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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고대석 수필가의 수필세계 <영원한 노스탈자 그 내면 들어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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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석 수필가의 수필세계

    

                   영원한 노스탈자 그 내면 들어내기

 

                                                                                                                            박봉진(한국수필진흥회 미주서부지회장)

 

    대석 치과의사 수필가의 수필집 미완성 초상화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자는 그 수필집에 수록된 48편의 글들을 차분히 읽었다. 오랫동안 한 교회의 교우로, 피차 마음을 나눠왔고 사정을 잘 아는 처지라서 글들이 속독으로 읽어도 낯설지 않았다. 그러나 평자의 관점으로 글의 배경과 문맥행간에 내비치지 않은 저자의 속내까지 추리하다보니 글 제목들이 전혀 새로운 모습의 일관된 주제로 엮여있음이 보였다. 문득 정지용의 시 향수가 떠올랐다. 고대석 수필가의 수필집 미완성 초상화는 산문으로 풀어낸 원초적 향수의 또 다른 표현. 그래서 ‘영원한 노스탈자 그 내면 드러내기라고 평제를 정했다.

 

    필의 단초는 필자가 그 소재를 어찌 봤느냐에 따라 개성적인 필자의 글이 태동된다. 그리고 글 핵심이 되는 주제의식, 그 나무 둥치를 기준으로, 연상 작용과 상상에 의해 얻은 어휘를 모아 문학적 의미화와 형상화과정을 거친다. 그것으로 짠 문장의 가지 단락과, 선택된 어휘의 잎줄기들이 서로 보완의 조화를 이뤄야 한 그루의 기품 있는 나무처럼 품격 있는 수필이 창작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충족으로 창작된 고대석 수필가의 수필, 그 내면을 흐르는 강심의 일관된 방향을 기준으로 텍스트 글들을 뽑아 예시하고 살펴보고자한다.

 

    향땅에서 미국 땅으로 이민 와 뿌리를 내려 살고 있는 우리가 마치 옮겨진 나무와 같다는 생각이 떠오를 때 나는 나무에 물을 주고 있었다.” “성서에는 새 땅이 매우 좋은 곳이라고 했다. 세상의 것들이 다 지나가고 눈물도 아픔도 없는 곳이라고 했다. 죽음이라는 것조차도 없다고 했다. 어떤 곳일까” 

 

   (나무를 옮겨 심으며) 옮겨 심은 나무의 생존의 어려움은 이민독자들이 다 겪은 체험일수 있겠지만 떠나온 고향과 돌아갈 본향을 링크한 저자의 의도가 하나로 오브 랩되고 있음이 글의 깊이를 더한다.

 

    내는 이번에 고향에 내려갔다가 어릴 적 옆집에 살던 친구를 뜻밖에 만났는데, 헤어질 때 갑작스레 준비한 듯 꾸러미를 건네며 꼭 남편에게만 주라고 했단다.” “세상에 어느 누가 소유한 모든 것과 하나뿐인 자신의 생명과 자손번식의 근원을 다 내어주고 배알이 꼴리고 창자가 뒤틀린다는자존심 가득 들어있는 창자까지 흝어 내어줄 수 있단 말인가

 

   (명란젓 먹고 나서) 부부간의 같지 않은 음식 기호는 저자 자신이 해학적 문장으로 잘 풀어내놓았지만, 그 다음 물음에 대한 것은 독자 개인들이 답변할 몫이라 할 수 있겠다.

 

    떠나보내고 두 늙은이가 신혼처럼 살아보자 하지만 분위기는 영 그러지 못하다.” “제비새끼처럼 샛노란 주둥이를 가진 아이들에게 먹이를 넣어주고, 위험이 이르면 종달새처럼 온몸으로 쏟아져 내리며 혼절할 듯 했던 그녀이다. 새로 정성들여 단장한 키친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초점을 읽고 멍청해 보이기까지 한다. 누구든 예외 없을 법칙을 따라가는 길이건만 현실에 맞닥뜨린 본인은 혼자인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인가 보다.”

 

   (리모델링) 상황을 바라보는 저자의 글쓰기 거리가 자기완 무관한 듯 사뭇 객관적이다. 속으론 목이 멨을 것임에도 냉철을 감내한 작가적 정신력이 오히려 독자들을 다독인 듯하다.

 

    마 전 중국여행을 다녀왔다. 북경 부근에서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북한 사람들이 경영하는 식당에 들어갔다.” “덤으로 나온 접시에 노란 콩고물을 묻힌 인절미가 나왔다. , 그런데 이 콩고물맛은 바로 그 맛. 옛날 집에서 만들어먹던 고소한 콩고물에 그 쫄깃한 인절미 맛이 아니던가. 화들짝 정신이 들어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나고 절구에서 나던 떡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어릴 적 일들이 빠르게 지나가며 그리움이 머리 털끝까지 솟아올랐다.

 

   (인절미 사랑) 유년의 시제로 거슬러 가면 타임캡슬 안이 환생한 듯 그리운 사람과 옛 추억을 만나듯이 본향에 이르러도 그러하지 않을까. 독자의 심금을 이만큼 쥐락펴락할 수 있는 필력이라면 그만큼 저자는 독자들의 감성과 동화할 줄 아는 심령의 콘추럴러 일 듯 하다.

 

    성들의 경우 아름다운 각선미를 과시하기 위해 적잖은 노력과 시간과 돈을 들인다고 한다.” “그런데 내 다리는 짧고 구부정한 것이 서양인들의 길고 곧은 다리와 다른 것 같다.” “마치 엉성하게 S자를 늘어뜨려 놓은 모양새라고나 할까. 그래서 인지 서서 오랜 활동을 하지 않았어도 다리에 쉬이 피곤이 온다.”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지금 서양인 여성의 현란한 각선미를 보여주는 다리가 클로즈업되어있는 다어어트 광고에 열이 올라있다. 나는 내 구부정 다리와 화면의 그 다리를 번갈아보며 어설픈 미소를 띄운다.” “왜무뿌리처럼 미끈한 그 다리는 마사지 냄새가 솔솔 배어나지만, 내 구부정 다리야 어느 돌짝밭 황톳길을 뛰어다니기 마다한 적이 있었던가.”

 

   (구부정 다리) 보통 남성이면 왜무 같은 그 다리에 관음증이 동할 듯도 하련만, 저자는 타고난 구부정 다리를 거기에 대비시켜 자탄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도 원초적 노스탈자에 귀의하고 싶은 역설임을 독자들은 알아차렸을 것이다.

 

    재의 한 벽 끝, 눈길이 잘 가지 않는 구석에 나를 그린 초상화 한 점이 미완성인 채 걸려있다. 시간을 쪼개어 파리의 망마르트 언덕에 있는 화가들의 광장을 보기 위해 그곳에 갔었다.” “정한 시간 내에 마칠 수 있다기에 얼굴을 한 번 문지르고 작업을 시작했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 그리던 그림을 들고 돌아오게 되었다.” “어찌 보면 나 같고, 달리 보면 아닌 것 같아 미완성임을 탓하게 된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입가에 여리게 퍼진 미소가 있다는 것이다.” “이순의 나이를 넘기고도 아직 미완성인 자신을 안타까워하며 초상화를 들여다본다. 초상화가 미완성이듯 나의 인격과 인생도 그리다 만 그림 같아서 절망스럽지만 미소를 지으며 이웃에게 용서와 자비를 구해보고 싶은 마음이다.”

 

    (미완성 초상화) 완성된 인격이란 유사 이래 어디에도 있지 않았으니 저자의 겸허함이 그 정도면 달관에 가까운 인생경지가 아닐는지요? 글은 결국 필자가 의도하지 않았어도 스스로 그려낸 자화상이 내보여지기 마련이고 또 내면 들어내기로 읽혀질 것이니 말입니다

 

    마 전 서울에서 목사로 시무하고 있는 친구가 다녀갔다.” “친구가 일정을 마치고 돌아갈 때 준비한 미제 향수 두 병을 슬며시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한 병은 네가 쓰고 다른 한 병은 네 아내에게 주려무나.’ 그러자 그도 예쁘게 포장된 작은 상자를 내밀며 이거 같은 종류가 되겠는데, 서울에서 제일 좋다고 하는 것이니까 고향생각하며 써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선물을 주고받은 것이 아니라 심중에 싸여있던 그리운 우정을 표하는 대체물로 향수병을 선택했을 뿐인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꺼덕거렸다.” “거울속의 타월을 다시 바라보며 상념에 젖어본다. 아내는 어떤 마음으로 나를 사랑한다고 할까? 향수 한 병의 가치만큼 일까? 아니면 생명을 담은 병을 깨트려 내 입술에 흘러 부어주는 아주 귀한 향을 가진 마음, 그만큼 일까? 나는 아내에게 어떻게 생명처럼 사랑한다는 마음을 쑥스럽지 않게 전할 수 있을까? 그래 이렇게 좋은 기회가 왔을 때 제일 쉬운 방법으로 표현해보아야겠다. ‘향수!’ 그것이로구나.”

 

   (깨어진 향수병) 실수로 깨트린 향수 한 병이 다섯 병의 향수 텔링으로 전개되었다. 아내와 얽인 향수는 예수님의 발을 씻긴 향수 이미지를 원용하며 독자들도 닭살이 돋을 만큼 부부애의 극치를 내보였다. 그리고 친구 간에 주고받은 향수는 물질 향수였는데 그것의 귀착점은 결국 그리운 고향 향수로 동화되었다. 절묘한 언어적 합성, 이러한 상상력이 아니면 무엇으로 깔끔한 문학수필을 창작해낼 수 있겠는가. ‘대기만성그 성어는 이 순간 고대석 수필가에게 주어진 성취의 기회이기를 간절히 염원해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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