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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밭머리에서 울던 소쩍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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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쩍새와 감자밭>

 

모내기를 끝내 놓고 한달 열흘후 쯤에, 커가는 모의 활황을 좋게 하기 위한

논바닥 애벌매기를 한다.햇빛을 받아 번들번들 눈부신 논바닥에 기역자로 엎드려 논매기를 하노라면,

그야말로 오뉴월 뙤약볕을 받은 등짝은 여러개의 탱자나무 가시를 모아 한꺼번에 찌르는 듯 

사정없이 따갑고, 이제는 제법 자라 기운이 세어진 모 이삭들이 얼굴과 팔을 휘적휘적 스치면

더러 피가 나기도 한다. 

 

땀은 비오듯 하고 허리는 부러지는 것 같아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은 지경에 이른다.   

거기다가 엊그제 장가든 아랫 마을 사는 왈패 친구 녀석이 빈 지게를 지고 소를 몰고

논매는 옆을 지나가면서, "이랴, 이 놈의 소, 엇길로 가면 지금 저 무논에 있는 장가도 못간

어설픈 못난이 대신 논매기를 시킬테다. 이랴, 이랴, 말 잘들어. 이놈의 소..." 하며

눈과 입을 찡긋거리며 약을 올리면서 지나가면 이젠 참을성도 한계에 이른다. 

"야! 너 거기 좀 섰거라 -"소리치며 호미를 팽개치고 논둑길을 뛰어 잡으러 가면,

놀려먹던 친구 녀석은 걸음아 날 살려라

소 잔등을 후려치며 마구 달아난다. 기어코 잡아서 족칠 만한 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얼마쯤 따라가던 떠끄머리 총각은 풀섶에 털썩 주저앉아 한숨을 내 쉰다.

하긴 못나기도 참 못났다. 남들 다가는 장가를 스무살이 넘도록 못 가고 있으니...

다른 건 다 그만두고라도 이렇게 힘든 일을 하다보면 금방 시장기가 도는데,

때 맞추어 흰 앞치마 두르고 쌩긋 쌩긋 웃으며 먹을 것 이고 오는 아내가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싶다.

그 어여쁜 아내의 왼손에 막걸리 한 주전자가 달랑달랑 들려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은데...

이그 이 지지리도 못나 빠진 놈. 미처 장가도 못간 녀석이 앞질러 별별 김칫국물을 다 들이키고 있구만...

딱하기도 하지. 혼자 한탄하며 자신의 머리를 두 주먹으로 쾅쾅 찧어보다가 별 수 없이 거머리 들끓는

무논으로 성큼성큼 들어가 다시 기역자로 엎드려 논 바닥을 주물럭 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초여름 해가 이윽고 서산을 넘어가고 건듯건듯 시원한 바람이 불면, 아무리 일 잘하는 장정도

하룻만에는 절대 못한다는 닷마지기 논매기가 남들보다 두배나 부지런하고 재빠른 총각의

손으로 거짓말같이 거진 다 마무리가 된다. 일이 끝나면 조그맣고 맑은 빛깔로 흐르는 도랑물에

손과 발을 대충 씻고 논 머리에 세워둔 빈지게를 지고 논 뒤에 있는 산에 올라 쇠꼴 한짐을

쓱싹쓱싹 단숨에 한다.

다시 꼴을 지고 김 맨 논을 휘 둘러보면 모들이 살았다는 듯 파르르 웃는다.

그러면, 언제 이 너른 논을 혼자 다 맸을꼬하는 생각이 들어 뿌듯해지고,

휘파람도 절로 난다.   

 

날은 거뭇거리고 있다. 쇠꼴 짐을 진 노총각의 걸음새는 힘차면서도 바쁘다.

병을 앓고 있는 노모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음이다. 

급한 걸음에 돌부리가 가끔 짚세기 사이 삐죽 나온 발가락에 걷어 채인다.   

저물어 가고 있건만 낯 익은 산골 길은 산뜻하고 정답다.

어둑해지는 하늘과 비례해서 점점 선명하게 하얘져 오는 찔레꽃 숲에

중꿩이 다 되어 가는 꿩병아리들의 종종 걸음이 분주하다.    

그 찔레 덩굴 너머 하루걸이 비탈진 밭에 감자꽃이 수줍지만 기운좋게

감자줏빛으로 수수하다. 하지 무렵에 캘 수 있는 감자는 지금쯤 아마도

씨알이 굵어져 가고 있을 것이다.

 

지난해 가을, 감자를 캔 후에 양식할 것과 이듬해 씨 할것으로 구분하여

씨감자는 땅에 잘 묻어 두었었다. 그러나 소작농으로 근근히 살아가는 탓에

두 모자(母子)밖에 먹는 입이 없건만 양식은 겨울도 다 지나기 전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렇지만 옥수수 죽일망정 병든 어머니에게만은 어떻게든 먹을걸 장만해주고

총각은 어머니 몰래 고픈 배를 움켜지고 몇날동안 끼니를 걸렀는지 몰랐다.

그러나 이듬해 봄에 밭에 심을 감자를 캐내어 삶아 먹을 생각은

두모자가 애시당초 꿈도 꾸지 않았다.

그리고 금년 봄에 드디어 묻어 두었던 감자를 꺼내어 가랑잎 태운 재를

밭에 먼저 뿌린 다음, 감자 한조각당 씨눈 두어개씩이 돌아가도록 잘라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심었었다.

오랜 지병을 앓고 있는 어머니는 외아들이 말리는데도 기어코 감자 심는 날은 와서

뼈만 앙상한 몰골로 감자를 같이 심었었다. 이제 며칠만 더 있으면 맛있는

저 감자를 캐리라.  허기가 질대로 져 배는 꼬르륵대고 있었는데, 감자 생각이 나자 입안 가득

쓸데없는 군침이 꾸역꾸역 괸다.  

그나 저나 감자 캘 때 생긋 생긋 웃으며 옆에서 같이 캐주는 아내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수북수북 고봉으로 담은 밥그릇 위에 감자 서너개를 얹어 된장, 고추장, 풋고추를 곁들인

저녁상을 내오는 아내가 있다면 얼마나 기운이 날까? 어허 또다시 섣부른 김칫국을

마시는구나 쓴웃음 지으며 어두워오는 감자밭을 한참동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감자밭 한 귀퉁이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깜짝 놀란 총각은, 

"거기 웬 사람이오?"

궁금증 반 노기(怒氣) 반을 띄운 음성으로 크게 소리침과 동시에

지게를 고여놓고 찔레 덩굴을 훌쩍 뛰어 감자밭으로 성큼 들어섰다.

총각의 큰소리에 지레 겁을 먹은 칩입자는 감자밭 머리에서 머리를

숙이고 그대로 주저앉아 있었다. 

 

처녀였다.

길게 땋은 머리에는 색바랜 분홍댕기를 들였고, 흰 무명적삼과

검정치마를 입고 짚신을 신은 처녀는 못먹어 누렇게 뜬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의외로 단정한 모습이었다.

순간, 총각은 할 말을 잊었다. 귀중한 남의 감자밭을 유린(蹂躪)하는

도둑에게 단단히 혼을 내리라 작정했던 마음이 온데간데 없어지고

가슴이 두근거려지고 얼굴이 화끈 달아 올랐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성급한 소쩍새가 울기 시작했다.

호된 시집살이를 견디지 못하여 굶어 죽은 며느리가 소쩍새로 화해서

밥솥이 적다고 밤마다 저렇게 애간장이 다 녹아들도록 운다지?

총각은 소쩍새 울음을 듣는 순간 눈앞의 처녀가 혹시 소쩍새로

변하여 죽은 그 며느리의 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처녀의 가엾은 정경에 갑자기 가슴이 끝없이 시려오고 목이 매어 왔다.

 

 "따라오시오!"

어떻게 그런 당치않은 말이 나왔을까? 그 말을 하고 쇠꼴지게를 지고

성큼성큼 앞장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배고픈 사람에게 그냥 저녁이라도

한끼 따뜻하게 차려주고 싶은 단순한 마음 뿐이었다.

따라올 듯 말 듯 망설이던 처녀는 결국 총각의 집까지 따라오게 되었다.  

의외의 상황에 놀라는 한편으로 어떤 좋은 기대감에 부풀어 입을

다물지 못하는 주인 노파에게 가엾은 처녀는 저녁 밥을 맛있게 얻어 먹고

그 노파와 잠까지 같이 잤다.

 

처녀는 재너머 숯골 마을 홀애비 숯구이의 딸이었다.

어미를 일찍 여의었는데, 지난해 어느날 숯 팔러 간다고 집을 나선 술꾼에

노름꾼인 아비마저 감감 무소식이 되자, 먹을 양식이 떨어져 며칠을 굶다가

그런 짓을 하게 되었노라고 했다.    

 

노파가 며칠을 얼르고 달래어 기어이 그녀의 아들과 처녀의 조촐한

혼례식이 외딴 산마을에 난데없이 올려지게 되었다.

누가 중매를 섰을꼬하며 궁금해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모자는 서로 약속이나

한 듯 감자밭에서 두 사람이 만났다는 말은 아예 입 밖에 내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혼례가 있은지 얼마쯤 지나 땅위의 감자꽃이 지고 줄기도 이지러진 다음,

땅속의 감자는 굵게 영글었다. 그리고 그 씨알 굵고 먹음직한 감자를 캐는 날,

이젠 어른이 된 총각 옆에 어여쁜 아내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같이 감자를 캐고 있었다. 없던 기운도 저절로 났다.  

 

그렇게 덥고 꿈같은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어 논에서 가을걷이를 할 때였다.

여름에 둘이서 캔 감자를 삶아서 머리에 이고 막걸리 주전자를 달랑대며

논둑길을 걸어오는 아내는, 보는 눈이 없으면 달려가서 으스러지게

껴안아 주고 싶어 못견딜만큼 더 없이 사랑스러웠다.

그리고,논 맬 때 혀를 낼름 내밀며 놀리던 아랫마을 왈패 녀석도

아름다운 두 신혼부부의 옆을 지나가면서 이번에는 감히 놀리지 못하고

만만한 소잔등만 하릴없이 이랴이랴 두드려 대고 있었다.

                                                      (完)

                           

* 그 전에 제가 근무했던 우체국 월간지에 발표했던 글입니다.

낯 뜨겁지만 이 작품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 미처 이 작품의 맛을 제대로 모르고 지나가실 지도 몰라서)

출품하면 선평을 해주시는 정공채 선생님의 말씀을 아래에 옮겨 봤습니다.  

 

- 소쩍새 처녀와 감자밭은 한편의 꿈만같은 서경적인 아름다운 장편소설(掌篇小說)이다.

짧은 이 작품 속에 소설문학의 멋들어진 정석(定石)과 같은 기승전결(起承轉結)과

복선(複線)마저도 거의 완벽에 이르도록 구사하고 있다.

한마디로 작품을 성숙시키는 솜씨가 대단하다. 어쩌면 천질적(天質的)인 작가가 아닌가 싶도록

이분의 글은 수필에서건 이야기글에서건 빼어나 있다.

「소쩍새 처녀와 감자밭」을 읽으면서 우리는 저 이효석님의 「메밀꽃 필 무렵」과 동격(同格)의

서경적 서정(敍景的 抒情)의 눈물겨운 아름다움을 복고적으로 흠씬 안아도 보게 된다.

작가 홍원근님은 벌써 문단에 나와 기량을 한껏 빛냈어야 할 분으로 믿고 있다.

                              -【정공채 - 시인】 2000년 9월 「정보와 통신지」

 

그리고 삼육대 명지원교수님의 감상평도 마저 곁들여 봅니다.

 

-홍원근 장로님,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장로님께서 보내주신 두 번째 글을 이제 찾아 읽었습니다.

그 사이에 읽을 수도 있었지만, 급하고 중요한 일을 먼저 해야지 하는 마음에 미루어 오다가,

약속이 더 중요한데 하며 찾아 읽었습니다.

더 일찍 읽지 않은 것이 후회되리만큼 지친 제 마음에 힘과 용기를 주는 에너지와 같은 글이었습니다.

'소쩍새와 감자밭'이라는 장편소설(掌篇小說). 정공채 선생님의 평 그 이상의 감동으로 글을 읽었습니다.

글 처음 첫 글자부터 그 글자들이 만들어낸 단어, 문장들 어느 하나 놓치지 않고 끝까지 집중하여 읽었습니다.

글 읽는 내내 정신을 흩뜨리게 하는 곳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제가 홀어머니 밑에서 커서 더 집중했는 지 모르겠습니다.

막내인 내가 결혼을 하기 위해 사귀는 여자친구를 어머니께 인사드리도록 데려가면 어머니는 얼마나 좋아하실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는데, 돌아가시기 이태 전에 며느리감을 데려오면 좋겠다는 비슷한 말씀을 하셔서, 돌아가신 다음에

어머니를 더욱 그리워하게 되었습니다.나이가 들어 소설을 많이 읽지 않았지만, 소설을 읽을 때, 세밀한 묘사하는 것을

보면서 감탄한 적이 있는데, 홍 장로님의 '소쩍새와 감자밭'은 제 가슴을 훑어내는군요.

완전히 몰입하였고, 마치 그 아들이 나인 양 가슴을 두근두근하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오시오!"라고 했던 부분에서, '나라면?"이라는 질문과 함께, 나라도 그렇게 말했을 것 같다는

 생각에 가슴이 알싸~하였습니다.

아, 이리도 아름다운 글이 있을까? 이리도 사람냄새 나는 글이 있을까 싶습니다.

이 글을 사랑하는 우리 아이들 외가와 친가쪽 단톡방에 올리고, 나의 사랑하는 학생들에게 올리겠습니다.

이 글을 보고 문학의 아름다움을 20대 때 경험할 수 있다면, 이 학생들은 아름답고 멋진 20대를 살 것임에

틀림없다고 확신합니다. 세상사가 '만남'의 연속이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글을 써서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마음의 묵은 때를 벗길 수 있는 홍 장로님을 만나뵙게 되어 가슴시린 마음으로 우리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다시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shalom!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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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만선님의 댓글

no_profile 한만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감자밭과 소쩍새 얘기를 하면서  딴 얘기를 꾸몄습니다.  아름다운 사랑과 인정, 행복을 말입니다.
백점 만점에 98점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앞으로 더욱 정진하셔서 좋은 작품을 많이 만드시고 많이 발표하십시오.  미주 재림문인협회와 관계를 맺고 싶으시면

주소를 주세요.  작품을 실으시도록 필요한 책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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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원근님의 댓글

no_profile 홍원근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미주 재림문입협회장님이신 한만선 장로님...
감사합니다. 근데 저는 한국에 사는데요?
작품을 실을 수 있는 책을 보내신다니...미국에서 한국으로 보내시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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