고 있었다. 속히 다녀 오리라던 출장길을 따라 흔연히 상경한 부군은 전쟁 길에 막혀 끝내 돌아오지 않았으며, 애달프게 기다리던 이십대 후반의 아직도 젊은 여인은 그대로 청상의 망부석이 되어 고달픈 삶의 뒤안길에서 외로운 풍화를 시작했다. 박옥종 여사이시다.


겨우 세 살과 한 돐을 맞는 아들 딸 아기 둘을 둘러업고 품에 안으며, 손목을 이끌고 면면이 이어온 고달픈 생존의 날들은 참으로 더디 흘렀다. 언제나 초롱초롱한 두 어린 자식의 눈망울을 바라보며 살아야 할 까닭을 찾은 여사는 생존을 위해 떳떳한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어설픈 기름 장사, 힘 겨운 보따리 장사, 명문의 고등교육을 받은 덕분에 그래도 가능했던 가정교사, 국민학교와중학교 교사 등 열 서너가지도 더 되는 일감을 찾아 몸부림치듯 살아온 십 수년이 더디기는 했지만 천천히 흘러갔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고달픈 삶의 여로를 외롭고 힘겹게 달리던 여사는 마침내 기진하여 쓰러졌으며, 이내 짙은 흑암이 시야를 가려버렸다. 바로 그 때 비쳐 온 한 줄기 빛, 그리고 잇달아 내려 온 한 가닥의 밧줄, 여사는 혼신의 힘을 다 해 그것을 붙잡았다. 끝내 돌아오지 않는 부군을 기다리다 두 자식과 함께 인생의 여로에 지쳐 쓰러진 가련한 여인에게 뻗쳐 온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었다. 행여 놓칠새라 그 손길을 붙잡은 여사는 더 이상 풍화로 낡아져가는 한낱 외로운 망부석이 아니었다. 이제 여사는 마침내 돌아오실 몸과 맘의 영원한 하늘의 님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리는 만년 소녀가 되신 채 어느덧 고희를 눈 앞에 두고 계시다.


지나간 40여년 홀로 걸으신 여사의 인생 여로가 이제 익을대로 익은 포도송이처럼 맺혀 알알이 그 모습을 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그것이 이번에 출간된 여사의 시집, "영원을 걸으며"의 전모이다. 아무도 함께 하는 이 없이 홀로 애쓰며 맺히신 고독한 열매를 모두가 함께 맛보게 되었으니 참으로 감격스럽다. 여사의 시 망부석과 사군가에 수놓인 망부의 애상, 유한과 고신적적에 스며진 청상의 고독, 애모곡에 넘치는 절절한 모정, 사자모에 드러난 애틋한 효심....


서정이 넘치고 잔 정이 많으신 여사는 천생의 가냘픈 시인이시다. 무엇보다도 삶의 온갖 탄원을 기도로 배태하여 시의 옷을 입혀 출산시킨 진솔한 기도의 시집을 가지게 되어 참으로 대행스럽다.


그러나 이번 시집이 여사의 모든 작품이 아니다. 또 다른 두 작품이 벌써 세상에 빛을 보였다. 여사의 인생 역작인 아들과 따님이다. 서울 가신 아빠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철부지 세살짜리 아들 무흠은 그후 의대를 나와 어엿한 의사가 되어 국내외에서 자선을 계속하다가, 어머니의 바램을 자신의 소원과 아울러 마침내 목양자의 길에 들어서 지금은 미국에서 안수받은 중견 목사로 애오라지 목자의 길을 걷고 있다. 참으로 갸륵한 일이요 장한 아들이다. 그리고 그 때 한 돐이었던 포대기 속의 딸 귀주는 대학을 나온 후 선교와 봉사로 이름난 의사의 아내로 미국에 살고 있다. 언제나 어머니의 마음을 뿌듯하게 하는 그 어머니의 그 따님처럼 살고 있다. 슬하에 두신 될성부른 손자 다섯과 손녀 하나는 여사가 신명을 다 해 쓰신 인생 시집을 영원히 빛내주는 편편의 자작시들인 것이다.


1979년 도미하신 이래 자녀들과 함께 사시며 기도를 호흡으로, 말씀을 음식으로 삼고 사시는 여사는, 이제 잠시 후 그 모습을 드러내실 영원한 하늘의 님을 오늘도 애타게 기다리시는 불퇴전의 영원한 망부석으로 우뚝 서 계시다. 


오상고절 박옥종 집사님의 여생에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이 가득하시기를 진심으로 기도드리고 싶어져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뫃는다. 나의 어머님을 위해서처럼...


1992년 12월 12일 


서울의 교외 청학리 산 기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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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무흠님의 댓글

no_profile 정무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박옥종 집사님 조의 표하면서 조시 "우리들의 숲에"
김명호http://www.kasda.com/?document_srl=3020362009.09.15 13:05:45
우리들의 숲에


 


김 명호

 

우리들의 숲에는

거목도 있고

막 자라 오르는

새 나무들도 있다.

 

때가 되면

조용히

삭으라드는

거목들

 

거목의 그늘에서

튼실하게 자라난

새 나무들이

삭아서 없어진

거목의 빈자리를 채운다.

 

아직은 아쉽지만

세월의 훈련을 따라

머지않아

듬직한 거목으로 설 것이다.

 

이어가는 이치를

터득한 거목들이기에

때가 되면

조용히 자리를 비운다.

 

오늘

숲 한쪽 비탈에

없는 듯 서 있으며

모진 풍상 막아서

새 나무들 가꾸어 온

고고한 거목 하나

조용히 자리를 비우고

 

오열을 소망으로 대신하는

새로 자란 나무들이

우리들의 숲 그 빈자리

말없이 메우려고

하늘을 우러러

마음의 눈을 뜨고 있다.

 

2009년 9월 15일

박옥종 집사님 부음을 듣고

김명호 삼가 조의를 표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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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무흠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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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옥종 집사님을 추모하며


결혼하고 남편을 통해 우리 가정의 은인 같은 분이라고 자주 들어오던 분, 멀리 미국에 계셔서 자주 뵙진 못하고 막연하게 그 고매한  인격을 존경하기만 하던 집사님을 남편이 학위를 위해 앤드류스에 잠깐씩 두 번 머무는 동안 가까이서 뵐 수 있었고 그분의 아름다운  삶의 향기를 직접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제게 큰 특권이었습니다.
 
특히 두 번째 체류 기간동안{2006년 2월-2007년 8월} 집사님의 원고를 영어로 옮기는 초벌 작업을 도우며('할머니의 마음은  거문고' The Heart of Grandma is Harp, '그 영광의 빛 속으로' Into the Glorious  Light) 집사님의 삶을 더 가까이서 나눌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귀한 경험이었고 축복이었습니다.
 
' 어쩌면 이다지도 마음이 순수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렇게 정직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예수님을 향한 믿음과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이렇게 열렬할 수 있을까' 한 문장 한 문장 서투른 영어로 글을 번역하며 집사님의 거울같이 맑은 영혼의 모습에 감탄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집사님의 글을 통해 제 삶을 돌아보며 반성하게 되었고 어느덧 집사님의 아름다운 품성을 닮고자 애쓰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사소한 일들에 때로 얼버무림으로 거짓을 말하고 싶을 때 집사님의 엄격한 정직의 모습이 떠올라 그 유혹을 물리치곤 합니다.
 
남의 어려운 형편을 자신의 일처럼 마음아파하고 그 일이 해결될 때까지 기도로 물심양면으로 돕는 모습에 제 자신의 이기적인 모습을 뉘우치곤 합니다.
 
자투리 천 조각 하나라도 버리지 않으시고 재활용하시며 알뜰하신 분이 남을 돕는 일에는 가장 크게 손을 펴는 집사님의 모습에 진정한 이웃사랑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사실 집사님이 쓰신 위 두 편의 책에는 저의 잊지 못할 기도 응답의 사연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2006년 2월 저희 가족은 남편의  박사학위 논문을 마치기 위해 모두가 앤드류스로 갔습니다. 당시 남편은 1년 먼저 앤드류스로 가서 논문을 쓰고 있었고 저는  삼육대학에 남아 여대 기숙사 관장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의 논문이 기한 내에 마쳐지지 않아 아무런 경제적인 대책도  없이 저도 앤드류스로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어느날 아침 성경과 예언의 신을 읽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모든 것, 특히  경제적인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여 저도 직장을 그만두고 앤드류스로 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학생 가족 비자라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던 저는 매달 식료품 비용만이라도 벌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기도를 시작한 지 한 달 정도 되었을 무렵 집사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미국에 사는 한국인 청년들에게 영어로 읽힐 책도 쓰고 편지도 쓸 수  있도록 영문법 과외를 받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영문법 공부를 하다가 아예 원고를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게 되었고,  집사님은 매달 제가 하나님께 기도한 꼭 그만큼의 비용을 주셨습니다. 논문을 마칠 때까지 저는 집사님의 글을 영작하며 집사님의 삶을 가장 가까이서 배우는 특권과 함께 경제적인 도움까지 받는 이중의 축복을 누리게 된 것이었습니다.
 
어느날 집사님의 시집을 읽다가 '시련 속에서'라는 시가 너무나 마음에 와 닿아 세미나리 학생에게 부탁하여 배경그림을 넣어 프린트해  드리며 집사님은 다른 사람에게 선물할 때 물건 고르실 필요가 없겠다고 이렇게 귀한 시들을 선물하시면 가장 좋은 선물이 되겠다고  말씀드렸더니 그 생각을 기뻐하시고 그 후로는 지인들에게 시로 선물을 대신하시곤 하셨습니다.
 
한번은 '오늘을 기쁘게'라는 시가 하도 좋아 생신 때 액자에 넣어 드렸는데 글씨가 너무 작게 나와서 잘 안보이실 것 같아 새로 큰  것을 해 드렸더니 작은 액자는 제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지금도 그 시는 저희 집 피아노 위에 올려 져서 제게 하루를 밝고 기쁘게 살 수 있는 활력을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제게 선명하게 남아있는 집사님의 생전 모습은 날마다 PMC로 기도하러 오가시는 모습입니다. 겨울에는 두터운 초록색 파카를 입으시고  여름에는 하늘색 외투를 입으시고 집에서 교회까지 꽤 먼 거리를 늘 오가시던 모습, 교회 입구에 무릎 꿇고 앉아 단정히 기도하시던  모습을 자주 뵈었습니다. 그 기도처를 오가시며 예수님과 나누는 마음의 대화들이 집사님의 시상의 많은 부분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어느 날 기도하고 일어서니 중년의 한 인자한 분이 곁에 계시다가 '당신의 기도가 다 응답되기를 바랍니다'라고 했는데 예수님을 뵌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집사님은 예수님과 매일 가장 가까이서 동행하셨고 저희 모두는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답니다.
 
저희가 앤드류스에 머무는 동안 잠깐 시댁 조카가 함께 지내 적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축구를 하다가 다쳐서 학교를 조퇴하고 집에 와서 누웠는데 침대에서 잘 보이는 곳에 말라기의 말씀,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2)를 크게 써서 붙여두고 그 약속의 말씀을 믿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곁에 있는 저에게 말씀하셨어요. '저는 하나님의 약속을 그대로 믿어요. 그렇게 믿어져요.' 단순하지만  확신에 찬 그 말씀에 '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이 이런 것이구나'라고 생각하고 저의 믿음 없음을 회개하게 되었답니다. 요즘도 종종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하게 그대로 믿는가' 돌아보곤 합니다.
 
집사님 그동안 내신  글들, 시집들, 책들, 자서전('그 영광의 빛 속으로')과 쓰고 계시던 '기도'(제목이 떠오르지 않는군요)의  글들을 통해 집사님 소원하시던 만명의 영혼, 아니 십만명의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일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고 마침내 넉넉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집사님의 얼굴을 조용히 그려봅니다. 집사님의 소녀같이 해맑은 미소가 떠오르는군요. 이상하게도 저는 집사님의  부고를 듣고도 마음이 그렇게 슬프지가 않았습니다. 멀리서 소식만 들어서 실감이 안 나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집사님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삶을 사셨기에, 삶의 종착역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인간의 욕심과 결점이 남아있는, 그래서 하나님의 미완의 작품이 아닌,  죄된 인간의 모습은 사라지고 예수님의 사랑의 품성으로 온전히 물든, 하나님의 손으로 빚어진 완성품이 되신 분이라고 믿기에, 그  품성의 향기가 저희에게 너무나 강하게 남아있기에, 집사님을 떠나보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예수님 부활하실 때까지 잠깐 쉬시는 모습, 한낮에 잠시 눈붙이셨다가 다시 일어나실 모습으로만 그려집니다. 집사님의 남기신 글로, 보여주신 모본으로 저희 속에  집사님은 영원히 살아계십니다. '집사님, 사랑합니다. 집사님처럼 그렇게 맑고 순결한 삶 살 수 있다는 것 모본으로 보여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2009년 9월 20일
 
멀리 한국에서 집사님이 사랑해주셨던 어린 딸 OOO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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