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로마의 도전(Rome's Challenge)" 제5회 - 기독교의 안식일 IV, "가톨릭 미러"지 1893년 9월 23일자 사설 >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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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로마의 도전(Rome's Challenge)" 제5회 - 기독교의 안식일 IV,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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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안식일  IV

 

가톨릭 미러1893923일자 사설

 

길이가 다른 짝짝이 목발을 짚고 절뚝이는 자여

한쪽 다리는 진실을 의지하고, 다른 쪽은 거짓을 의지하고

어색한 옆걸음질로 결승점을 향해 가지만

온통 불안정스러우니 경주에 패배할 수밖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한 새로운 율법을 제정하셔서 당신을 예배하는 날로 토요일 대신 일요일로 대체하셨고, 그런 하나님의 뜻이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사도들의 글에 기록되었노라고 성서적 기독교 신자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새로운 증거들을 이번 기사를 통해 마지막으로 신중하게 검토해 보려고 한다.

이런 급진적 변동이 있었다는 증거가 주의 날(the day of the Lord or the Lord’s day)”이란 표현이 들어 있는 성경 구절들에서 거듭거듭 발견된다는 주장들이 우리에게 들어오고 있다.

먼저 안식일에 관한 주제를 지닌 것으로 분류할 수 있는 성구들이 신약의 복음서들과 사도행전 및 편지서들 가운데 도합 61회 등장한다. 또 둘째 부류로 주일 중 첫날”, 즉 일요일과 관련된 성구들이 아홉 개 있는데, 이들을 모두 철저히 분석한 결과 사람의 경배를 받으실 날짜를 변경하시려는 의향이 하나님께 있었다는 단서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세 번째, 곧 마지막 부류의 성구들에 관한 검토를 진행하려 한다. 우리가 이 성구들을 제시하는 이유는 저들의 스승인 성경에 추호의 정당성이나 근거가 없는 하나의 종교적 법령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상에 속여 팔아먹으려는 죄악으로부터 성경의 진리를 수호하려는 의도에서이다.

이 부류에 속하는 첫째 성구는 사도행전 220절이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이 예언이 선포된 후 일요일이 몇 번이나 지나갔는가? 심판의 날을 가리키는 거룩한 성경 말씀을 일요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왜곡하는 우행(愚行)을 제발 그만두기 바란다.!

이 부류에 속한 둘째 성구는 고린도전서 18절이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가지 견고케 하시리라.” 여기에 언급된 날이 심판의 날인 것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가 있을까?

이 부류의 다음 성구는 같은 편지서 55절에서 발견된다.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근친상간의 죄를 범하던 고린도인이 바로 다음 일요일에 구원을 받았다? 이 얼마나 가련한 둘러대기식 논리인가?

넷째 성구는 고린도후서 113, 14절이다. “너희가 끝까지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너희가 대강 우리를 아는 것같이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 이날이 어느 날인가? 일요일인가, 아니면 심판 날인가?

다섯째 성구는 바울이 빌립보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 16절이다. “우리가 이것을 확신하노니, 너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그분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킹제임스역). 선량한 빌립보 사람들은 다음 일요일에 곧바로 완전에 도달했으므로 그들이 현대 고속 수송 체제를 보았다면 아마 웃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여섯째 성구를 바로 제시하는 것을 용납하기를 바란다. 빌립보서 110절이다.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그날이 바로 다음 일요일이었으므로, 진실로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으리라.

일곱째 성구는 베드로후서 310절이다. “그러나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오리니..”(킹제임스역) 이 성구를 일요일에 적용하려하면 우리는 모두 부조리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하리라.

여덟째는 베드로후서 312절이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이날은 바로 위에 언급된 날과 같은 날이다. 만일 이 두 구절의 주의 날을 다음 일요일에 적용해야 했다면 당시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 전야인 토요일 밤을 뜬눈으로 새워야 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독자들에게 주의 날을 일요일로 속여 팔아먹으려는 신성 모독적 계략을 떠받들기 위해 이용되는 성경 구절 아홉 개 중 여덟을 소개했다. 그 결과가 어떤가? 그 성구들의 용례가 하나같이 직접적이고 절대적이며 변명의 여지 없이 분명한 말세적 기만을 폭로하는 증거를 제공해 준다.

우리가 만나게 될 주의 날에 관한 아홉 번째 언급은 사도들의 기록 중 가장 마지막 부분에서 발견된다. 말세의 예언인 요한계시록 110절에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그러나 이 말씀도 앞에서 살펴 본 여러 성구와 같이 성서적 친구들에게 아무런 위로를 줄 수 없다. 요한이 그의 복음서나 편지서에서 이와 동일한 표현을 쓴 일이 있는가? 단연코 없다. 그러면 이때까지 그가 일요일을 언급한 적은 있었던가? 두 번 있었다. 그러면 그는 두 차례의 경우에 일요일을 무엇이라고 지칭했는가? 부활절 일요일을 그는 안식 후 첫날곧 주일 중 첫날이라 불렀다.(20:1)

다시 2019절로 가 보자.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요한은 성령의 감동 하에 그의 복음서와 편지서들에서 동일하게 일요일을 주일 중 첫날이라고 불렀다. 그러면 무엇을 근거로 그가 이 명칭을 버렸다고 추정할 수 있을까? 요한계시록을 쓸 때는 그가 더 큰 영감을 받은 때문일까? 아니면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때는 일요일 준수가 더욱 일반화 된 까닭에 일요일을 위한 새로운 명칭을 채택한 것일까?

이와 동일한 표현을 이미 누가, 바울, 베드로가 여덟 번이나 사용했고, 그들 모두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위의 질문들, 특히 마지막 질문에 응답하는 것은 지나친 열성으로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심판 날을 주의 날이라 칭하게 하시고, 유독 요한만은 따로 일요일을 주의 날로 부르도록 하셨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변증론(辨證論)자들은 확실성이라는 무오(無誤)의 동기(動機)들로부터 유추(類推) 혹은 귀납(歸納)의 도덕적 동기를 예견(豫見)한다. 우리도 이 방식에 의거하여 알려진 것들로부터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한 확실한 결론을 도출(導出)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덟 번 사용된 한 어휘의 의미를 확실히 알았으니 우리는 그 표현이 아홉 번째 사용되었을 때도 역시 동일한 의미로 사용될 수밖에 없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특히 아홉 번의 표현이 모두 성령의 감동에 의한 것임을 우리가 알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또한 다른 자매 성구들의 경우처럼 위의 성구도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강력한 내적 뒷바침을 통해서도 증명될 수 있다. 요한은 요한계시록 110절에서 말하기를,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라고 했는데, 같은 책 41, 2절에서는 이 표현에 대한 해석의 열쇠를 이렇게 제공한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그때 한 음성이 그에게 말하기를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하였다. 우리도 성령의 감동으로 요한과 함께 올라가 보자. 어디로 올라간다는 말인가? 하늘의 열린 문을 통해 하늘로 올라가 보자. 무엇을 보게 될 것인가? –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4:1)이다. 요한은 성령의 감동 가운데 하늘로 올라갔다. 그는 주의 날”, 또는 심판의 날에 발생할 일들과 그 심판의 날 이전에 발생할 일들을 계시로 보았고, 또 그것들을 빠짐 없이 기록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성서적 주의 날은 전적으로 심판의 날을 표현하는 용어이다.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 옛 율법에 속한 안식일이 취소되었다거나 기독교 시대를 위하여 다른 날이 대신 책정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일에 가용(可用)한 증거들을 신중하고 정확하게 수집했다. 그것은 혹시라도 셋째 계명이8 어떤 새로운 법에 의해 폐지되었다는 주장이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위와 같이 조심스럽게 구분한 것이다. 그런 종류의 모든 주장은 1874년 감리교 감독회의 때 내려진 결정에 의해 이미 완전히 배제된 바 있고, 당일에 뉴욕 헤럴드(New York Herald) 지가 그 대의(大意)를 이렇게 인용 보도하였다. “태초에 제정되었고 모세와 선지자들에 의해 거듭거듭 확인된 안식일 제도는 결코 폐지된 일이 없다. 이는 도덕율의 일부이며, 그 신성성이 일점 일획도 제거된 일이 없다.” 이런 공식 선언서는 수많은 성서적 기독교 신도들에게 새 율법 아래서도 셋째 계명은8 영구적인 것임을 엄숙히 다짐해 주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우리 독자들에게 영국의 성공회기도서(聖公會祈禱書)에 실린 39개 신조 중 20번째를 특별히 주목해 줄 것을 간구하는 바이다. “교회가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에 위배되는 것을 제정하는 것은 불법이다.”

 

편집자 주()

8 십계명 중 넷째 계명인 안식일 계명이 가톨릭식 계산 방식으로는 셋째 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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