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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8장 연구-이 주의 교과 공부


나는 교과 공부를 가르칠 때 좋은 해답을 가져올 질문을 찾는다.

보통 교과공부 시간이 약 30분 정도 할애되기 때문에 약 세 가지 질문을 찾는다.

한 질문에 10분정도 토의한다.

45분이 할애되면 15분씩 하면 된다.

만약 20분밖에 없다면 보통 두 질문만하면 된다. 

질문에 대해 모든 반생이 대답할 기회를 주고 원하지 않으면 

패스라고 하면 다음 반생이 대답하면 된다.

대답이 동일하면 누구와 동일하다고 이야기 하면 된다.

나는 질문과 내 나름대로의 대답을 생각하지만

내용을 너무 많이 준비하지 않으려고 한다.

내가 너무 많이 준비하면 그것을 모두 가르쳐야할 유혹을 받기 때문에

반생들과 대화할 시간을 잃어버린다.

내가 생각하는 것을 가르치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반생이 창의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지를 유도한다.

마침 교과공부를 부탁받아 주제를 생각해 보았다.


첫 질문: 로마서 8장 1절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인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아래에서 위 질문에 가장 적당한 대답은 어떠한 대답일까?

1.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섬기는 자

2. 육신으로 죄의 법을 섬기는 자

3.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섬기고 육신으로 죄의 법을 섬기는 자


사도 바울 선생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라고 이야기할 때

그 사람은 어떠한 사람일까? 

단순히 안식일 학교 교과책 122쪽에 있는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처럼

"그분을(예수) 영접했고, 그분을 신뢰하며, 그분의 삶의 방식을 따르기로 결심한 결과 

그리스도와 가까운 개인적 유대를" 가진 자일까? 물론 틀린 답은 아니지만

로마서 8장을 연구하는 우리로서 

문맥상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라고 특수하게 지정하고 있을 때 

그 사람은 로마서 7장에 나오는 사람을 지칭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로마서 7장의 사람은 어떠한 사람인가?

지난주에 공부를 잘하였으면 우리는 그가 어떠한 사람인 것을 잘 알 것이다.  

그 사람은 사도 바울 선생을 포함하여 우리와 같은 그리스도 인이다.


로마서 7장은 논란을 가져오는 장이다. 

사도 바울이 일인칭을 사용하여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모습을 설파하고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의 회심 이전의 모습인가? 아니면 혹은 회심한 이후의 상태인가? 

확대하면 회심하기 이전의 그리스도인의 상태인가? 

아니면 회심한 후의 그리스도인의 상태인가에 대한 논란이다. 

 

회심 이전을 주장하는 성경학자들은 

7장 14절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라는 말을 예로 들어 

어떻게 사도 바울이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다"라고 믿을 수 있는가? 라고 반문한다. 

그래서 7장에 나타나는 사람은 그의 회심 이전을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나에게 떠오르는 다른 질문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 마음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속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며(롬7:22)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섬길 수 있을 것인가?(롬7:23)

하나님의 영이 우리 마음속에 없다면 어떻게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법이

지체 속에 있는 또 다른 법과 싸울 수 있는가?(롬7장 22,23절)라는 질문이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 24절에서 절망적인 인간의 상태를 말하면서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라는 질문으로 

그(우리)에게 가장 문제되는 육체 즉 몸의 죄된 상태에 대해 절규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롬7장25절)하는데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긴다는 말로

7장을 끝맺는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7장에서 "영의 새로운 것으로"(롬7:6) 또는 "속사람"으로(롬7:22) 

혹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롬7:25)이라는 특별한 용어를 사용하였지만

8장에서는 같은 의미로 "생명의 성령의 법"(롬8:2) 또는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

(롬8:4) 혹은 "영의 생각"(롬8:6)의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로마서 8장 1절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섬기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이며 그들에게는 결코 누구에게서든지 정죄함이 없다. 

그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아닌가?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와 "이제"라는 말과 함께 이 진리를 선포하고 있다. 

이 성경 절은 거룩하고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정죄를 받지 않고 

심판을 통과한다는 이야기가 아닌 것을 문맥상으로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섬기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비록 육신의 죄와 사망의 법이 그들을 종과 같이 얽맨다 할지라도

그들이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섬기고 영의 생각을 하기 때문에 

육체가 부서질 때까지 영육의 싸움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다.  


둘째 질문: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이러한 일이(롬8:1) 가능할 것인가?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지만  죄의 법을 섬기려는 육신과 싸우는 ,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선포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사도 바울은 그 대답을 8장에서 설명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대신 그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이 땅에 보내어 

그의 육신에 정죄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율법의 요구를 이루셨다. 

아래 성경절의 "죄를 정하사"에서 "정하사"의 원어는 

8장 1절의 "정죄함이 없다"에서 "정죄하다"와 같은 원어로 사용되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율법의 요구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정죄하시고 그를 십자가에 달리시게 하셨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놓으셨다. 그 이유를 다음 질문에서 설명하려고 한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3,4)


그는 7장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섬기는 자를 이곳에서는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로 

설명한다. 그리고 우리로 영을 좇아 사는 사람이 되기를 강권한다. 

속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즐기는 사람은 비록 육신이 연약하여 죄의 법도 섬기기고 있지만

그들은 영의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신의 생각은 결코 하나님의 법을 즐기지 않고

하나님의 법을 섬기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럴수도 없기 때문이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5-7)


그는 계속해서 로마서 8장 1절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일어나는 비밀을 설명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을 살리시리라."(롬8:9-11)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7장의 인간이 즉 마음으로 혹은 속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섬기기를 즐거워하지만 

육신이 연약하여 죄의 종이 되어 영육간이 싸움을 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영이 

우리도 죽을 몸에서 살리신다고 말씀하신다.

사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의 앞장들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즉 칭의의  진리를

이곳에서는 영과 육체의 관계를 가지고 아주 재미있게 설명하고 있다.

물론 인간의 상태를 영과 육으로 나누는 헬라적 사고방식이지만

로마서의 독자들이 헬라적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기에 

이렇게 설명할 때 그들이 진리를 쉽게 이해하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의 다음의 생각이다.

마지막 질문: 왜 하나님은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기지만 육신을 좇아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그의 육신을 부서뜨리며 우리의 죽을 몸을 살리시는가?

하나님이 이러한 놀라운 은총을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사도 바울은 그 이유를 로마서 8장 14절에서부터 설명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진수인 것이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4)

"너희는...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but you received the Spirit of sonship. And by him we cry, 'Abba Father."(롬8:15)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시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다."(롬8:16-17)


사도 바울 선생은 로마서를 통하여 죄인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복음을 소개한다.

그 복음의 깊은 내면에 "너희는 내 사랑스러운 자녀"라는 하나님의 사랑의 부르심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았다. 

우리는 그 음성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그 복음을 믿을 수 없다.

우리 인간은 우리 아버지가 누구인가를 잊어버렸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곁을 떠나온 지 너무 오래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우리의 삶이 너무 풍족하고 부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이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돼지 먹는 쥐엄 열매를 뒤지고 있을 때 

불현듯 그에게 아버지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아버지께 돌아가기로 작정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다. 부자의 관계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놓은 이유는

그의 다른 아들들 그 자녀들을 다시 찾기 위한 것이다.

예수가 기꺼이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의 자녀들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그의 아들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친 아버지이시다.

우리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귀하게 생각하고 우리 아버지께 돌아가자. 

그래서 로마서 8장을 결론짓는 마지막 성경 절은 참으로 진리인 것이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9)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부자 관계이기 때문에 결코 아버지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2010년 8월27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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