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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하시는 하나님과 싸우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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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석진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08.12.12 23:13 조회수 7,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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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하시는 하나님과 싸우는 사람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Come now, and let us reason together,”

Says the Lord.

 

나는 오늘 아침 일찍 눈을 뜨고

갑자기 떠오르는 욥에 대한 생각으로 이불을 뒤척거렸다.

아마도 기도주일을 인도하는 송연호 목사님의 언급도 있었고

평소에 생각하던 욥이 친근하게 닥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며칠 전에 다시 욥기의 편을 읽으면서 생각에 잠겼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욥기를 읽을 때마다

욥에게 가장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본다.

문제를 해결할 있다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있을 것이다.

정말로  그에게 문제되는 것이 육체적인(physical)  고통이었을까?

아니면 정신적인(mental) 고통이었을까?

아니면 그의 가족에게 당한 재앙(disaster) 대한 몰이해 때문이었을까? 

그렇지 않으면 날아가버린 재물(materials)들이었을까?

아니면 마누라의(family)  바가지였을까?

못된 친구들(social)이었을까?

 

욥에게 가장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사실 욥의 실존에서 가장 문제는 침묵하시는 하나님인 같다.

욥은 침묵하시는 하나님과 싸우고(변론) 있는 것이다.

그가 신뢰하는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욥은 그의 실존의 비참함을 경험하면서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참을수 없었다.

그래서 욥은 침묵하시는 하나님과 싸우는 사람이다.

그렇다 욥은 침묵하시는 하나님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의(인간의) 강력한 의지로 하나님과 변론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머리 속에는 친구들의 위로의 밀이나 마누라의 바가지나

그가 가운데서 고통하는 고통과 싸우는 것이 아니고

침묵하시는 하나님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에게 이렇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에게

이러한 고통을 주는 것이 하나님이라면 모순이다라고

무수히 머리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그보다 한것은 이러한 인간 삶의 실존에서

하나님이 치묵을 지키는 것은 모순이다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침묵을 지키시면 인간에게 하나님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침묵을 지키시는 하나님은 존재 자체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욥은 유대인들이 말하고 있는 zaddik임이 틀림없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서

마침내 38장에서 하나님으로 침묵을 깨게 하시고

하나님으로 욥의 실존에 나타나 말씀하시게 한다.

그는 마침내 그의 삶에 하나님을 끌어들이는 것에 성공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욥에게 세상에 있는 이해할 없는 이치를 설명하고 있다.

욥은 듣는 자가 되었다.

침묵으로 항변하며 무수히 마음과 가슴으로 이야기하던 욥은 이제

그의 뒤죽박죽이 되고 진창 속에 뒹그러진 삶의 고통 속에

입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다구치며 말하고 있다.

 

변박하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과 변론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욥은 하나님의 이러한 도전적인 말에 약간 움츠려들면서 말한다.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입을 기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두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하지도 아니하겠고

대답지도 아니하겠나이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욥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이

욥의 가슴에 닿지 않은 같다.

가슴 쉬원하게 하는 위로를 받지 않은 같다.

그의 대답을 영어로 적으면

그냥 약간 움츠려드는 그의 모습만을 있다.

 

“Behold, I am insignificant;

What can I reply to Thee?

I lay my hand on my mouth.

Once I have spoken,

And I will not answer:

Even twice, I will add no more.”

 

하나님의 이야기가 다시 계속되고 있다.

욥을 깨우치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다.

그는 하마의 이야기 악어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욥은 그러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인간의 그런 비참의 실존에서 하마의 신비가

악어의 신비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욥의 대답이 재미있지 않는가?

 

주께서는 무소불능 하시며 무슨 경영이든지 이루실 것이

없는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이정도에서는 욥이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아야하고

하나님께 손을 들어 항복해야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상 말하지도 않겠다던 욥은 다시 하나님께 말하고 있다.

아니, 다시 알고 싶어 묻고 싶은 것이다.

하나님의 설명이 그의 가슴에 닿지 않는 것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어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아니 하나님이 나타나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고 알아야 것이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

욥은 침묵하시는 하나님과 다투어(싸워) 하나님을 말하게 후에

그는 그것으로 그의 삶의 문제를 해결할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그의 앞에 나타나게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 싶은 것이다.

폭풍 속에 말하는 하나님으로 그의 삶이 정리될 없는 것이다.

그의 실존이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는 해결될 없는 것이다.

 

! 욥은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말씀하시게 하고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그의 실존에 나타나게 하신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은 그의 삶에서 마침내 내었다.

하나님을 그의 삶의 현장으로 끌어내려  하나님을 보는 일에 성공하였다.

이제 그는 참으로 인생의 위로를 받았다.

하나님이 가습에 닥아온 것이다.

그곳에 전류가 흐르고 있다.

욥의 위대한 고백이 이제 터져 나왔다.

하나님이 가슴에 닿았을

우리의 속에 하나님께 진정한 신앙고백이 있을 있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그런데 성경절에는 진정한 위로함이 없다.

내가 잘못했으니 회개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요

이러한 의미가 우리에게 들린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러한 인생의 마지막 실존에서 무엇을 원하시는가?

재와 티끌 가운데  회개를 요구하시는  것일까?

하나님은 그러한 하나님이실까?

티끌과 가운데에 있는 인간에게는 죄의 회개보다는

위로함이 필요하다. 다음이 죄의 문제이다.

 

우리 모두는  간음한 여자를 다루시는 예수님을 기억한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그리고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예수님에게는 위로가 먼저고 죄가 나중이다.

우리 인간은 그러한 긴박한 실존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필요로 한다.

하나님도 예수와 같이 우리를 위로하신다.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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