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e

복 있는 사람은…
(시편 1:1-6)

Ⅰ. 들어가는 말


1. 성경에서 가장 핵심적인 용어이면서도 가장 오해가 많은 용어?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가장 먼저 성경에 나온 단어들의 개념을 바로 정립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구원, 복음, 기도, 율법, 의, 영생, 믿음, 성전, 칭의, 거룩 그리고 앞으로 살필 ‘형통’ 같은 단어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많이 들어서 익숙한 것이지 실제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뜻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신학을 한다는 것은 결국 그 단어들에 대해 ‘정의’를 다시 내리는 작업을 뜻합니다. 내가 무슨 뜻으로 그런 성경의 용어들을 이해하느냐에 따라 신앙관이나 구원관이나 교회관이 크게 달라집니다. 인간이 유한해서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깊은 진리를 다 이해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죽는 날까지 하나님께서 새롭게 당신의 백성들을 통해서 드러내시는 진리에 늘 마음을 열고 있어야 합니다.


시편 1편에도 그같이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지만 실제로는 너무나 많이 오해하고 있는 한 단어가 등장합니다.

그것은 시편 1편과 2편을 이해하는 키워드인 ‘복’(blessing)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시간 시편 1편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했던 그 복이 무엇인지 들어봅시다. 또한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 공동체가 그 영광스러운 복을 누릴 수 있을지를 잘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시편 1편에 대해


시편 1편과 2편은 시편 전체로 들어가는 현관과 같습니다. 시편엔 각 시마다 표제(heading)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시편 3편에는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란 표제가 있고, 시편 4편에는 “다윗의 시, 영장으로 현악에 맞춘 노래”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 1, 2편엔 그런 표제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두 시편은 전체 시편의 숫자에 포함하지 않기도 하고, 시편 1편과 2편을 한편으로 간주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두 시편을 시편 전체의 서론, 혹은 도입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시편은 여러 시인들의 시를 모아놓은 ‘선집’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선집으로 묶은 사람이 의도적으로 이 시편 1, 2편을 서론 혹은 도입으로 사용한 것 같습니다.


두 가지 사실이 이것을 증명해줍니다.
첫째, 두 시편은 ‘복 있는 사람’으로 시작해서 ‘복 있는 사람으로’ 끝나고 있습니다(inclusio).


둘째, 구약성경을 다른 말로 ‘율법과 예언’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구약의 ‘율법서와 예언서는 이스라엘의 영적인 삶의 근간’이 됩니다. 율법서가 기초에 해당한다면 예언서는 그 기초 위에 세워진 골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 두 시편은 각각 율법과 예언을 다루고 있습니다. 시편 1편은 율법(말씀)에 대한 태도를, 시편 2편은 메시아에 관한 예언에 우리가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Leupold, Psalms, 31). 그리고 이 율법과 예언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복 있는 자와 악인, 혹은 의인과 죄인,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원수가 갈라진다고 말합니다.


그럼 이제 시편 1편으로 들어가 볼까요?


Ⅱ. 몸 말


1. 시편 1편의 구조


 모든 성경이 그렇듯 이 시편 1편 역시 아주 정교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시인이 생각나는 대로 써내려 간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전하기 위해 세심하게 문학적인 기교와 장치를 사용해서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성경이 말하는 복은?


시편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먼저 우리가 이해하는 복과 성경이 말하는 복이 얼마나 다른지를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성경 다른 곳에서 말하는 복이 정말 시편 1편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이 단어는 성경이 말하는 뜻과는 거리가 먼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God bless you’란 인사를 우리의 ‘진지 드셨습니까?’ 정도의 문안 인사쯤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새해에 복조리를 만들거나, 정화수 떠놓고 지성으로 빌어서 초월적인 신에게서 얻어내는 그 무엇쯤으로 성경의 복을 이해합니다. 그러다 보니 복을 ‘내적이고 영적인 의미’보다는, ‘외적이고 물질적인 개념’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복이라는 것은 어떤 ‘관계’나 ‘상태’를 표현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 상태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들, 혹은 그 상태의 풍성함이나 부요함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는 상징들, 예를 들면, 건강, 재산, 장수, 물질적인 번영 등과 같은 것을 복으로 착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민간 신앙과 기독교가 혼합돼서 생긴 결과입니다. 한국 교회가 70-80년대 급속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도 이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기복주의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나라에서 ‘잘 살아보세’라고 난리치던 시대였기에 교회에서도 ‘예수 믿고 복 받자’는 구호가 먹혀 들어갔던 것입니다.


물론 이런 잘못된 이해들이 과거에 비해 많이 극복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요즘에도 교회에서 무당처럼 복 빌어주고 사람 모으고 돈을 벌려는 가짜 목사들이 보입니다. 또 축도는 목사들만 할 수 있다는 엉터리 같은 주장을 해서 자신을 성도들과 구분하려는 안타까운 모습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염려한 분들은, 기독교가 ‘기복종교’가 아니라고 역설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심각하게 성경을 오해한 주장입니다. 기독교는 철저하게 ‘기복종교’입니다. ‘복’은 기독교의 핵심 사상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실 계획을 ‘복 주실 계획’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담을 통해 창조 때부터 약속한 것이 바로 ‘복’입니다. 인간의 죄악으로 거듭 이 약속이 좌절되었지만, 하나님은 다시 아브라함에게 아담에게 주신 복 주실 언약을 하십니다. 이 복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러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그 때 하나님은 다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우십니다.


그 내용은 간단했습니다. 믿음으로 율법에 순종하면 복을 받겠지만,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후 역사 내내 이 언약을 어기기만 했습니다. 그러다 남북 두 나라로 갈라지고, 결국 앗수르와 바벨론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약속은 끝난 것입니까?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보내서 그 복 주실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은 그 조건으로 ‘믿음’ 혹은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제일 먼저 하나님의 나라가 왔다고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산상수훈은 무엇으로 시작합니까? ‘팔복’입니다. 다시 말해서 무엇이 복이라는 뜻입니까? 믿음으로 그 왕이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 복입니다. 그것이 바로 창조 때부터 약속하시고, 아브라함과 다윗과 시편과 선지자서들을 통해서 거듭 약속하시고 마침내 인간이 철저하게 그 복 받을 언약을 어겼음에도 자기 아들을 죽이시면서까지 이루신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무엇보다도 간절히 믿고, 구하고, 또 고난 중에도 끝까지 인내하며 소망해야 할 것이 바로 그 ‘복’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기독교가 얼마나 철저하게 기복종교인지 아니겠습니까? 문제는 ‘기복’이 아니라 ‘복의 내용’입니다.

복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문제일 뿐 복을 비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150편이나 되는 방대한 시집을 묶으면서, ‘복’으로 시작하는 것만 봐도 이 용어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3. 시편 1편에서 말하는 복 있는 사람은?


그럼 이제 시편 1편에서는 이 복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살펴볼까요?


A. 복 있는 사람의 삶의 태도(:1-2)


먼저 1-2절은 시인이 복 있는 사람의 삶을 관찰한 내용이 나옵니다. 1절은 부정적으로, 2절은 긍정적으로 표현합니다.

1) …을 하지 않는 자(:1)
그런데 히브리 본문은 우리 번역과는 뉘앙스가 많이 다릅니다. 시인은 ‘복’을 복수(blessnesses)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히브리어에서 최상급을 만드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이 뉘앙스를 살리려면 이 구절을 감탄문으로 번역해야 적절합니다.

‘how very happy is the man…..’ 즉, ‘…하는 사람은 얼마나 복이 있는가!’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입니까? 세 가지를 말합니다.


* 부정적으로 시작하는 2가지 이유?
첫째, 악인의 꾀를 좇지 않는 자입니다. 둘째,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 자입니다. 셋째,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자입니다.
여러분, 동사에만 주목해 보시겠습니까? ‘좇다’(walk), ‘서다’(stand), ‘앉다’(sit). 복 있는 사람을 말하면서 먼저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도 이상하려니와 그것을 점층법을 사용하여 표현한 것도 뭔가를 암시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시인이 인간의 상태를 얼마나 현실적으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잘 해야 할 것을 듣기 전에,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들어야 하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라는 거 아니겠습니까?


둘째,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철저하게 죄로 둘러 싸여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2절에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는 자’가 이런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한 것을 볼 때, 어느 한 순간도 이런 죄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때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떤 자가 복이 있는 자인지, 반대로 어떤 자가 복이 없는 자인지 보겠습니다.


a. 악인의 꾀를 좇지 않는 자
우선 ‘악인의 꾀’를 좇지 않는 자입니다. 여러분, 복 있는 자의 반대로 누구를 말합니까? 악인입니다.

악인은 하나님의 백성 중에 나쁜 짓 좀 하는 자를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아닌 자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저버리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자를 말합니다. 아니 늘 하나님의 백성들을 유혹하여 죄를 짓게 하는 자를 뜻합니다.

성경은 ‘복’이나 ‘상’을 하나님의 백성들이 받는 보너스 정도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복’이 없는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악인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단의 별명은 ‘속이는 자’입니다. 사단은 현실을 왜곡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릇된 기대와 환상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 욕망의 노예가 되어 스스로 자신을 속이고 하나님도 속이다가 결국 파멸하게 만드는 것이 사단의 목표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악인의 꾀’입니다. 그건 ‘악인의 (삶의) 원리(principles)’로도 번역할 수 있고, 어떤 분은 ‘악인의 충고’(counsel)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꾀’라고 번역했다고 해서 어떤 ‘기교’나 ‘잔재주’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시인은 지금 철저하게 ‘태도’의 문제와 ‘가치관’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악인은 간교한 계획으로 이 세상과 더불어 잘 살아보려고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악인은 보다 더 ‘근본적인 부분에서’ 하나님의 백성과 차이가 납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잘못을 해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듯 침묵하시는 하나님, 겉으로는 그 하나님을 경배하는 척 하지만 사실 삶으로는 하나님을 맘껏 조롱하는 자, 그들이 곧 악인입니다. 이 세상이 주는 풍요와 번영의 신, 돈의 신의 노예가 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없어도 별로 티가 안 나지만, 자존심이나 돈은 없이 못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마저 모른 체 할 사람. 그런 자가 바로 악인입니다.


여러분 이 시편은 이방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한 시입니다.

따라서 혈통적으로 하면, 이 악인 역시 자신을 선민이라고 생각하는 이스라엘 백성일 것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그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복을 누리지 못하는 ‘악인’일 뿐이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 우리 시대의 악인의 꾀?
하나님이 주신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기로 작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바로 그 순간 ‘악인의 도구’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은 요즘 어떤 유혹을 받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가진 자리와 위치에서 악하고 부정한 이득을 취하라고 유혹받는 일이 있습니까? 발을 떼셔야 합니다. 당장 그리 하시길 바랍니다.


b.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 자
처음 냉탕이나 온탕에 발을 담그면 느낌이 강한데 단 몇 초만 지나도 몸이 적응합니다.

처음엔 양심에 꺼리던 일도 반복하면 머잖아 그럴듯하게 합리화하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런 태도를 ‘죄인의 길에 선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는 단지 유혹을 받아 따라 하는 입장이었다면, 이제는 자기만의 ‘길’ 혹은 ‘방식’이 생긴 것입니다. 다른 악인의 길을 좇다가 이젠 자기만의 노하우가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기의 부정한 방법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혼자 할 때보다 죄책감이 덜 하기 때문입니다. 좀전에는 ‘따랐는데’ 이제는 ‘서’ 있습니다. 익숙해진 것이지요.


☞ 습관으로 굽어버린 불의한 것?
이미 습관으로 굳어버린 우리의 못된 습성은 무엇입니까?
‘돈에 미친’ 이 시대의 노예가 아니라, 이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분과 만나기를 기뻐하는 선한 습관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믿지 않는 자의 냉소와 조롱의 대상이 아니라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살아있는 복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악인의 길이 아니라 생명의 길이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지금 어디에 서 계십니까? 그곳이 하나님과 얼마나 떨어져 있습니까? ‘아버지’ 하고 부르면, 당장 “오냐, 무슨 일이냐” 하실 만한 곳입니까?

아니면 차마 기도조차 할 수 없는 민망한 곳입니까?

하나님께로 향하는 길이 아닌 죄인의 길에 서 계시다면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고 주님께로 돌아오시길 바랍니다.


c.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자
지금 하나님의 호소에 귀기울이 않고 계속 그 자리를 고수하면, 결국 그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게 됩니다.” 여기서 ‘자리’는 ‘무리’(counsels)를 나타내는 은유입니다. 오만한 무리 가운데 주저 앉아 버린다는 뜻입니다. 아시다시피 ‘오만한 자’는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같아지려던 첫 아담의 범죄가 바로 ‘오만함’입니다.


이쯤 되면 이 사람은 이제 어느 누구의 충고나 권면도 듣지 않습니다. 자기가 법입니다. 자기가 주인입니다. 양심이 마비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오만한 무리 중에 아예 ‘주저앉아’ 스스로 파멸을 자초하는 자입니다. 사단이 가장 기뻐할 비참한 인생입니다.

그는 자기가 가진 자원을 가지고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처럼 착각하는 헛똑똑이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도 듣지 않습니다. 귀로는 들어도 듣기 좋은 말만 듣습니다. 자기를 축복해주고 변호해주는 말만 듣습니다.

심판의 복음은 싫어하고 용서의 복음만 좋아합니다. 고난의 복음은 싫어하고 번영의 복음만 좋아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는 이미 하늘의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가 만들고 길들인 하나님을 자기 눈에 옳은 대로, 자기 욕망이 부채질 하는 대로, 부리고 있는 자입니다. 그 자신이 하나님인 사람입니다.


☞ 나에게 충고해 줄 사람이 있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충고해줄 수 있는 사람을 곁에 두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서 기꺼이 쓴 소리를 해줄 만큼 여러분을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꾸짖는 소리를 듣고 계십니까?

정말 무슨 소리든 달게 받을 만큼 권위 있는 분을 두고 있으시다면, 여러분은 참 복된 사람입니다.


* 죄의 점증성과 중독성: 약 1:13-16
우리는 1절에서 또 한 가지 아주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복이 없는 자의 삶을 다시 한 번 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을 떠난 삶을 좇다가 서다가 아예 주저앉아 버리지 않습니까? 이것은 죄가 얼마나 중독성이 강한지를 보여줍니다.

그 이유는 죄란 다름 아닌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 그것이 곧 죄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생명체와 같아서 하나님과 다시 관계가 회복되기 전에는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주지 않으면 견딜 수 없게 됩니다.


야고보 사도 역시 이처럼 죄가 점점 발전하는 속성이 있음을 이렇게 지적합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여러분, 절대 속지 마십시오. 더 이상 자신을 속이지 마시고, 찬찬히 지금 자신이 어디만큼 와 있는지 돌아보십시오. 좇고 있습니까?

서 있습니까? 앉아 있습니까? 늦기 전에 돌이키십시오. 복 있는 삶으로 돌아오십시오. 하나님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다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속이려 들지 마십시오. 그분이 울면서 기다리십니다. 그 넓은 품에 덥석 안기십시오. 다 받아주실 겁니다.


2) 복 있는 사람의 삶의 태도(:2)

* 사역(私譯)
“그러나 오히려(but rather) 즐거워하는 것은 여호와의 율법이요, 주야로 묵상하는 것 역시 바로 그 율법입니다.”

1절에서 부정적으로 ‘복 있는 사람’을 이야기하고 난 후 이제 2절에서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측면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문장이 두 개인데, 두 문장 모두 ‘율법’이 문장 맨 앞에 나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어나 헬라어는 우리 말이나 영어처럼 문장의 순서가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일반적인 순서는 있지만, 강조하고 싶을 때는 가장 중요한 단어를 맨 앞에 배치합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그러나 오히려(but rather) 즐거워하는 것은 여호와의 율법이요, 주야로 묵상하는 것 역시 바로 그 율법입니다.”

여기서 율법은 1차적으로는 모세오경이나 모세의 율법, 혹은 십계명을 뜻할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포괄적인 의미의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수 1:7; 왕하 17:13; 21:8; 시 78:5 등).

문서로 기록된 말씀 외에 선지자나 천사를 통해 보이신 하늘의 뜻, 혹은 직접 음성이나 꿈이나 환상으로 주신 말씀 등이 모두 여기에 속합니다.

이 율법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언약의 조건입니다.


율법에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기로 서로 약속했습니다. 그럼 누가 복 있는 자입니까?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입니다. 주야는 ‘온 종일’을 뜻합니다. 그렇다고 식음을 전폐하고 성경만 본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의 삶 전체가 말씀을 통해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그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뜻입니다.

무슨 일을 하고, 누구를 만나고, 어디에 있든지 간에 하나님의 임재 아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애쓰며 산다는 뜻입니다.

소가 새김질을 하듯 말씀을 새김질 한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마다 그 말씀을 떠올리며 하나님의 인도를 구한다는 뜻입니다. 아니 말씀 자체이신 하나님을 늘 마음에 모시고 산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살지 않고는 결코 ‘악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를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지 않고는 결코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절대 자기 합리화나 겉과 속이 다른 외식적인 삶의 유혹을 벗을 수 없습니다.

‘복 있는 자’는 결코 의무감에서 어쩔 수 없이 말씀을 보지 않습니다. 그에게 말씀을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는 삶의 전부입니다.

그것은 인생을 의미 있게 사는 에너지의 원천입니다. 시편 기자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 율법을 즐거워한다.”


다윗은 시편 19편에서도 이 하나님의 말씀이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맛을 알고 계십니까? ‘바로 이 맛이야!’라고 하실 만큼 하나님이 말씀의 여러분의 심장을 두드리시는 경험을 하고 계십니까?

아니라면 내가 하나님의 백성인지 한번 되물어보셔야 합니다.

정말 말씀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을 모르고서도 내가 하나님을 믿고 산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게 여겨지는 자만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B. 복 있는 사람과 악인의 결과(:3-5)


이제 3-5절에서는 복 있는 사람과 반대로 악인이 결국 어떤 결말을 맞게 되는지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묵상하는 자에게 ‘결과’가 있다는 것은 그 묵상이 단지 명상이 아니라 깨달음을 실천하는 것까지를 모두 포함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복 있는 사람의 결과(:3)


시인은 말씀을 묵상하며 사람을 두고 ‘시냇가에 심은 나무’에 비유합니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동사 ‘심은’이라는 말을 직역하면 ‘심기운’, 더 자세히 말하면 ‘옮겨 심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따라 살려고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늘 물이 마르지 않는 시냇가 곁으로 인도해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특별히 물이 귀한 고대 근동의 상황을 생각하면, 늘 물이 마를 날이 없는 시냇가의 나무는 생각만 해도 듣는 이들을 시원하게 해줍니다. 그 나무는 제철이 되면 여지없이 열매를 맺습니다. 그 잎은 사시사철 마를 날 없이 늘 푸르름을 간직할 겁니다.


☞ 내가 맺고 있는 열매는 나를 누구라고 말해주는가?
말씀의 물가에 심기우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심겨진 나무입니까? 여러분이 맺은 열매를 보십시오.

바로 여러분 자신이 열매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고 있습니까?

말씀의 물을 받아 사셨다면, 그리 되어 있어야 정상입니다.

아니 그리 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있어야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복 있는 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교회도 말씀의 물가에 심겨있지 않으면 죽습니다.  

사람만 들어 차 있을 뿐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곳이 될 것입니다. 그저 외로움을 달래주는 친목 단체로 전락할 것입니다.


부디 광야에서 생수가 솟듯 말씀이 선포되어, 죄인들이 자기 죄를 인하여 애통해하고 주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는 생명의 공동체가 될 수 있다면, 내가 어떤 희생도 감수하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실상은 죽었던 사데 교회처럼 될 것입니다.


b. 형통함
그런 열매가 있는 삶을 두고 시편 가지는 “그 행사가 다 형통하다(prosperity)”고 표현합니다.

우리말 뉘앙스 때문에 이 말을 마치 ‘어려움 없이 모든 것이 순조로이 진행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실지 모르겠습니다.

혹은 외적으로 번창하는 것을 형통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는 맞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창세기 39:2, 3, 23에서 요셉의 생애를 묘사하면서 이 단어가 세 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형들의 손에 죽으려다 겨우 풀려나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 팔려 결국 애굽의 군대 장관의 집에 넘겨집니다.


그런데 그렇게 죽을 고생을 하였는데도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하심을 보았더라.”(39:2,3).


그의 시련은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주인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치자 오히려 겁탈하려 했다는 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옥에 갇힙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감옥의 제반 사무를 맡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39:23).


무엇이 형통입니까? 고난이 없는 것을 형통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하셨는데도 그는 억울한 일을 연거푸 당했습니다. 그러고도 형통했습니다.

무엇이 형통입니까? 어려울 때나 평안할 때나 늘 하나님의 손을 의지하며 그 손에 이끌려 사는 삶을 형통이라고 말합니다.


시편 23편처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그 때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곧 “내가 형통합니다”라는 고백입니다.

말씀과 더불어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그것이 바로 형통한 삶의 비결입니다.

그것이 고난 중에도 여호와를 인하여 기뻐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것’이 무엇입니까?

문맥을 보면, 바울은 가난해도 부해도, 평안해도 고난을 받아도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항상 자족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 고난 중에도 하나님과 함께 하여 형통함을 누리고 있는가?
형통하십니까? 고난 중에도 살아계신 하나님이 손수 만져주시는 은혜를 경험하고 계십니까? 그것을 형통이라고 부릅니다.

그 형통은 무엇을 통해서라야 가능하다구요? 주야로 말씀을 묵상할 때라야 가능합니다.

말씀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으면, 내가 처한 상황을 해석할 눈을 잃어버립니다.

좋은 때는 감사하고 힘들 때는 불평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때로는 내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상황이 내게 독이 될 때도 있습니다.


반대로 내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형편이 오히려 내게 약이 될 때도 있습니다.

이런 것을 잘 분별하여 늘 형통하기 위해서는 늘 말씀과 가까이 하여 영적으로 민감해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렇게 하지 않을 때 우왕좌왕하는 모습, 심지가 굳지 않은 연약한 모습을 시인은 4-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2) 악인의 결과(:4-5)


 a.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시냇가에 깊이 뿌리 내린 나무

먼저 비유로 답합니다.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농경 사회에서 겨는 아주 흔한 대상입니다. 키질을 하면 겨는 날아가고 알곡만 남습니다. 비바람에도 끄떡없이 시냇가 옆에 든든히 서 있고 사시사철 늘 푸른 뿌리 깊은 나무와, 잔바람에도 온 데 간 데 없이 날아가는 겨. 극단적인 대조입니다.


이것은 말씀에 뿌리는 내리지 않고 중심 없이 시류에 휩쓸리는 가여운 인생을 표현하는 참 멋진 비유입니다.

뿌리 깊은 나무가 주는 생명력과 생동감과 안정감. 반대로 껍질뿐인 죽은 겨가 주는 무상함과 무가치함과 유한함. 이 얼마나 대조됩니까?

그래서 성경은 다른 곳에서도 이 ‘겨’를 심판의 메타포로 자주 사용하고 있습니다(시 35:5; 호 13:3 등).

하나님을 아는 그리스도인과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이 겉으로는 비슷하게 보이지만 실제는 이렇게 다릅니다.


☞ 나는 중심 없이 시류에 영합하는 초라한 인생은 아닌가?
우리의 목숨줄을 죄어오는 까마득한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우리 신앙인은 그 현실에 매몰되어 현실논리만을 내세울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의 주인되신 하늘의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그 분께 인생을 맡기는 배짱이 있어야 합니다.

절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과는 타협하지 않겠다고 하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지 않으면’ 절대 하나님이 그토록 위대해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내 눈 앞의 현실이 하나님을 부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우리를 압도하고 말 것입니다.


b. 두 가지 결과(:5)


그러니 그 악인의 결국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5절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4절이 악인의 속성이었다면, 5절은 그 실제 결과입니다.

그래서 5절은 ‘그러므로’(on this account)로 시작합니다. 두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악인은 심판을 견디지 못합니다.
이 심판은 최후에 하나님이 내리실 심판을 뜻합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도 악인이 그 마땅한 대가를 받는 경우도 있지만, 죽을 때까지 부귀영화를 다 누리고 죽을 때도 아주 편안하게 죽는 악인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이 세상만이 전부라면 우리는 자신 있게 하나님이 없다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있다 하더라도 그는 불의 앞에 철저하게 무기력한 신일 뿐입니다.


역사는 정의가 승리한다는 것을 항상 보여주지 않습니다.

절대 착하고 양심적으로 성실하게 살면 사람 대접을 받으며 살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하지만 마지막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전부라면, 멍청하게 여기 앉아 있을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의 멋진 제안대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죽은 사람이 다시 살지 못한다면-마지막 심판 때에-내일이면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할 것입니다.” 결국엔 하나님은 하나님을 조롱한 이들을 심판하실 것이고, 겨가 불 앞에 버티지 못하고 재가 되듯이, 그들도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둘째, 죄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할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지금은 의인인 듯 행세하지만 하나님은 속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시는 자신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자신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쓴 시입니다.

시인은 그들 중에도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는 자가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심판 때까지 알곡과 가라지가 같이 자라게 그냥 두라고 하셨습니다. 지금은 속일 수 있지만 그 날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지 않는 자고 악인의 꾀를 좇고 오만하게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 하나님을 속이려 들지 말자


 참 두려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살고 싶은 데로 다 살면서 하나님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진정으로 누릴 줄 모르면서 천국에 가고 싶다는 것은 진심이 아닐지 모릅니다. 시편 기자는 그런 회색지대를 허락하지 않고 있습니다.


기도의 깊은 맛. 말씀의 달고 오묘한 맛. 그것을 아는 자라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그 말씀과 기도의 실체이신 하나님을 뵈올 날을 소망하게 됩니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여러분들의 마음이 그 천상의 소망을 향해 비상하시길 바랍니다. 쑥쓰러움과 어색함을 넘어 내 존재의 근원되신 이에게 마음을 조아리고, 무릎을 꿇어 복종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복종의 기쁨, 항복하는 자의 행복을 맛보기 바랍니다.


C. 결론(:6)
마지막으로 시인은 1-5절까지 말한 대로 복 있는 자와 악인의 인생의 결과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달라지는 이유를 6절에서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왜냐하면’으로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인정한다’는 히브리어 동사 ‘yada’입니다. 직역하면 ‘알다’(know)입니다.

이 앎은 단순히 1+1=2라는 식의 지식적인(intellectual) 앎이 아니라 관계(relational)를 통한 앎을 말합니다.

따라서 부부간의 관계처럼 아주 친밀하고 내밀한 관계를 묘사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여호와께서 의인의 길은 아신답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 의인의 길이란 곧 여호와와 동행하는 길 아닙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늘 함께 가시는 길을 모르실 리 있겠습니까?


의인은 윤리적으로 완벽한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복’이 언약용어라고 했습니다. ‘의’도 역시 언약 용어입니다.

하나님과 충실한 관계를 맺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 의인에게 주어지는 관계의 기쁨이 바로 ‘복’입니다.

늘 하나님의 도우심과 긍휼을 기대하면서 결코 죄 앞에 자신을 굴복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이 바로 ‘의인’입니다.

하나님은 그 의인의 마음을 ‘야다’, 알아주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악인, 즉 하나님의 길에서 떠난 사람은 결국 사망에 이를 것입니다. 심판을 견디지 못하고, 자기가 선택한 길을 따라 갈 것입니다.


Ⅲ. 나오는 말


여러분은 자신의 인생의 성패를 가늠하는 기준으로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까? 어떤 분들은 사업의 성공으로, 어떤 분들은 자식 농사로, 어떤 분들은 가족이나 교회의 관점으로 평가하실 것입니다. 그 관점에 따라 만족의 정도도 다르고 평가 기준도 달라질 것입니다.


오늘 시편 기자는 우리들에게 단 두 길만 제시합니다. 우리 시대의 가치관으로는 아주 옹졸하고 편협하게 보이는 안경입니다.

그것은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입니다. 인생의 성패가 하나님이 인정하시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던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시면 그 인생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영원한 사망에 이르고 만다고 에누리 없이 선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 앞에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복을 누리는 사람의 길과, 하나님을 떠나 악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탐닉하는 사람의 길이 있습니다. 어떤 길을 좇고 계십니까?


추수의 날이 오기 전에는, 심판의 날이 오기 전에는 결코 그 진상이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알고 하나님은 아십니다. 이제 선택하실 시간입니다. 양다리 걸치는 중립지대, 회색지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지금 우리를 복 있는 자의 삶으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비록 고난이 있고 시험이 있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기쁨이 있고 형통이 있고 찬양이 있는 삶으로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시인의 초청에 우리 함께 응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시냇가에 심기워 늘 초록이 무성한 나무처럼 말씀의 깊은 맛을 느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그 말씀으로 우리를 다스리시고 이끄시겠다는 약속이,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해주시겠다는 약속이 정말 내 삶 가운데 실현되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이 가슴으로 생생하게 느끼는 복된 인생을 만들어 보지 않으시렵니까? 우리 한 번 그 길에 나서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