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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왜 죽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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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석진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08.04.13 13:30 조회수 1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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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끔 다음의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놀라곤 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으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장 17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고 죽음을 선포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 어느 누구도
이렇게 말을 듣지 않는다고 죽음을 선포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자식을 기르고 있다.
그리고 수 없이 말을 듣지 않는 그들을 대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코 우리의 자식에게 죽음을 선포하지 않는다.
자식을 낳고
그가 범죄하여 사형수가 된다 할지라도
그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눈물을 흘리는 부모가 한 둘이 아니다.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기 때문이다.
죽음이 인간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죽음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이라는 말에
인간 존재 그 자체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으로 창조하시고
말을 듣지 않는 인간에게 죽음을 선포하셨다.
차라리 곤장 백대로 해결하시지…
그것도 인간 세상에서 과한 벌이 아니겠는가?

왜 사람은 죽어야 하는가?
나는 교회에서 인간 고통의 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해결할 수 없는 죽음의 선포에 대한 하나님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어떠한 설명도 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
이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죽음의 딜레마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하는가?
생각의 시작 하나님의 입장에 서서 해보자.
내가 하나님이라면 왜 인간에게 죽음을 선포해야하는가?
내가 이제 이 땅에 인간을 창조하려고 한다.
그런데 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루스벨의 문제이다.
지금 하나님은 큰 문제를 가지고 있는데 루스벨의 반역이다.
만약에 하나님이 사랑, 공의, 정의등을 논하는 분이라면
이 반역은 하나님에게 아픔이요, 또한 고통이다.
“얼마나 아프실까 하나님의 가슴은…”
이것은 비단 예수님의 십자가 상의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가슴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 이전에 하나님은 루스벨의 반역에서도 고통을 받으시는 하나님이다.
고통과 죽음의 문제는 우리 인간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이 문제는 인간의 존재 이전에도 있었고
현 인간 존재에도 있고
이대로라면 인간 존재 후에도 있을
영원성을 가진 하나님의 문제인 것 같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창세 이전에 죽음을 당한 어린양,
지금도 죽음을 당하는 어린양,
이대로라면 이 이 없어진 후에도 죽임을 당할 어린양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사업의 가장 허가 되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가 창조한 모든 존재에 자유의지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너무나 매력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자유의지를 가지고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이 되고자 한다.
이 유혹은 결코 뿌리칠 수 없는 것이다.
이 땅이 생기기 전
저 우주에서 사람보다 더 훌륭하게 지음을 받은 루스벨이 그랬었고
이 땅이 창조된 후 하와를 비롯하여 모든 인간에게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고
만약 하나님이 몇 천번의 창조를 다른 우주에 하셔도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를 창조하면
변합없이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고 자유 의지가 없는 존재를 창조할 것인가?
자유의지냐 아니면 자유의지가 없는 존재냐?
이것이 인간을 창조할 하나님의 가장 큰 딜레마이다.
이 딜레마에서
하나님은 자유의지의 편을 선택하고
죽음을 인간과 언약으로 내 놓았다.

하나님은 말하고 있다.
에덴에서의 인간의 창조는 창조 사업의 시작에 불과한 것이다.
더 나은 인간의 창조는
이 땅에서 현재 이루어지고 있다.
죽음의 고통을 지나가며
죽음의 의미를 참으로 경험하는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유혹을 받지 아니할
새 생명의 인간을 창조하는 것이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아니하면….”

죽음의 문제에 고민하며 딜레마에 빠진 나에게는 하나님과 대화가 필요하다.

하나님은 지금 나를 새롭게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에덴의 창조는 시작에 불과한 good creation이였고
지금 죽음을 앞두고 매일 새롭게 거듭나는 신앙 생활은
더 나은 better creation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 죽음의 터널을 지나 부활한 새 생명은
하나님이 계획한 가장 좋은 창조가 될 것이다.
그 창조가 바로 the best creation이다.

이제 남은 것은 나의 선택이다.
바로 하나님이 내게 주신 그 문제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을 믿느냐 아니면…..
나의 선택이다.
이 부활의 아침에……

2008년 3월 22일 Easter 아침에
앤드류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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