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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바람의 얼굴 / 송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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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의 얼굴 / 송 선주


 

 

    뒷마당 그늘에 앉자 지그시 눈을 감고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에 온 몸을 맡겨본다. 오후 이시간이면 언제나 같은 방향으로 바람이 불어온다. 마당 한복판에 한껏 팔 벌리고 큰 그늘을 만들어 주는 우산 모양의 뽕나무에도.


    저 멀리 우뚝 솟은 마운틴 발디에서 불어오는 바람일까, 숲을 지나 내를 건너 이 마을 저 마을을 기웃대다 우리 마당까지 이른 걸까.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알 수 없는 바람이 나뭇가지에 무성한 이파리들을 간질이며 다가온다. 지난 봄 황금빛으로 물들었던 금귤나무 가지마다 매달린 하얀 꽃망울들이 바람의 속삭임에 따라 향기를 사방으로 날린다. 향긋한 꽃내음에 벌들이 부지런히 날갯짓한다.


    더위를 쫓으려 뒷문을 열고 집안으로 바람을 가득 채워본다. 빠져나갈 구멍도 없는데 어디로 사라졌을까. 잃어버린 바람을 찾아 나선다


    어린 시절 바람은 나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내 고향엔 넓은 강을 가로질러 긴 다리가 놓여있었다. 겨울이면 삭풍이 불어 강물이 얼고 칼날처럼 매서운 눈보라에 귀가 에는 듯, 책가방을 든 손이 꽁꽁 얼어 감각이 없어진 듯 했다. 교복 위 코트 속까지 파고드는 바람은 나를 겨우내 기를 못 펴게 하였다.

 

    끝날 것 같지 않던 긴 겨울의 매서운 바람도 저만치 뒷걸음질하고, 봄날 미풍이 불어와 대지의 잠을 깨운다. 은빛모래가 반짝이고 꽁꽁 얼어있던 개울물이 졸졸 소리 내어 흐르면 올챙이가 꼬물꼬물. 아지랑이 피어나는 들판에 나비들이 팔랑팔랑 바람에 휘날리듯 날갯짓하고, 버들강아지도 물이 올라 연둣빛으로 변할 때면 동무랑 피리를 만들어 불었다. 진달래를 꺾어와 병에 꽂기도 하고 어머니는 찹쌀가루를 반죽하여 진달래 화전을 곱게 구워주곤 했다.


    어느 해 여름이었던가. 태풍이 불어 지붕이 날아가고 나무뿌리가 통째로 뽑혀 뒹굴어서 어린 마음에 얼마나 두려움에 떨었던지. 육이오 전쟁으로 돌아가신 할아버지 제삿날은 언제나 제일 더운 날이었다. 그때 우물에서 찬물을 길어다 수박, 참외 등을 차게 하는 일은 우리 형제들의 몫이었다. 여름방학 숙제로 매미소리 요란한 버드나무 그늘에서 사생화를 그리기도 했다. 무더위 속에서도 한줄기 바람은 영혼을 맑게 하는 청량제였다. 밤이면 쑥대로 불을 피워 몽개몽개 하얀 연기는 바람에 실려 모기를 쫓았다.

 

    가을에 부는 순풍은 들판에 곡식들을 토실토실 살찌우고 농부들의 마음을 풍요롭게 했다. 감나무에 감들이 점점 붉어질 때면 팔월 한가위가 가까웠다. 추석빔으로 호랑이할머니 몰래 읍내 양장점에서 옷을 맞추어주시곤 딸의 고운 모습에 흐뭇해하시던 어머니 얼굴에는 미소가 감돌았다.


    우리 삶도 언제나 순풍에 돛단 듯 순조롭기만 하지는 않은 것 같다. 한편의 드라마처럼 미풍이 불기도 하고 때론 뼈를 에는 삭풍이 불어 우여곡절을 겪게 한다.


    지금 내안엔 회오리바람이 일고 있다. 내 친족에게 찾아온 치매라는 단어가 생소하고 두렵기 때문이다. 두 해 전, 언니는 형부를 먼저 보내고 이제 가까스로 슬픔에서 벗어나려는데 불어온 매정하고 야속한 바람, 90년 이상을 건강하게 사셨던 아버지에게도 세월의 바람이 불어와 노환이 악화되어 요양원으로 가셨다.

 

    숨을 깊이 들이켜고 심호흡을 해본다. 뜨거운 바람이 훅 터져 나온다.


    우리들 한 평생도 한줄기 바람이라고 했었나. 최근 인구에 회자되는 <내 영혼 바람 되어>(Mary Elizabeth Frye)의 시구를 되뇌어본다.

 

   " 나의 무덤 앞에서 이젠 울지 말아요./ 나는 거기 없어요. 나는 잠들지 않아요.

     나는 이리저리 부는 천 가닥 바람이에요./ (중략)/ 나는 죽지 않았어요."

 

    “는 죽지 않았어요.”라는 끝 구절을 되뇌며 마운틴 발디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서있다.

 

    (한국 수필전문지 ‘Green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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