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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회추천 수필}우리의 요란한 대화 / 주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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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요란한 대화주영희

                                           

   1983년 미국 중부 아이오와주의 대학을 중심으로 한 작은 도시 애임스에는 5평 남짓한 작은 한국식품점이 있었다. 그나마 하루에 서너 시간밖에 열지 않았다. 김치를 금치라고 부를 만큼 배추가 비쌌다. 많은 한국학생 가정에서는 양배추 김치를 담가먹었다. 이웃의 한국할머니께 배워서 콩나물을 길러먹기 시작했다. 아파트 뒤에서 냉이를 캐어다가 국을 끓여먹는 맛이 일품이었다.

   봄이 되니까 원하는 사람은 땅을 빌려 농사를 지으라고 학교에서 공고를 했다. 한국채소가 비싸서 항상 찬거리 땜에 전전긍긍했던 나였기에 귀가 솔깃했지만 농사경험이 없던 터라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남편이 "내가 농사를 잘하니까 걱정 말고 밭을 신청해라."고 말했다. 나는 들뜬 기분에 20불을 맡기고 땅을 빌렸다. 상추와 깻잎, 토마토, 오이, 호박, 무, 배추 등을 길러서 풍성한 식탁을 만들 생각을 하니까 저절로 신이 났다.

   밭을 배정 받은 후에 남편이 계속 바빠서 같이 갈 수가 없어 발을 동동 구르며 눈치만 보고 있었다. 밭이 차를 타고가야 하는 거리였고 젖먹이 아기가 있었기 때문에 남편도움 없이는 갈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밭은 채소가 제법 자라 있었을 때 우리는 겨우 씨를 뿌렸다. 남편은 시간이 없다며 밭을 갈지도 않고 풀이 잔뜩 나있는 곳에 그대로 씨를 뿌렸다. 자주 가서 물도 주고 풀도 뽑아줘야 할 것 같은데 그러지를 못했다. 어쩌다 한번 밭에 갔는데 무가 돌처럼 딱딱했다. 물을 너무 주지 않아서 그렇게 됐다는 것을 한참이 지나서야 알았다. 농사를 잘한다는 남편의 말은 한국남자의 텅 빈 호언이었던 것이었다.

   방학이 시작되고도 며칠이 지나서 남편을 가까스로 설득할 수 있었다. 밭에서 가볍게 일도하고 소풍도 하자고 약속을 했다. 김밥을 싸놓고 아기도 나들이 준비를 완전하게 시켜놓고 설레면서 기다렸다. 약속시간이 되자 남편은 친구들과 같이 우르르 몰려와서는 "내 천사 같은 마누라가 우리 낚시 가라고 김밥까지 싸놨네." 하면서 김밥을 들고 친구들과 함께 허연 이빨을 드러내고 밉살스럽게 웃으면서 가버렸다. 

   남편이 먼저 미국으로 온 후에 나 혼자 나중에 아기를 데리고 들어와서 가족이 합친 지가 일주일도 채 안되었을 때였다. 한인 교회의 주말 야영회 공고가 나자 많은 한국학생들이 들떠 있었다. 젖먹이 아기도 있고 시차적응도 안된 때라 피곤하고 낯설기도 해서 가기 싫다는 나를 기어코 데리고 2시간동안 차를 타고 호수가의 야영장으로 갔다. 남편은 야영장에 도착하자마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나는 여자숙소에서 두 달된 아기를 자주 젖먹이니라, 그리고 무척 덥기도 하여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아침이 되어 지부 둥한 몸을 일으켜보니 현기증이 났다. 속이 비어서 그런지 잠이 부족해서 그런지 알 수가 없었다.

   아기를 데리고 혼자 식당가기가 엄두가 안 나서 남편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다가는 식사시간을 놓칠 것 같아서 남자숙소 앞에 가서 안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차마 남정네들이 자는 곳에 들어가질 못하고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어떤 부인이 들어가서 자기남편을 깨워서 같이 나왔다. 나도 용기를 내서 얼른 들어가서 남편을 깨웠더니 감히 여자가 외관남자들 자고 있는 곳으로 왔다고 엄청나게 화를 냈다. 결국 아침밥은 못 먹고 남들이 안보는 호숫가 후미진 곳으로 가서 둘이서 한참 싸웠다.

  남의 집 이사라면 헐레벌떡 가서 카펫도 깔아주고 에어컨도 달아주면서 우리가 이사할 때는 도무지 얼굴을 구경할 수가 없었다. 나 혼자서 카펫을 깔다가 손가락에 물집이 생겼다. 에어컨은 무거워서 내가 혼자서 도저히 설치할 수가 없었다. 몇 번 애가 타도록 부탁한 후에 남편이 마지못해 선심 쓰는 듯이 뻐기면서 설치했다. 하지만 엉성하게 설치해서 찬 공기가 다 새어 나가곤 했다. 우리 집에 방문 왔던 사람들이 남편이 다른 집의 에어컨은 잘 설치했으면서 자기 집은 왜 이랬을까 하면서 웃었다.

  마음속으로 칼을 갈면서 비장하게 무장해서 남편이 돌아왔을 때 닭 볏을 세우듯 기분으로 싸움을 걸었다. 한참 말다툼을 하다가 남편이 할 말이 딸리니까 접시 한 개를 던져서 깼다. 나는 두개를 남편보다 더 멋있게 던져서 깼다. 이번에는 남편이 더욱 화가 나서 주먹으로 벽을 쳐서 작은 구멍을 하나 만들었다. 지난번 이사 오기 전의 좀 더 고급 아파트에서는 주먹의 손가락자국만 약간 났는데 이번에는 구멍이 생기니까 남편표정이 바뀌었다. 변상해야 할 것 같으니까 겁이 났던 모양이다. 그러자 나는 양쪽 발을 번갈아 힘차고 날렵하게 벽 차기해서 남편이 만들었던 것보다 세배나 더 큰 구멍 두개를 더 만들었다. 남편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리고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사실 그 아파트는 네 종류의 학교아파트 중에서 제일 오래되고 싼 아파트였는데 세입자가 임의대로 꾸며도 좋다고 학교에서 이미 허락한 상태였다. 옆집에서 벽을 고치고 남은 큰 나무판자가 여러 개 있으니 갖다 쓰라고 한 터라 나는 겁 없이 통쾌하게 몸을 날려 벽 차기를 할 수 있었다. 남편은 집안일에 무관심한 사람이라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평소에 남편이 잘 하던 대로, 이번에는 내가 먼저 집밖으로 나가버렸다. 이미 어두워졌는데 남의 나라에서 아내가 집을 나갔으니 놀랬던 모양이다. 숨어서 남편의 동정을 살펴보니 아기가 자다가 깼는지 아기를 안고 놀란 표정으로 정신없이 나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어쨌든 그날의 싸움은 처음으로 나의 승리로 끝났다. 역전이 된 것이었다. 그 날 이후로 남편은 잔뜩 나를 약올려놓고 나가버리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부부의 크고 작은 싸움은 하루에도 몇 번씩 계속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우리가정에 모신 이후 우리싸움의 원인은 모두 남편이라는 내 생각이 바뀌었다. 나의 잘못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의 전쟁은 눈에 보이게 줄었지만 그래도 성경말씀과 멀어질 때는 내 속에서 붉은 악마가 끓어오르는 것을 보면 우리싸움의 원인은 나였는지도 모른다.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잠언 21;19) 참을성 없고 성질도 쉽게 잘 내는 나로부터 남편이 얼마나 도망하고 싶었을까를 깨닫게 해주었다. 깨달음을 주신 크신 분에 대한 감사함, 친정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남편에게 미안함 때문에 한참을 울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싸움을 통해 서로를 잘 알게 되었고 그러면서 같이 자라갔다. 서로에 대한 관심과 사랑하는 연유로 싸웠던 것이었다. 싸움은 우리의 요란한 대화였다. 하지만 우리의 부부싸움은 이제는 즐거운 사랑의 확인으로 바뀌었다.

   나는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을 빨리하려고 하다가 그릇을 잘 깨곤 했다. 깨어지는 소리가 나면 남편은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뛰어와서 내가 안 다쳤는지 확인한 후에 나를 안전한 곳에 보내놓고 깨진 그릇 조각 하나하나를 여러 번씩 다 닦아낸다. 어설픈 아내를 그렇게 치다꺼리하다 남편은 약속을 취소한 적도 있다. 내가 쉽게 잠들지 못하면 조용히 기도하면서 내가 잠들 때까지 발 마사지를 해주는 남편이다. 내가 우울해 할 때면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끝내는 배꼽을 잡고 웃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목청 돋워 같이 노래하기도 하고 눈물 흘리며 같이 손잡고 기도하기도 한다.

   이제 우리는 오십 줄에 들어섰다. 서로의 눈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거의 알아맞힐 수가 있다. 염색약 하나를 열어서 하얘지는 머리를 서로 물들여 주며 키득거린다. 성질 급한 나를 만나서 힘들었을 남편의 홍안의 소년 같았던 얼굴이 어느새 마른 대추처럼 되어가고 있다. 콧등이 찡해온다. 이제 우리는 황혼을 향해 가야 하는가보다. 철없었던 시절, 나 아니면 도저히 같이 살아줄 여자가 없을 구제불능이라고 생각했던 그 남편이 이젠 나에겐 잠시도 곁에 없으면 안 되는 내 인생의 버팀목이며 나를 살맛나게 해주는 유일의 사람이다. 내 친정아버지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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