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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한 하와의 눈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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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석진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08.04.13 14:27 조회수 10,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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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한 하와의 눈물 이야기

시작하는 말

새해를 시작하면서
아내의 절친한 친구 여 집사님의 새해 인사와 함께 다음의 e-mail을 보내왔다.

“새해 인사를 드립니다.
좋은 새해, 멋있는 새해, 보람 있는 새해, 건강한 새해 되시기 기도힙니다.
요즈음 성경통독을  시작하고 있어요.
혹 이점을 생각해 보셨는지요.
노아 때, 왜 아들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하고
딸들은 사람의 딸들이 되어야 하는지...
지금 세상엔, 요즘 교외엔 여자들이 80%정도는 되는 듯 한데요...
조금 생각하는 중입니다.
롯의 처는 왜 뒤를 돌아 보았는지 성경에는 답이 없든데요....
너무 심심하시면 생각해봐 주세요.”

이 e-mail를 받고 생각해보니
성경을 읽으면서 여자들이 가지고 있는 무거운 짐들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모든 문제 중에 하와의 문제가 가장 큰 문제가 아닌가 생각된다.
오래 전부터 생각한 하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므로
여자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고 싶다.
오늘의 주제는 “회개한 하와의 눈물 이야기”입니다.
물론 심심하여 생각한 문제가 아니고
진리를 탐구하듯이 열정으로 찾은 하와의 이야기이고
아직 들어보지 못한 것이기에 우리에게 생각할 주제를 줍니다.

하고 싶은 말

성경에서 하와의 이름은 타락한 이후에 처음 사용되었다.(창3:20)
그 전에는 여자라는 명칭과 또 아내라는 명칭으로 나오다가
창세기 3장 20절에 비로서 하와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불행하게도 그 후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게 된다
에덴에서 쫓겨난 그들은 가인을 낳게 되는데 그 사건이 창세기 4장 1절에 기록되었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학자들은 창세기 4장을 인간 문명의 시작 또는 가인의 후예들에 대한 이야기로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창세기 4장을 “회개한 하와의 눈물의 장”이라고 생각한다.
창세기 3장 20절과 4장 1절 사이에는 짧게는 1년 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많은 세월이 지났다.
첫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 쫓겨난 후 그들이 진정한 회개의 눈물의 생활을 살았을까?
두 번째 질문은 그들이 살았던 환경이 아주 좋은 환경이었을까?
혹은 그들이 살던 환경이 열악한 환경이었을까?
에덴에 쫓겨난 그들은 그 아름다웠던 에덴을 그리며 후회와 회개의 삶을 살았을까?
그들이 여러 번 에덴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을까?
그럴 때 마다 화염검을 든 천사들에 의해 쫓겨나게 되는 그들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범죄 후 하나님의 저주에 따르면
하와는 고통스러울 임신 중이고 그들에게 삶의 생활고가 있고 심각한 부부의 문제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환경과 삶에서 나타난 인간의 마음은 대체로 후회는 있지만 회개는 없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살아야 할 현실에 직면할 때가 있지 않을까?.
이러한 전체적인 상황에서 하와는 가인을 낳게 된다.

나는 하와의 회개를 이끌기 위해 하와가 말한 두 성경절을 비교하여
화와의 심적 신앙상태를 생각해보자 한다.
그리고 하와의 회개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위해 세가지 방법으로 접근하려고 한다.
두 성경절은 창세기 4장 1절과 창세기 4장 25절의 말씀이다.
먼저 창세기 4장1절을 생각해보자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첫번째 접근은 단어에 대한 연구이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에서 문제되는 것은 동사와 전치사이다.
동사 “득남”의 득의 번역과 “여호와로 말미암아”의 전치사 말미암아의 번역이다.
이곳에 사용된 동사의 원어는 카나로 “얻다” “취득하다” “창조하다”로 사용된다..
한국어 성경에서 창세기 4장 1절의 “득남”에서 동사를 “득”으로
NIV에서는 “bring forth”로 NASB에서는 “get”으로 번역 하였다.
그러나 현대 번역의 귀재인 Stephen Mitchell은 이 동사를 “create”로 번역하였다.
그 다음은 전치사에 관한 것이다.
원어에서는 에트로서 주로 ~와 함께로 사용되는 전치사이다.
보통 여러 번역에서는 “with” “from” “with the help of””로 번역했다.
그러나 Stephen Mitchell은 특이하게 “just as the Lord did”로 번역하였다.
그는 이 전치사가 “together with”나 “equally with”로 번역할 수 있으나
이곳에서 후자의 편을 택했다.
이러한 번역은 tone을 중요시하지 않으면 결코 할 수 없는 번역인 것 같다.
아래 그의 번역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The man had slept with his wife Eve, and she conceived and gave birth to Cain,
He Who Is Created, and she said, “I have created a man, just as the Lord did!”
(Stephen Mitchell)
우리가 이 번역을 따르면 단순히 하와가 가인을 낳는 것을 지나
하나님과 같이 창조의 일을 대신하고 있는 모습니다.
인간을 창조하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하와의 모습과 말이다.

두번 째 접근은 언어학 구조에 의한 세 인격체의 역할이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이 성경절에는 세 인격체가 나온다.
첫째는 하와이고, 둘째는 카인이고, 셋째는 하나님이다.
그러나 여러 번역에서 공통적으로
주체는 하와이고 목적은 카인이고 하나님은 도우미의 역할이었다.
“내가 카인을 낳았다.”
“내가 카인을 낳았는데 하나님이 도왔다.”
나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신앙인의 자세를 생각하게 된다.
첫번째 아이, 하나님의 저주로 고통스러운 산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힘든 일.
내가 신앙인이면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할까?
“아 내가 죽을뻔했다. 하나님이 나를 살리셨고 카인을 태어나게 했다.”
이러한 말도 할 수 있지 않으까?

세번재 접근은 신앙과 신학적인 접근이다.

창세기 4장 1절의 하와의 말을 분석하면 자신의 행위가 강조되어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보다는 자신의 행위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교만으로 이끌어가는 인간 자신의 능력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하와의 자신의 넘치는 인본주의 적인 태도를 느낄 수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한 하와의 소망이 카인을 낳으면서 절규하고 있다.
인본주의 사상이요 기독교적으로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이다.

이러한 생각의 소용돌이에서 창세기 4장 1절과 짝이 되는 다음의 성경절이 내 눈 앞에 나타났다.
창세기 4장 25절의 말씀이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니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름 씨를 주셨다 함이며”

하와가 카인을 낳은 후 얼마 후에 셋을 낳은 지 모르지만 오랜 세월이 흘렀는 것 같다.
셋을 낳았을 때 그의 말은 카인을 낳았을 때와는 아주 다른 태도를 볼 수 있다.
셋을 낳았을 째 하와의 말의 주체는 자기가 아니고 하나님으로 말하고 있다.
자기 자신은 목적어의 자리로 자리잡았다.
하나님은 더 이상 카인의 경우처럼 도우미가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아이로 셋을 칭하고 있다.
셋을 얻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은혜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신앙에서 은혜를 강조할 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참으로 그렇다.
처음으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사례가
셋을 낳은 후 하와의 말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다시 Stephen Mitchell의 번역을 보자.
“Adam slept with his wife again, and she gave birth to s son, and named him Seth, He Who Is Granted, for she said, “God has granted me another child!”(Stephen Mitchell)

자식을 하나님이 주었다고 생각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그 진실됨이
깊은 인생의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어머니의 신앙이다.
자식이 내 자식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식이라 생각하는 신앙이다.
하와는 4장 1절의 경험 후 4장 25절의 경험을 갖기까지
그 많은 세월의 아픔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 세월에 아벨의 죽음이 있었고 가인의 후예들의 인간 문명의 시작이 있었다.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서 없어지게 되었다.
하와는 그 아픔의 세월을 지나 셋을 얻게 되었으며
신앙으로 하나님께 돌아가게 되고
4장26절에서 비로서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서 불리워지게 되었다.

나는 눈을 감고 그 수 많은 세월 속에 일어난 사건들을 경험하는 하와의 눈물을 보게 된다.
오늘날도 하나님을 향해 흘리는 여인들의 많은 눈물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지 않는가?

끝 마치는 말

여자들이여,
하와의 눈물의 회개가 여러분들을 하나님에게로 더욱 가깝게 하는
심성을 가지게 하였음이 틀림없습니다.
하와를 원망하지 말고 무거운 짐을 벗으시고
하와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경험하는 하나님의 여종들이 되십시요.
좋은 안식일 보내세요.

2008년 3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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