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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다와 마리아의 세번 째 이야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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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석진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10.05.05 13:43 조회수 13,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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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다와 마리아의 세번 째 이야기(3)

 

나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 이유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신다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나의 삶을 깊이 들여다 보면

영혼은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처럼

예수와의 만남을 절실히 갈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글에서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한 사건을 주목했다.

마리아를 둘러싸고 예수님과 마르다와의 대화 속에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문제점을 해결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다.

 

오늘은 요한복음 11장과 12장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요한복음 11장에는 나사로의 부활의 사건이 있다.

도스도예프스키의 죄와 벌과 카르마조프의 형제들을 읽으면

그곳에 너는 이 나사로의 부활 사건을 믿느냐라는 심각한 질문이 나온다.

그렇다. 요한복음 11장은 나사로의 부활장이다.

그러나 이 놀라운 사건에서 나에게 관심을 끄는 것은

마르다의 신앙 고백과 그녀의 변화된 모습이다.

또한 예수를 사랑하는 마리아의 마음이다.

 

우선 마르다의 신앙고백을 생각해 보자.

예수님과와의 대화에서 보여준 마르다의 신앙고백은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신앙 고백 중에 하나이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저도 알고 있읍니다.”

, 주님,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믿습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신앙고백인가?

예수가 옆에 있다면 죽지 않는다는 신앙.

마지막 날의 부활을 확신하고 있는 신앙

재림에 대한 확고한 신앙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위대한 신앙.

 

마르다와 예수와의 대화는 주옥같은 대화였다.

예수가 눈물을 흘리면서 나사로를 다시 부활시킨 것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정성스러운 믿음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이 부활의 사건 외에

흘려버릴 수 있는 한 사건에 큰 관심이 간다.

누가복음 10장에서  동생 마리아를 대하는 마르다의 태도는 거칠었고

또한 의도적인 것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 11장에서 동생 마리아에게 보여준 마르다의 태도는 인상적이다.

예수께 위대한 신앙고백을 한 마르다는 급히 마리아에게 달려간다.

예수가 마리아를 찾는다는 이야기는 기록에 없지만

그는 마리아에게 예수가 온 것을 알려주고 예수가 그를 찾는다고 일러준다.

그는 동생이 얼마나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는줄을 알고 있었다.

 

이 말을 남기고 마리아는 돌아가 자기 동생 마리아를 불러 귓속말로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하고 일러 주었다.”

 

가만히 불러 귓속말로 동생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부드러운 마르다의 모습을 상상한다.

왜 마르다는 가만히 마리아를 불러 귓속말로 이야기하고  있을까?

마르다의 침착하고 다정한 모습이 갑자기 마음에 와 닿는다.

사실 마르다는 그러한 성격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아마도 가정의 모든 짐을 벗겨주신 예수님을 만난후

그녀는 이제 평안을 찾게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작은 표현들은 그냥 스쳐갈 수 있는 표현이다.

그러나 그렇게 스쳐가는 표현 속에 따뜻한 바람이 가슴에 스며든다.

동생의 마음을 이제는 읽고 있는 마르다의 모습이다.

 

요한복음 12장에는 예수를 영접하는 만찬회에서

마리아가 향유을 머리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예수의 발을 씻는다. 

요한은 나사로는 만찬회에서 손님들과 끼어 앉아 있고

마르다는 일을 보고있었다고 이야기 한다.

분주하게 일을 보고 있는 마르다는

더 이상 마리아의 이상한 행동을 말리지 않는다.

우리는 이곳에서 요한이 마르다는 일을 보고

마리아는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는다고 특별히 언급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 이전의 누가복음 10장의 사건을 연상할 수 밖에 없다.

마르다는 여전히 분주히 일을 하고 있었고

마리아는 여전히 모든 주위의 사람들을 당혹하게 하는 행동을 한다.

그러나  마르다는 더 이상 그를 나무라지 않는다.

그는 동생을 예수에게 맡긴 것이다.

 

사실 예수는 이 요한 복음 12장의 마리아의 사건을 승화 시키고 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14 9절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 하시니라.”

사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우리는 이 사건을 기념하지 않고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마리아가 차지하고 있는 위상은 높은 편이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기념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성찬예식과 이 사건뿐이다.

그런데 기독교 역사는 이 기념하라는 마리아의 사건을 기념하지 않는다.

우리는 마리아를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시 여겨야 한다.

 

나는 이 마리아를 막달라 마리아와 동일인으로 생각한다.

성경에는 이 마리아를 베다니 마리아라 부르지 않는다.

성경의 저자들이 막달라 마리아라고 칭할 때는 언제나

다른 마리아와 구별이 필요할 때 그 호칭을 사용한다.

그런데 그 무리 중에 베다니 마리아라는 이름은 없다.

예수가 마리아의 업적을 기념하라고 한 이 베다니 마리아가

예수의 무덤에 향유를 가지고 뛰어갔을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살았을 때 향유를 준비한 그가 예수가 죽은 뒤에도 분명히 준비하였을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만 무덤에 찾아간 것으로 나오지 베다니 마리아는 나오지 않는다.

제자들 사이에 이 마리아는 막달라 마리아로 불리어지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나는 예수와 마르다 그리고 마리아의 관계에서 보여주는 작은 일들이

사려깊은 예수의 따사함으로 성숙된 신앙인이 되어가고 있는 두 여성을 본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한 여인이다.

예수를 대할 때 그들이 보인 정성을, 사랑을 우리는 이야기 속에서 느낀다.

 

나에게 비추어진 예수님의 따뜻한 햇빛이 나의 마음을 환하게 하기를 원한다.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 같은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기를 기도한다.

 

2010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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