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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신기루를 쫓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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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08.11.29 14:09 조회수 1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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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본성을 인성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즉 사람을 사람이 되게 하고 사람 아닌 것이 되게 하지 않는 성질이라고 말하면 맞은 말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짐승을 말할 때에는 수성(獸性)이라고 말하고 새들에게 대하여서는 금성(禽性)이라는 말을 쓰는지 모르겠다. 짐승이기 때문에 짐승의 성질이 있으며 그런 성질을 드러내는 생태는 당연하다. 새이기 때문에 새의 성질이 있고 그것을 생태로 살아가는 것이다.

영성을 이런 사실에 미루어 생각한다면 영이 되지 않으면 영성이 있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육신의 생명만을 가진 사람이 도덕적 수양을 통하여 성인(聖人)의 경지에 이른다고 하더라고 그것이 영성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수양을 통하여 이룬 도덕성의 높은 경지에 이른 것일 뿐이다. 사람들이 이 높은 도덕성을 영성으로 착각하거나 오해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영의 생명으로 존재하지 않으면서 영성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그것을 위하여 최대의 노력을 경주하고 높은 도덕성을 이루고 그것이 영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영성 신기루를 따라가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영성은 영의 사람이 될 때에 당연히 따르는 성질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영의 사람이 된다. 예수께서 거듭남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3:6)라고 말씀하셨다. 성령으로 나는 것이 거듭난 것이다. 그러면 이 육신에 성령의 본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바울은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고 가르쳤다.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는 사람이 되면 영성이 있는 것이다.

영성이 있는 사람은 그것이 생활의 생태로 드러난다. 이렇게 될 때 사람들은 그의 언어와 삶에서 영적인 감화력을 느끼게 된다. 말이 없어도 느낀다. 그런 사람은 생각의 경향이 영적으로 기울어져 있다. 사람이 영의 사람이 되었는지 아닌지는 그 생각의 경향이 어디로 기울어져 있는지 스스로 시험해보면 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5,6). 영의 생각의 가장 핵심 되는 것이 바로 생명과 평안을 실천하려는 생각이다. 그들은 사람을 살리려하며 평안하게 하려고 한다.

그러나 사람이 사망으로 달려가려고 기를 쓸 때에는 그를 살리려는 그 간절한 마음이 의분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진노가 바로 이런 것이다. 진노로 그들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만 있다면 그 간절한 사랑이 진노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는 불의로 진리를 막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것이다(롬1:18).

이 진노하시는 간절한 사랑이 바로 십자가에서 그 독생자를 죽게 하셨다. 인생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한 진노요 간절한 사랑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하든지 사람을 영원한 생명으로 살게 하시려고 최대의 사랑을 나타내셨다. 이 사랑의 가장 기본적인 사상이 사람을 영원한 생명으로 살리려는 것이라는 것은 지난 번 칼럼에서 말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일4:9).

그러므로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한 롬8:6의 말씀을 위의 말씀과 대조하면 영의 생각은 사랑이라는 말이 된다. 결국 영성은 진정으로 사람들을 영생의 생명으로 살게 하려는 열망이 간절한 그런 성질이다. 그것은 사람을 평안하게 하며 성내지 않는다. 성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약1:20) 영의 생각이 될 수 없다. 화평을 이루고 화평하게 한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서 목사나 장로나 집사나 일반 교인들이 교회를 화평하게 하지 못한다면 이런 사람은 영의 사람이 아니다. 결코 영성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런 것은 전혀 영의 사람의 생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의 사람 곧 영성이 있는 사람은 끊임없이 지체를 의에게 굴복시키며, 자기 생각을 예수 그리스도께 굴복시킨다. 날마다 자기를 죽인다. 이것이 바로 영의 생태이기 때문에 그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주의 몸된 교회의 지체라고 하면서 이런 생태가 나타나지 않으면 비록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해도 그는 육신에 있는 자이지 영에 있는 자가 아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그렇게 편지하였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전3:3). 시기하고 분쟁하고 싸우고 성내는 사람은 육신에 있는 사람이다. 그들은 육신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영의 일을 생각하지 않는다. 교회를 위하여 그렇게 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육신의 정욕을 따라 교회를 자기 육신의 생각의 표준으로 판단하면서 교회를 위한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의 생각에 의하여 교회는 운영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영이시며 그분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다. 이것이 영성이다.

우리는 거듭나서 영에 있는 사람인가? 그렇다면 영성이 생태로 나타날 것이다. 물론 더욱 풍성하기 위하여 훈련해야 한다. 날마다 순간마다 말씀과 기도로 훈련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지기 때문이다(딤전4:5).

우리는 도덕성 함양이라는 훈련으로 영성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님을 확인하고 진정으로 회개하고 거듭나서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애에 이루어지는 희열을 맘껏 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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