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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 캐나다 이민생활 / 이영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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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나다 이민생활 / 이영목

                                                

   1968년 8월 1일 아내와 2살 딸과 세 식구가 정든 고국을 떠나 캐나다 이민 길 비행기를 탔었다. 초청 받은 곳은 토론토에서 500마일 북쪽 작은 도시 Cochrane의 Lady Hosp.이다. 캐나다에 먼저 와 있은 친구가 같이 살자면서 며칠을 지나는데 유대인 Apt 주인이 9명이 북적거리는 생활을 보고는 친구와 다투는 모습을 보고는 더 이상 피해를 줄 수 없어서 그 날 저녁 기차로 Cochrane로 떠났다.

   캐나다의 기차 여행이 즐겁고 낭만적인가를 아는 사람이라면 기대에 부풀 여행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나에게는 망망대해의 부평초 같은 신세여서 너무 무서웠다. 오돌 오돌 떨고 있는 아내와 딸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무능한 가장의 신세가 더욱 비참했다.

   기차 안에는 우리 3식구 외에는 백인들이었다. 그들은 기쁨이 넘치며 기차가 설 때마다 터미널에 나가 커피를 사 마시면서 희희낙락하는 모습이 나와는 대조적이었다. 우리 3 식구는 의자에 궁둥이가 붙은 양 꼼작도 못하고 노랗게 질린 얼굴에 눈만 빤짝 거리는 모습이 가엽게 보였는지 백인 신사 한분이 우리 곁으로 찾아왔다. 어디서 왔느냐? 어디로 가느냐? 물어보기에 한국에서 와서 Cochrane Lady Minto Hosp.로 초청 받고 간다고 했더니 자기를 소개하기를 6.25 한국 전쟁 때 참전했다면서, 그 곳은 작은 도시고 겨울에 춥고, 너희들이 살기 좋은 곳이 아니라면서 몇 정거장 더 가서 자기 따라 같이 내리자고 권했다. 짧은 영어로 이민 초청 해준 병원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가야한다고 했더니 Good Luck 하면서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면서 캐나다의 천사는 사라졌다.

   첫날 출근하여, 만난 간호원장 Mrs Monphty는 전형적인 불란서 여인이었다. 우리를 환영한다면서 기숙사 방을 정해주고 쉬라고 하였다. 잠간 밖에 나와 구경하는데 새빨간 고급 승용차가 들어오기에 원장님이 출근하시는가보다, 했더니 한 노인이 내리더니 뒤   트렁크에서 청소도구를 꺼내더니 청소를 시작하는데 알고 보니 병원 정원사였다. 정원사가 저런 고급차를 탈수 있다면 우리도 희망이 있겠다는 용기가 나면서 잘 왔다는 생각을 했다. 해질 무렵 기숙사 창문 바깥을 내다보니 소, 말이 자유롭게 풀을 뜯어먹는 풍경이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 했지만  저녁노을이 붉게 물드니 밀려드는 외로움과 그리움에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528장 찬미(“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를 부르고 또 불렀다. 다음날 시간표를 주면서 Wife는 Am반, 나는 Pm반, 우리의 입장을 알고서 내일부터 출근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남자는 기숙사에 있을 수 없으니 나가라 하기에 병원 가까운 곳에 방을 구하려 하였으나 없고 인디언이 방을 주겠다고 하여 보았더니 집과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선택의 여지없이 이사했다.

   이사를 했지만 밤에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밤새도록 이상한 음악을 틀어 놓고 술 마시고 떠들어 대니 겁에 질린 아이들은 밤새 잠을 못자고 보챘다. 보채는 딸아이를 맡길 수가 없어 딸아이를 안고 병원으로 갔다. 엄마 떨어진 딸아이는 엄마를 찾으면서 울어대고, 아빠까지 저를 두고 없어 질까봐 바지를 붙잡고 놓지를 않았다. 딸도 울고, 아빠도 울고 이것이 이민생활 일 줄이야 짐작이나 하였겠는가?

   근무 중인 아내에게 딸을 밀어 넣고 내 병동으로 가는 아빠의 고통이 하루... 다음주... 또... 간호원장이 아이를 병동으로 데리고 오지 말라며 베이비시터에게 맡기면 영어도 배울 수 있고 좋은 기회라 하였다. 우리가 근무 중 아이를 병동에 두면 불법인줄 왜 몰랐겠는가, 그들은 알면서도 모른 척 보고도 못 본 척 그들은 우리를 이 땅에 뿌리 내리게 해준 고마운 천사들이었다.

   토론토의 생활, 다음날 아내와 의논 끝에 토론토에 다녀오기로 했다 2 달 전 기차 여행 때 보다 여유가 있었다, 토론토 친구들 만났더니 빨리 내려오라고 야단이었다. 안식일마다 4가정이 캐나다인 교회 내에 한국어 안교반이 있어서 너무 좋았다. 이영천씨가 지도하였다. 시내에는 한국식당, 한국식품가게가 있어 한국음식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었다.

돌아가는 길에 김밥과 두부 등, 먹고 싶었던 몇 가지를 사가지고 기차에 올랐다. 아침에 먹고 싶었던 한국 음식으로 요리하려고 김밥, 두부를 풀어 보니 밤기차의 기온이 높았는지 김밥이 쉬여서 버려야 했던 우리의 심정을 누가 알기나 할까. 

   기차에서 처음 만났던 백인  신사의 말대로 코크란은 우리 같은 이민자들이 살만한 곳이 아니었다. 2개월 일하는 동안 병원 당국과 동료 간호원들의 배려와 이해로 나름대로 정이 들었으나 딸의 베이비시터 문제로 더 이상 머물 수 없어 간호원장을 찾아가 우리의 입장을 설명하고, 친구들이 있는 토론토로 가려고 한다 했더니 이해한다면서 원하면 언제든지 다시 오라는 위로와 격려까지 아끼지 않던 간호원장Mrs Monphty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나눈 후 코크란의 짧은 이민생활을 마쳤다.

   1968년 10월 말 선명희 어린이 합창단이 토론토를 방문, 교민 위로 공연이 어느 교회에서 있었는데 200여명 교민들이 입장 관람했다. 순서에 따라 애국가가 연주될 때 교회 안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한국을 떠나온 지 불과 3 개월 밖에 안 되었는데 조국이 그리워지고 식구들 생각이 나서 많이 울었다.

   토론토에 돌아와서 첫 직장이 Baycrest Hosp.에서 Orderly였다. 첫 날 출근했더니 양로원인지라 노인들 세상이었다. 여기저기서 우는 노인이 있는가 하면 벌거벗고 복도를 활보하는 노인, 침대에 누워는 있으나 손발이 묶인 채 소리 지르는 노인들도 있었다. 간호원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바쁜 모습이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인생지옥 같았다. 첫날이라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서성거리고 있으니 고참 Orderly가 부른다. 250Lbs 넘을 듯한 코끼리 같은 환자가 어제 밤 외출했다 술 마시고 늦게 돌아와 잤는데 아침 당번이 환자를 깨워 Wheel Chair에 태우려 하니 너무 무거워서 혼자서는 감당할 수가 없어 도와달라고 부른 것이다. 환자의 담요를 열자마자 고약한 냄새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을 정도였다. 알고 보니 밤 당번이 술 취해 돌아온 환자를 옷도 벗기지 않고 침대에 눕히고 퇴근했는데 아침에 보니 바지에 그냥 실례를 해놓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고참 Orderly가 이 환자를 목욕시키라는 것이다. 너무나 자존심 상하고 모욕감까지 느껴졌던지 내가 이런 일 하려고 캐나다에 왔나? 성질이 욱하고 치밀었으나 이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인데 자신을 달래면서 손에 고무장갑을 끼고 환자의 바지를 벗겨서 쓰레기통에 던졌더니 자는 줄만 알았던 환자가 화를 벌컥 내면서 욕지거리까지 하면서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그 바지가 얼마 짜리인줄 아느냐? 빨아서 다려서 가져오라고 호통 치는 것이 아닌가, 똥 싸는 것은 나의 일이고, 너는 똥을 치우는 것이 너의 일이라는 듯 너무나 당당하였다, 너무 화가 나서 고무장갑을 벗어 던지고 간호원장실로 내려가 "I go Home"(그 때 나의 영어 실력이었다) 이라고 했더니 간호원장 비서 Mrs Shapiro(샤피로)가 앉아서 잠시 기다리라면서 Mr Lee! 2 주 동안 일해보고 그 때도 못 견디겠으면 가도 좋다했다. 그 분은 나를 인간적으로 대해주었다.

   Mrs Mitchell 수간호원을 불렀는지 잠시 후에 내려왔다. 수간호원에게 무엇이라고 말했는지 나에게 같이 올라가자고 말하는 것이었다. 두 분의 고마움 때문에 따라 올라 갔더니 바지에 똥 싼 환자에게로 데리고 가더니 나를 소개한다.(그 후 좋은 친구가 되다) 간호원장 비서 Mrs Shapij는 아예 따뜻한 물을 담아 수건에 적시더니 보기만 해도 구역질 날정도인 환자의 전신을 깨끗이 목욕시키더니 여자가 손댈 수 없는 거기 까지도 ...... 그리고 환자에게 Lotion을 발라 주라고 한다. 장갑을 끼고 Lotion을 환자 몸에 쭉 뿌렸더니 수간호원이 No No..... 차가운 Lotion을 환자 몸에 뿌리면 환자가 놀래니까 장갑을 벗고 Lotion을 네 손에서 따뜻하게 한 후에 발라 주라 한다. 간호원장과 비서 두 분의 은혜를 잊지 못한다.

   유대인들의 단결력과 애국심, Baycrest Hosp.에서 일하면서 유대인들을 볼 수 있었고 친구로 사귈 수 있었다. 이 양로병원의 원장과 운영자들은 물론 유대인들이고 환자들도 100% 유대인(러시아 폴랜드 출신의 유대인)들인 반면 간호원을 비롯하여 일반 노동자들도 대부분 외국인 이민자들이었다.

   양로원에는 환자가 아닌 또 다른 노인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원봉사 대원들이다. 무심코 보면 환자인지 자원봉사자들인지 구별되지 않을 만큼 나이 많은 노인들이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그들도 곧 양로원 환자로 입원해야할 노령인데도 매일 출근하여 환자들 밥을 먹이고, 환자들을 Wheel Chair에 태워 정원으로 나가 일광욕도 시키고 Bingo Game도 같이 해주고 환자들의 뒷바라지를 했다. Game이 끝나 일과를 마칠 때면 그들의 애국가를 부르고 헤어지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유대인들은 동네마다 Synagogue(회당)와 Community centre(한인회 같은 곳)가 있다. 사업을 시작하려는 이민자들에게 동업을 권한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동업을 해야 사업을 키우고, 한국인들은 동업을 하면 싸우고 헤어지기가 일수라 한다. 유대인들의 단결력과 애국심은 그만큼 대단하다.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에 전쟁이 있었을 때 Toronto - Tel Aviv행 비행기는 항상 만원이었다 한다. 캐나다에서 유학하던 유대인 학생들이 학업을 중단하고 본국의 군대에 자원하는 학생들이 많았기 때문이라 했다.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전쟁은 고양이와 사자의 싸움 같았지만 성난 고양이가 사자를 물어뜯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과 같은 결과였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수상은 골다메어 할머니였다. 전쟁이 격렬할 때 할머니 수상은 New York, Chicago ,Toronto 등 대도시 몇 곳의 유대인 회관을 방문 “여러분들은 이곳에서 안락하게 사는 동안 여러분의 조국 부모, 형제들은 이집트와 싸우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눈물로 호소하면 모아지는 성금이 천문학적 숫자였다. 그것으로 신무기를 사서 이집트를 물리쳤다고 했다. 한국 정치인들(자칭 애국자) 자신과 그의 아들들의 병역 기피와 청문회 때마다 곤혹을 치르는 모습과는 천양지차이다.

   Impala 자동차, 어느 날 친구 집에서 우리 3식구를 저녁 초대했다. 저녁 식사 후 Shopping 가자해서 따라 나섰다. 우리는 아직 차가 없어서 친구의 차로 가야했다. 그 날 저녁에는 비가 내렸는데 친구 부부는 앞좌석에 타고 친구 아들(5살)과 우리 세 식구는 뒷좌석에 탔는데 친구의 아들이 내 딸에게 차가 더러워진다면서 내리라고 말했다. 물론 5살짜리 철없는 아이의 소행이긴 하지만 차주인 아들에게 꼼작도 못하고 쭈그리고 당하고 있는 딸의 모습을 보자 아빠인 나로서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기가 쉽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서 다른 친구에게 오늘 우리가 탔던 친구의 차보다 한 단계 좋은 차가 어떤 차냐고 물었다. Impala라 했다. 1968년 이 찻값이 $3,000이었다. 내 돈 $100로 계약하고 은행에서 $3,000을 36개월에 월 $100씩 물기로 하고 Impala차를 샀다. 내 평생에 자가용을 탄 가족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아빠는 흐뭇하였다.                     

   카나다 공무원들, 직장도 가졌고 새 차도 샀고 차차 이민생활이 자리 잡히게 되니 부모님을 모시고 싶은 생각이 들어 이민국에 가서 부모님 초청 면접을 하는데 우리의 영어가 초라했는지 이민국 직원이 필요한 서류를 타이핑 하더니 사인만 하라고 했다. 8개월 후에 부모님이 캐나다에 오셨다. 캐나다 이민생활5년이 지났다. 시민권을 타려고 갔더니 사람이 많아 기다리는데 아이들이 지루하다고 울고 부산을 떠니 담당자가 우리 식구들을 자기 사무실로 따로 불러서 선서를 하고 시민권을 받게 해주어 너무 고마웠다.

   세관시험, 어느 날 신문을 보니 캐나다 연방정부 세관 공무원 채용공고가 있었다. 확신이 있어서가 아니라 경험도 해볼 겸 신청서를 제출했더니 즉석에서 타자용지에 빽빽하게 타자 친 3장을 주면서 읽어 보고 수정이 필요한 곳이 있으면 수정하라고 하면서 시간제한이 없으니 편한 자세로 하라고 했다. 최선을 다해 수정한 답안지를 담당관에게 건넸더니 며칠 후에 결과를 우송하겠다고 했다. 합격을 기대했던 바도 아니어서 기다리지도 않았는데 며칠 후 편지가 왔다. 깜짝 놀았다.

   출근 날 자, 장소, 나의 월급까지 정해서 왔다. 영어 실력도 안 되고 세무경험도 없는데 동양인 한사람이 필요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어떤 보직을 바랐다면 공항 세관에서 한국인을 위해 봉사하고 싶었다. 첫날 출근한 사무실은 연방정부 세관 세금 감정 국이었다. 직원이 30여명 되는 큰 사무실이었는데 모두 배트란 급 세무관들이었다. 나의 보직은 세무관이 아니고 CR-7 국장님의 서류정리 비서실이었다. 세관 중에서 가장 중요부서 세금 감정 국 국장 Mr Kitchen은 30년의 배트란 급이었다.

   국장님이 아침에 출근할 때는 노란 봉지 하나를 들고 오는데 그 분의 점심이다. 사무실에는 Typist 여자들 7명이 있었다. 커피 시간인데도 극장님의 커피한잔 사다 드리는 일이 없다. 캐나다 연방정부 세관에 취직했다 했더니 하나 같이 사람들이 하는 말은 “이 친구 돈 방석에 앉았다”고 했다. 이민 오기 전 서울에서 세관 세금 감정국 비서였다면 돈 방석에 앉았을 가능성도 없지 않는지 모른다. 서울서 세관국장님 쯤 이라면 점심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는 것은 물론 그 국장님과 점심식사 약속 한 번 하는 것도 쉽지 않는 자리일 것이다. 돈 방석은 본 일이 없고 캐나다 공무원들의 정직 청빈을 보았다. 그래서 캐나다가 세계에서 살기 좋은 나라 중에 하나라는 말은 내가 직접 보고 듣고 느꼈기 때문에 빈 말이 아님을 말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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