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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en Essay 신인상 당선작} 바람아 내게 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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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아 내게 등을 / 이봉희   

                                                                                            ('가든수필문학회' 회원)

                             

    남가주의 겨울은 몇 번의 Santa Ana Wind 강풍이 불은 뒤에 시작된다. 그제께 한밤중에 창문을 흔들어대는 바람 소리에 선잠이 깨서 커튼을 조금 젖히고 창밖을 내다봤다. 바람은 나뭇가지들을 휘감고 나무둥치까지도 뽑아내려는 듯 마구 휘돌고 있었는데 황소바람이 그렁거리며 우리 집 창틀을 이리저리 흔들어서 나를 움츠리게 했다. 바람은 제 실체는 보여주지 않으면서 행적만 보란 말인가. 어쩌자고 이리도 집요하게 나를 뒤쫓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랬다. 바람이 마구잡이로 나를 휘감았던 때가 있었다. 바람은 내가 역마살을 타고난 사람인 양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나를 지구의 동서반구를 돌게 해서까지 난파시키려 했던 걸까? 누가 시베리아 눈얼음 벌판에서 불어대는 바람이 매서운 칼바람이라고 했는가? 그때 바람은 아무도 내 손을 잡아줄 사람이 없는 외진 곳으로 나를 떠밀어 붙였다.

 

    내 인생의 첫 바람은 스페인에서 불어왔다. 그곳에서 사업을 하는 형부가 함께 일해보자며 남편에게 손을 내밀었다. 남편은 그 손을 잡고 싶어 했지만 나는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성격이어서 찬성하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어떤 일이 있어도 식구들은 안 굶긴다는 남편의 결연한 말에 한국을 떠나기로 했다. 우선 아이들이 하루라도 빨리 그곳에서 적응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남편과 함께 딸려 보냈다. 우리와 함께 사셨던 어머니의 거처를 정해드리고 집과 그 외 모든 것을 정리하고는 나도 합류하기로 하였다.

 

    두 달 뒤 남편과 아이들에게로 가고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 문득 내가 왜 이 바람에 휩쓸려가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이지 않는 손길이 강퍅한 나를 꺾으려 밀어내는 것 같아 무조건 믿으리라 다짐했다. 가족을 만난 기쁨은 잠시, 그곳에서 우리 가족은 헤어날 수 없는 어려움에 빠져들고 있었다. 바다가 보이는 18층 아파트 창문을 바람이 두드려댔다. ‘그리 힘들면 눈 딱 감고 뛰어내려무나.’ 어둠속에서 윙윙거리면서 나를 유혹했다.

 

    우리는 삼년 반 만에 돈도, 사람도 다 잃고 빈손으로 다시 바람 따라 스페인을 떠나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아무 대책도 없이 친정어머니가 계신 미국으로 가려고 했으나, 가족 모두가 비자 받기가 힘든 여건에서 용케도 남편이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왔다. 그러나 미국 바람도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녹록찮았다. 명문대를 나와 일류 기업체에서 일했던 남편은 자존심마저 묻어버렸다. 찬밥 더운 밥 가릴 처지가 아니니 무슨 일이든 몸으로 때우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또 다시 매서운 바람이 내게 불어 닥쳤다. 채 미국생활에 적응도 못했는데 나는 큰 수술을 받아야 할 처지가 됐다. 수술도 못한 채 일 년을 어찌어찌 견디면서 살았는데 어느 날 쓰러졌다. 병원에 실려 가서 곧장 수술을 받아야 했지만 몸이 너무 쇠약해서 3개월간 몸을 보한 후에야 수술할 수 있었다. 이제는 바람의 긴 터널을 빠져나왔다 싶었다. 수술한 몸을 겨우 회복한 어느 날, 밤 청소를 하러 간다는 남편을 따라나섰는데 강도 3명과 맞닥뜨렸다. 권총을 눈앞에 보면서도 죽음을 넘나든 사투 끝에 간신이 목숨을 건졌다.

 

    얼마나 더 내 인생의 거센 바람을 맞아야 하는 걸까. 내게 바람불은 뒷날은 볼 수 있는 걸까. 한동안 나는 무엇을 잃어버린 듯 허전함에 힘든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항공모함을 타고 한 달 동안 먼 바다에 나간 아들의 WashingtonEverett 아파트가 있었다. 나는 아는 사람도 없는 그곳에서 한 달을 지내겠다고 했다. 단호히 휴가를 선언한 것이다.

 

    아무도 없는 아들의 아파트 창문 밖으로 바람이 불었다. 스페인에서 들었던 그 바람소리보다 더 내 마음을 흔들어댔다. 얼마나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늘어졌는지 이리저리 흔들거릴 때마다 마치 머리 풀은 귀신이 나를 마구 잡아채는 듯 움칠거렸다.

 

    어느 날 내다본 창밖으로 진녹색바탕의 잔디밭에 노란 민들레꽃이 여기저기 목을 내밀고 있었다. 어찌나 앙증맞고 귀엽던지 힘들고 지친 마음이 민들레꽃 속에 풀어지고 있었다. 그 다음날 민들레는 하루 새 바람개비인 양 목을 길게 뽑아 솜털씨방을 이고 바람을 기다리고 있지 않는가. 바람을 운반체로 삼고 분초를 미루지 않는 바람타기 무드라니.

 

    , 나는 여태 바람을 피하려고만 했지, 바람과 친할 줄을 몰라서 그리도 힘들게 살았구나. 바람과 조우 때 어찌하면 좋을지 고 작은 민들레를 지켜보면서 깨달았다. 얼마 전까지 이골이 나도록 내 곁에서 떠나지 않고 내 인생을 뒤죽박죽으로 휘감던 바람이 꼬리를 거둬들인 걸까. ‘바람불은 뒷날임을 일려주듯 포근한 한나절로 시치미를 뗐다.

 

    철새는 멀리 이동할 때 공중에서 날갯짓을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바람을 탄다고 한다. 노련한 뱃사공은 순풍이 불 때는 동력선처럼 빠른 항해를 하고, 역풍이 불어도 걱정 안한다. 돛을 바람 받는 방향으로 조금씩 각도를 맞춰 지그재그 항해술로 갈 곳을 향해 나간다고 한다.

 

    이제 나도 내 삶의 갈 길을 따라 바람타기 무드로 전환, 바람을 타보련다. 바람아 내게 등을 내다오. 사람을 태워 올릴 때 무릎 꿇은 낙타처럼, 나를 태워 내 가자는 데로 가보자구나. 우리네 일생도 한줄기 바람일 터인데, 바람잡이란 소리 좀 들으며 살고 싶다. 그래야 전화위복 기회도 만날 수 있겠기에. 우리의 삶과 이웃해서 불어대는 바람아. 바람아.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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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은숙님의 댓글

no_profile 윤은숙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삶의 모진 강풍을 잘 견디시고
이제는 들꽃의 고운 숨결도 들으시면서
따듯하고 신명 좋은 '바람잡이'로 행복하시기 바라며,
좋은 글 즐감했습니다.
주안에서 아자,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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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진님의 댓글

no_profile 박봉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따뜻한 마음씨로 괴로웠던 한 삶에 대해 위로와 격려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작가는 버지니아주 아들네 집에 잠시 가있어 님의 귀한 글을 전해드리진
못하지만, 공감의 싸이클로 이심전심의 텔레파시 소통은 되고 있지 싶습니다.
늘 즐거운 일상과 평강하심 간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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