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급하심과 부에 대한 개요 > 칼럼

사이트 내 전체검색

칼럼

공급하심과 부에 대한 개요

페이지 정보

글씨크기

본문

Deuteronomy 28:1-3 "If you fully obey the Lord your God and carefully follow all his commands I give you today, the Lord your God will set you high above all the nations on earth. All these blessings will come on you and accompany you if you obey the Lord your God: You will be blessed in the city and blessed in the country."


3 John 1:2 "Dear friend, I pray that you may enjoy good health and that all may go well with you, even as your soul is getting along well."

 

공급하심과 부에 대한 개요 (퍼온 글)   

       기고자: Wayne Kirkland 

서론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부유해지기를 바라신다. 그리고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재물(기본적인 필요)을 찾을 수 있길 원하신다. 또한 우리가 그분의 관대하심 속에서 부유함(풍족함)을 누리기를 소망하신다. 하나님의 세계는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줄 수 있을 만큼 풍부한 자원으로 가득 차있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타락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풍족한 공급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필요가 채워짐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이는 반드시 자기 자신 또는 주변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정신적, 육체적, 관계적, 환경적, 도덕적 또는 영적인) 엄청난 희생을 전제로 해야만 가능하다. 또한 다른 이들이나 스스로에게 해를 끼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이들도 있다. 어떠한 경제적 상황에 처해 있든지,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공급하심과 재물에 대해 어떠한 의도와 역할을 지니고 계신지에 대해 크게 궁금해 하고 염려하기도 한다. 이런 문제는 빈곤층, 부유층, 고용주, 직원, 구직자, 학생, 부모, 퇴직자, 주택 소유주, 세입자, 노숙자 등 할 것 없이 모두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다행히 경제적 상황에 대한 걱정은 성경에서 말하는 우선순위와도 상통한다. 참으로 성경은 공급하심이나 재물을 단순하게 다루고 있지 않다. 신약과 구약의 상당 부분에서는 이러한 문제가 다뤄지고 복음서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렇다면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은 어떤 말씀을 하고 계신가? 이번 글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다룰 것이다.

  • 하나님께서 공급하심이나 재물과 관련해 태초부터 가지고 계셨던 의도
  • 타락한 세상에서의 삶이 그분의 공급하심 및 재물을 경험할 수 있는 능력에 관해 우리에게 미친 영향
  • 경제권을 다시 회복시켜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응답과 이를 위한 우리의 역할
  •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대해 우리가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것
  • 우리가 소유한 재물을 관리하는 방법

 

   우리는 주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재산을 어떻게 관리하도록 의도하셨는지에 더 주목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기본적인 공급하심에 의존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는 크게 주목하지 않는다. 이 글을 읽는 많은 이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필요를 채워주실지, 그렇지 않을지, 염려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들 중 대다수는 삶을 영위하는 데 필수적인 공급이 아니라 세상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높은 수준의 부를 계속해서 누릴 수 있는지를 걱정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물론 기초적인 공급 또한 이 토론에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특히 불안 가운데 가난한 삶을 경험한 적이 있거나, 이런 분야에서 남들에 비해 생계유지가 어려웠던 이들이 지닌 더 깊은 통찰력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지니셨던 본래의 의도 : 축복, 공급, 풍요

목차로 돌아가기

   창세기 1장과 2장의 말씀을 보면, 인류가 창조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 및 풍족함을 누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계획하셨음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에덴동산의 목가적인 환경 속에서 최초의 인간은 풍요롭고 비옥한 땅을 찾았으며, 인류는 이에 따라 모든 면에서 번영을 누리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번성할 수 있도록 풍부한 자원과 재물을 공급해주시기 때문이다.

 

   창세기의 저자는 인간이 창조된 이야기의 앞부분에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창1:28) 라고 말하고 있다. "축복" 또는 "복을 받다"라는 단어는 성경 이야기를 이루는 중심적 요소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축복을 받는 것은 분명히 실재하며, 우리의 손 안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물질적 축복은 우리의 창조주를 알고 그를 사랑함으로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혜택들과 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이후 광야의 황폐함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만나를 내려주시고 (출16)  반석에서 물을 얻게 하심으로 (출17) 매일 필요한 양식을 제공해주셨다. 그분으로부터 비롯되는 풍족한 재물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약속의 땅'에 도착한 때를 묘사하는 성경구절 속에서 더욱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으며 하나님의 의도하심에 따라 사는 데 필요한 물질로 넘쳐났다. 신명기를 보면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 즉 번성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지상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그 약속이 기록되어 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신8:7-9)

 

   태초부터 하나님께서는 인류가 번성할 수 있도록 세상을 완벽하게 준비해두셨다. 인간이 비옥한 땅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경작하며 지키게" 하신 능력을 사용할 때, 식량을 일구어낼 수 있다(창2:15). 하나님의 의도하심은 사람들이 그저 생계를 겨우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들로 풍족함을 누리는 것이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창1:28)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연계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으며 이를 통해 자원을 얻을 수 있도록 하셨다(창2:20).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에게 풍족함을 안겨주시기 위해 다른 피조물을 지으셨으며, 인간은 이를 충분히 누릴 수 있도록 노동의 능력과 재주를 받았다. 창조주와의 동반자적 관계 속에서 우리는 땅의 자원을 창조적으로 사용해야 하며, 이를 통해 획기적으로 산물을 길러내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며, 본래의 것보다 더 발전시켜나가야 한다. 우리가 쓸 수 있는 원자재는 모든 이들에게 돌아가고도 남을 만큼 풍부하다. 이는 에덴동산 이후, 대부분 재산과 물질이 부족했던 경제적 상황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놀랍게도 인류는 그분의 피조물을 개발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 잘 협조해왔다. 농업이나 원예의 발달, 석탄과 석유, 가스, 풍력, 그리고 수자원을 이용한 전력발전, 또는 공원과 정원, 그리고 아름다운 풍경의 창조, 주택, 가전제품, 옷, 다양한 운송수단의 설계와 구축 등과 같은 발전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였고 이는 공동 창조의 결과이다. 이렇게 획기적인 방법으로 제작하고 생산해내며 발전시킬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은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지어졌다는 사실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타락한 세상의 영향

목차로 돌아가기

   태초 인류의 반란은 (창3) 모든 만물에게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 태초의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무너졌을 뿐 아니라, 땅을 통해 식량을 공급받고 재물을 얻는 능력 또한 잃게 되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상실했을 때, 경제적 문제와 여러 가지 악이 따라옴을 여실히 보여주는 예이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사이가 소원해지면서, 인간이 식량과 재물을 얻을 수 있는 능력 또한 약화되었다.

 

   결국 타락한 인류는 저주와 축복 모두를 안고 살게 된 것이다. 이는 노동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그 땅,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것들과 풍요로움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로 인해 심하게 훼손되었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셨다.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창3:17하-19상)

 

   우리는 식량을 생산해낼 수 있는 재료들을 통해 기본적인 식량도 일구어내지 못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이나 남의 잘못으로 인해 그렇게 될 수도 있고, 그 누구의 잘못이 아닐 수도 있다. 약물의 남용, 형편없는 업무 습관, 적은 교육기회, 병약한 신체, 상류층에 집중되어 있는 자원, 인종차별 등과 같은 수많은 장애물들이 개인, 가족, 공동체, 그리고 사회 전체가 하나님과의 동반자 관계 속에서 함께 식량을 생산해내는 것을 어렵게 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타락한 세상에서 공급하심과 재물을 향한 하나님의 본래 의도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크게 방해받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필요한 공급도 받지 못한다

목차로 돌아가기

   전 세계적으로 약 14억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고 있으며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공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이 밖에도, 간신히 입에 풀칠만 할 정도로 생계만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11억 명에 달한다.[1] 이렇게 전 세계 인구의 40%에 가까운 이들이 경제적 빈곤으로 인해 힘들어하고 있다.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본 것처럼, 이 같은 현실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 아님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매일같이 가난에 시달려야 하는 것일까?

 

   모든 것이 공평한 세상에서는 현명한 선택이 공급하심과 재물로 이어지고 잘못된 선택이 가난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원인과 결과가 확실하게 나타나는 세상에서 다음과 같은 잠언의 진리는 논리상의 오류가 전혀 없다. "모든 수고에는 이익이 있어도 입술의 말은 궁핍을 이룰 뿐이니라."(잠14:23) 게으름, 헛된 사치, 형편없는 자제력, 그리고 중독적인 행동 등은 자연스럽게 빈곤으로 이어진다. 그 반면에 근면함, 현명한 소비생활, 강한 자제력, 그리고 중독으로부터의 자유 등은 부유함으로 이어진다. 이는 오늘날 전 세계 수백만 또는 수십억에 달하는 사람들에게 해당될 수도 있다. 즉, 그들의 상대적인 부와 빈곤은 그들이 어떠한 결정을 내렸는지,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또는 어떠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등에 크게 기인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자원 및 교육의 접근기회를 얻을 수 있는 매우 안정된 사회가 있다고 하자. 그리고 질병, 재난, 가족의 역기능, 범죄, 사고 등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때, 이 사회의 구성원들의 개인적인 부와 가난은 아마도 개인적인 노력에 따른 공정한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살고 있는 이 세계는 그러한 공평한 경쟁 환경과는 거리가 멀다. 타락한 세상은 공평하지도, 공정하지도 않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모두 다른 시작점에서 출발한다. 가족, 공동체, 그리고 사회 환경으로 인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세상의 기회가 좌우된다. 어떤 이들은 부유한 국가에서 사랑과 보살핌이 넘치는 가정의 자녀로 태어나 수많은 능력과 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자원이 매우 부족한 환경에서 태어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자급자족할 수 있는 기본적인 자원마저 공급받지 못한다.

 

   빈곤이 대부분 인류가 범한 일종의 죄 또는 실수의 결과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부족한 자원과 재물로 어려움을 겪는 것이 전부 그들 자신만의 죄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형편없는 정부, 전쟁, 부정부패, 권력에 의한 착취, 교육과 훈련의 부족, 가정 및 사회적 병폐 등으로 인해 사람들은 그들의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자신의 잘못은 하나도 없지만 충분한 자원을 공급받지 못한다. 특히, 이러한 공급의 부족은 종종 사회 또는 개인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죄에서 기인한다. 즉, 가난한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지은 죄의 희생자라는 것이다. 가령 어느 폭군이 어느 한 가족의 땅을 압수해 그들이 더 이상 농작물을 생산하지 못하게 한다든지, 어떤 공장이 힘없는 노동자들을 착취하며 최소임금도 보장해주지 않고 이에 반발하는 이들을 협박한다든지, 부유한 지주가 울창하고 거대한 숲의 나무들을 베어내어 강의 하류에서 거주하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홍수의 위험으로 몰아넣는다든지, 어떤 남편이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이 가난에 허덕이는데도 도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든지, 사기와 속임수로 인해 투자에 실패해 가족들이 미래를 위해 힘들게 모아두었던 재산을 모두 날리는 경우 등등이 모두 그러한 예가 된다.

 

   그렇지만 모든 가난이 죄의 결과는 아니며, 어떤 특정한 사람이 지은 죄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누구의 잘못이 아닌 장애, 질병, 나이 등과 같은 다른 요인들로 인해 자급자족하지 못한다. 구약에서는 특히 과부, 고아, 그리고 이방인 이렇게 세 부류의 사람들이 약자로 묘사되고 있다.[2] 이를 내다보고 히브리 법은 이러한 약자들이 필요한 식량을 공급받을 수 있도록 하는 규정을 지니고 있다.[3] 예언서를 대표하는 인물인 스가랴는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스7:9-10)라고 말하고 있다.[4]

 

   또 다른 종류의 가난은 천재지변으로 인해 생겨난다. 지진, 쓰나미, 가뭄 또는 홍수 등의 자연재해는 공동체를 전부 황폐화시키고 농작물과 집, 소유물, 생계수단 등을 눈 깜짝할 사이에 파괴해버린다. 그 예로, 2004년 인도네시아 해안과 동남아시아 일부를 휩쓴 복싱 데이 쓰나미로 인해 25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이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었고 자급자족할 수 있는 방편을 전부 잃어버렸다.

 

   따라서 많은 요소들이 작용한 결과로 나타나는 개인의 부유함 또는 궁핍함에 대해 마음대로 추측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일부는 개인 스스로가 자초한 것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범위에서 일어난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성경은 굉장히 현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이는 "부와 가난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는 개인이 자초한 것이라고 일컫는 부분은 잠언 전체의 1/3도 되지 않으나, 나머지 부분은 전부 사회경제적 정의와 그 문제를 인식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주목하기도 한다.[5] 따라서, 성경이 부유함과 가난함을 어떠한 원인과 결부시키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성경은 가난의 구체적인 이유를 밝혀내는 데 치중하기보단 부유한 이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의무, 즉 가난한 이들에게 베푸는 의무에 대해 더욱 많은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많은 이들이 재무을 탐하고 부유해지지만 결국 자신에게 큰 해만 끼친다

목차로 돌아가기

   하루하루 끼니를 겨우 연명해나가는 수십억 명의 사람들과 대조적으로, 이 세상에는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고도 남을 만큼 풍족한 재산을 지닌 사람들이 있으며 이들은 얼핏 보기에 큰 축복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또 경제적으로 보면 이는 틀린 말도 아니다. 하지만, 부유한 개인, 가정, 공동체, 국가 등은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르기 마련이며 그 대가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도 생겨난다. 이제 공급이나 재물을 지닌 이들, 또는 이들이 재물을 얻기 위해 착취하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 여러 상황들을 살펴보자.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재물은 해롭다

목차로 돌아가기

   어떤 국가 지도자들은 착취, 무력, 부패, 갈취 등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 또는 부를 얻는다. 잔혹한 독재자 및 정권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빼앗으며 국민들을 무력과 협박으로 탄압하고 다른 이들이 생존하기 위해 몸부림칠 때, 자신들은 호화로운 삶을 살아간다. 버마, 짐바브웨, 리비아 등 이러한 국가들은 수도 없이 많다.

 

   어떤 다국적기업들은 최대한의 이윤을 남기기 위해 노동이 값싼 시장을 착취하고, 절실한 이들에게 위험한 근로 환경을 강요하거나 현지 생태계를 파괴한다. 이렇게 사람들과 그 지역을 해치면서 얻은 이윤은 본국 규제기관들의 감시망을 피하며 해당 제품을 구매하는 소비자들도 이를 알지 못한다.

 

   어떤 개인과 조직은 개인투자자에게 사기를 치거나 속임수를 써서 이들이 그 과정에서 큰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무시한 채 굉장히 큰 위험을 떠안게 만든다.

 

   이 같은 경우는 다른 이에게 해를 가하면서 자신은 이득을 취하는 방법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러한 부당함은 종종 "재물, 권력, 또는 식량을 향한 강력하고 자기중심적인 열망"과 같은 욕심으로 인해 비롯된다.[6]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교회에 있을 때, 그는 이러한 문제에 맞서 디모데전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9-10)

 

   그러한 욕심은 우리 자신의 영적 상태를 해치고 다른 이들을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만드는 것 이외에 다른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 예로, 탐욕은 환경을 파괴하기도 한다. 즉, 지구를 심하게 파괴하여 궁극적으로 다른 이들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에 악영향을 미치고, 모든 사람들이 앞으로 생산해낼 수 있는 식량도 줄어들게 된다.

 

   안타깝게도,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부정한 방법으로 부유해진 사람들이 꽤 있었다. 사실 예언서가 전하는 메시지 대부분도 이스라엘 내 권력 있는 부유층이 저지르는 경제적 부당함을 겨냥해 쓰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모스, 미가, 그리고 예레미아와 같은 대변자들을 통해 우리가 만일 이웃을 착취함으로써 부를 축적한다면 우리의 예배는 무의미하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우리가 이웃을 대하고 일을 할 때도 실제로 그런 모습이 반영되어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에 심판이 내려졌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며"(암2:6) 이러한 질책은 언약적 책임을 어긴 이스라엘이 응당 받아야 할 결과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품은 변함없는 사랑, 공의로우심, 그리고 의로우심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7] 즉,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은 언약공동체에서도 나타나야 하는 필수적인 요소임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약자를 포함한 사회의 모든 일원이 자원을 얻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언약적 책임 중 하나였다.

 

   애석하게도 공정하고 정의로우며 인정을 베푸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법체계는 도외시되고 무시되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샬롬(‘평화’를 뜻하는 히브리어_역자 주)을 본보기로 따르기는커녕, 억압과 권력 남용의 소굴이 되었으며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노골적으로 무시해버리는 등 다른 국가와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 부자들은 땅의 대부분을 소유하게 되었으며 (이는 레25:25-28을 위반함), 소작농들에게 이자를 받고 빌려주었고 (이는 신23:19-20에서 금하고 있음), 이는 채무불이행으로 이어졌다. 또한 부자들은 뇌물로 사법제도를 왜곡시켰다. 그 결과, 생계를 이어나기 힘들었던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을 팔아 노예가 되었다.

 

   이에 따라 선지자 아모스는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5:24)라고 간청하였다. 미가는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돈을 벌고, 다른 이들을 고용하거나 관리하며, 사업을 하고, 투자를 하며 돈을 소비하는 방식은 정의로울 수도, 또는 부당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분리할 수 없다. 우리는 부를 추구하기 위해 남을 착취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당한 재물도 여전히 해가 될 수 있다

목차로 돌아가기

   모든 부의 축적이 부당함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재물을 정당한 방법으로 얻었다고 하더라도, 이 역시 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많은 성경 구절은 독자들에게 재물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들면서 이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부유함은 온갖 종류의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부는 교만과 오만으로 이어질 수 있다. 잠28:11은 이렇게 말해주고 있다. "부자는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나 가난해도 명철한 자는 자기를 살펴 아느니라." 이처럼 부유한 사람들은 그들이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재물을 얻었다고 믿기 쉽다. 에스겔은 두로의 왕에게 이렇게 경고하지 않는가. "네 큰 지혜와 네 무역으로 재물을 더하고 그 재물로 말미암아 네 마음이 교만하였도다."(겔28:5)

 

   두 번째로, 재물은 종종 자족감, 안일함, 그리고 잘못된 안도감을 불러일으킨다. 하나의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호12:8에서 볼 수 있는 에브라임의 자만이다. "에브라임이 말하기를 나는 실로 부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는데 내가 수고한 모든 것 중에서 죄라 할 만한 불의를 내게서 찾아 낼 자 없으리라 하거니와" 그리고 바로 다음 장에서는 호세아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을 묘사하며 굉장히 안타까운 어조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이 먹여준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르니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 이로 말미암아 나를 잊었느니라."(호13:6). 예수님께서도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하시면서, 재물이 우리에게 주는 그릇된 안도감의 위험에 주목하신다(눅12:13-21). 우리는 배가 부르고, 삶이 평온하며, 미래가 보장되었다고 느껴질 때, 더 이상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쉽다.

 

   세 번째, 재물은 어려운 상황에 처한 주변 이웃들에게서 우리의 관심을 거두고, 이들에게 연민을 느끼고 자비를 베풀지 못하게 막는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이야기해주셨다(눅16:19-31). 나사로라는 거지가 어떤 부자의 대문 앞에서 굉장히 궁핍하게 살아가고 있었는데, 그 부자는 나사로의 고통에 눈도 깜짝하지 않고 자신의 생활과 사치스러운 소비생활을 계속하였다. 공교롭게도 이 부자는 죽어서까지 자신만의 필요를 채우는 데만 집착하며 나사로를 여전히 하수인 취급하고 있다.

 

   네 번째는 우리가 그 모든 것 중에서도 가장 빠지기 쉬운 것으로, 재물의 유혹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마음을 둘로 나눈다. 다음은 돈이 지닌 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성경 말씀이다. 시편 기자는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시62:10)라고 우리에게 경고한다. 재물의 위험은 신명기 8:12-17에서 다음과 같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 조심스럽게 설명되고 있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말씀이 아니겠는가? 어쩌면 그러한 이유로 잠언 30장에서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간청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잠30:8-9)

 

   이러한 재물의 위험은 신약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예수님께서 하신 다음 말씀에서 주님의 생각이 어떠한지 알 수 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6:24)

 

   여기서 재물을 표현하는 데 사용된 단어는 맘몬(mammon)이다. NIV 성경과 같은 일부 번역본에서는 예수님께서 재물을 신으로 표현해 하나님과 대적하는 관계로 나타냈다 해서 이를 대문자로 쓰기도 한다. 하나님과 재물은 모두 충성과 찬양을 추구한다. 부는 중립적이지 않다. 재물은 만족할 수 없는 속성을 지닌다. 만약 재물을 조금 얻었다면, 계속해서 점점 더 많이 갖고 싶어진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젊은 부자 청년과 만나신 후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마19:23-24)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위험한 것으로 보신다. 이는 마치 다이너마이트와 같아서 굉장히 선하게 쓰일 수도 있으나 동시에 큰 해를 끼칠 수도 있다. 그리고 더 많이 가질수록, 그에 따르는 위험 또한 같이 커진다.

 

   다섯 번째로, 공급하심과 부를 얻는 것은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불만을 키울 수 있으며, 이에 따라 더 많은 부를 갈망하게 된다. 질투와 탐욕은 우리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진 이들과 우리 자신을 비교하면서 생겨난다. 우리는 더 많은 재산을 축적하고 소비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인해 쉽게 조종당할 수 있는 무방비 상태가 된다. 1929년 경, GM의 간부였던 플로이드 앨런(Floyd Allen)은 사뭇 직설적으로 말했다. "광고란 사람들이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나은 것을 원하도록 만드는 사업이다."[8]

 

   최근에는 사회학자 버나드 맥그레인(Bernard McGrane)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광고에는 이런 메시지가 숨어 있다. "있는 그대로의 당신 모습은 문제가 많다. 이거 심각한 수준이다. 그러니 당신은 도움이 필요하다. 당신은 구원이 필요하다." 그러한 맥락에서 광고는 끝없는 자기비판과 온갖 종류의 걱정을 하도록 종용하고 있으며, 그런 다음 ‘구원’을 위해 필요한 소비재를 모든 사람들에게 권한다. 우리가 절대 접할 수 없는 광고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광고다. "당신은 괜찮다. 당신은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다. 그저 당신 자신이 되어라.”[9]

 

   우리는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원한다. 우리가 더 많은 것을 갈망하도록 우리의 욕구를 훈련시켜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어느 정도가 충분한 것인지 인식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작업이다. 다음 구절처럼 야고보 또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했을 것이다.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약 4:2-3)

 

   여섯 번째, 우리는 미래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재물에 대해 근심하고 걱정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실제로 많이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속에만 이러한 걱정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많이 가진 사람들도 대부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러한 걱정을 키워간다. 기본적으로 생계에 필수적인 재물보다 더 많이 지니게 되면 혹시라도 재물을 잃을까봐 근심하는 마음 역시 커지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충분한 부를 갖지 못할까봐 두려워 불필요하게 오랜 시간 일하면서 자녀들에게 최신 기기나 화려한 옷을 사주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변명하지만, 실제로 자녀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부모의 관심과 함께하는 시간이다. 또 다른 이들은 노후를 위한 자금을 충분히 마련해놓지 못할까봐 두려워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들은 현 시점에서 하나님과 이웃들을 섬기는 일이나, 깊고 의미 있는 관계를 맺는 것, 또는 균형 잡힌 삶을 희생하면서 미래를 위한 자금을 준비하고자 한다.

 

   또 다른 이들은 어떤 투자항목이 과연 안전한지 걱정하거나, 또는 어떻게 자신들이 원하는 집 또는 차를 마련할 것인지 꿈꾸면서 밤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한다. 이처럼 사람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돈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가장 많은 근심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걱정 때문에 사람들은 평소 같으면 하지 않았을 사기도 치고, 정직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며, 우정을 희생하거나 그들의 가치를 위태롭게 하는 것일까?

 

   기본적으로 필요한 공급보다 더 많이 갖는 것은 오히려 짐이 될 수 있다. 이에 대한 적절한 예로 마태복음 6에서 생계를 겨우 이어나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아는 군중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유명한 말이 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1-33)

 

   이는 예수님께서 굉장히 강하게 주장하신 말씀이다. 만약 미래의 경제적 상황이 불투명하다면, 그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의존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토머스 라이트(N.T.Wright)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본을 보이심으로 제자들의 삶을 이끌어 주셨음을 알아야 한다."[10] 따라서 만약 "그러한 점에 있어 하나님을 정말로 의지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우리는 적어도 단 한 명은 그렇게 믿었다고 답할 수 있다.

 

 

경제권 되찾기

목차로 돌아가기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본래 의도는 그분의 공급과 재물을 누리는 것이었지만, 이것이 방해를 받았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 세상의 물질과 부가 부족함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경제권을 다시 되찾아주심으로써 모든 이들에게 필요한 자원을 공급하고자 하신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1:19-20)

   여기서 "만물"은 경제권을 포함한다.

 

   하나님께서는 결정적인 방법인 예수님 제자들의 삶을 통해 이러한 구속을 행해 보이셨다. 골로새서에 다음 내용이 이어진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1:21-22)

 

   또한,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설명하고 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고후5:17-20)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경제적인 것을 포함해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친다. 위의 구절에서 사신이라 함은, 그들의 통치자가 지닌 다른 모든 관심사와 함께 경제적인 관심사도 나타낸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사신이자 구속의 동반자로서 우리가 지닌 역할은 무엇일까?

 

공급하심과 부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기르고 이를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

목차로 돌아가기

   우리의 재정적인 자원의 사용권을 되찾는 일은 올바른 행동으로 이어질 성경적 태도를 기르면서부터 시작된다. 가장 근본적인 성경적 태도로는 위탁감사, 그리고 만족이라는 세 가지가 있다

 

소유의 태도에서 위탁의 태도로

목차로 돌아가기

   하나님께서는 최초의 인류에게 에덴동산과 그 안에 사는 모든 피조물들과 식물들을 관리하라고 명령하셨다. 이를 "창조 명령"이라 불리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경영하는 일상적 업무를 아담과 이브와 함께 나누신 것이다. 아담과 이브는 스스로를 창조 질서의 관리자로 여겼어야 했다.

 

   이러한 위탁 관계는 우리가 소유한 것, 우리가 거주하는 것은 모두 궁극적으로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라는 원리에 입각해서 세워졌다. 소유주는 하나님이시며 그분의 목적에 따라 일을 행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경영을 위탁하신 것이다. 시편 기자가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24:1)라고 말했듯이 말이다. 이는 다윗 왕이 성전 건축을 위해 필요한 자금을 모은 후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올린 기도를 통해서도 볼 수 있다. “...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29:14 ) 우리는 돈, 재산, 기업, 능력, 물리적 환경,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Copyright © KASDA Korean American Seventh-day Adventists All Right Reserved admin@kasd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