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힘들었을때 기도응답하신 하나님! 박형종 목사 고학생 시절 미국 문서 전도 체험 간증!!! - 박형종 목사님 체험 간증 > 칼럼

사이트 내 전체검색

칼럼

가장힘들었을때 기도응답하신 하나님! 박형종 목사 고학생 시절 미국 문서 전도 체험 간증!!! - 박형종 목사님 체험 간증

페이지 정보

글씨크기

본문

제목 가장 힘들 때 기도응답하신 하나님! 박형종 목사 체험 간증!!!(먼저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골육친척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한 정무흠 목사의 외숙부) - detkr.com조회 6286

My Canvassing Experience in the US 나의 미국 문서 전도 체험

By 박형종 


이 글은 저희 외숙부님 박형종 목사님께서 77세 때, 타이에 있는 대학에서 영문학 공부하시며 Report로 쓰신 글입니다. 제 가 읽어보니 감동적인 글이기에 "외숙부님 이런 감동적인 글은 인터넷에 올려 어렵게 살아가는 독자들의 삶에 유익을 줄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실 것입니다"라고 말씀드려 외숙부님의 허락을 받고 그랜드 래피즈 교회 칼럼 게시판에 올렸습니다. 제가 번역하였고, 아래에 박형종 목사님이 영어로 쓰신 원문이 있습니다. 자녀들을 믿음 안에서 훌륭하게 교육하고, 8순이 가까운 나이에도 중국과 페루와 타이등을 여행하시며 친구들도 사귀고 대학에서 공부도 하시며 조용히 예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노년의 삶이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인생역전을 체험하고 수많은 골육친척들을 영원한 축복의 길로 인도한 박형종 목사님의 "My Born Again Experience 나의 중생 체험"이란 은혜로운 글도 kasda.com 칼럼 게시판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가난한 고학생이 가장 힘들어할 때, 기도에 응답하셔서 필요를 채워주셨던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도도 응답해주실 것입니다.***


1970 년 1월 나는 가난한 고학생으로 앤드류스 신학대학원 생활을 시작하였다. 물론 나는 학업을 계속하기에 충분한 돈이 없었다. 나는 돈을 빌려서 미국 유학을 왔었다. 첫 학기가 끝나고 여름 방학이 시작 되었을  때, 돈이 다 떨어졌다. 첫 학기 동안에도 나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하루 세 시간씩, 그리고 일요일에는 여덟 시간씩 노동을 해야했다. 이렇게 노동하며 좋은 성적을 유지하는 것이 고통스럽고 힘든 고핵생의 삶이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생활비가 바닥이 났다. 그것은 확실한 사실이었다. 


나는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것만이 그 때에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대학교내 알바이트는 급료가 아주 적었으므로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나는 새학기 등록금과 생활비와 초등학교 2학년인 딸의 교회학교 수업료를 지불하기에 충분한 돈을 마련해야만 했다. 9월이 되면 나의 딸은 나의 아내와 두 어린 아들들과 함께 미국으로 들어올 것이었다. 나는 여름방학동안 좋은 직장을 얻을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시옵소서라고 계속해서 간절히 기도드렸다. 마침내 나는 뉴욕 합회에서 학생 문서전도자로 일하기로 결심했다. 뉴욕합회에서는 학생 문서전도자들을 채용하기 위해 숙식을 제공해주는등 매력적인 장려보조를 해준다는 것이었다. 나는 뉴욕 합회 문서전도부 책임자와 통화를 하고, 여름방학에 6주 동안 학생 문서전도자로 일하기로 합의하였다. 뉴저지주 아틀란틱 시티에서 대총회가 끝난 후 나는 문서전도를 하기위해 뉴욕주 시라큐스로 달려갔다. 무엇보다 먼저 나는 $400을 주고 중고차를 한 대 사서 타고 빙함톤으로 가서 어떤 교인 가정에 여장을 풀었다. 다음날 나는 우리 교회책들과 정기 간행물들을 팔기 위해 나갔다. 나는 많은 집들의 문을 두드리며 하루 종일 수고했지만 많은 책을 팔지 못했다. 한 주일 동안에 겨우 $100어치의 귀한 책들을 전할 수 있었다. 이런식으로 팔아서는 결과가 참담할 것이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나는 지치고 완전히 고갈되었다. 나는 일을 계속할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 예수님과 함께하는 조용한 시간이 참으로 필요했다. 나의 영적 바테리는 필사적으로 재충전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나는 영혼의 소생함을 얻기 위해 뉴욕주 캠프미팅에 참석했다. 하나님의 백성 중에 있는 것이 너무나도 좋았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설교자들의 기별은 나의 마음을 고야시키고 나의 영혼에 자양분을 공급했다. 나는 이미 시작한 선한 일을 계속할 준비가 되었다. 나는 나머지 여름 방학동안 배당된 일을 하기 위해 나 자신을 재교육하였다.


뉴욕주 야영집회가 끝난 후, 나는 문서전도하는 한 무리의 학생들과 같은 집에 거하게 되었다. 우리 모두는 아주 가깝게 지내며 함께 기도하고 서로 격려하였다. 매일 아침 우리는 지정된 장소로 가서 그 지역을 체계적으로 방문했다. 고등학교 졸업반 학생 몇명이 나와 함께 갔는데 나는 그들이 일할 장소에 내려주었다. 저녁에 나는 그들을 다시 나의 차에 태워 데려왔다. 저녁마다 우리는 함께 모여 그 날의 문서전도 체험들을 서로 이야기하며 유익을 얻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하셔서 하나님의 사랑의 기별이 가득한 귀한 서적들을  매일 $150이상 판매할 수 있었다. 40여명의 문서 전도 학생들 중 내가 가장 많이 판매할 수 있었다. 나는 $6000어치의 귀한 서적을 판매하였고, $4200이 장학금으로 나의 학교 구좌에 입금되었다.


자애로우신 하나님께서 나의 필요를 보시고, 그해 여름에 진리의 말씀이 충만한 귀한 서적들을 전하도록 축복하셨다고 나는 확실히 믿는다. 하나님의 놀라운신 역사를 인하여 나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 내가 가장 힘들었을 때, 하나님게서 주신 선물은 가장 달콤하였다.


In January, 1970, I started my Seminary life at Andrews University as a humble foreign student. Of course, I did not have enough money to continue studying. With borrowed money, I came to the US. By the beginning of summer vacation, I would be broke. Even during the first semester, I had to work three hours a day, Monday through Friday, and eight hours on Sunday. To maintain decent grades was a real pain and a continuous struggle. How would it be for a new school year beginning in September? There was no money, that was quite sure.

 

I began to pray: that was only thing I could do at that time. The school campus jobs would not be the answer because of low wage. I had to save enough money to cover tuition for the new year, living expense, and church school's tuition for my second grade daughter. In September she was supposed to come to the US with her mom and two brothers. I continued praying hard, asking for wisdom to decide on a right job for summer vacation. Finally, I decided to participate in student canvassing in New York Conference. The New York Conference was trying to recruit student canvassers with attractive incentive-free lodging and free meals. I contacted the Conference Publishing Department Director and arranged for the summer work-canvassing for one and half month.

 

Right after the the General Conference Session that was held in Atlantic City, New Jersey, I rushed to Syracuse to start canvassing. First of all, I had to buy a used car at the price of $400 and drove down to the city of Binghamton: I unpacked at a church member's house. The following day, I went out selling our church books and periodicals. I had knocked on many houses, struggling the whole day without  many sales. The whole week I had delivered $100 worth of precious materials. With this kind of of sale, the prospect looked very dismal. Both physically and mentally, I was exhausted, completely drained. I really needed a quiet time to be with Jesus for receiving power to work. My spiritual battery desperately needed recharge. So I went to New York Conference camp meeting in order to be refreshed. It was so good to be among God's people. The messages from God-sent preachers uplifted my heart and nourished my soul. I was ready to continue the good work already having been started. I reeducated myself for the rest of assigned summer work.

 

After the camp meeting, I joined a group of students, and we stayed at the same house. All of us were very close each other, praying together and encouraging each other. Every morning, we went out to the same area and covered that area in a systematic way. Some of the high school seniors rode with me, and I dropped them off at different places where they were supposed to work. When evening came, I took a round and picked them up. Then we went back to our place and shared experiences. The lord blessed me to sell more than $150 everyday. Among forty student canvassers, I was by far the best as far as sale was concerned. My total amount of sale was $6,000, resulting $4,200 scholarship fund in my school account.

 

I, firmly, believe my merciful God had seen my need and blessed me to deliver so many truth-filled literature that summer. For His marvelous work, I return all the glory to Him. When I suffered the most, the outcome from it was the sweetest.



댓글목록

profile_image

정무흠님의 댓글

no_profile 정무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973 년 5월 14일 청운의 꿈을 품고 서북항공기를 타고 태평양을 넘어 미국으로 이민왔을 때, 앤드류스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시던 외숙부님댁 학생 아파트에서 6주동안 함께 있었는데, 아침 저녁 가정예배를 자녀들 중심으로 흥미있게 드리는 것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외숙부님 댁에는 국민학교에 다니던 딸 정현이와 아들 원제, 민제가 있었습니다. 외숙부님은 매일 새벽 일찍 일어나 성경을 읽으시고, 신선한 새벽 공기를 호흡하며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아침 마다 온 가족이 함께 가정 예배를 드렸는데, 찬미부르고, 성경 말씀 읽고, 자녀들에게 짧지만 감동적인 말씀으로 교훈하고 축복 기도드린 후, 아침 식사하고 학교에 보냈습니다. 저녁에도 함께 가정 예배드리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금요일 오후에는 해지기 전에 온 가족이 집안 청소를 깨끗이 하고, 자동차도 깨끗이 씻고, 구두도 닦고, 정성들여 예비한 후, 기쁜 마음으로 거룩한 안식일 맞이하며 안식일 환영 예배를 드렸습니다. 토요일 아침에는 9시에 온 가족이 정장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러 교회로 갔습니다.  안식일 오후에는 앤드류스 대학 캠퍼스나 가까운 공원에서 산책하며 자녀들과 정답게 대화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이렇게 자녀들을 교육하리라 결심하였습니다. 날마다 가정예배에서, 안식일마다 교회에서 은혜로운 하나님의 말씀들으며 자란 정현이와 원제와 민제는 장성한 후에도 교회에서 훌륭하게 봉사하는 신앙인들이 되었고, 사회생활에도 성공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을 보면서, 청소년 범죄가 증가하며 부모님들이 자녀들의 장래를 염려하며 안타까와하는 오늘날,  성공적인 자녀 교육의 첫째 비결은 성공적인 신앙 교육! 성령충만한 삼육 교육임을 저는 확신합니다. 소아과 의사가 된 정현이는 구강외과 의사인 남편{빌리 정}과 함께 테네시주 칼리지데일 한인 교회 청소년 지도자로 봉사하며, 치과의사가 된 원제부부는 캘리포니아주에서, 응급실 전문의사가 된 민제는 치과의사인 아내와 함께 오레곤 주에서 행복하게 신앙생활 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 정현이 부부와 민제 부부는 고국에 나가 한국 삼육고등학교 기도주일 강사로 청소년 들에게 힘있게 복음을 전하며 꿈을 심어주고 왔습니다. 아침 저녁 가정예배를 충실히 드리던 외숙부님댁 자녀들도 모두 믿음 안에서 행복하게 결혼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를 잘 도우며 보람되게 사는 것을 보면 참으로 은혜로운 가정예배는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신앙 유산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Copyright © KASDA Korean American Seventh-day Adventists All Right Reserved admin@kasd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