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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 -독단주의와 회의주의의 유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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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 -독단주의와 회의주의의 유혹에서...


최근에 몇 분과의 대화에서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다시 생각해 볼 기회가 있었다.

오랫동안 일요일 교회를 다니셨다가 개종한 분도 있었다.

그렇게 목숨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찾은 진리 교회에 대한 회의였다.

급변하는 21세기의 물결 속에 마치 표류하듯 방황하고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어쩌면 가만히 물결에 떠내려가 표류하는 의식이라기 보다는

도전을 응전하기 위해 고민하는 긍정적인 의식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몇 가지 중요한 주제들을 함께 생각하고 싶다.


독단주의와 회의주의에 우리는 조심하여야 한다.

독단주의라 함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고가 절대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지식과 믿음과 생활양식이 절대적이라고 확신하는 생각이다.

이것은 참으로 위험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순간 적어도 가지고  있는 그것이 성장을 멈추게 된다.

그곳에 창의성이라고는 결코 존재할 수 없고 끊임없이 찾아오는 도전들에 대해

고집과 아집 그렇지 않으면 자제를 잃은 포기와 방임의 물결에 싸이게 된다.

혹시 우리는 이러한 독단주의에 살고 있지 않는가?

우리만이 남은 무리, 우리 교리만이 절대 진리, 우리 교회만이 진리 교회, 

우리의 생활양식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그래서 우리에게 성장이 없고, 창의성이 없고, 

고집과 아집이 우리의 울타리를 둘러싸고 있고 

다가오는 새로운 물결을 쳐다보면서 불안하게 서 있지 않는가?


이러한 위험의 독단주의와 마찬가지로 회의주의는 또 다른 위험한 사상이다.

독단주의가 지식의 확실성에 대한 절대 진리라고 주장한다면

회의주의는 지식의 불확실성에 대한 절대 진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증명되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은 

현대 철학의 시조 데카르트에 의해서 시작 되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자기 존재밖에는 믿을 수 없기에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증명되지 않는 모든 과거와 현재의 것은 버려야 하고 역사 속으로 보내야 한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기에 자신의 이성으로 모든 것을 증명해야 한다.

그것이 오늘날의 철학과 과학과 심리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급변하는 세상에서 익숙한 회의주의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도 회의주의에 빠지게 된다.

회의주의는 독단주의와 마찬가지로 그 회의에 대한 독단이기에 위험한 생각이다.


이 두 가지 사고의 형태 앞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있는 것은 큰 도전이 필요하다.

이 도전을 어떻게 대응하느냐는 신앙의 삶에서 중요한 숙제이다.

열려진 마음과 진리를 찾고자 하는 정직한 갈망으로 열정을 가지고  

우리의 교리나, 우리의 교회나, 우리의 생활양식을 들여다 볼 때

그것이 독단적으로 절대적 진리라는 생각을 버린 지 오래다.

교리나, 교회나, 생활양식을 버린 것이 아니고 독단적인 생각을 버렸다는 말이다.

절대적 진리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그에게서 그것을 빼앗을 수 없다. 

우리가 독단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 하나님도 나의 생각 속에 갇히어 계신다.

우리가 회의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 하나님은 나의 생각에 설 자리가 없다.

하나님을 우리의 독단과 회의적인 생각에서 자유롭게 해방시켜야 한다. 

그래야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가 찾아온다. 그것은 깨달음이었다.

우리를 하나님 안에 자유롭게 하는 것은 새로운 깨달음이다.


평범한 사람은 위대한 업적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깨달음으로 산다.

평범한 신앙인으로 살아온 많은 삶을 돌아보면 증명되지 않은 많은 세월들이 있다.

삶은 고비 고비마다 과학과 이성의 증명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주신 은혜의 선물로 이루어진 것을 경험하여 알 수 있다.

놀라운 것은 우리들의 삶이 부족과 실패와 모순의 연속이었지만 

오늘의 우리로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존재로 하나님이 만들어 준 것이다. 


많은 교우들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교리들 중

성소문제, 다니엘 계시록 연구, 2300주야, 일요일 휴업령, 대쟁투의 신앙,

건강기별, 예언의 신에 대한 영감 등에 회의를 가지고 있다. 

어쩌면 당연한 생각인지 모른다.

21세기의 사고를 가지고 19세기의 사고를 해석하려면 문제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다른데 문제도 있는 것 같다.

젊어서는 그러한 교리들이 성경을 연구하는데 매력적이었는데

나이가 들고 나니 그러한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른 말로 말하면 신앙생활의 우선순위에 변화가 생긴 것 같다.

이렇게 나이가 들면 신앙의 중심은 예수밖에 보이지 않는 것 같다.

그러한 삶이 가장 가치 있는 삶으로 다가오고 있다.

신앙이 점점 성숙해 가는 것인지 나이가 들어 총명이 흐려져서 그런지

이제 더 이상 그러한 문제들로 사용할 시간이 없는 것 같다.


그렇다고 그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하거나 보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믿음과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구원을 받기 때문에

도덕률이나 계율 같은 것은 필요 없고 그것에 자유롭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오늘날 우리 개인의 삶이 이렇게 존재하기까지에는

숱한 실패와 과오와 모순의 연속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에 이르렀다.

우리도 지금까지 이렇게 성장한 것은 그러한 것들로 시작되어 이렇게 왔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교회도 이러한 경험으로 오늘의 교회가 된 것이 아닐까?

19세기 역사적인 배경에서 우리 믿음의 선조들의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것에 특별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다.


이제 21세기를 사는 우리나 우리의 젊은이들은 우리의 것들을

독단주의나 회의주의를 조심하고 창의성을 가지고 연구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나는 이 일에 비관적이지 않다.

지난 안식일 오후 포틀랜드 영어권에서 침례식이 있었다.

열한명의 자녀들이 침례를 받았다.

우리는 그들의 침례예식 진행을 참관하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

그것은 지난 오십년의 침례예식 중 가장 감동의 예식이었다.

우리들의 전통적인 방법이 아니고 21세기의 젊은이들의 문화에 맞게

예식의 모든 순서를 진행하고 있었다.

자녀들의 신앙을 위해 열심히 침례공부를 시키고

각 후보자에 대한 교사의 간증과 함께

그들로 각 개인이 영상으로 침례를 받게 된 신앙고백을 하게하고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한 자녀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부모의 시간 등

그들은 우리들보다 결코 뒤지지 않게 훌륭하게 준비한 예식이었다.

비록 한 시간 반이라는 긴 시간이었지만 지루하지 않았고 의미 있는 예식이었다.

새해의 시작을 이렇게 희망적으로 시작해서 좋았다.


우리도 이 새해에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도전에 창조적인 대응을 하므로

희망찬 우리의 신앙생활을 했으면 좋겠다.

독단주의와 회의주의의 유혹을 물리치면서.......


2011년 1월 7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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