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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후 갈릴리 호수가로 베드로를 찾아오신 예수님!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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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후 갈릴리 호수가로 베드로를 찾아오신 예수님!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


닭 울기 전에 3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

부활 후 갈릴리 호수가로 베드로를 찾아오신 예수님! 


갈릴리 호수가에서 주님은 시몬에게 물으셨네~~”

사랑하는 시몬아  사랑하느냐?” “주님 당신만이 아십니다 


갈릴리 호수가에서 시몬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던 예수님께서 여러분과 저에게 물으십니다.

사랑하는 무흠아넌 날 사랑하느냐?”


오, 주님 당신만이 아십니다" 라고 대답하는 여러분과 저에게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곧 죽게 될 것을 알았습니다.

게다가 (오래 전부터) 어떻게 죽게 될 것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에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결말은 어떠했습니까?

“유대인이요 외국인으로서 베드로는 채찍질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선고를 받았다.

이 무서운 죽음을 내다본 사도는 예수께서 심문받으시는 시간에 그분을 부인한 그의 큰 죄를 기억하였다.

한때 그처럼 십자가를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던 그는 이제 복음을 위하여 그의 생명을 버리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고

주님을 부인하였던 자신이 주님이 죽으신 동일한 방법으로 죽는 것은 너무도 큰 영광이라고 느낄 뿐이었다.

 

베드로는 그 죄를 성실히 회개하였으며 그에게 양떼를 먹이라고 하신 고상한 사명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그는 그리스도에게서 용서함을 받았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최후의 무서운 장면의 고통에 대한 생각조차도 슬픔과 회개의 괴로움을 감소시킬 수 없었다.

베드로는 마지막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아 달라고 사형 집행자들에게 간청하였다. 그 요구는 수락되었다.

위대한 사도 베드로는 이런 방법으로 죽었다”(사도행적, 537~538).

이런 일을 내다보고도 베드로의 관심은 양떼의 영적 안녕에 있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베드로를 부르시고,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고 사랑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도 용성하시고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다정한 음성으로 "내 양을 돌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음성을 듣고, 분부하신 말씀을 명심하고 실천함으로 예수님 안에서 충만한 기쁨을 누리는 성령충만한 삶! 

이웃과 함께 영원한 생명의 축복누리는 행복한 삶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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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무흠님의 댓글

no_profile 정무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넷째 날(수) 5월 24일 장막을 벗다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이는…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벧후 1:13~14). 1956년 오스카 쿨만은 <영혼불멸과 죽은 자의 부활 : 신약 성경의 증언>이라는 제목의 짧은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부활의 개념과 영혼불멸의 개념은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신약 성경은 ‘죽은 자의 부활’ 편에 반듯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고 말했다. 후에 그는 “내 저서 중 그처럼 큰 환호와 격렬한 증오심을 일으킨 책은 없었다.”고 진술했다. 1. 고전 15:12~57을 읽어 보라. 사후에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뜻인가? [고전15:12~57] 본문이 길어서 여기 옮기지 않는다. 각자가 찾아 읽어보기 바란다.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한 계시의 말씀이다. 답: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모든 예수를 믿고 성도로 산 사람들은 생명의 부활을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심판의 부활을 한다고 분명히 계시하였다. 대부분의 신약학자들은 죽음과 부활에 관한 신약 성경의 연구를 통해서 쿨만이 옳다고 인정한다. 신약 성경은 몸은 죽고 영혼은 생존한다는 영혼불멸 사상이 아닌 부활의 개념을 당연하게 여긴다. 예를 들어 살전 4:16~18에서 바울은 사랑하는 자를 잃은 자들에게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죽은 자들을 일으키시리라는 지식을 가지고 위로를 받으라고 권면한다. 고전 15:12~57에서 그는 부활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그는 우선 기독교 신앙이 예수님의 부활에 기초해 있음을 주지시킨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분에 대한 믿음은 소용이 없게 된다. 그러나 그분은 정말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 즉 죽음에서 일어난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그분을 믿는 모든 자들도 죽음에서 부활할 수 있게 되었다. 고전 15:35~50에서 바울은 몸의 부활에 대해서 말한다. 그는 현재의 몸과 부활할 때 받을 몸을 비교한다. 현재의 몸은 죽겠지만 부활의 몸은 죽지 않을 것이다. 요컨대, 신약 성경은 영혼불멸이 아닌 부활의 관점에서 죽음을 설명한다. 벧후 1:12~14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신학적인 배경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부가설명> 성경의 종교는 예수님의 부활한 사실에 의하여 확고하게 되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일이 없으면 사망의 종교일 뿐이다. 다는 종교들처럼 영혼불멸을 성경은 가르치지 않는다. 그것은 최초에 에덴동산에서 여자를 유혹한 뱀, 곧 사단 마귀의 거짓말이다. 그는 여자에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아도 결코 죽지 않는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은 아담부부는 죽었다. 사단은 자기의 거짓말을 사실로 알도록 다시 한 번 속인 것이 몸은 죽어도 영혼은 죽지 않는다는 소위 영혼불멸설을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죽은 자의 영혼이 몸은 없이 영으로만 활동한다는 것을 성경을 믿지 않기 때문에 죽음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믿도록 하기 위하여 그의 부하 타락한 천사들을 죽은 자의 귀신노릇을 하게 하여 아직도 몸을 가지고 살아있는 사람들을 속인다. 사후 세계를 볼 수 없는 사람들은 이런 사단의 장난에 완전히 속아 있는데 성경을 믿는다고 하는 기독교가 앞장서서 이 속임수를 성경진리인 것처럼 교리를 만들어 가르치고 있다. 사단이 얼마나 성공했는가.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그대로 사후 상태와 마지막 날 부활을 믿어야 한다. 죽은 자는 부활하는 그날까지 아무것도 모른다. 이미 어디서 말한 것 같은데 사도행전은 예수부활 증거행전이다. 초대교회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전파하였고 이 진리를 믿을 때 예수님 재림하실 때 성도들도 예수님처럼 부활한다는 소망을 확실하게 하였다. 베드로가 이 장막을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은 몸을 벗고 영혼이 어디에 간다는 뜻이 아니다. 죽을 때가 가깝다는 것이고 그는 부활의 소망 중에 잠잘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벧전 1장부터 부활의 소망을 강하게 이야기했다. 교훈 : 성경은 일관성 있게 영혼불멸이 아닌 죽은 자의 부활을 가르친다. 죽은 의인들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영원히 죽지 않을 몸으로 부활한다. 다섯째 날(목) 5월 25일 죽음을 목전에 둔 신앙 “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벧후 1:12~14). 1. 벧후 1:12~15을 읽어 보라. 베드로가 곧 자신의 장막에서 벗어난다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 [벧후1:12~15] 이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 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하노라 13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14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15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답: 베드로가 죽을 날이 가까웠다는 뜻이다. 벧후 1:12~14은 서신의 동기를 밝힌다. 베드로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마지막 기별 또는 증언을 서신에 담았다. 그가 임박한 죽음을 예상했다는 사실은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벧후 1:13~14)라고 말한 어법에서 드러난다. 베드로는 몸을 자신이 죽을 때 벗게 될 장막으로 비유했다. 베드로가 장막을 벗겠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분명히 몸을 의미하기 때문에 현대의 번역성경들은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여러분에게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제 곧 육신을 떠나야 함을 알고 있습니다…”(벧후 1:13~14, 쉬운성경)라고 번역했다. 자신이 장막 혹은 몸을 벗을 것이라는 베드로의 말 속에는 그의 영혼이 일종의 분리된 존재로서 생존하리라는 암시는 전혀 없다. 2. 벧후 1:12~15을 다시 읽어 보라. 베드로는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그러한 태도는 믿음에 대하여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가르치는가? 답: 죽기 전에 신자들에게 소망을 확실하게 증거하고 베드로가 죽은 후에도 그들이 이미 받은 믿음에 굳게 서도록 권고하는 자세였다. 우리도 그와 같은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벧후 1:12~15은 베드로의 편지에 엄숙함을 더한다. 그는 자신의 생명이 곧 그칠 것을 알고 편지를 기록한다. 주님은 이러한 사실을 그에게 보여주셨다. 그러나 그에게는 두려움, 염려, 불길함의 조짐이 없었다. 대신 베드로의 초점은 자신이 남겨둘 자들의 안녕에 맞춰져 있다. 그는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진리에 굳게 서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가 살아있는 한 그들에게 신실하게 살라고 당부할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가 주님에게서 얻은 경험의 진실성과 깊이를 볼 수 있다. 즉 그는 곧 죽을 것이다. 심지어 그것은 편안한 죽음이 아닐 것이다(사도행적, 537~538 참고). 그럼에도 그는 다른 이들의 유익에 이타적인 관심을 기울인다. 진실로 베드로는 자신이 가르친 믿음대로 사는 사람이었다. <부가설명> 사람은 죽는 것을 두려워한다. 살아있고 싶은 것이다. 가까운 사람이 죽으면 살아있는 사람들은 상실감에 사로잡힌다. 성경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라고 했다.(히9:27) 그러므로 한 번 죽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두 번째 죽음을 당하지 않는 사람은 죽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사랑하고 함께 살던 사람이 죽을 때 대화가 끊어지고 친교가 없어지기 때문에 슬퍼하게 된다. 그러나 부활의 소망이 확실하면 죽는 것은 그냥 깊은 수면상태에 있다는 것을 안다. 그것이 믿음이다. 요셉은 자기가 죽고 이스라엘이 해방되어 약속의 땅에 갈 때에 자기 해골을 가지고 나가라고 유언했다.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이 약속한 것을 항상 기억하라가는 확고한 신앙의 부탁이었다. 그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가 임종하면서 후손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베드로도 같은 마음으로 자기 임종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고 후생들에게 소망에 대한 신앙을 확고하게 하도록 당부하는 편지를 쓴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죽음을 보지 않는다고 예수께서 약속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요8:51) 이 말씀은 예수를 참으로 믿는 사람들은 영원한 사망을 당하지 않는 것을 뜻하는데 곧 둘째 사망과 상관없다는 말씀이다. 둘째 사망이 진짜 사망이다. 이 사망을 당하지 않는 사람은 죽은 것이 잠자는 것이지 죽은 것이 아니라고 확언하는 말씀이다. 베드로는 이 소망이 확실했고 우리도 확실하다. 믿는가? 교훈 :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죽음은 두려움과 염려의 주제가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살아있는 동안에 동료 신자들의 믿음을 격려하고 이타적인 관심을 기울인다 여섯째 날(금) 5월 26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베드로는 자신이 곧 죽게 될 것을 알았다. 게다가 (오래 전부터) 어떻게 죽게 될 것도 알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에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의 결말은 어떠했는가? “유대인이요 외국인으로서 베드로는 채찍질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선고를 받았다. 이 무서운 죽음을 내다본 사도는 예수께서 심문받으시는 시간에 그분을 부인한 그의 큰 죄를 기억하였다. 한때 그처럼 십자가를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던 그는 이제 복음을 위하여 그의 생명을 버리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고 주님을 부인하였던 자신이 주님이 죽으신 동일한 방법으로 죽는 것은 너무도 큰 영광이라고 느낄 뿐이었다. 베드로는 그 죄를 성실히 회개하였으며 그에게 양떼를 먹이라고 하신 고상한 사명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그는 그리스도에게서 용서함을 받았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최후의 무서운 장면의 고통에 대한 생각조차도 슬픔과 회개의 괴로움을 감소시킬 수 없었다. 베드로는 마지막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아 달라고 사형 집행자들에게 간청하였다. 그 요구는 수락되었다. 위대한 사도 베드로는 이런 방법으로 죽었다”(사도행적, 537~538). 이런 일을 내다보고도 베드로의 관심은 양떼의 영적 안녕에 있었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삶을 살아야 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신자답게 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진정으로 거듭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거듭났으면 신자답게 살아질 수밖에 없다. ➋ 우리는 벧후 1:5~7에 나오는 영적 덕목들을 어떻게 잘 나타낼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서로를 도울 수 있을까요? ※ 생경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예수님께 참으로 받았으면 그렇게 된다. 서로 복음과 진리로 거듭나는 경험을 함께 하도록 말씀과 기도로 도우도록 해야 한다. ❸ 벧후 1:12에서 말하는 “이미 알고 있는 진리” 또는 “현대 진리”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 시대의 “현대 진리”는 무엇일까요? ※ 각각 그 시대에 가장 필요한 복음 진리를 깨닫고 그 위에 굳게 서는 것이다. 이 시대의 현대진리를 세 천사의 기별을 깨닫는 것이고 하나님의 인을 받는 것이며 짐승의 표를 받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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