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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애를 인도하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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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애를 인도하신 하나님***

넘치는 사랑과 은혜와 치유와 구원과 축복을 베푸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머리말


사랑하는 나의 어머님은 "그 영광의 빛 속으로"(Into the Glorious Light)와 "할머니와 손자녀들"(Grandmother's Heart Is A Harp)이라는 자서전 저술을 마치시고, 2009년 9월 13일, 85세에 부활의 소망 가운데 잠드셨다.


춘하추동 새벽마다 앤드류스 대학  교정에 있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불리우는 "개척자 선교 교회"(PMC) 정문 앞에서 무릎꿇고 기도드리셨는데, 어느날 새벽 기도드리면서 "소녀에게 베푸신 주님의 그 크신 사랑과 은혜와 치유와 구원과 축복의 체험을 수천, 수만, 수십만명에게 증거하고 싶습니다" 라고 말씀드렸더니, "글을 써서 수많은 사람들이 읽게 하여라"는 응답을 받았다고 하셨다.


그리하여 돌아가시기 전 몇 년 동안, 정성을 다 하여 자서전을 쓰셨다. 

손자녀들과 한국어를 잘 읽지 못하는 젊은이들도 읽을 수 있도록 한국어와 영어로 집필하셨다. 

손자녀들을 위해 "Grandmother's Heart is a Harp"(할머니와 손자녀들)라는 책도 영어로 써서 자녀들과 손자, 손녀들이 읽게 하시고, Lulu.com에 출판하셨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치유와 구원과 축복을 베푸시는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증거하여 한 영혼이라도 더 예수님께로 인도하고 영생의 축복을 받도록 도와주고 싶어하시던 어머님의 소원을 성취시키기 위해, 그리고 성공적인 자녀 교육을 원하는 분들이 읽고 참고할 수 있도록, 어머님께서 쓰신 "그 영광의 빛 속으로"(Into The Glorious Light)와 "할머니와 손자녀들"(Grandmother's Heart Is A Harp)과 어머님의 시집 "영원을 걸으며"와 영원히 새로운 것"에 실린 은혜로운 글을 kasda.com 칼럼, 글동네, 8healthplans.com 칼럼, grkasda.com, detkr.com, sfkorean.com 게시판등에 부지런히 올렸고, 벌써 수천, 수만명이 읽었고, 은혜받았다는 여러 댓글도 써주셨고, 감사 전화도 해주셨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님을 더욱 잘 믿고 하나님 은총 속에 행복하게 살아가며, 믿음 안에서 자녀들과 손자들과 손녀들을 잘 교육할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어 하나님께 영광돌리기 바라며 간절히 기도드린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뜨겁고, 부지런하신 어머님은 엘렌 화잇 여사의 대쟁투 총서를 다 읽고 녹음하셨고, "봄비"라는 동화책과 "믿음의 행진"이라는 번역책도 출판하셨다.


어머님의 소원대로 이 글을 읽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애에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되며, 어머님께서 체험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와 치유와 구원과 축복을 체험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드린다.


새벽 4시부터 7시까지 성경과 예언의 신을 읽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암송하시며 충분한 새벽 헌신의 시간을 가지시고, 기억절을 암송하시며 앤드류스 대학 개척자 선교교회(PMC) 정문 앞으로 걸어가서 무릎꿇고 기도하시고 돌아오셔서 아침 예배를 드리시고 아침 식사를 하시던 경건한 어머님을 닮고 싶다.


해마다 52기억절을 암송하시고, 대쟁투 총서를 다 녹음하시고, 성경을 수십 번 통독하시고, 암송하시고, 십일조와 헌금을 충실히 드리시고, 신학생들과 선교지와 가난한 이웃과 골육친척들을 힘껏 도우며, 열심히 복음을 전하시던 어머님의 경건한 신앙생활을 본받고 싶다.


어릴적부터 새벽마다 일찍 일어나시는 어머님의 영향을 받고 자란 나는 오늘 새벽에도 일찍 잠이 깨었는데, "예수님, 저도 어머님처럼 주님의 그 크신 사랑과 은혜와 치유와 구원과 축복을 증거하여 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성령충만한 영혼구원자가 되고 싶습니다" 라는 기도를 드릴 때, "글을 써서 수많은 사람들이 읽게 하여라"는 어머님께서 들으셨던 주님의 음성이 나의 가슴에도 메아리쳐 왔다.


2014년 3월 15일!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의 기념일이요! 구원의 기념일이요! 성화의 기념일이요! 에덴동산에서부터 거룩하게 하시고 복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성일인 이 뜻 깊은 안식일 새벽에 창조주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과 은혜와 치유와 구원과 축복이 창조주를 경배하는 모든 가정과 교회와 북미주와 대한민국과 온 세계와 온 우주에 충만히 임하시기를 기도드리며, 풍성한 영혼구원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기 위해 내가 만난 하나님의 사랑의 체험담을 쓰기 시작한다. 


성령충만한 하나님의 종 다니엘은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 날 것이요, 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라는 하나님의 위대한 말씀을 증거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책을 사지 않고도 인터넷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좋은 글을 읽을 수 있는, 이 문명한 인터넷 시대에, 영원한 복음, 세천사의 기별을 증거할 수 있는 카스다와 여러 웹사이트 자유게시판을 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린다. 


예수님을 믿기 전, 우리 가정은 1살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5살에 6.25로 아버지가 행방불명이 되시고, 어머님은 심장병, 만성신장염, 늑막염, 불면증, 신경쇄약등 여러 병을 앓으시고, 가난과 고통과 슬픔과 우수사려가 많은 불행한 가정이었다.


이 불행한 가정에 찾아오신 예수님은 질병과 가난과 고통과 슬픔을 치유해주시고, 믿음, 소망, 사랑으로 충만하게 채워주시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가정으로 거듭나도록 인도해주시고 축복해주셨다. 


절망 중에 탄식하던 우리 가정에 넘치는 사랑과 은혜와 치유와 구원과 축복을 베푸신 자애로우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의 가정에 넘치는 사랑과 은혜와 치유와 구원과 축복을 충만하게 채워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드린다.



제 1부 출생 및 유년시절


삼천리 강토가 고통당하며 신음하던 일본 제국 주의 말기인 1944년 무더운 여름에 나는 태어났다.


그해 여름 가뭄이 얼마나 심하던지 농부들이 하늘을 쳐다보며 한탄하던 그 여름! 내가 태어나자 소나기가 쏟아져 모든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그 때는 살기가 힘들고 먹을 것도 부족하여 할머님은 첫 손자가 출생하여 너무나 기쁜데도, 미역을 구할 수가 없어 안타까운 마음으로 무우국을 끓이고 있었는데, 외할머님이 미역을 구해오셔서 미역국을 끓여 이웃에 사는 골육친척들을 청하여 함께 식사하며 모두 기뻐하였다고 하셨다.


외할머님은 미역을 구하기 위하여 기차를 타고 동해안까지 가셔서 미역을 구해오셨다고 하셨다.

나를 무척 사랑하시던 할머님과 외할머님이 그립다.


나의 이름은 공경 "흠"자는 돌림 자이고, 할아버지께서 외할아버지께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셨는데, 애국심이 강하셨던 외할아버님은 조선이 망한 이유는 문을 숭상하고 무를 천시했기 때문이라고 한탄하시며, 호반 "무"자를 지어 보내주셔서 "무흠"이가 내 이름이 되었다고 하셨다.


청렴결백하신 외할아버지께서는 이웃의 존경을 받으셨고, 일본이 망하고 조국이 해방 된 후 초대 경산군 국회의원 선거 위원장으로 봉사하셨다.


나의 고향 경상북도 경산군 경산면 옥곡동은 뒤에는 성암산이 솟아있고, 마을 앞에 펼쳐진 논을 지나면 남천강이 흐르는 평화로운 시골이었고, 초계 정씨 문중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옥곡동 초계 정씨는 뱀골 한씨와 중방 서씨와 시지 장씨와 함께 경산 4대 성이라고 하시던 할머니의 말씀이 생각난다.


성암산에 올라가 진달래꽃, 철쭉꽃도 따먹고, 소풀도 먹이고, 남천강에서 물고기도 잡고 물놀이도 하던 옛추억이 그립다.


우리 집은 본채에 방 2개와 대청과 부엌이 있고, 사랑채에 방 2개와 광이 있는 초가집이었다. 마당에는 감나무가 4그루 있었다. 소가 있는 헛간도 있고, 닭장도 있고, 염소도 있는 시골집이었다.


외가집은 2 km 정도 떨어진 사정동 경산 중학교 옆집이었는데, 방이 6개나 되는 꽤 큰 집이었고, 마당에는 포도나무, 복숭아 나무, 모과 나무 등 과일 나무 들이 많았고 꽃도 아름다웠다.


경북중학을 졸업한 아버님과 경남여고를 졸업한 어머님은 그 당시로는 드물게 고등교육을 받으셨고, 동네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행복한 결혼을 하셨으며, 자녀들을 이상적으로 잘 길러보려는 꿈을 가지셨다고 하셨다.


그런데 이 행복한 가정에 뜻밖에도 우환이 찾아왔다.

내가 1살 때, 할아버님이 39세 젊은 나이에 고혈압과 뇌일혈로 돌아가시고, 5살 때, 6.25 동란으로 아버님이 행방불명이 되셨다.


5살에 행방불명 되신 아버님에 대한 몇가지 추억이 남아있다.

달밝은 밤에 앞집에 사시던 종조부님댁에서 종고모들과 함께 숨바꼭질을 하는데 아버님께서 나를 안으시고 여기 저기 숨으시던 생각이 난다. 우람한 아버님 품에 안겨 헛간에도 숨고, 대청마루에도 눕던 추억이 그립다.


어느 날 아침에 사랑채를 돌아 걸어나오시며 노래부르시던 아버님 생각도 난다.

"태산보다 높으신 아버지 은혜, 하해보다 깊으신 어머니 은혜~~"

아버지께서 부르시던 이 노래를 자주 부르며 아버지를 생각하곤 했다.


나의 종고모인 태분이는 나보다 한 살 어렸지만, 초등학교 시절 한 반에서 같이 공부했다. 마음도 착하고 공부도 잘 하고 운동도 잘 했다. 후일에 경북여고 테니스 선수가 되었고, 테니스 특기 장학생으로 청구대학에 입학하였으며 전국체전에 경상북도 대표로 출전하여 메달을 따기도 했다.


종조부 님댁 과수원에서 사과도 많이 먹고 함께 놀던 추억이 그립다.


나의 조부님은 13살에 결혼하시고, 아버님은 19살에 결혼하셔서 내가 일찍 태어났음으로 옥곡동에는 나보다 어린데도 아저씨뻘, 할아버지뻘 되는 아이들이 많았다. 나의 할머님은 참 부지런하셨다. 밭에서 부지런히 일하셔서, 고추, 상추, 쑥갓, 호박등 채소를 길러주셨고, 누에도 기르시고 길쌈도 하시고, 방아도 찌으시며 부지런히 일하시고, 저녁에 공부하고 있으면 잘 익은 감홍시를 하나씩 주시던 사랑하는 할머님이 무척 그립다. 계성고등학교를 졸업하신 삼촌은 앉아서 공부할 수 있는 책상을 만들어주셨다.


나의 어머니는 8남 1녀 귀한 딸이었으며, 나는 외조부님과 외삼촌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외할아버지께서 동서양 위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셨고, 정직한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와싱턴, 조조, 손권, 유비, 관우, 장비, 조자룡, 제갈공명, 적벽대전등 삼국지 이야기는 흥미진진하였다.


외가집 식구들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났는데, 이른 새벽 외할아지께서 큰 소리로 시를 낭독하시면 그것이 기상나팔이었고, 일찍 일어나 책을 읽어야 했다. 외할머니께서는 맛있는 음식을 해주셨고, 맛있다고 하면, "맛있으면 많이 먹어라"고 하셨다.

외삼촌들은 책읽기를 좋아하셨고, 모두 공부를 잘 했다. 


정직하고 부지런하고 사랑이 많은 조부모님과 삼촌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우리 구주 예수님 영과 중에 재강림하시는 감격의 그날에 다 함께 반갑게 다시 만나 다시는 이별이 없는 영원한 하늘 본향에서 안식일마다 창조주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영원히 행복하게 함께 살개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드린다.




제 2부 고난의 세월, 6.25 동란, 행방불명 된 아버지


내가 5살 누이동생 귀주가 1살이던 1950년, 대한민족의 비극인 6.25 동란이 일어났다.

경북중학을 졸업하고 24살 젊은 나이에 대한 석탄공사 업무국장이라는 새 직장을 얻어 서울로 가신 아빠는 행방불명이 되셨다.

서울에 집을 준비한 후, 가족을 데려가겠다고 약속하고 올라가신 아빠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셨다.


25세 젊은 나이에 사랑하는 남편과 생이별한 어머님은 밤마다 소식없는 남편을 기다리다가 옷을 입은 채 새우잠을 주무시고, 가랑잎 굴러가는 소리에도 사랑하는 님의 발자국 소리인가 방문을 열어보고, 동네 개들이 짖으면 혹시나 하고 일어나 기다리고, 식사 때마다 제일 먼저 밥 한 그릇 퍼서 따뜻한 아랫목에 묻어두고 갸륵한 정성으로 사랑하는 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렸건만 달이 가고 해가 가도 나의 아버님은 영영 돌아오지 않으셨다.


아버지를 잃은 우리 가정엔 근심과 슬픔과 가난이 찾아왔고, 어린 남매를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키기 위해 밤새워 삯바느질하시던 어머님은 자주 편찮으셨고, 젊은 나이에 남편 잃고, 기대가 컸던 큰 아들마저 잃은 할머님은 땅이 꺼져라 한숨 쉬시고 담배를 피우시며 세월을 한탄하시니 나는 참 외롭고 슬펐다.


근심과 걱정이 가득하던 우리 가정, 아무도 교회 나가는 사람이 없던 우리 방 남쪽 벽에 누가 준 것인지 모르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 그림이 걸려있었는데, 나는 그분이 누군지 몰랐지만 그 그림을 바라보노라면 엄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우리 집엔 '창세 시대와 부조들의 생활'이란 일본말로 쓰여진 오래된 책이 한 권 있었는데, 아마 우리 집을 찾아온 어떤 문서전도인으로부터 마음 좋으셨던 우리 할아버지께서 예수님 그림과 함께 그 책을 사셨을 것이라고 추측해 본다. 어머님께서는 그 책을 읽으시고 잠자기 전에 어린 우리 남매에게 재미있게 이야기해 주셨다.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가 있는 아이들을 보면 참 부러웠다. 뒷산에 올라 풀을 뜯어먹는 소를 지키며 책을 읽고 있노라면 저 아래 읍내로 뚫린 길로 아버지께서 걸어오실 것만 같았다. 푸른 하늘 위로 흘러가는 뭉게구름을 바라보며 "구름아, 구름아, 우리 아빠 계신 곳으로 날 실어다 주렴..."하고 시를 지어보기도 했다. 그러면 아버지가 더욱 그리워 눈물이 핑 돌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밤 꿈을 꾸었는데, 아버지께서 외갓집 대문으로 들어오시는 것이었다. 나는 부엌 문을 박차고 달려가 "아버지!" 소리치며 품에 안겼다. 그리고 잠이 깬 나는 아버지가 그리워 흐느껴 울었다. 꿈이라도 좀 더 길었으면 좋았을텐데...


내가 2학년까지 다녔던 경산 중앙 국민학교 성암 분교가 어느날 갑자기 영남 삼육학교가 되었다. 원래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 땅이었지만 2차대전 말기에 일본 제국주의의 박해로 선교사들이 떠나고 교회가 해산되면서 일본 정부에 빼앗겼던 땅을 되찾았다고 한다. 나는 경산 중앙 국민학교 본교로 옮겨 갔지만, 성암 분교의 아름다운 추억이 깃든 삼육학교에 호감을 가졌다.


영남삼육 중고등학생들은 토요일 오후마다 이웃 동네로 전도 활동을 나왔는데, 아이들을 모아놓고 찬송과 손놀이도 가르쳐주고, 그림들을 걸어 놓고 재미 있는 성경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그후 어느날 밤 다시 꿈을 꾸었는데,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천천만만의 천사들과 함께 구름을 타고 이 땅으로 오시는 꿈이었다.

나는 두 손을 높이 들고 흔들며 "하나님 아버지 어서 오세요!"하며 환영하였다.


그 꿈을 꾸고나니 얼마나 기쁘던지 그 이후로는 외롭거나 쓸쓸하거나 어려운 일을 만날 때 그 꿈을 생각하며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다'고 믿으면 힘이 났다.


초등학교 시절 한 반이었던 김무성이의 아버지는 서울 중앙청에서 근무하시다가 피란오셨다고 하였다. 서상재의 부모님은 경산 중학교와 경산 농예학교와 경산 고등학교를 세운 교육자들이셨다. 상재의 고모 동숙이도 공부를 잘 했다. 김종철이의 아버님은 프린스톤 대학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으셨고, 후일에 서울 영락 교회 당회장이 되신 분이셨다. 종철이 부모님은 우리 외가집을 사서 고아원을 세우셨는데, 종철이 어머님과 이모님이 차례로 원장으로 고아들을 키우시며 선한 사업을 하셨다. 나의 친한 친구 종철이네 집에 가서 탁구도 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즐겁게 놀던 추억이 그립다.


우리 반에 가정환경도 좋고 공부 잘 하는 학생들이 많았는데도 내가 1등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전적으로 어머님의 헌신적인 사랑과 교육열 덕분이었다. 어머님은 아침 밥을 지으시면서 나에게 소리 내어 책을 낭독하며 예습을 하라고 명하셨다. 학교 갔다 오면 숙제를 다 하고, 날마다 복습을 하라고 명하셨다. 일요일이나, 공휴일이나 방학 때도, 동양사, 서양사, 영어공부 등 숙제를 많이 주셨다. 저녁에 자기 전에는 날마다 일기를 쓰라고 하셨다. 잠들기 전에 베드 타임 스토리를 들려주셨다. 어머님은 나와 나보다 4살 적은 누이동생 귀주의 성장기를 기록하셨다.


"시간을 아껴 써라. 흘러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글을 써서 책상 앞에 붙여주셨다. 

그리고 시간을 아껴 쓰는 모본을 몸소 실천하셨다. 참으로 모범적인 좋은 어머님이셨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국어책을 잃어버렸는데, 국어책을 빌려오라고 하셔서 빌려오니, 밤새도록 국어책을 노트에 써서 주시던 사랑하는 어머님의 모습이 무척 그립다.


아버지 없이 가난하게 살던 나는 옷 살 돈이 없어서 어머니께서 손수 만들어주신 한복을 입고 학교에 다녔다. 여름 방학 동안 그림일기를 그려, 방학이 끝난 후 학교에 가져 갔더니, 칭찬을 들었던 생각이 나고, 전교에서 남학생 1명 여학생 1명 착한 어린이를 뽑는데, 남학생 대표로 뽑혀 교육감상을 받아 어머니께 기쁨을 드리던 생각도 난다. 가난한 중에도 자녀 교육을 위해 최선을 다 하신 어머님의 은혜는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제 3부 찾아오신 예수님, 새출발, 침례


영남삼육 중고등학생들은 안식일 오후에 우리 외갓집도 방문했는데, 수양딸로 들어와서 집안 일을 도와주던 명암 아지매가 외할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영남삼육학교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얼마 후, 해군 사관학교에 다니다가 폐결핵과 대장염으로 집에 와서 휴양하며 생사의 기로에 있던 외삼촌이 명암 아지매와 함께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였다. 가끔 외갓집에서 잠을 잘 때, 새벽에 외삼촌이 무릎 꿇고 '눈을 예수께 돌려 그 얼굴을 주목하라. 주의 영광스러운 광채에 세상 영화는 사라지네' 찬미부르던 경건한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생각이 난다. 치료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외삼촌의 병을 다 고쳐주셨고, 복음 전하는 주의 종(전 재림교회 미주협의회장 박형종 목사님)이 되도록 축복하셨다.


박형종 목사님의 형님 박해종 목사님은 경북대학교 의예과 재학 중 학도병으로 나갔다가 인민군의 포로가 되고, 다시 유엔군의 포로가 되는 등 죽음의 고비를 여러번 넘기고, 반공포로 석방으로 집에 와 있을 때 동생의 감화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영남삼육 국어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시다가 삼육대학에서 신학공부를 하시고 삼육대학 신학 교수가 되시고 총장님으로 봉사하시고 은퇴하셨다.


우리 가족에게 닥쳐온 재난을 축복으로 바꾸어 주시고,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형통하게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린다.


어머님과 함께 외삼촌 댁을 방문하여 건강 음식도 먹고, 성경말씀도 듣고, 찬송 부르고 예배드리면 참 좋았다. 

외삼촌들과 외숙모님들은 나를 사랑하셨고 믿음이 자라도록 여러모로 도와주셨다.


우리 외갓집에 복음을 전한 영남삼육 학생들의 선교봉사가 참으로 감사하다. 

그들이 옥토에 뿌린 복음의 씨앗이 100배의 풍성한 열매를 맺어 우리 집안에 벌써 100여명의 행복한 재림 성도들이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재림 교회 성도가 되고, 삼육교육을 받고, 로마린다 위과대학 치과대학을 졸업한 의사 치과의사들도 30여명이 되어 신앙생활 잘 하며, 주님의 몸된 교회를 도우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부모님께 효도하고, 형제 간에 우애하며 행복한 재림 성도들로 보라모디게 살아가고 있으니,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 감사하고 감사하다.


믿음 좋은 영남삼육 학생들과 교사들을 통해 우리 가족을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린다. 할렐루야!!! 


(일전에 조재경 목사님 사모님과 대화하는 중에 영남삼육학교 시절, 우리 외갓집을 방문하여 복음 전하던 추억을 말씀하셨다. 재난 당하고, 우환 중에 허덕이던 우리 가정을 찾아와서 구원의 길, 행복의 길로 인도해주신 전화위복의 하나님과 복음을 전해준 분들, 참 감사하고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도 고해같은 이 세상에서 재난 당하고, 병들고, 시련 속에 허덕이는 이웃들에게 소망의 예수님을 증거하여, 영원한 행복과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해야 한다.)


나는 경산 중앙 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대구 사범대학 부속 중학교를 졸업하고, 어려운 가정 형편을 돕기 위해 장로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대구 계성 고등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였다. 계성 고등학교 교정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언 9:10) 이라는 성경 말씀이 새겨진 큰 돌이 있었다.




매주 성경을 배웠고, 3년 동안 학급 대표로 봉사하였고, 또 종교 클럽인 청맥 클럽에 가입하여 봉사하며, 예수님의 사랑을 배우며 믿음이 자라갔다. 한번은 합천 해인사에서 열린 종교부 수양회에 참석했는데, '기독교 학교에서 문제 학생을 퇴학시켜도 되는가?'라는 제목으로 두 편으로 나뉘어 토론대회가 있었다. 나는 "예수님께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고, 또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옵시고 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으니 기독교 학교에서는 문제 학생을 어떠한 경우에도 퇴학시키지 말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선도시켜야 한다."라고 말했는데 일등 상을 받아서 참 기뻤다.


그 당시 나는 친구들을 따라 장로교, 감리교, 성결 교회도 가끔 참석하고, 외숙부님이신 박형종 목사님이 영남대회 안식일학교 부장으로 계시던 대구 중앙 재림 교회도 가끔 참석하곤 하였다. 


외숙부님, 외숙모님은 늘 따뜻한 사랑으로 환영해주셨고, 맛있는 건강 음식도 요리해주셨다. 외숙부님의 감화로 우리 가정에서도 가정예배가 시작되었는데, 가난한 시절 어머님과 여동생과 함께 찬송부르고 기도드리던 가정 예배 시간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저녁마다 가정교사 알바이트를 하는 고학생이었는데, 학교 공부가 끝나자마자 두 집을 들려 가르치고 9시경에 집에 오면, 피곤해서 바로 자고 새벽 3 시에 일어나 먼저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성경을 한 장 읽고 공부 한 후, 아침 식사를 하고 학교에 갔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고 늘 반에서 1등 하게 해주셔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심을 체험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나는 경북대학교 의옛과에 입학하였고, 동생 귀주는 안식일 오후에 대구 중앙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 학생반 집회에 자주 참석하더니, 영남 삼육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나는 대학에 가서도 가정교사를 하면서 공부했다. 부잣집에 들어가서 먹고 자며 그 집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사랑하는 가족들이 그립고 정신적 스트레스가 많았다. 가난하고 배고파도 어머님과 함께 생활할 때는 학업성적이 우수했었는데, 어머님을 떠나 가정교사 하는 집에 들어가 생활하니 잘 먹고 좋은 방에서 잠을 자는데도 마음이 편하지 않고 학업성적도 떨어졌다. 경북대학교 기독학생 클럽인 갈바리 클럽 회원이 되고 제 7기 회장으로도 봉사했는데, 기독학생회원들이 소풍도 가고, 음악감상실에도 가고 하니, 아름다운 여학생 회원들도 있고, 즐겁고 좋은점도 많았지만, 학교공부에 지장이 있었다. 학창시절에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하는데, 고등학교 시절처럼 가난하고 배고프더라도 어머님과 함께 생활하며, 저녁에 두시간 가정교사 공부를 가르쳐주고 집에와서 일찍 자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 열심히 공부를 했더라면 더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었을텐데, 후회가 된다. 그러나 기독학생회 활동을 통해 사회생활과 사교 생활등 학교공부에서 배울 수 없는 것을 배우고 인격도야에 도움도 얻었을테니, 하늘나라에 가보면 잘했는지 못했는지 알 것이라 생각하며 위로를 받는다.


어머님은 아버지를 잃은 후, 마음에 심한 충격을 받으셨고, 홀로 어린 남매를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키시느라 밤새워 삯바느질도 하며 고생을 많이 하셨다. 심장병, 만성 신장염, 위장병, 관절염, 기관지 천식, 결핵성 늑막염, 불면증, 신경쇄약등 여러 질병에 시달리시면서도 삯 바느질도 하시고, 보따리를 이고 이곳 저곳 다니시며 무명, 비단 등 여러 가지 천을 팔고 다니기도 하시고, 가정 교사도 하시며, 살아남기 위해 고생하시는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났다. 


어느 날 저녁, 어머님은 무거운 보따리를 이고 홍수가 난 강을 건너시다가 강물에 떠내려갈 번 했다고 하셨다. 어서 속히 부지런히 공부해서 훌륭한 의사가 되어 어머님 병도 고쳐드리고 평안히 모셔야 할텐데, 세월이 얼마나 더디 흐르던지 답답하기만 했다.


경북대학교 기독학생회 갈바리 클럽 제7기 회장으로 봉사하기도 했지만, 아직 침례도 받지 않았고, 깊은 신앙체험도 없던 시절이었다. 등산도 가고 음악 감상실에도 가고 YMCA 회관에 모여 집회도 하고 탁구도 치고, 예수님 믿는 진실한 젊은이들, 예수님 사랑하는 아름답고 마음씨 고운 여학생들과 대화하면 즐거웠고, 신앙 생활의 즐거움을 체험하며, 나는 조금씩 조금씩 주님께로 가까이 나아가고 있었다. 그 때에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 영남대회 청소년 부장으로 계시던 주상규 목사님을 YMCA 회관에 모셔 말씀을 듣던 기억이 난다.


장마비가 내리던 어느 여름 밤, 진해에서 해군 장교로 있던 외삼촌 댁을 찾아가신 어머님은 비가 와서 장사도 못하시고, 몸은 병들고 돈은 없고 살아갈 길이 막막하여 눈물 흘리며 자애로우신 주님께 간절히 기도드리셨다. 


'어머니께서 예수님 잘 믿고 안식일 잘 지키시도록 새벽마다 기도드린다'고 말하던 영남 삼육 고등학교 기숙사에 있는 딸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십계명대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자니 매일 일해도 이렇게 살기가 힘든데, 토요일마다 쉬면 어떻게 먹고 살까 걱정이 태산 같아서 마음에 번민하며 간절히 기도드리는데, 비몽사몽간에 마태복음 6장을 읽으라는 음성을 들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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