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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재림의 소망! 부활의 소망! 주님 계신 가정, 행복한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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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재림의 소망! 부활의 소망! 주님 계신 가정, 행복한 가정! 

데살로니가 전서 4:13-17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 잠자는 성도
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헬라어 코이마오(koimao-), “자다”, “죽다.” “잠들고 있다”라는 뜻
죽은 자들은 부활의 아침을 기다리면서 자고 있는 이들 
요한복음 11: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잠들었도다
헬라어 코이마오(koimao-). 일상적인 잠(마 28:13; 눅 22:45 등)과 죽음의 잠(마 27:52; 고전 7:39 등)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 제자들은 예수가 일반적인 잠을 말하는 것으로 오해했다.
다음의 비교를 통해 잠이 죽음을 나타내기에 타당한 것인지 살펴보자. 
(1) 잠자는 동안 우리는 무의식 상태에 있다.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전 9:5, 6). 
(2) 잠자는 동안 우리는 삶의 모든 활동으로부터 쉼을 누린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 9:10). 
(3) 잠자는 동안에는 의식을 가지고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그 호흡이 끊어지면…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시 146:4). 
(4) 우리는 깨어날 때까지 계속 잠을 자게 된다. 
    “사람이 누우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하늘이 없어지기까지 눈을 뜨지 못하며…”(욥 14:12). 
(5) 잠을 자면 깨어 있는 자들의 활동에 동참할 수 없다. 
    “행하는 모든 일에 저희가 다시는 영영히 분복이 없느니라”(전 9:6). 
(6) 우리는 잠잘 동안에 정서적인 활동을 멈춘다. 
    “그 사랑함과 미워함과 시기함이 없어진 지 오래니…”(전 9:6). 
(7) 누구에게나 잠은 일상적이며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전 9:5). 
(8) 잠자는 동안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멈추게 된다.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시 115:17; 참조 사 38:18)

전도서 9:5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바 됨이라 

산 자는 죽는 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죽은 자는 의식이 없고 
상도 받는 것이 아님으로 무슨 천당 가서 상을 받는 것도 아니다 

소망 없는 
 비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과 같은 소망이 없다. 불신자는 죽음 후에 생명을 기대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 그에게는 죽음이 끝이 될 수밖에 없는데 이는 그가 죽음의 속박을 깨뜨리고 죽은 자들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능력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자신과 자신의 추종자들을 위하여 죽음을 정복하신 분을 안다. 이와 같이 바울은 신자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주위에 있는 이교도 세계의 절망과 대비시킨다. 

다른 이와 같이 
 “그밖의 사람들과 같이”, 즉 비그리스도인들을 말한다.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데살로니가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죽은 동료들 때문에 지나치게 슬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아 있는 자들은 죽은 자들이 그리스도가 올 때 그리스도인들이 누리기를 기대한 영광스런 경험을 잃어버릴까 두려워했다. 바울은 이 오해를 제거하고 신자들을 위로하는 데 13~18절을 할애한다. 그는 부활의 소망이 슬픔의 원인을 제거해 주기 때문에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이 그의 죽은 형제 때문에 슬퍼할 필요가 없다고 설명한다. 바울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슬픔에 관하여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지 않다. 그는 그들이 절망적인 인간적 슬픔에 빠져들지 말고 주의 재림과 부활의 때에 있을 이별했던 사랑하는 자들과의 재연합을 기대하면서 머리를 들도록 가르친다. 

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그리스도인에게 확실한 부활의 소망을 준다(참조 요 14:19; 고전 15:20~23 주석). 그러므로 데살로니가인들은 사랑하는 자들이 죽을 때 절망하지 말아야 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무덤에서 나오게 했듯이 그리스도가 잠자는 성도들을 무덤에서 나오게 할 것이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사람의 영혼이 불멸이라는 것과 죽을 때 그것이 하늘로 올라간다고 가르치지 않는다(참조 마 10:28; 눅 16:19~31; 고후 5:2~8 주석).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일어나”지 “내려오”지 않는다. 살아남은 자들은 주와 함께 있는 것과 관련하여 그들보다 앞서지 못하는 것으로 묘사된다(15절). 모두 함께 왕국에 들어간다(17절). 
그의 가르침은 주의 가르침과 일치했다(참조 요 14:3 주석). 
요 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제자들에게 재림의 때가 주님과 재회할 순간으로 제시되었다. 이 말씀에는 신자들이 죽을 때 그들의 주님과 함께 있기 위하여 간다는 널리 보급된 교리에 대한 암시가 조금도 들어있지 않다. 또한 성경 어디에서도 이 교리를 지지하지 않는다. 바울 또한 신자들의 관심을 장엄한 재회의 순간인 재림의 때로 향하게 하였다(살전 4:16, 17).
  예수는 아버지의 집으로 갔다. 예수는 교회 안에서 자신이 구현되기를 애타게 바라며 기다린다. 그의 형상이 백성들에게서 완전히 재현될 때에, 그는 올 것이다(실물교훈, 69). 영광스러운 귀향을 촉진하는 것이 우리의 특권이다(벧후 3:12; 참조 시대의 소망, 633, 634,; 실물교훈, 69).



2. 예수 재림의 소망! 부활의 소망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강림 
 헬라어 파루시아(parousia). 참조 마 24:3 주석. 파루시아는 때때로 도시의 거리를 통과하는 승리의 행진을 경축하기 위하여 로마의 장군이 도착하는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그처럼 그 단어는 그리스도의 승리의 귀환을 묘사하기에 적절하다. 

 바울은 독자들에게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자는 자들보다 먼저 주님과 연합하지 않을 것을 확증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16, 17절). 이와 같이 살아 있는 성도들이 주 안에서 죽은 자들보다 우선권을 갖지 못할 것이다. 이 가르침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의 참 상태를 밝혀 준다. 그들은 구주의 오심을 기다리면서 자고 있다. 그들은 아직 그분과 연합한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들처럼,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려 온 주님과 연합하려고 재림을 기다린다(참조 요 11:23~25). 어느 부류도 다른 부류보다 우선하지 않고, 둘 다 그가 오실 때 주님에 의해 함께 이끌려져 영광에 들어갈 것이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부활하여 나오는 장소는 무덤이다 

(요5:28,29)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이 말씀은 천당 가서 자다가 깨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무덤에서 자다가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깨어라! 라고 명령하시는 음성을 듣고 깨어 일어난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주께서…친히 
 큰 위엄 중에서 인격적이요, 가시적이요, 육체적인 주의 나타나심이 여기에 명확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어떤 대리인을 보내지도 않고, 영적으로 오지도 않는다. 그는 자신이 친히 온다. 하늘로 올라간 동일한 예수가 이제는 하늘에서 내려온다. 그는 하늘로 가기 직전에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였다(요 14:3). 교회는 그가 구름을 타고 올라갈 때 “이 예수는…그대로 오시리라”는 보증을 받았다(행 1:9~11). 바울은 이 약속들을 되풀이해서 말하고 그것들이 성취되는 방식에 관하여 추가로 세부적인 사항들을 기록한다. 

호령 
 헬라어 켈류스마(keleusma), “명령”, “명령의 큰 외침.” 이 말은 신약에서 여기에만 나타난다. 성서 외의 저작들에서 켈류스마는 장교가 군대에 명령을 내리는 것과 전차의 전사가 말들을 채근하는 데 사용된다. 헬라어 구문으로 볼 때 그리스도가 명령을 내리는지 주가 강림할 때 어떤 다른 존재가 큰 소리로 외치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문맥상의 증거는 말하는 분이 그리스도임을 지지한다(아래의 “천사장”과 “하나님의 나팔”에 관한 주석을 참조하라). “호령”을 하는 명확한 이유는 여기에 제시되지 않았지만,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에 뒤이어 즉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소리가 울리는 것은 의인들의 부활의 예비단계로 간주될 수 있다(참조 요 5:25, 28, 29; 11:43). 그리스도는 승리를 선포하면서 하늘에서 온다. 그는 죽음과 무덤을 정복했다(계 1:18). 원수인 죽음은 구속받은 자들 중 어떤 사람도 그의 비정한 손아귀에 더 이상 쥐고 있을 수 없다. 죽은 의인들은 주의 명령에 반응하여 무덤에서 일어난다. 

천사장 
 헬라어 아르캉겔로스(archanggelos), “수석 천사”, “첫째 천사.” “장” 혹은 “높은 것”을 뜻하는 접두사 아르키(archi)와 앙겔로스(anggelos), 즉 “천사”가 합성되었으며, 그런 까닭에 “천사의 수장”이다. 아르캉겔로스라는 말은 신약에서 여기와 미가엘을 천사장이라고 말하는 유 9절에만 나온다. 본 주석은 미가엘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견해를 지지한다(참조 단 10:13; 유 ssalonians/4/9eS=Jude/1/9e; 계 12:7 주석). 이 해석은 그리스도가 내려올 때 천사장의 소리로서 그리스도의 음성이 발해지는 것으로 여길 수 있게 해 준다(참조 유 9절 주석). 

하나님의 나팔 
 이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어떤 특정한 나팔을 반드시 가리키지는 않으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사용하는 악기를 가리킨다. 구약은 실제이거나 예언이거나 간에 하나님의 주목할 만한 개입들과 관련하여 나팔을 빈번하게 언급한다(출 19:13, 16, 19; 시 47:5; 사 27:13; 욜 2:1; 습 1:16; 슥 9:14). 나팔은 또한 하나님의 백성을 소집할 때(민 10:2~4), 전쟁의 경고를 발할 때(5~9절), 국가적인 절기 때(10절) 사용했다. 신약에서는 나팔 소리가 택하신 자들을 모으는 일과 죽은 자들이 다시 일어나는 일과 연관되어 있다(마 24:31; 고전 15:52). 

강림하시리니 
 헬라어 카타바이노(kata- baino-), “내려가다”, “내려오다”, “내려가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는 신약의 어느 다른 곳에서도 사용되지 않았지만, 초림을 위해 인자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에 대해서는 사용되었다(요 3:13; 6:33, 38 등). 재림 때 그리스도의 내려오심은 그의 돌아오심에 관한 다른 성경 기록들 가운데 암시되어 있다(마 16:27; 24:30 등).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 
 접속사 “그리고”(and)는 하늘에 울려 퍼지는 소리에 동반되는 결과, 즉 죽은 의인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구약 시대의 성도들을 포함하여 믿음 안에서 잠든 자들이다(참조 롬 4:3; 고전 15:18 주석; 계 14:13). 그들은 예수가 “부활의 자녀”(눅 20:36)로 묘사한 자들 가운데 포함된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그들을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라고 부른다(고전 15:23). 그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은 “첫째 부활”에 해당한다(참조 계 20:5, 6 주석).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라는 구절은 다른 두 부류의 사람들과 자고 있는 성도들을 구분하기 위하여 여기에 사용되는데, 그 두 부류는 (1) 그리스도 재림 때에 육체로 다시 살아나지 못하는 죽은 악인들과 (2) 자신이 사랑하는 죽은 자들이 예수가 올 때에 불리한 상태에 처하지 않고 오히려 먼저 살아남으로 더 먼저 배려받고, 살아 있는 성도들과 동등한 입장에 설 것을 확신하는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다. 

먼저 일어나고 
 즉 살아 있는 자들이 공중에서 주를 만나기 위하여 끌어 올려지기 전에 먼저 일어나고(17절). 
***플라톤의 영혼불멸설(영원지옥설)은 성경의 부활신앙과 조화될 수 없다*** 
***죽지 않은 영혼이 어떻게 부활하나?*** 

***창조주 하나님을 전무후무한 폭군으로 전락시키는 비성경적 영원지옥설을 격파하는 남은 교회! 
종교개혁의 최후의 보루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 (창 2:17, 창 3:4, 전 9:5, 살전 4:13-18)*** 

사람이 죽은 후에도 영혼은 불멸불사한다는 영혼불멸사상은 에집트의 미이라, 플라톤의 헬라 철학, 모슬렘의 영원지옥설, 힌두교와 불교의 윤회설, 일본의 신도교, 한국의 무당, 무속신앙에 이르기 까지 세계 곳곳에 편만한 이교 사상인데, 헬라 철학에 물든 로마 천주교는 물론이요, 대부분의 개신교회에도 침투해 있으며, 다음과 같은 3가지 치명적인 독소로 순수한 기독신앙을 파괴하고 있다. 

1) 영혼불멸설은 영원지옥설의 모체가 된다. 

영혼불멸설은 수많은 악인의 영혼들이 지옥불 속에서 천년 만년 억만년 영원무궁 세월 지나도록 결코 죽지 않고 처참한 고문과 고통과 괴로움을 영원무궁토록 당하리라고 주장함으로, 궁극적으로는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을 히틀러나 스탈린보다 더 잔인하고 진시황보다 더 무자비한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전무후무한 폭군으로 전락시키는 치명적인 이교 철학이요, 창조주 하나님을 대적하는 거짓의 아비 사탄의 최대의 기만이다. (창 2:17. 3:4) 

2) 영혼불멸설은 부활신앙을 부인한다. 

영혼불멸설은 사후에도 그 영혼이 이미 천국이나 지옥에 가서 살고 있다니 사실상 부활이 필요없다는 어리석은 주장이 아니고 무엇인가? 

3) 영혼불멸설은 예수 재림 신앙을 부인한다. 

죽자마자 천국가고 지옥 가서 살고 있다면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심판을 베풀며 뒷북 칠 이유가 무엇인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면 저절로 천국가고 지옥갈텐데... 

그러니 영혼불멸설을 믿는다는 것은 사실상 예수 재림도 필요없다는 위험천만한 함정에 빠진 것이 아닌가? 

일찌기 에덴동산에서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먹으면 너희가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지만 {창 2:17} 사탄은 네가 결코 죽지 않으리라는 말로 아담과 해와를 유혹했다.{창 3:4} 

그러므로 영혼불멸설과 영원지옥설의 원조는 거짓의 아비 사탄이다. 
거짓의 아비 사탄에게 속지말자. 

유다서 1:7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소돔을 태운 영원한 불은 태울 것을 다 태운 후 꺼졌다. 
사해 바다가 소돔이 있었던 자리라고 하는데, 그곳은 지금 불타고 있지 않다. 

시 104:35 “죄인을 땅에서 소멸하시며 악인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실지로다 ” 

악인들은 천년기가 끝날 때 부활하여(둘째 부활), 유황불로 영원히 소멸될 것이다(둘째 사망). 
- 악인을 억만년도 더 뜨거운 불 속에 고문하지 않으시고, 소멸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자비다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자녀. 악인도 사랑하시는 하나님) 

겔 33:11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다. 영원한 고통이 아니다. 

거짓의 아비 사탄에게 속아 영원지옥설을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예수님 믿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이 불타고 있다는 그 지옥은 도대체 어디 있나? 
하늘 위에 있나? 땅 속에 있나? 

예수님 믿지 않고 죽은 자기 조상들과 골육친척들과 이웃들이 뜨거운 불속에서 영원무궁토록 고통당하며 울부짖는 것을 바라보면서 자기는 구원받았다고 좋아하며 할렐루야 찬송하는 곳이 천국이란 말인가? 

그런 인정머리 없는 인간들이 사랑의 종교를 믿는다는 기독교도란 말인가? 
참으로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인가? 
깊이 생각해보기 바란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지혜자 솔로몬을 통해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전도서 9:5)라고 말씀하셨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해 죽은 자들을 부활의 아침을 기다리며 잠자는 자들로 묘사하셨다. 
[데살로니가 전서 4:13-17] 

영국을 대표하는 종교개혁자 틴데일은 “그대들은 몸을 떠난 영혼이 천국이나 지옥에 간다고 가르침으로써, 그리스도와 바울이 입증한 부활의 논증을 파괴하고 있다”고 했다. 

종교개혁의 새벽별이라고 불리우는 위클립은 “죽음 이후부터 부활의 순간까지 완전한 무의식 세계에서 잠을 잔다”고 가르쳤다. 

마틴 루터는 1520년 11월 29일에 발표한 41개조 신조에서 “영혼이 불멸이라는 신조는 터무니없는 다른 견해들과 함께 로마교회의 교리집 쓰레기더미에서 발견되어 지는 것”이라고 논박하였다(The Problem of Immortality, p. 256 by Petavel). 

유명한 “실락원”의 저자인 밀톤은, “만일 우리가 이방종교에서 가르치는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사람 자체가 바로 살아있는 영혼이라고 말하는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합성시키거나 분리될 수 없는 존재이며,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두개의 다른 존재, 즉 영혼과 몸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The Prose Works of John Milton, Vol. 4, p188) 

데일의 제자인 프리드는 영혼불멸을 반대한 죄목으로 화형에 처해졌으며, 1575년7월 종교 개혁자인 테르우르트와 피터스가 동일한 죄목으로 화형에 처해졌다. 

종교 개혁자들 뿐 아니라 각 분야의 학자들과 전문 지식인들조차 영혼 불멸설에 강한 반대를 표명하였다. 

산소를 발견한 과학자인 프리스틀리,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톤 경, 케임브리지 대학의 수학자인 휘스톤 등은 과학자요 신학자로서 영혼불멸설을 공개적으로 부인하였으며, 영국 찬송가의 아버지요 신학자인 아이삭 왓츠는 초기에 받아들였던 영혼불멸 사상을 버리고 성경의 진리로 돌아섰다. 

오늘날까지 굴지의 성경주석학자로 손꼽히는 루터교회의 히브리 학자인 프렌츠 델리취는 그의 구약성경 주석에서 “성경 전체는 영혼이 불멸한다는 것에 대해서 전혀 말하고 있지 않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영혼은 죽음에 이를 수 있다” 라고 단언하였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신학자인 스위스의 오스카 쿨만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그리스도 교회의 소망과 영혼불멸에 대한 헬라사상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영혼불멸을 믿는 헬라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의 부활 설교를 받아들이기가 가장 어려웠다... 
신약에는 ‘영혼불멸이냐? 죽은 자의 부활이냐?’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다. 
위대한 철학자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가르침은 결코 신약의 가르침과 조화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와 같이 ‘영혼불멸설’은 성경에도 그런 단어가 없을뿐더러, 16세기에 타락한 카톨릭에서 신앙을 개혁하여 나온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초기 다수의 종교 개혁자들도 믿지 않았고, 다수의 학자들과 전문 지식인들조차 부정했다. 

요한계시록 22:20-21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예수 재림 때 우리는 부활하여 사랑하는 주님과 영원히 함께 살 것입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We will live together forever with Jesus!!! 

3. 영원히 행복한 하늘 나라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 후에 
 죽은 의인들이 부활한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헬라어 하마 쉰(hama sun). 부사 하마는 “동시에”를 나타내는 한편, 전치사 쉰은 여기에서 “함께”를 의미한다. 17절의 이 부분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동시에 저희와 함께 우리가 나꿔채감을 당할 것이다.” 그런 보증은 그 당시 죽었던 그리스도인들과 살아남아 있는 자들이 동시에 주와 연합될 것이라고 설명함으로써 데살로니가인들을 안심시켰을 것이다.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헬라어 하르파조(harpazo-), “나꿔채다.” 참조 행 8:39; 빌 2:6; 계 12:5 주석. 하르파조로부터 라틴어 동사 라피오(rapio-)를 거쳐 영어 단어 “rapture”(휴거)가 파생되었는데, 이 단어는 바울이 여기서 그들에 대하여 기록하는 성도들의 끌어 올림 혹은 데려감을 기술하기 위하여 어떤 사람들이 전문적인 신학적 의미로 사용하는 용어이다. “휴거”라는 단어를 그렇게 사용하는 자들은 그리스도가 능력과 큰 영광으로 가시적이요 가청적으로 나타나기 몇 년 전에 성도들을 데려가기 위하여 지구의 공중으로 비밀리에 불가시적으로 오는 일이 먼저 있을 것이며, 한편 지상의 나머지 거민들은 적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서 환난으로 특징지어진 기간을 거치게 될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 비밀 강림을 기술하고 있다고 그들이 주장하는 지금의 성경절은 그리스도의 오심에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이 함께한다고 말하고 있다. 결코 비밀스런 사건이 아닌 것이다. 더욱이 이 구절은 명백히 데살로니가인들이 염려하고 있던 “우리가 그의 앞에 모임”에 관한 것으로, 그런 모임은 “환난 전 휴거”설이 제시하는 것처럼 적그리스도가 출현하기 전이 아니라 적그리스도가 나타난 후에(살후 2:1~3) 있게 될 것이다(계 20장에 관한 추가적 설명, 설명 2를 참조하라). 나팔은 또한 w/24/30e, 31에서 가시적 강림을 분명히 기술하는 문맥 내에서 언급된다. “땅의 모든 족속들이…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이 성경절들의 어구들 가운데 마 24장에 묘사된 강림과 ssalonians4/1에 묘사된 것이 다르다고 간접적으로라도 암시하는 것이 조금도 없다. 
그러므로 두 성경절은 한 시점에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을 묘사한다. 이것은 모든 성경의 한결같은 가르침이다. 비밀 휴거를 믿는 신조의 근거가 되는 그릇된 개념에 관한 논의는 계 20장에 관한 추가적 설명, 설명 2를 참조하라.공중에서. 성도들은 땅에서 올라갔고, 주와 그를 수행하는 많은 천사들은 하늘에서 내려왔다. 그들은 땅과 하늘 사이의 공중에서 만난다. 

주를 영접하게 
 문자적으로 “주를 만나기까지.” 의인들이 땅에서 들려 올려진 목적, 곧 그들이 주를 만나는 목적의 성취를 표현한다. 만남의 순간에 그리스도인의 가장 귀중한 소망은 성취된다. 즉 그는 어느 누구보다 더 사랑하는 분과 연합하게 된다(참조 빌 1:23 주석).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강림과 16, 17절에 묘사된 일련의 사건들의 결과로서, 모든 신자는 그들의 주와 연합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항상 주와 함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전쟁도 가난도 질병도 고통도 사망도 이별도 없는 하늘나라에서 사랑하는 가족, 친구들과 함께 안식일마다 예수님의 말씀들으며 하늘 합창대의 찬미 들으며 영원히 행복하게 함께 살 것입니다.
예수 재림의 소망! 부활의 소망! 주님 계신 가정, 영원토록 행복한 사랑의 가정!!!
행복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무든 분들의 가정이 주님 계신 가정, 영원토록 행복한 사랑의 가정이 되기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 골육친척과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여 우리 구주 예수님 영광 중에 재강림하실 때. 부활한 가족들과 성도들과 다 함께 넘치는 감격과 기쁨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질병도 고통도 사망도 이별도 없는 하믈 본향에서 여원무궁토록 행복하게 살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드립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의 가정과 교회와 일터에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과 은혜와 축복이 충만하게 임하시며, 영원한 하늘 본향 우주적 안식일 대예배에 참석하여 함께 예배드리는 최대의 축복을 받으시기 간절히 바라며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Here is the link to the sermon: https://www.4shared.com/s/fSdaO0pGifi 
(이사야 66:22,2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을 것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가 말하노라! 매 월삭과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이르러 내 앞에 경배하리라!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의 가정과 교회와 일터에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과 은혜와 축복이 충만하게 임하시며, 영원한 하늘 본향 우주적 안식일 대예배에 참석하여 함께 예배드리는 큰 축복을 받으시기 간절히 바라며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Here is the link to the sermon: https://www.4shared.com/s/fSdaO0pGif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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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 죽은 의인들이 부활한 후에.우리 살아남은 자 참조 15절 주석.함께 헬라어 하마 쉰(hama sun). 부사 하마는 “동시에”를 나타내는 한편, 전치사 쉰은 여기에서 “함께”를 의미한다. 17절의 이 부분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동시에 저희와 함께 우리가 나꿔채감을 당할 것이다.” 그런 보증은 그 당시 죽었던 그리스도인들과 살아남아 있는 자들이 동시에 주와 연합될 것이라고 설명함으로써 데살로니가인들을 안심시켰을 것이다.구름 속으로 참조 마 24:30; 행 1:9; 계 1:7.끌어 올려 헬라어 하르파조(harpazo-), “나꿔채다.” 참조 행 8:39; 빌 2:6; 계 12:5 주석. 하르파조로부터 라틴어 동사 라피오(rapio-)를 거쳐 영어 단어 “rapture”(휴거)가 파생되었는데, 이 단어는 바울이 여기서 그들에 대하여 기록하는 성도들의 끌어 올림 혹은 데려감을 기술하기 위하여 어떤 사람들이 전문적인 신학적 의미로 사용하는 용어이다. “휴거”라는 단어를 그렇게 사용하는 자들은 그리스도가 능력과 큰 영광으로 가시적이요 가청적으로 나타나기 몇 년 전에 성도들을 데려가기 위하여 지구의 공중으로 비밀리에 불가시적으로 오는 일이 먼저 있을 것이며, 한편 지상의 나머지 거민들은 적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서 환난으로 특징지어진 기간을 거치게 될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 비밀 강림을 기술하고 있다고 그들이 주장하는 지금의 성경절은 그리스도의 오심에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이 함께한다고 말하고 있다. 결코 비밀스런 사건이 아닌 것이다. 더욱이 이 구절은 명백히 데살로니가인들이 염려하고 있던 “우리가 그의 앞에 모임”에 관한 것으로, 그런 모임은 “환난 전 휴거”설이 제시하는 것처럼 적그리스도가 출현하기 전이 아니라 적그리스도가 나타난 후에(살후 2:1~3) 있게 될 것이다(계 20장에 관한 추가적 설명, 설명 2를 참조하라). 나팔은 또한 w/24/30e, 31에서 가시적 강림을 분명히 기술하는 문맥 내에서 언급된다. “땅의 모든 족속들이…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이 성경절들의 어구들 가운데 마 24장에 묘사된 강림과 ssalonians4/1에 묘사된 것이 다르다고 간접적으로라도 암시하는 것이 조금도 없다. 그러므로 두 성경절은 한 시점에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을 묘사한다. 이것은 모든 성경의 한결같은 가르침이다. 비밀 휴거를 믿는 신조의 근거가 되는 그릇된 개념에 관한 논의는 계 20장에 관한 추가적 설명, 설명 2를 참조하라.공중에서. 성도들은 땅에서 올라갔고, 주와 그를 수행하는 많은 천사들은 하늘에서 내려왔다. 그들은 땅과 하늘 사이의 공중에서 만난다.주를 영접하게 문자적으로 “주를 만나기까지.” 의인들이 땅에서 들려 올려진 목적, 곧 그들이 주를 만나는 목적의 성취를 표현한다. 만남의 순간에 그리스도인의 가장 귀중한 소망은 성취된다. 즉 그는 어느 누구보다 더 사랑하는 분과 연합하게 된다(참조 빌 1:23 주석).그리하여 그리스도의 강림과 16, 17절에 묘사된 일련의 사건들의 결과로서, 모든 신자는 그들의 주와 연합한다.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바울은 독자들을 그 황홀한 만남의 순간 그 너머까지 데려가고자 시도하지 않는다. 각 시대의 제자들은 마침내 주와 연합되고, 미래는 보장된다. 이 시점에서 그 너머에 있는 것을 탐구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여러 성경절들을 통해 우리는 연합한 후에 구속받은 자들은 그들이 시작한 여행을 계속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 집으로 간다는 것을 안다(참조 요 14:2, 3 주석). 그리하여 그들은 “항상 주와 함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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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불멸설과 영원지옥설은 성경 말씀과 전혀 조화되지 않는 이집트와 헬라의 이교 철학이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죽자마자 낙원가서 찬양하고, 지옥가서 고통당한다는 주장은 비성경적 헛소리다. 전도서 9:5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며 ..." (살전 4:13-17)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영혼불멸설은 사람이 죽자마자 그 영혼이 천국이나 지옥에 가서 계속 살고 있다니 사실상 부활이 필요없다는 어리석은 주장이 아니고 무엇인가? 바울은 예수재림 때 죽은 자들이 부활한다고 기록했는데, 죽자마자 낙원, 지옥간다는 건 비성서적 궤변이다. 영혼이 죽지 않고 낙원가서 행복하게 살고 있고, 지옥가서 뜨거운 불속에서 영원히 고문당하며 살고 있다면, 부활과 예수 재림이 왜 필요하며, 최후의 심판이 왜 필요한가? 그러므로 독일의 저명한 신학박사 오스카 쿨만은 영혼의 불멸이냐? 죽은 자의 부활이냐? 양자택일하라! 둘다 믿는다고 말할 수는 결코 없다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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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죽은 자는 아무 의식이 없다 Chels ( 전9:5 )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바 됨이라 ----------------------------------------------- 산 자는 죽는 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죽은 자는 의식이 없고 상도 받는 것이 아님으로 무슨 천당 가서 상을 받는 것도 아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부활하여 나오는 장소는 무덤이다  ( 요5:28,29 )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 ( 1 )  이 말씀은 천당 가서 자다가 깨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무덤에서 자다가 그 분 곧 재림하셔서 깨어라! 라고 명령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깨어 일어난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 2 )  이 말씀은 또한 두가지 부활이 차례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곧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고전15:23 )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 그에게 붙은 자요( 고전15:23 )  그 후에는 나중이니 ( 고전15:24 ) 그것을 가리켜 주님께서는   생명의 부활과 '  심판의 부활    이라 하셨으니( 요5:29 )  ( 3 ) 생명의 부활은 주님 재림하실 때 의인들이 받는 부활이라( 살전4:16 )  곧 복이 있고 거룩한 첫째 부활이요( 계20:6 )    그 후에는 나중이니 ( 고전15:24 )  둘째 부활로  재림 후 1,000년이 지나서( 계20:7 ) 심판 받기 위해 일어나는 부활이니    곧 둘째 사망을( 계20:6 )받는 부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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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영혼불멸설(영원지옥설)은 성경의 부활신앙과 조화될 수 없다*** ***죽지 않은 영혼이 어떻게 부활하나?*** ***창조주 하나님을 전무후무한 폭군으로 전락시키는 비성경적 영원지옥설을 격파하는 남은 교회! 종교개혁의 최후의 보루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 (창 2:17, 창 3:4, 전 9:5, 살전 4:13-18)*** 사람이 죽은 후에도 영혼은 불멸불사한다는 영혼불멸사상은 에집트의 미이라, 플라톤의 헬라 철학, 모슬렘의 영원지옥설, 힌두교와 불교의 윤회설, 일본의 신도교, 한국의 무당, 무속신앙에 이르기 까지 세계 곳곳에 편만한 이교 사상인데, 헬라 철학에 물든 로마 천주교는 물론이요, 대부분의 개신교회에도 침투해 있으며, 다음과 같은 3가지 치명적인 독소로 순수한 기독신앙을 파괴하고 있다. 1. 영혼불멸설은 영원지옥설의 모체가 된다. 영혼불멸설은 수많은 악인의 영혼들이 지옥불 속에서 천년 만년 억만년 영원무궁 세월 지나도록 결코 죽지 않고 처참한 고문과 고통과 괴로움을 영원무궁토록 당하리라고 주장함으로, 궁극적으로는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을 히틀러나 스탈린보다 더 잔인하고 진시황보다 더 무자비한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전무후무한 폭군으로 전락시키는 치명적인 이교 철학이요, 창조주 하나님을 대적하는 거짓의 아비 사탄의 최대의 기만이다. (창 2:17. 3:4) 2. 영혼불멸설은 부활신앙을 부인한다. 영혼불멸설은 사후에도 그 영혼이 이미 천국이나 지옥에 가서 살고 있다니 사실상 부활이 필요없다는 어리석은 주장이 아니고 무엇인가? 3. 영혼불멸설은 예수 재림 신앙을 부인한다. 죽자마자 천국가고 지옥 가서 살고 있다면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심판을 베풀며 뒷북 칠 이유가 무엇인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면 저절로 천국가고 지옥갈텐데... 그러니 영혼불멸설을 믿는다는 것은 사실상 예수 재림도 필요없다는 위험천만한 함정에 빠진 것이 아닌가? 일찌기 에덴동산에서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먹으면 너희가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지만 {창 2:17} 사탄은 네가 결코 죽지 않으리라는 말로 아담과 해와를 유혹했다.{창 3:4} 그러므로 영혼불멸설과 영원지옥설의 원조는 거짓의 아비 사탄이다. 거짓의 아비 사탄에게 속지말자. 유다서 1:7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소돔을 태운 영원한 불은 태울 것을 다 태운 후 꺼졌다. 사해 바다가 소돔이 있었던 자리라고 하는데, 그곳은 지금 불타고 있지 않다. 시 104:35 “죄인을 땅에서 소멸하시며 악인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실지로다 ” 악인들은 천년기가 끝날 때 부활하여(둘째 부활), 유황불로 영원히 소멸될 것이다(둘째 사망). - 악인을 억만년도 더 뜨거운 불 속에 고문하지 않으시고, 소멸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자비다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자녀. 악인도 사랑하시는 하나님) 겔 33:11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다.  영원한 고통이 아니다. 거짓의 아비 사탄에게 속아 영원지옥설을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예수님 믿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이 불타고 있다는 그 지옥은 도대체 어디 있나? 하늘 위에 있나? 땅 속에 있나? 예수님 믿지 않고 죽은 자기 조상들과 골육친척들과 이웃들이 뜨거운 불속에서 영원무궁토록 고통당하며 울부짖는 것을 바라보면서 자기는 구원받았다고 좋아하며 할렐루야 찬송하는 곳이 천국이란 말인가? 그런 인정머리 없는 인간들이 사랑의 종교를 믿는다는 기독교도란 말인가? 참으로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인가? 깊이 생각해보기 바란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지혜자 솔로몬을 통해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전도서 9:5)라고 말씀하셨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해 죽은 자들을 부활의 아침을 기다리며 잠자는 자들로 묘사하셨다. [데살로니가 전서 4:13-18] (살전 4:13-17)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영국을 대표하는 종교개혁자 틴데일은 “그대들은 몸을 떠난 영혼이 천국이나 지옥에 간다고 가르침으로써, 그리스도와 바울이 입증한 부활의 논증을 파괴하고 있다”고 했다. 종교개혁의 새벽별이라고 불리우는 위클립은 “죽음 이후부터 부활의 순간까지 완전한 무의식 세계에서 잠을 잔다”고 가르쳤다. 마틴 루터는 1520년 11월 29일에 발표한 41개조 신조에서 “영혼이 불멸이라는 신조는 터무니없는 다른 견해들과 함께 로마교회의 교리집 쓰레기더미에서 발견되어 지는 것”이라고 논박하였다(The Problem of Immortality, p. 256 by Petavel). 유명한 “실락원”의 저자인 밀톤은, “만일 우리가 이방종교에서 가르치는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사람 자체가 바로 살아있는 영혼이라고 말하는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합성시키거나 분리될 수 없는 존재이며,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두개의 다른 존재, 즉 영혼과 몸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The Prose Works of John Milton, Vol. 4, p188) 데일의 제자인 프리드는 영혼불멸을 반대한 죄목으로 화형에 처해졌으며, 1575년7월 종교 개혁자인 테르우르트와 피터스가 동일한 죄목으로 화형에 처해졌다. 종교 개혁자들 뿐 아니라 각 분야의 학자들과 전문 지식인들조차 영혼 불멸설에 강한 반대를 표명하였다. 산소를 발견한 과학자인 프리스틀리,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톤 경, 케임브리지 대학의 수학자인 휘스톤 등은 과학자요 신학자로서 영혼불멸설을 공개적으로 부인하였으며, 영국 찬송가의 아버지요 신학자인 아이삭 왓츠는 초기에 받아들였던 영혼불멸 사상을 버리고 성경의 진리로 돌아섰다. 오늘날까지 굴지의 성경주석학자로 손꼽히는 루터교회의 히브리 학자인 프렌츠 델리취는 그의 구약성경 주석에서 “성경 전체는 영혼이 불멸한다는 것에 대해서 전혀 말하고 있지 않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영혼은 죽음에 이를 수 있다” 라고 단언하였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신학자인 스위스의 오스카 쿨만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그리스도 교회의 소망과 영혼불멸에 대한 헬라사상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영혼불멸을 믿는 헬라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의 부활 설교를 받아들이기가 가장 어려웠다... 신약에는 ‘영혼불멸이냐? 죽은 자의 부활이냐?’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다. 위대한 철학자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가르침은 결코 신약의 가르침과 조화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와 같이 ‘영혼불멸설’은 성경에도 그런 단어가 없을뿐더러, 16세기에 타락한 카톨릭에서 신앙을 개혁하여 나온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초기 다수의 종교 개혁자들도 믿지 않았고, 다수의 학자들과 전문 지식인들조차 부정했다. 요한계시록 22:20-21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예수 재림 때 우리는 부활하여 사랑하는 주님과 영원히 함께 살 것입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We will live together forever with Jesus!!!  추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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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재림의 기쁜 소식! 부활의 기쁜 소식!!! 데살로니가 전서 4:13-17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 잠자는 성도자는  헬라어 코이마오(koimao-), “자다”, “죽다.” 중요한 본문상의 증거는 “잠들고 있다”라는 독법을 지지한다(참조 20쪽). 더 많은 사람들이 계속하여 땅에 묻혀 쉬고 있었다. 죽음의 비유로서의 잠에 관해서는 요 11:11 주석을 참조하라. 헬라어의 비문들은 매장지가 때때로 기숙사 혹은 침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 단어인 코이메테리온(koime-te-rion)으로 알려져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인 용어에서, 죽은 자들은 부활의 아침을 기다리면서 자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졌다.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제임스왕역」에는 “I would not”으로 되어 있음-역자 주). 본문상의 증거는 “we would not”(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라)이라는 독법을 입증한다(참조 20쪽). 바울이 의도적으로 그의 언급 속에 실라와 디모데를 결부시키고 있을 수도 있고 또는 “우리”라는 말이 편집상 사용된 것일 수도 있다(참조 1:1 주석). 여기서 사도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해서 죽은 그리스도인의 운명이란 새로운 주제를 거론한다. 데살로니가에서 방금 돌아온(3:6) 디모데는 교인들이 회심한 후에 죽은 동료들의 운명을 대단히 염려하고 있다는 소식을 가져온 것 같다. 그런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올 때 어떻게 그의 나라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겠는가? 바울은 이제 그 문제를 구체적으로 숙고하고(13~18절) 밀접하게 관련된 주제, 즉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때를 다루기 위하여 다음으로 넘어간다(5:1~11). 그는 두 문제를 새로운 교리로서가 아니고 신자들이 좀 더 깊게 교훈과 권고를 받을 필요가 있는 친숙한 교훈으로 취급한다. 바울은 그들과 함께 있을 때 모든 문제에 대답하거나 모든 주제를 분명히 밝혀 줄 시간을 갖지 못했다. 소망 없는  비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과 같은 소망이 없다. 불신자는 죽음 후에 생명을 기대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 그에게는 죽음이 끝이 될 수밖에 없는데 이는 그가 죽음의 속박을 깨뜨리고 죽은 자들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능력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자신과 자신의 추종자들을 위하여 죽음을 정복하신 분을 안다. 이와 같이 바울은 신자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주위에 있는 이교도 세계의 절망과 대비시킨다. 다른 이와 같이  “그밖의 사람들과 같이”, 즉 비그리스도인들을 말한다.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데살로니가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죽은 동료들 때문에 지나치게 슬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아 있는 자들은 죽은 자들이 그리스도가 올 때 그리스도인들이 누리기를 기대한 영광스런 경험을 잃어버릴까 두려워했다. 바울은 이 오해를 제거하고 신자들을 위로하는 데 13~18절을 할애한다. 그는 부활의 소망이 슬픔의 원인을 제거해 주기 때문에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이 그의 죽은 형제 때문에 슬퍼할 필요가 없다고 설명한다. 바울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슬픔에 관하여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지 않다. 그는 그들이 절망적인 인간적 슬픔에 빠져들지 말고 주의 재림과 부활의 때에 있을 이별했던 사랑하는 자들과의 재연합을 기대하면서 머리를 들도록 가르친다. 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믿을진대 헬라어는 의심의 표현이 여기에 전혀 없는 것을 보여 준다  조건절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사실임을 나타낸다. 바울이 처음에 데살로나가인들이 사는 성읍에 들어갔을 때 이 교훈들을 제시했기 때문에(행 17:1~3), 그가 회심시킨 자들은 그리스도인 신앙에 속한 이 기본적인 신조들 안에 굳게 서 있었다. 바울은 이제 그들에게 죽은 그리스도인이 미래에 부활한다는 믿음을 확립시키는 기초로서 이 교훈들을 활용하기를 원한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그리스도인에게 확실한 부활의 소망을 준다(참조 요 14:19; 고전 15:20~23 주석). 그러므로 데살로니가인들은 사랑하는 자들이 죽을 때 절망하지 말아야 했다. 예수 안에서  문자적으로 “예수를 통하여.” 이 어려운 표현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해석이 제시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언젠가 죽은 자들을 깨울 그리스도가 주는 생명을 시여하는 능력의 효력에 의해서만 죽음이 잠이 된다는 사실을 바울이 말한다고 생각한다. 만일 그리스도의 능력이 작용하지 않는다면 죽음은 끝이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를 통하여”라는 구절을 본 성경절의 뒷부분과 연결해 “이와 같이 예수를 통하여 자던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개정표준역」)고 읽는다. 그런 번역이 가능하지만 헬라어는 「제임스왕역」의 번역에 가깝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 표현을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이라는 구와 평행구로 간주한다. 이 해석은 아마도 두 표현이 밀접한 문맥상의 상관관계 속에 등장하는 까닭에 선호하고 있는 것 같다. 자는  “잠이 든.” 즉 이미 죽어 있는 그리스도인. 저와 함께  곧 무덤으로부터 예수와 함께. 바울은 당혹해하는 데살로니가인들에 대한 그의 대답의 핵심에 도달한다. 그들은 죽은 자들의 운명을 걱정했다. 바울은 예수가 부활한 것처럼 죽은 그리스도인들이 부활하도록 하나님이 계획을 세웠다는 확고한 진술로 이제 그들에게 보증한다. 그런 말들은 신자들에게 그들의 사랑하는 자들이 잊어버린 바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증해 주었다. 이 영감의 보증은 데살로니가인들의 의문을 해소시키고 그들의 마음에 안정을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바울이 부활에 관한 연대기적 세부사항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죽은 의인들이 잊혀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주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것들은 고전 15:23에 제시되어 있다.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바울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무덤에서 나오게 했듯이 그리스도가 잠자는 성도들을 무덤에서 나오게 할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바울이 죽을 때 하늘로 올라가서 예수가 이 땅으로 재림할 때 그와 함께 돌아온다고 그들이 주장하는 육체를 이탈한 영혼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사람의 영혼이 불멸이라는 것과 죽을 때 그것이 하늘로 올라간다고 가르치지 않는다(참조 마 10:28; 눅 16:19~31; 고후 5:2~8 주석). 더욱이 그런 해석은 문맥과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바울은 불멸의 영혼들에 관해서가 아니고 “자는 자들”(4:13),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14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16절)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일어나”지 “내려오”지 않는다. 살아남은 자들은 주와 함께 있는 것과 관련하여 그들보다 앞서지 못하는 것으로 묘사된다(15절). 모두 함께 왕국에 들어간다(17절). 만일 죽은 자들이 살아남은 자들보다 앞섰고 부활 전에 주님과 함께 얼마 동안을 보냈다면 사도의 말은 전혀 무의미하고, 사실상 터무니없는 것이 될 것이다. 그는 위로를 잘못된 대상에 둔 것일 것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모든 염려를 떨쳐버리라고 말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사랑하는 자들이 천상의 기쁨을 누리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의 가르침은 주의 가르침과 일치했다(참조 요 14:3 주석). 어떤 주석가들은 관련된 문제들을 보고, “육체가 없는 영혼들이 여기에서 거론되고 있지 않다”고 주저하지 않고 인정한다(Jamiesen, Fausset and Brown).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의 말씀으로  사도는 자신의 것보다 더 높은 권위에 호소한다(참조 고전 7:6, 10, 12, 25 주석). 강림  헬라어 파루시아(parousia). 참조 마 24:3 주석. 파루시아는 때때로 도시의 거리를 통과하는 승리의 행진을 경축하기 위하여 로마의 장군이 도착하는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그처럼 그 단어는 그리스도의 승리의 귀환을 묘사하기에 적절하다.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  문자적으로 “우리 살아 있는 자들, 남아 있는 자들.” 즉 죽은 의인들과는 대조적으로 그리스도가 올 때까지 살아남는 자들. 바울은 여기서 예수가 올 때 그와 그가 편지를 쓰고 있는 회심자들이 살아 있을 것이라는 희망, 곧 각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공통의 희망을 표현한다. 그러나 그는 그 큰 날까지 그가 살아 있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다(참조 롬 3:11; 고전 10:11; 빌 4:5; 딛 2:13; 롬 13장에 대한 추가적 설명). 그는 ssalonians/5/1e에서 이 문제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밝히는데, 거기서 그는 재림이 불시에 임할 것과 자신이나 그들이 주가 올 때에 여전히 살아 있을지는 불확실하다는 것을 다룬다(10절). 데살로니가의 신자들은 바울의 말을 오해했고, 어떤 사람들은 고의로 그 말을 왜곡해 주의 날이 심지어 그 당시에도 임박했다고 가르쳤던 것 같다(참조 살후 2:2 주석). 사도가 조금 후에 둘째 편지를 쓴 이유는 그들의 생각에 있는 이 오류를 바로잡아 주기 위해서였다(사도행적, 264, 262,). 앞서지(prevent)  헬라어 프싸노(phthano-), “~앞서 오다”, “선행하다.” 「제임스왕역」이 번역되었을 당시에 “prevent”는 “앞서 오다”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이 말은 의미가 바뀌었기 때문에 더 이상 헬라어 프싸노를 정확하게 번역하지 않는다. 바울은 독자들에게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자는 자들보다 먼저 주님과 연합하지 않을 것을 확증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16, 17절). 이와 같이 살아 있는 성도들이 주 안에서 죽은 자들보다 우선권을 갖지 못할 것이다. 이 가르침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의 참 상태를 밝혀 준다. 그들은 구주의 오심을 기다리면서 자고 있다. 그들은 아직 그분과 연합한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들처럼,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려 온 주님과 연합하려고 재림을 기다린다(참조 요 11:23~25). 어느 부류도 다른 부류보다 우선하지 않고, 둘 다 그가 오실 때 주님에 의해 함께 이끌려져 영광에 들어갈 것이다. 못하리라  헬라어에서는 강한 부정으로 표현된다.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바 됨이라 ----------------------------------------------- 산 자는 죽는 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죽은 자는 의식이 없고 상도 받는 것이 아님으로 무슨 천당 가서 상을 받는 것도 아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부활하여 나오는 장소는 무덤이다  ( 요5:28,29 )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 ( 1 )  이 말씀은 천당 가서 자다가 깨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무덤에서 자다가 그 분 곧 재림하셔서 깨어라! 라고 명령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깨어 일어난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2. 예수 재림의 소망! 부활의 소망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주께서…친히  큰 위엄 중에서 인격적이요, 가시적이요, 육체적인 주의 나타나심이 여기에 명확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어떤 대리인을 보내지도 않고, 영적으로 오지도 않는다. 그는 자신이 친히 온다. 하늘로 올라간 동일한 예수가 이제는 하늘에서 내려온다. 그는 하늘로 가기 직전에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였다(요 14:3). 교회는 그가 구름을 타고 올라갈 때 “이 예수는…그대로 오시리라”는 보증을 받았다(행 1:9~11). 바울은 이 약속들을 되풀이해서 말하고 그것들이 성취되는 방식에 관하여 추가로 세부적인 사항들을 기록한다. 호령  헬라어 켈류스마(keleusma), “명령”, “명령의 큰 외침.” 이 말은 신약에서 여기에만 나타난다. 성서 외의 저작들에서 켈류스마는 장교가 군대에 명령을 내리는 것과 전차의 전사가 말들을 채근하는 데 사용된다. 헬라어 구문으로 볼 때 그리스도가 명령을 내리는지 주가 강림할 때 어떤 다른 존재가 큰 소리로 외치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문맥상의 증거는 말하는 분이 그리스도임을 지지한다(아래의 “천사장”과 “하나님의 나팔”에 관한 주석을 참조하라). “호령”을 하는 명확한 이유는 여기에 제시되지 않았지만,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에 뒤이어 즉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소리가 울리는 것은 의인들의 부활의 예비단계로 간주될 수 있다(참조 요 5:25, 28, 29; 11:43). 그리스도는 승리를 선포하면서 하늘에서 온다. 그는 죽음과 무덤을 정복했다(계 1:18). 원수인 죽음은 구속받은 자들 중 어떤 사람도 그의 비정한 손아귀에 더 이상 쥐고 있을 수 없다. 죽은 의인들은 주의 명령에 반응하여 무덤에서 일어난다. 천사장  헬라어 아르캉겔로스(archanggelos), “수석 천사”, “첫째 천사.” “장” 혹은 “높은 것”을 뜻하는 접두사 아르키(archi)와 앙겔로스(anggelos), 즉 “천사”가 합성되었으며, 그런 까닭에 “천사의 수장”이다. 아르캉겔로스라는 말은 신약에서 여기와 미가엘을 천사장이라고 말하는 유 9절에만 나온다. 본 주석은 미가엘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견해를 지지한다(참조 단 10:13; 유 ssalonians/4/9eS=Jude/1/9e; 계 12:7 주석). 이 해석은 그리스도가 내려올 때 천사장의 소리로서 그리스도의 음성이 발해지는 것으로 여길 수 있게 해 준다(참조 유 9절 주석). 하나님의 나팔  이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어떤 특정한 나팔을 반드시 가리키지는 않으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사용하는 악기를 가리킨다. 구약은 실제이거나 예언이거나 간에 하나님의 주목할 만한 개입들과 관련하여 나팔을 빈번하게 언급한다(출 19:13, 16, 19; 시 47:5; 사 27:13; 욜 2:1; 습 1:16; 슥 9:14). 나팔은 또한 하나님의 백성을 소집할 때(민 10:2~4), 전쟁의 경고를 발할 때(5~9절), 국가적인 절기 때(10절) 사용했다. 신약에서는 나팔 소리가 택하신 자들을 모으는 일과 죽은 자들이 다시 일어나는 일과 연관되어 있다(마 24:31; 고전 15:52). 강림하시리니  헬라어 카타바이노(kata- baino-), “내려가다”, “내려오다”, “내려가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는 신약의 어느 다른 곳에서도 사용되지 않았지만, 초림을 위해 인자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에 대해서는 사용되었다(요 3:13; 6:33, 38 등). 재림 때 그리스도의 내려오심은 그의 돌아오심에 관한 다른 성경 기록들 가운데 암시되어 있다(마 16:27; 24:30 등).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  접속사 “그리고”(and)는 하늘에 울려 퍼지는 소리에 동반되는 결과, 즉 죽은 의인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구약 시대의 성도들을 포함하여 믿음 안에서 잠든 자들이다(참조 롬 4:3; 고전 15:18 주석; 계 14:13). 그들은 예수가 “부활의 자녀”(눅 20:36)로 묘사한 자들 가운데 포함된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그들을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라고 부른다(고전 15:23). 그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은 “첫째 부활”에 해당한다(참조 계 20:5, 6 주석).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라는 구절은 다른 두 부류의 사람들과 자고 있는 성도들을 구분하기 위하여 여기에 사용되는데, 그 두 부류는 (1) 그리스도 재림 때에 육체로 다시 살아나지 못하는 죽은 악인들과 (2) 자신이 사랑하는 죽은 자들이 예수가 올 때에 불리한 상태에 처하지 않고 오히려 먼저 살아남으로 더 먼저 배려받고, 살아 있는 성도들과 동등한 입장에 설 것을 확신하는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다. 먼저 일어나고  즉 살아 있는 자들이 공중에서 주를 만나기 위하여 끌어 올려지기 전에 먼저 일어나고(17절). 3. 영원히 행복한 하늘 나라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 후에  죽은 의인들이 부활한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  참조 15절 주석. 함께  헬라어 하마 쉰(hama sun). 부사 하마는 “동시에”를 나타내는 한편, 전치사 쉰은 여기에서 “함께”를 의미한다. 17절의 이 부분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동시에 저희와 함께 우리가 나꿔채감을 당할 것이다.” 그런 보증은 그 당시 죽었던 그리스도인들과 살아남아 있는 자들이 동시에 주와 연합될 것이라고 설명함으로써 데살로니가인들을 안심시켰을 것이다. 구름 속으로  참조 마 24:30; 행 1:9; 계 1:7. 끌어 올려  헬라어 하르파조(harpazo-), “나꿔채다.” 참조 행 8:39; 빌 2:6; 계 12:5 주석. 하르파조로부터 라틴어 동사 라피오(rapio-)를 거쳐 영어 단어 “rapture”(휴거)가 파생되었는데, 이 단어는 바울이 여기서 그들에 대하여 기록하는 성도들의 끌어 올림 혹은 데려감을 기술하기 위하여 어떤 사람들이 전문적인 신학적 의미로 사용하는 용어이다. “휴거”라는 단어를 그렇게 사용하는 자들은 그리스도가 능력과 큰 영광으로 가시적이요 가청적으로 나타나기 몇 년 전에 성도들을 데려가기 위하여 지구의 공중으로 비밀리에 불가시적으로 오는 일이 먼저 있을 것이며, 한편 지상의 나머지 거민들은 적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서 환난으로 특징지어진 기간을 거치게 될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 비밀 강림을 기술하고 있다고 그들이 주장하는 지금의 성경절은 그리스도의 오심에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이 함께한다고 말하고 있다. 결코 비밀스런 사건이 아닌 것이다. 더욱이 이 구절은 명백히 데살로니가인들이 염려하고 있던 “우리가 그의 앞에 모임”에 관한 것으로, 그런 모임은 “환난 전 휴거”설이 제시하는 것처럼 적그리스도가 출현하기 전이 아니라 적그리스도가 나타난 후에(살후 2:1~3) 있게 될 것이다(계 20장에 관한 추가적 설명, 설명 2를 참조하라). 나팔은 또한 w/24/30e, 31에서 가시적 강림을 분명히 기술하는 문맥 내에서 언급된다. “땅의 모든 족속들이…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이 성경절들의 어구들 가운데 마 24장에 묘사된 강림과 ssalonians4/1에 묘사된 것이 다르다고 간접적으로라도 암시하는 것이 조금도 없다. 그러므로 두 성경절은 한 시점에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을 묘사한다. 이것은 모든 성경의 한결같은 가르침이다. 비밀 휴거를 믿는 신조의 근거가 되는 그릇된 개념에 관한 논의는 계 20장에 관한 추가적 설명, 설명 2를 참조하라.공중에서. 성도들은 땅에서 올라갔고, 주와 그를 수행하는 많은 천사들은 하늘에서 내려왔다. 그들은 땅과 하늘 사이의 공중에서 만난다. 주를 영접하게  문자적으로 “주를 만나기까지.” 의인들이 땅에서 들려 올려진 목적, 곧 그들이 주를 만나는 목적의 성취를 표현한다. 만남의 순간에 그리스도인의 가장 귀중한 소망은 성취된다. 즉 그는 어느 누구보다 더 사랑하는 분과 연합하게 된다(참조 빌 1:23 주석).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강림과 16, 17절에 묘사된 일련의 사건들의 결과로서, 모든 신자는 그들의 주와 연합한다.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바울은 독자들을 그 황홀한 만남의 순간 그 너머까지 데려가고자 시도하지 않는다. 각 시대의 제자들은 마침내 주와 연합되고, 미래는 보장된다. 이 시점에서 그 너머에 있는 것을 탐구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여러 성경절들을 통해 우리는 연합한 후에 구속받은 자들은 그들이 시작한 여행을 계속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 집으로 간다는 것을 안다(참조 요 14:2, 3 주석). 그리하여 그들은 “항상 주와 함께 있”을 것이다.(이사야 66:22,2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을 것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가 말하노라! 매 월삭과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이르러 내 앞에 경배하리라!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의 가정과 교회와 일터에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과 은혜와 축복이 충만하게 임하시며, 영원한 하늘 본향 우주적 안식일 대예배에 참석하여 함께 예배드리는 큰 축복을 받으시기 간절히 바라며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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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우리 친구 여기서는 나사로가 제자들에게도 친구였음을 가리키고 있다(참조 3절 주석).잠들었도다 헬라어 코이마오(koimao-). 일상적인 잠(마 28:13; 눅 22:45 등)과 죽음의 잠(마 27:52; 고전 7:39 등)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 제자들은 예수가 일반적인 잠을 말하는 것으로 오해했다.  다음의 비교를 통해 잠이 죽음을 나타내기에 타당한 것인지 살펴보자. (1) 잠자는 동안 우리는 무의식 상태에 있다.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전 9:5, 6). (2) 잠자는 동안 우리는 삶의 모든 활동으로부터 쉼을 누린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 9:10). (3) 잠자는 동안에는 의식을 가지고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그 호흡이 끊어지면…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시 146:4). (4) 우리는 깨어날 때까지 계속 잠을 자게 된다. “사람이 누우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하늘이 없어지기까지 눈을 뜨지 못하며…”(욥 14:12). (5) 잠을 자면 깨어 있는 자들의 활동에 동참할 수 없다. “행하는 모든 일에 저희가 다시는 영영히 분복이 없느니라”(전 9:6). (6) 우리는 잠잘 동안에 정서적인 활동을 멈춘다. “그 사랑함과 미워함과 시기함이 없어진 지 오래니…”(전 9:6). (7) 누구에게나 잠은 일상적이며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전 9:5). (8) 잠자는 동안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멈추게 된다.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시 115:17; 참조 사 3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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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만일 내가] 가서 이 조건절은 불확실성을 도입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 아니었다. “만일”(에안[ean])로 번역된 단어는 일시성(一時性)을 뜻하며, 필시 고전 14:16; 요일 3:2에서처럼 “~때”(when)로 번역해야 한다.내가 다시 와서 헬라어는 이 약속을 현재시제로 표현한다. 소위 이 미래적 현재(futuristic present)는 사건의 확실성을 강조한다. 그 사건은 너무도 확실하기 때문에 이미 발생하고 있는 것처럼 간주된다. 이 언급은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참조 마 24:3 주석; 24:30, 31)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며칠 전 예수가 생생하게 묘사한 그의 인격적 재림을 가리키는 것임이 분명하다.영접하여 헬라어 파랄람바노(paralambano-). 문자적으로 “~의 곁으로 영접하다”(참조 마 24:40 주석).나 있는 곳에 제자들에게 재림의 때가 주님과 재회할 순간으로 제시되었다. 이 말씀에는 신자들이 죽을 때 그들의 주님과 함께 있기 위하여 간다는 널리 보급된 교리에 대한 암시가 조금도 들어있지 않다. 또한 성경 어디에서도 이 교리를 지지하지 않는다. 바울 또한 신자들의 관심을 장엄한 재회의 순간인 재림의 때로 향하게 하였다(살전 4:16, 17).  예수는 아버지의 집으로 갔다. 예수는 교회 안에서 자신이 구현되기를 애타게 바라며 기다린다. 그의 형상이 백성들에게서 완전히 재현될 때에, 그는 올 것이다(실물교훈, 69). 영광스러운 귀향을 촉진하는 것이 우리의 특권이다(벧후 3:12; 참조 시대의 소망, 633, 634,; 실물교훈,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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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목 - 예수 재림의 소망! 부활의 소망!첫 찬미 - 41 장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끝 찬미 - 706장 주님과 만나는 찬란한 아침



성경 말씀 - 데살로니가 전서 4장 13-17 절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 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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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ope of the Advent of Jesus! The Hope of the Resurrection! 1 Thessalonians 4:13-17 "Brothers and sisters, we do not want you to be uninformed about those who sleep in death, so that you do not grieve like the rest of mankind, who have no hope.  For we believe that Jesus died and rose again, and so we believe that God will bring with Jesus those who have fallen asleep in him. For the Lord himself will come down from heaven, with a loud command, with the voice of the archangel and with the trumpet call of God, and the dead in Christ will rise first.  After that, we who are still alive and are left will be caught up together with them in the clouds to meet the Lord in the air. And so we will be with the Lord for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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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day You'll make everything new, Jesus



One day You will bind every wound The former things shall all pass away No more tears



One day You'll make sense of it all, Jesus 



One day every question resolved Every anxious thought left behind No more fear



When we all get to heaven What a day of rejoicing that will be 

When we all see Jesus We'll sing and shout the victory







One day we will see face to face, Jesus Is there a greater vision of grace 

And in a moment, we shall be changed On that day 


And one day we'll be free, free indeed, Jesus One day all this struggle will cease 

And we will see Your glory revealed On that day



And when we all get to heaven What a day of rejoicing that will be 

When we all see Jesus We'll sing and shout the victory 







Yes, when we all get to heaven What a day of rejoicing that will be 

And when we all see Jesus We'll sing and shout the victory 



Oh one day, one day Yes, one day we will see face to face, 

Jesus Is there a greater vision of grace?



And in a moment, we shall be changed Yes, in a moment, we shall be changed 

In a moment, we shall be changed On that day



When we all get to heaven What a day of rejoicing that will be When we all see Jesus 


We'll sing and shout the victory We'll sing and shout the victory


615장 주의 사랑 찬양하세
1. 주의 사랑 찬양하세 그의 자비 찬양해 우리 위해 금도성을 예비해 주셨다네 (후렴) 우리 다 본향 가세 그날 기쁨이 넘쳐흐르리 우리 주님 볼 때 다 승리 찬양하겠네 2. 우리 순례 길을 갈 때 어둔 구름 막아도 순례 길을 다 마치면 평화 기쁨 넘치네 3. 우리 주께 충성하세 매일 믿고 따르며 주의 얼굴 뵈올 때에 슬픔 사라지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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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장 주의 사랑 찬양하세
1. 주의 사랑 찬양하세 그의 자비 찬양해 우리 위해 금도성을 예비해 주셨다네 (후렴) 우리 다 본향 가세 그날 기쁨이 넘쳐흐르리 우리 주님 볼 때 다 승리 찬양하겠네 2. 우리 순례 길을 갈 때 어둔 구름 막아도 순례 길을 다 마치면 평화 기쁨 넘치네 3. 우리 주께 충성하세 매일 믿고 따르며 주의 얼굴 뵈올 때에 슬픔 사라지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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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숙영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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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부활에 대하여 쓰신 글이 본인의 죽음 앞에서 부활의 소망을 확인하신 것이었구나 생각됩니다. 예수께서 하루 속히 재림하시기를 간구합니다. 마라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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