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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가 마귀가 된 황당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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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석진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08.04.13 14:57 조회수 1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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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가 마귀가 된 황당한 이야기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 중에 아마 가장 황당한 이야기는 천사가 마귀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나는 요즈음 이 황당한 이야기에 작은 새로운 빛을 보고 있다.  그리고 나로 하여금 새로운 생각에 빠져들게 하고 있다. 인간적인 생각이지만 하나님은 이 나이에도 삶의 진리를 가슴 아프게 깨우쳐 주고 있다.

루스벨은 하나님의 총애를 받는 천사장으로 창조되었다.
그러던 그가 얼마의 세월이 흘렀는지 모르지만 마귀 곧 사단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과 루스벨의 관계에는
우리가 알 수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많은 일들이 있었으리라 생각 된다.
이 일들은 하나님에게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적인 사고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아니겠는가?
단지 많은 아픔과 슬픔과 고통이 하나님에게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루스벨에게도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무엇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분명 하해 같은 하나님의 은혜는 오해로 둔갑이 되었을 것이다.
그 오해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치지 않는 불화로 이어졌을 것이고
더 이상 사랑과 자비와 인내와 온유라는 단어로 그 불화를 지우고
새로운 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결국 하나님은 루스벨과의 인연의 줄을 끊게 된다.
그를 하늘에서 내어 쫓았다.
물론 하늘에서 전쟁이 일어났으니 루스벨이 하나님을 하늘에서 쫓아내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때부터 오늘날까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이 거짓말이다라는 비난 받는 것을 감수 하셨을 것이다.
그래도 그는 루스벨과 인연의 줄을 끊고
그를 하늘에서 내어 쫓는 것이 최선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결정하셨다.

그리고 그는 공의를 베풀기 위해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그러나 루스벨에게도 할 말은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가식이요,
그의 사랑은 편애요,
그의 자비는 말뿐이며,
그의 온유와 인내는 위선이다.”
그는 굶주린 사자처럼 분노하였고
뱀처럼 지혜롭게 천사들을 꾀여 말하였을 것이며
결코 그의 생각을 바꾸지 않고
계속 고집을 부렸을 것이다.  
그는 하늘에 전쟁을 일으킬 만큼 능력이 있었으며
그의 동료 삼분의 일을 동참시킬 수 있을 만큼 타당성이 있는 이론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마침내 그는 전쟁을 일으켜
아마 하나님을 하늘의 권좌에서 내어 쫓으려고 시도하였음이 틀림없다.

하나님과 루스벨에게 이루어진 이러한 하늘의 이야기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에게 황당한 이야기가 틀림없다.

분명 이 사건에서 나는 아파하시는 하나님을 보았다.
고통 당하신 하나님을 생각하였다.
지금까지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놓은 아버지의 아픔만 생각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 황당한 하늘의 이야기에서
십자가의 고통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아픔을 보게 하셨다.

이 하늘의 황당한 이야기는 너무나 인간적인 이야기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러한 황당한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천사 같은 사람들이 하루 아침에 마귀 같은 사람들이 되는 세상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천사 같은 사람도 마귀 같은 사람이 되는데
똑똑하고 깐깐한 사람은 무엇이 될지 염려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서
우리의 육체적, 지적, 영적인 성장이 둔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 사람은(영의 사람) 날로 새롭게 성장한다는 이론을 철석같이 따르지 않기로 했다.
그것은 어쩌면 나 자신을 속이는 마지막 이론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쩌면 헬라적인 사상에서 온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늙어서까지 영적으로 목이 곧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서 육체적, 지적, 영적으로 그 성장이 둔화되기 때문에(히브리 사상?) 더 이상 이제는 천사 같은 사람이라거나 똑똑한 사람이라거나 깐깐한 사람이라는 것이 하나님 앞에 의미가 없을 것 같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겠는가?
재미있는 말에 구십에는 산 자나 죽은 자가 똑같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의 인생의 삶에서
육체는 점점 시들어 가고
반짝이던 지혜와 지식도 녹 쓸어가고
영적인 삶도 게을러져 가고 뒷 걸음치는 이 시기에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어 하늘의 황당한 이야기를 통해
황당한 나의 이 땅의 삶을 들어다 보게 하신다.
지금까지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라면
앞으로의 삶도 하나님의 은혜일 것이니
그의 사랑과 은혜, 자비와 온유, 그리고 그의 인내심을 비난하지 않겠다.
오늘 내게 베풀어주신
따뜻한 햇빛과 깨끗한 물과 공기를 주신 하나님에게 감사하면서 살겠다.

2007년 7월 7일 안식일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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