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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재림 교회사 -2] - - - 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3 - (원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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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재림 교회사 -2] - - - 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 - (원제목)


목사 유형환 (전 한국 연합회장-편집자 주)
3. 정 동심 목사의 약력


(*아버님의 약력은 아버님께서 손수 작성하신 것입니다.
아버님의 일기장과 기억력에 의존하셨을 것이라고 추축이 됩니다. )

* 1896. 3. 30. 본적지 평안남도 강서군 수산면 운북리 386번지에서
부친 정 석문, 모친 이 섭련 씨의 3남, 유복동으로 출생
(음력 2월17일)
* 1907. 4 - 1911. 8출생지 소재 한문 서당에서 한문 공부 수료
* 1910. 6. 안식일 교회 출석 시작
* 1913. 3. 21 .출생지 소재 안식일 교회 소속 진명 학교 제 1회 졸업
* 1913. 8. 15 노설 목사로부터 침례를 받음
* 1913. 11. 20. 곽치겸 양과 결혼
* 1917. 3. 21. 순안 의명 학교 제 5회 졸업
* 1917. 7. - 1918. 3. 문서 전도에 종사
* 1918. 4. - 1921. 3. 평남 강서군 성태면 대마리 소재 희명 학교 교사
및 교장으로 근무
* 1919. 4. - 1921. 3. 조도전 대학교 교외생 법과 수료
* 1922. 3. 21. 순안 의명 학교 신학과 수료
* 1922. 4. - 1923. 3. 황해도 황주군 삼전면 철도리 홍명 학교 교사로 근무
* 1923. 4. - 1924. 4. 평북 의주군 옥산면 좌동, 평남 영유 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
* 1924. 5. - 1929. 5. 북간도 삼도구, 투도구, 북간도 용정에서 선교함
* 1929. 6. - 1931. 3 함경남도 원산, 함경북도 청진에서 사역
* 1931. 3. 조선 합회 행정 위원으로 피임됨
* 1933. 2. 10. 목사 안수 받음
* 1934. 6. 북선 대회장으로 피임됨
* 1934. 10. 11 아내 곽치겸 여사 장질부사로 별세함
* 1935. 2. 25. 김병애 여사와 재혼함
* 1939. 6. 중선대회장으로 피임되어 서울로 전임
* 1941. 4. 11. 충남 화강리 교회에서 검거되어 청양경찰서와
홍성경찰서에 수감됨
* 1941. 9. 홍성 재판소 선고에 항고하여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
* 1942. 2. 19 6개월 징역 선고받음, 항고 기각 당함
* 1942. 8. 19 화강리 교회에서 검거 된지 16개월 8일 만에 출감
* 1943. 4. -1944. 7 서울 위생병원 총무로 재직
* 1944. 8. - 1945. 8. 서울 동대문구 여관 조합 총무로 근무
* 1945. 8. - 1945. 10. 교회 재건위원회를 조직하고 재건위원으로 종사
* 1945. 10 - 1946. 3 시조사 및 서울 위생 병원 총무로 재직
* 1946. 4. - 1952. 6 원동 지회 부회장으로 피임됨
* 1946. 4. - 1947. 8. 중선 대회장과 한국 연합회장 대리로 근무
* 1947. 9. - 1953. 8 남선 대회장으로 재직
* 1950. 6. 미국 상항에서 열린 안식일 교회 46회
세계 총회 한국 대표로 참석
* 1951. 1. 한국 교회 대표로 원동 지회 총회 참석(싱가폴)
* 1953. 9. 삼육 신학 원장에 취임
* 1954. 4. 한국 삼육 고등학교 교장에 취임
* 1955. 4. -1956. 6. 삼육 신학원 남 기숙사 사감으로 재직
* 1956. 6. 중한 대회장에 취임
* 1957. 12. 영남 대회장에 취임, 원동 지회 총회 한국대표로 참석.
* 1960. 1. 한국 교회 대표로 원동 지회 총회 참석-홍콩
* 1961. 6 한국 연합회 재단 이사장에 취임
* 1964. 4. 정년퇴직
* 1964. 5. - 1965. 4 면목동 모의 보육원 교회 예식 담당 목사로 취임
* 1965. 11. 21 자녀들의 초청으로 도미
* 1966. 7. - 1967. 6. 나성 중앙 교회 제 2대 담임 목사로 재직
(본인의 요청으로 자급 사역자로 재직함)
* 1986. 11. 4. 아내 김병애 여사 별세
* 1992. 2. 22 정동심 목사, 안식일 아침 96세로 주안에서 수를 다 하심.
슬하에,
장 남태혁자부임 명신장 녀진실사위김 성래
차 남태영김 기련차 녀충실명 윤수
3 남태중김 학경3 녀제후최 석범
4 남태목김 인숙4 녀정실
5 남태국정 문자5 녀경실
6 남태경
외에 수십 명의 손자, 손녀, 증손자, 증손녀를 두셨습니다.
(*아버님의 글과 녹음해 주신 육성 테잎의 말씀 위에 제 말을 더
첨부 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막상 글을 편집하여 올리면서 상당히
예민한 부분들은 삭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양해 하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아름답지도 못한 투박한 글을 읽어 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아버님께서 저희 집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한동안
칼리포니아에 계신 저희 막내 누님댁에 한동안 거하셨습니다.
2011년 제가 수술을 받은후에 저를 방문하신 막내 누님께서
아버님의 유품을 몇 점 가지고 오셔서 전해 주셨습니다.
그 속에 아버님의 노트북이 한권 있었는데 원래 미주 시조사에
원고를 보내시고 나서 그 원고에 첨부할 글을 더 쓰신 것이었습니다.
물론 녹음 테이프의 내용과 중복되는 글도 있지만 새로운 사실들도 있었습니다.
제가 몸이 회복되면 편집하여 다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원래 50회에 걸쳐 연재되도록 편집을 했었지만 좀 일직 끝내고 싶어
좀 길게 올려서 33회에 끝내게 되었습니다.
어떤 분들께는 매회의 분량이 좀 길었다고 느끼셨으리라 사려 됩니다.
그 점도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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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 #3

제 2부. 배움의 길과 가르침의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

*(1913년 3월, 네 명의 학생이 진명학교 제일회로 졸업을 하게 되었다.
내 나이 만 17세였다. #2의 끝 부분)

1. 순안 의명학교

교회 소학교를 졸업한 학생은
누구나 순안 의명중학교로 진학하는 것이 소원이었다.
허나 거리상으로나 경제적인 면에서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나도 학비조달관계로 진학하기는 도저히 불가능한 형편이었다.
어려운 형편에 형님들을 제쳐놓고 소학교를 다닌 것만 해도
감지덕지 한데 중학교를 가겠다는 말을 하기가 정말 어려웠으나
진학하고 싶은 마음에 많은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는 식구들이 다 모인 때에 어렵게 청을 드렸다.
"어머님, 형님, 그간 교회 소학교에서
신학문을 공부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왕 시작한 공부, 중학교도 다니게 해 주신다면
힘을 다해 공부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
두 형님은 어이가 없는지 말씀 한마디 없이 천장만 쳐다보셨다.
막내인 나는 또 어머님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가정 형편이 힘든 것 알지만
허락해 주시면 힘을 다 해서 해보겠습니다."
"유복아! 네가 진학을 원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그 많은 학자금을 어디서 구한단 말이냐?"
"어머님! 진학만 허락해 주신다면 노동을 해서
학자금을 대겠습니다. 허락만 해 주십시오!"
".................."
"어머님! 진학하는 것이 소원입니다.
제발 허락만 해 주십시오! 네?!"
"그래! 우리집안 형편은 유복이 네가 더 잘 알지 않느냐?
정말 노동해서 공부할 자신이 있겠느냐?
그렇다면 시작은 해보자꾸나!”
"어머님! 형님! 정말 고맙습니다.
제 힘껏 해 보겠습니다."
이때에 기쁜 마음은 하늘을 날을 것만 같았다.
지금도 어머님의 큰 은혜는 잊을 수가 없다.
순안 의명학교는 내 집에서 약 110리 떨어진
평안남도 평원군 순안면 포정리에 있었다.
안식일교회 계통의 소학교 졸업생은 무시험으로 입학했다.
4월1일에 학교가 시작한다 했다.


1913년 3월 하순,
아침 일찍 둘째형님 동로 씨와 함께 그 먼 길을 걸어
저녁 늦게 순안 의명학교에 당도했다.
하도 먼 길이라 형님께 “힘들지요?” 하고 물으니
“유복이 네가 여기까지 유학 온 것이 대견하고 기뻐서
피곤함을 모르시겠다.”고 했다.
내가 진학하는 것을 형님들이 못 마땅하게 생각하시는 줄로
알았는데 실은 경제적 문제로 걱정한 것뿐이었지
막내인 나를 사랑하고 대견하게 여기시고 계셨던 것이었다.
형님의 노고와 사랑이 너무 감사하고 눈물겨웠다.
이때 같이 입학한 이는 박기석, 정동성, 최경선, 송찬오, 이격원,
김병직, 정관신, 최경신, 김은수, 민채희, 김일세 제씨였다.


내가 여장을 풀어놓은 곳이 처음 들어보는 기숙사라는 곳이었다.
이 기숙사는 사각으로 된 집인데 열 개 정도의 방이 있었고
서남쪽으로 출입구가 하나와 서북으로 비상출입구가 하나 있었다.
나는 5호실에 배정되었는데 같은 방에 4학년생 강봉호,
고두칠, 김의목 세 사람, 전영역 씨가 삼 학년,
신입생으로 하동만 씨와 나, 6명의 학생이 한방에 있게 되었다.
하동만 씨는 진명학교 선생으로 있던 분이라 하여 당장 이 학년으로
편입이 되어 내가 결국은 유일한 신입생이 되고 말았다.
내 나이 17세가 되어 상당히 숙성되고 키가 크기 때문에
다른 학생들과 같이 잘 어울려 지났다.
또 한문을 잘한다고 인정을 해 주어
상급생들도 나를 홀대(忽待)하지를 못했다.


나에게 힘든 일이 있었다면 각 방별로
식사를 준비하는 일 이었다.
한사람이 일주일간씩 식사를 책임 졌는데 식량과 반찬,
땔나무까지 모든 것을 각 방 학생들이 준비해야 했다.
드디어 내가 음식 짓는 차례가 되었는데 집안에서 막내로 자라서
밥이나 반찬을 만들어 보기는커녕 쌀을 일어 보지도 못했으니
밥이 돌투성이요, 거기다 아래는 타고 위는 설어 버린 것이 아닌가?
우리 방 학생들이 조반을 못 먹고 학교에 가게 되었으니
얼마나 창피하였던지 말할 수가 없다.
그러나 한 가지씩 배워서 조금씩 해 나갔다.
그래도 겨울을 나기 위해 담근 김장은 우리 5호실이
제일 잘했다는 평을 들었으니 신기하다.


한 번은 밥도 잘 못하는 우리가 좁쌀떡을 해 먹기로
의기투합하여 의논 끝에 좁쌀을 불려 갈기까지는 잘했는데
그 후에는 어찌 할 줄을 몰라 내 생각대로 재를 퍼서 담아놓고
그 위에 보자기를 펴고 그 위에 좁쌀을 갈아서 만든,
물이 흐르는 반죽을 퍼서 놓으면 된다고 했더니
방원들이 다 옳게 여겨 그리 하였다.
이렇게 걸러진 가루덩이로 떡국대를 만들자하여
막대기 같이 딱딱한 좁쌀 떡국대가 만들어 졌다.
여기까지는 잘 됐는데 “이 딱딱한 좁쌀 떡국대를
뜨거운 물에 잠깐 삶으면 된다.”고 했으나 모든 방원들은
“처음부터 물에 떡 덩어리 넣고 끓여야 할 것 같다”고 해서
처음부터 물에 넣고 끓이니 떡덩이가 모두 풀어져
떡 물이 되어 버렸다.
즉 좁쌀 떡 죽이 되 버린 것이다.
저녁은 굶고 그 떡 물을 큰 보시기에 퍼 놓고
이튿날 점심때에 떡 먹고 싶으면 5호실로 오라고 했더니
모든 학생이 숟가락을 가지고 와서 그 물 떡을 맛있다고
삽시간에 다 퍼먹은 웃지 못 할 일도 있었다.
한창 배가 고픈 때의 이야기이다.


나는 어머니와의 약속대로 많은 시간 노동해서
식비와 학비를 거의 벌어 썼다.
그래서 나는 간단한 금전출납부를 만들어서 세세히 기록하여
적지만 손수 십일금도 드리게 된 것은 큰 기쁨이었다.
한 번은 여름방학 직전에 어떤 상급생이
나에게 돈을 1원 50전만 꾸어 달라했다.
그래서 꾸어 주고는 금전출납부에 기입했다.
개학 후에도 돈을 안 갚기에 독촉한즉 돈 꾼 적이 없다고 했다.
나는 증명할 길이 없어 금전출납부를 보여주니
“네가 금전출납부 중간에 거짓 기록했을 리가 없으니
갚아 준다.” 하면서 돈을 갚았다.
그때부터 나는 평생 간단한 금전출납부를 손수 만들어 기록해 왔다.


내가 집에서 소죽 만들다가 손가락 마디 하나를 잃기는 했으나
그래도 그것이 경험이라 하여 나는 노동으로 처음에
소죽 만드는 일을 해서 학비 얻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삼 학년 때는 주로 등사 일을 하고
졸업학년에는 예배당과 교실 소제(청소)를 했다.
등사나 교실 소제는 상당히 신망 있는 학생에게 준다고
알려져 있어서 마음 뿌듯하게 일했다.
그러나 학비를 벌고 자취생활을 해야 하는 기숙사 생활은
바쁘고, 어렵고, 기쁘기도 했다.

나는 믿음생활의 일부라 생각하고 십일금도 정성껏 바치고
채식도 했는데 여러 면에서 학우들은 나를 신임해서
학생들 사이에 다툼이 있다가도 내가 중재하면
내 말을 어려워하면서 잘 듣는 것을 보고 감사했다.
그러나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번은 기숙사에 절도 사건이 일어났는데
사감선생이 상급학생을 모아놓고 누가 이 절도질에
관계가 되었을까 하고 의견을 물은즉 어떤 상급생이
나를 혐의자 중에 한사람으로 말했다는 것을 듣고는
사감을 찾아가서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지 모른다.
얼마 후, 그 일 저지른 학생이 탄로 나서 해결되었지만
나는 얼마동안 마음에 큰 타격을 받았다.


학교생활은 상당히 바빴고 힘들었다.
학생들이 일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오후에는 수업이 없었다.
아침 6시에 기침, 밤 10시에 취침,
아주 규칙적이고 바쁘지만 재미와 보람이 있었다.
매일 4시간씩 노동한 임금으로
식비와 학비는 거의 해결이 되었다.
내가 삼 학년 되는 때에 한식 장방형 기와집으로
기숙사 한 채를 더 짓고 자취제도대신
식당에 식모를 두고 공동식사를 했다.
60여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공동으로 식사를 하게 되니
나이든 어른 같은 중학생들 중에는 말썽을 부리는 학생도 있었다.
어떤 나이 많은 학생은 공공연하게 밥을 밥상에 버리고
나가는 이도 있었는데 하도 나이가 많아 직접 대고 말은 못하고
사감선생은 밥상에 밥을 버리는 학생이 없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까지 드리는 웃지 못 할 일도 있었다.


순안 의명 학교에서의 기숙사 생활은 나에게 전에 경험할 수 없었던
많은 인간적인 배움과 신앙의 아름다움을 얻게 했다.
의명학교는 중학과정이고 교실도 초라하기는 짝이 없었지만
당시에 안식일 교회의 유일한 최고의 교육기관인지라
많은 학생이 전국에서 찾아왔다.
학교는 석박산 골짜기에 재래식 기와집인데
장방형 네 칸짜리 집이었다.


교사는 8명으로 서양인 2명, 일본인 1명, 본국인 5명이었고
우리는 주로 한문과 성경을 공부했다.
내가 입학할 때 학생 수는 한 40명으로 남녀 공학 이었다.
나의 반은 남자 8명, 여자 4명으로 시작했으나
2학년 때에 보결생 두 명이 들어오고 한 명은 낙제를 해서
2학년 때부터 13명이 되어 모두 함께 졸업했다.
이때는 말이 의명중학교지 신학교(神學校)나 다름없는 분위기였다.
또 남녀공학이지만 남녀 학생에 대한 감시는 대단해서
예배드리는 때에는 남녀 학생이 좌우로 앉고 가운데는
휘장으로 막아서 서로 얼굴도 볼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졸업할 때까지 남녀 학생은
피차간에 말을 건네어 본 적이 없었다.


학생들은 기숙사에서 드리는 조석예배는 물론 화요일, 금요일,
안식일 예배에 참석률도 거의 100%에 가까웠다.
또 인상에 남는 일은 학생 모두가 졸업하면 복음 전도자가 되겠다는
분위기여서 석박 산에서 개인기도하는 일이 많았다.
학생들은 멀리 제주도에서부터 함경 남북도 에서 왔는데
학생수의 증가로 순안에 가장 중심 되고
경치 좋은 곳에 부지를 정하고 1913년 여름에 기공하여,
붉은 벽돌로 같은 해 10월에 준공을 했다.
온 학생들이 새 교실에서, 새 기분으로 공부하게 되었을 때의
그 기쁨을 지금도 잊을 수 가없다.
이때 학교제도는 한 학년을 3학기로 나누었는데, 4월부터 7월이 1학기,
9월부터 12월이 2학기, 1월부터 3월이 3학기였다.
7월에 방학이 시작되면 대부분 집에 돌아가지 않고
학비를 위하여 노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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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무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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