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 일(그물 깁는 일) > 글동네

사이트 내 전체검색

글동네

고방 일(그물 깁는 일)

페이지 정보

글씨크기

본문

<고방 일>

왼손은 그물을 잡고,
오른손에는 그물바늘과 쪽칼을 쥐고,
튿어진 그물 코를 깁는 손길이 재빠르다.
하긴 벌써 몇년째 그물 깁는 고방 일을 했으니 이력이 날만도 하다.

빼내다가 남겨진 생선토막 일부가 달려있는 그물더미에서는 생선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
처음 얼마간은 그 좋지않은 냄새에 고개를 흔들었지만 이젠 마냥 푸근하게 느껴진다.
아니, 이젠 코에 배어 버린 탓에 생선냄새를 전혀 못 맡을 때도 많다.
일하다 졸리면 날이 갈수록 정겹게 느껴지는 그물 뭉치위로 아무렇게나 몸을 뉘고
잠시 잠에 취하기도 한다.

그물에 걸린 생선들이 그물에서 벗어나 너른 망망대해를 다시 헤엄치고 싶어
안간힘을 다했던 흔적들이 찢어진 그물사이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런 생각이 들면 그 푸른 생선들을 옭아맬 그물을 깁고 있다는 것이
비릿한 아픔으로, 정리되지 못한 갈등으로 다가온다.

어미 죽은지 몇해 후 늦여름 저녁 무렵이었다.
그냥 소박한 옷을 걸친, 죽은 어미의 나이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어느 여인이 애비와 함께 긴장되고 약간 쑥스러운 표정으로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닦을 염도 없이 집으로 들어섰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이복 남동생이 셋이나 생겼다.
셋째를 보고 이태가 지났을 무렵, 멀지않은 바다로 생선잡이 배를 타고 나갔던
애비가 세상을 떠났다.

한때는 애비도 고래잡는 포경선의 포수로 이름을 날렸었다.
집채만한 고래를 배뒷전에 달고 항구가 좁다하며
뱃머리에 떡 버티고 서서 들어올 때의 애비의 그 의기양양한 모습이란....
그런 날은 선주영감도 오히려 애비 앞에서는 쩔쩔매기 일쑤였다.
선주가 고래잡이에 제일 공이 큰 포수 몫으로 잘라준 고래꼬리,
열두가지 맛이 난다는 고래고기는 꼬리부분의 맛이 특히 절묘하다.
그 좋았던 날들...
작은 꽁치나 갈치 고등어를 잡는 잔챙이 뱃사람과는 격이 다르다며
큰소리를 떵떵치는 애비가 마냥 자랑스러운 그런 좋은 시절이었다.

그러나 고래포획이 금지되자 오갈데 없어진 애비는
한동안 술과 노름으로 만사를 잊고 살았다.

애비의 갑작스런 실직으로 여섯식구의 생계를 떠맡게 된 그....
항구에서 할일이 뱃일밖에 없는데도
폐인이 되어가는 애비는 자식에게만은 한사코 배는 타지말라고 하였다.
이리저리 헤매다 별 수가 없자 친구가 하는, 그물깁는 고방일을 같이 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구러 얼마가 지난 어느 날이었다.
잔생선잡이는 않는다던 애비가 노름밑천이 떨어졌었는지
풀죽은 목소리로 며칠만 탄다며 목선을 타고 갔는데, 그만 그날이 애비의 제삿날이 되었다.
실바람도 불지 않던 바다에 갑작스런 돌풍이 불어
낡고 작은 배가 어이없이 뒤집히고 말았던 것이다.

애비가 죽은 후,
검다희다 간에 말이 도통 없으나 맘씨 착한 새어미와 이복동생들을 위해
일년 열두달 쉬는 날 없이 그물을 깁건만 수중에 돌아오는 돈이 몇푼되지 않아
겨우 겨우 입에 풀칠만 하고 지내왔다.

죽은 애비의 영을 거역하더라도 배를 타면 다소 수입이 나을 것 같지만
생선배도 쉬는 날이 많다보니 수입면에서는 그물 깁는 일이나 배타는 일이나
그게 그거라는 생각이다.

열려진 고방문 사이로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가 하릴없이 아래위로 맞닿아 있는
풍경이 보인다.
기실 이 고방 저 고방, 그물 깁는 일도 많더니 이제는 그나마 끊어지지 않는
튼튼한 그물이 생산되고부터는 하나 둘 일자리가 없어져 간다.

애비가 잡고 있었던 고래잡이 포경선의 포가늠쇠와 자신이 쥐고 있는 그물바늘...
아버지가 잃게 되었던 포수 자리와 자신이 잃게 될 고방 일 자리....

잠시 눈을 질끈 감으니,
뱃사람들이 쳐놓은 그물 앞으로 한떼의 생선들이 다가왔다가 그물을 피해 유유히
사라져 가는 모습이 언뜻 스친다.

갑자기 쌓여있는 그물로부터 나지않던 생선 냄새가 물씬 났다.



---------------------



포항 어느 바닷가에서 그물을 기우며 새어머니와 이복동생들을 잘 보살피며 사는 어진 사람의 실제 이야깁니다.

이제 그는 늙었을테고....몇발짝 앞서 같이 늙어가던 그의 마음씨 착한 새 어머니는 아무 유언없이 조용히 먼저 세상을 하직했을 지도 모르겠네요.
아마도 어진 그는 피한방울 안섞였지만 새어머니를 먼저 간 어머니 묘와 가묘를 쓴 아버지묘 옆에 잘 묻어 드렸을 테지요.
오늘같이 햇살좋고 바람없는 날은 세분의 무덤가에서 말없이 조용히 서 있을 테지요.

고방일(그물 깁는 일).png


댓글목록

profile_image

한만선님의 댓글

no_profile 한만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감개무량입니다.  이같이 군말없이 깨끗하고 간결하면서도 감정이 넘치는 글을
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디 사시는 뉘신지 모르오나 좋은 글 많이 쓰세요.

profile_image

홍원근님의 댓글

no_profile 홍원근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아...글 마당을 살펴보니 미주재림문인협회장 한만선장로님..이시군요. ...감사합니다.

장로님의 댓글이야말로 군말없이 깨끗하고 간결하면서도 감정이 넘치는군요.

Copyright © KASDA Korean American Seventh-day Adventists All Right Reserved admin@kasd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