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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애를 인도하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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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애를 인도하신 하나님***

넘치는 사랑과 은혜와 치유와 구원과 축복을 베푸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머리말


사랑하는 나의 어머님은 "그 영광의 빛 속으로"(Into the Glorious Light)와 "할머니와 손자녀들"(Grandmother's Heart Is A Harp)이라는 자서전 저술을 마치시고, 2009년 9월 13일, 85세에 부활의 소망 가운데 잠드셨다.


춘하추동 새벽마다 앤드류스 대학  교정에 있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불리우는 "개척자 선교 교회"(PMC) 정문 앞에서 무릎꿇고 기도드리셨는데, 어느날 새벽 기도드리면서 "소녀에게 베푸신 주님의 그 크신 사랑과 은혜와 치유와 구원과 축복의 체험을 수천, 수만, 수십만명에게 증거하고 싶습니다" 라고 말씀드렸더니, "글을 써서 수많은 사람들이 읽게 하여라"는 응답을 받았다고 하셨다.


그리하여 돌아가시기 전 몇 년 동안, 정성을 다 하여 자서전을 쓰셨다. 

손자녀들과 한국어를 잘 읽지 못하는 젊은이들도 읽을 수 있도록 한국어와 영어로 집필하셨다. 

손자녀들을 위해 "Grandmother's Heart is a Harp"(할머니와 손자녀들)라는 책도 영어로 써서 자녀들과 손자, 손녀들이 읽게 하시고, Lulu.com에 출판하셨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치유와 구원과 축복을 베푸시는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증거하여 한 영혼이라도 더 예수님께로 인도하고 영생의 축복을 받도록 도와주고 싶어하시던 어머님의 소원을 성취시키기 위해, 그리고 성공적인 자녀 교육을 원하는 분들이 읽고 참고할 수 있도록, 어머님께서 쓰신 "그 영광의 빛 속으로"(Into The Glorious Light)와 "할머니와 손자녀들"(Grandmother's Heart Is A Harp)과 어머님의 시집 "영원을 걸으며"와 영원히 새로운 것"에 실린 은혜로운 글을 kasda.com 칼럼, 글동네, 8healthplans.com 칼럼, grkasda.com, detkr.com, sfkorean.com 게시판등에 부지런히 올렸고, 벌써 수천, 수만명이 읽었고, 은혜받았다는 여러 댓글도 써주셨고, 감사 전화도 해주셨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님을 더욱 잘 믿고 하나님 은총 속에 행복하게 살아가며, 믿음 안에서 자녀들과 손자들과 손녀들을 잘 교육할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어 하나님께 영광돌리기 바라며 간절히 기도드린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뜨겁고, 부지런하신 어머님은 엘렌 화잇 여사의 대쟁투 총서를 다 읽고 녹음하셨고, "봄비"라는 동화책과 "믿음의 행진"이라는 번역책도 출판하셨다.


어머님의 소원대로 이 글을 읽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애에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되며, 어머님께서 체험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와 치유와 구원과 축복을 체험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드린다.


새벽 4시부터 7시까지 성경과 예언의 신을 읽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암송하시며 충분한 새벽 헌신의 시간을 가지시고, 기억절을 암송하시며 앤드류스 대학 개척자 선교교회(PMC) 정문 앞으로 걸어가서 무릎꿇고 기도하시고 돌아오셔서 아침 예배를 드리시고 아침 식사를 하시던 경건한 어머님을 닮고 싶다.


해마다 52기억절을 암송하시고, 대쟁투 총서를 다 녹음하시고, 성경을 수십 번 통독하시고, 암송하시고, 십일조와 헌금을 충실히 드리시고, 신학생들과 선교지와 가난한 이웃과 골육친척들을 힘껏 도우며, 열심히 복음을 전하시던 어머님의 경건한 신앙생활을 본받고 싶다.


어릴적부터 새벽마다 일찍 일어나시는 어머님의 영향을 받고 자란 나는 오늘 새벽에도 일찍 잠이 깨었는데, "예수님, 저도 어머님처럼 주님의 그 크신 사랑과 은혜와 치유와 구원과 축복을 증거하여 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성령충만한 영혼구원자가 되고 싶습니다" 라는 기도를 드릴 때, "글을 써서 수많은 사람들이 읽게 하여라"는 어머님께서 들으셨던 주님의 음성이 나의 가슴에도 메아리쳐 왔다.


2014년 3월 15일!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의 기념일이요! 구원의 기념일이요! 성화의 기념일이요! 에덴동산에서부터 거룩하게 하시고 복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성일인 이 뜻 깊은 안식일 새벽에 창조주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과 은혜와 치유와 구원과 축복이 창조주를 경배하는 모든 가정과 교회와 북미주와 대한민국과 온 세계와 온 우주에 충만히 임하시기를 기도드리며, 풍성한 영혼구원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기 위해 내가 만난 하나님의 사랑의 체험담을 쓰기 시작한다. 


성령충만한 하나님의 종 다니엘은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 날 것이요, 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라는 하나님의 위대한 말씀을 증거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책을 사지 않고도 인터넷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좋은 글을 읽을 수 있는, 이 문명한 인터넷 시대에, 영원한 복음, 세천사의 기별을 증거할 수 있는 카스다와 여러 웹사이트 자유게시판을 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린다. 


예수님을 믿기 전, 우리 가정은 1살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5살에 6.25로 아버지가 행방불명이 되시고, 어머님은 심장병, 만성신장염, 늑막염, 불면증, 신경쇄약등 여러 병을 앓으시고, 가난과 고통과 슬픔과 우수사려가 많은 불행한 가정이었다.


이 불행한 가정에 찾아오신 예수님은 질병과 가난과 고통과 슬픔을 치유해주시고, 믿음, 소망, 사랑으로 충만하게 채워주시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가정으로 거듭나도록 인도해주시고 축복해주셨다. 


절망 중에 탄식하던 우리 가정에 넘치는 사랑과 은혜와 치유와 구원과 축복을 베푸신 자애로우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의 가정에 넘치는 사랑과 은혜와 치유와 구원과 축복을 충만하게 채워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드린다.



제 1부 출생 및 유년시절


삼천리 강토가 고통당하며 신음하던 일본 제국 주의 말기인 1944년 무더운 여름에 나는 태어났다.


그해 여름 가뭄이 얼마나 심하던지 농부들이 하늘을 쳐다보며 한탄하던 그 여름! 내가 태어나자 소나기가 쏟아져 모든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그 때는 살기가 힘들고 먹을 것도 부족하여 할머님은 첫 손자가 출생하여 너무나 기쁜데도, 미역을 구할 수가 없어 안타까운 마음으로 무우국을 끓이고 있었는데, 외할머님이 미역을 구해오셔서 미역국을 끓여 이웃에 사는 골육친척들을 청하여 함께 식사하며 모두 기뻐하였다고 하셨다.


외할머님은 미역을 구하기 위하여 기차를 타고 동해안까지 가셔서 미역을 구해오셨다고 하셨다.

나를 무척 사랑하시던 할머님과 외할머님이 그립다.


나의 이름은 공경 "흠"자는 돌림 자이고, 할아버지께서 외할아버지께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셨는데, 애국심이 강하셨던 외할아버님은 조선이 망한 이유는 문을 숭상하고 무를 천시했기 때문이라고 한탄하시며, 호반 "무"자를 지어 보내주셔서 "무흠"이가 내 이름이 되었다고 하셨다.


청렴결백하신 외할아버지께서는 이웃의 존경을 받으셨고, 일본이 망하고 조국이 해방 된 후 초대 경산군 국회의원 선거 위원장으로 봉사하셨다.


나의 고향 경상북도 경산군 경산면 옥곡동은 뒤에는 성암산이 솟아있고, 마을 앞에 펼쳐진 논을 지나면 남천강이 흐르는 평화로운 시골이었고, 초계 정씨 문중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옥곡동 초계 정씨는 뱀골 한씨와 중방 서씨와 시지 장씨와 함께 경산 4대 성이라고 하시던 할머니의 말씀이 생각난다.


성암산에 올라가 진달래꽃, 철쭉꽃도 따먹고, 소풀도 먹이고, 남천강에서 물고기도 잡고 물놀이도 하던 옛추억이 그립다.


우리 집은 본채에 방 2개와 대청과 부엌이 있고, 사랑채에 방 2개와 광이 있는 초가집이었다. 마당에는 감나무가 4그루 있었다. 소가 있는 헛간도 있고, 닭장도 있고, 염소도 있는 시골집이었다.


외가집은 2 km 정도 떨어진 사정동 경산 중학교 옆집이었는데, 방이 6개나 되는 꽤 큰 집이었고, 마당에는 포도나무, 복숭아 나무, 모과 나무 등 과일 나무 들이 많았고 꽃도 아름다웠다.


경북중학을 졸업한 아버님과 경남여고를 졸업한 어머님은 그 당시로는 드물게 고등교육을 받으셨고, 동네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행복한 결혼을 하셨으며, 자녀들을 이상적으로 잘 길러보려는 꿈을 가지셨다고 하셨다.


그런데 이 행복한 가정에 뜻밖에도 우환이 찾아왔다.

내가 1살 때, 할아버님이 39세 젊은 나이에 고혈압과 뇌일혈로 돌아가시고, 5살 때, 6.25 동란으로 아버님이 행방불명이 되셨다.


5살에 행방불명 되신 아버님에 대한 몇가지 추억이 남아있다.

달밝은 밤에 앞집에 사시던 종조부님댁에서 종고모들과 함께 숨바꼭질을 하는데 아버님께서 나를 안으시고 여기 저기 숨으시던 생각이 난다. 우람한 아버님 품에 안겨 헛간에도 숨고, 대청마루에도 눕던 추억이 그립다.


어느 날 아침에 사랑채를 돌아 걸어나오시며 노래부르시던 아버님 생각도 난다.

"태산보다 높으신 아버지 은혜, 하해보다 깊으신 어머니 은혜~~"

아버지께서 부르시던 이 노래를 자주 부르며 아버지를 생각하곤 했다.


나의 종고모인 태분이는 나보다 한 살 어렸지만, 초등학교 시절 한 반에서 같이 공부했다. 마음도 착하고 공부도 잘 하고 운동도 잘 했다. 후일에 경북여고 테니스 선수가 되었고, 테니스 특기 장학생으로 청구대학에 입학하였으며 전국체전에 경상북도 대표로 출전하여 메달을 따기도 했다.


종조부 님댁 과수원에서 사과도 많이 먹고 함께 놀던 추억이 그립다.


나의 조부님은 13살에 결혼하시고, 아버님은 19살에 결혼하셔서 내가 일찍 태어났음으로 옥곡동에는 나보다 어린데도 아저씨뻘, 할아버지뻘 되는 아이들이 많았다. 나의 할머님은 참 부지런하셨다. 밭에서 부지런히 일하셔서, 고추, 상추, 쑥갓, 호박등 채소를 길러주셨고, 누에도 기르시고 길쌈도 하시고, 방아도 찌으시며 부지런히 일하시고, 저녁에 공부하고 있으면 잘 익은 감홍시를 하나씩 주시던 사랑하는 할머님이 무척 그립다. 계성고등학교를 졸업하신 삼촌은 앉아서 공부할 수 있는 책상을 만들어주셨다.


나의 어머니는 8남 1녀 귀한 딸이었으며, 나는 외조부님과 외삼촌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외할아버지께서 동서양 위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셨고, 정직한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와싱턴, 조조, 손권, 유비, 관우, 장비, 조자룡, 제갈공명, 적벽대전등 삼국지 이야기는 흥미진진하였다.


외가집 식구들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났는데, 이른 새벽 외할아지께서 큰 소리로 시를 낭독하시면 그것이 기상나팔이었고, 일찍 일어나 책을 읽어야 했다. 외할머니께서는 맛있는 음식을 해주셨고, 맛있다고 하면, "맛있으면 많이 먹어라"고 하셨다.

외삼촌들은 책읽기를 좋아하셨고, 모두 공부를 잘 했다. 


정직하고 부지런하고 사랑이 많은 조부모님과 삼촌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우리 구주 예수님 영과 중에 재강림하시는 감격의 그날에 다 함께 반갑게 다시 만나 다시는 이별이 없는 영원한 하늘 본향에서 안식일마다 창조주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영원히 행복하게 함께 살개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드린다.




제 2부 고난의 세월, 6.25 동란, 행방불명 된 아버지


내가 5살 누이동생 귀주가 1살이던 1950년, 대한민족의 비극인 6.25 동란이 일어났다.

경북중학을 졸업하고 24살 젊은 나이에 대한 석탄공사 업무국장이라는 새 직장을 얻어 서울로 가신 아빠는 행방불명이 되셨다.

서울에 집을 준비한 후, 가족을 데려가겠다고 약속하고 올라가신 아빠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셨다.


25세 젊은 나이에 사랑하는 남편과 생이별한 어머님은 밤마다 소식없는 남편을 기다리다가 옷을 입은 채 새우잠을 주무시고, 가랑잎 굴러가는 소리에도 사랑하는 님의 발자국 소리인가 방문을 열어보고, 동네 개들이 짖으면 혹시나 하고 일어나 기다리고, 식사 때마다 제일 먼저 밥 한 그릇 퍼서 따뜻한 아랫목에 묻어두고 갸륵한 정성으로 사랑하는 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렸건만 달이 가고 해가 가도 나의 아버님은 영영 돌아오지 않으셨다.


아버지를 잃은 우리 가정엔 근심과 슬픔과 가난이 찾아왔고, 어린 남매를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키기 위해 밤새워 삯바느질하시던 어머님은 자주 편찮으셨고, 젊은 나이에 남편 잃고, 기대가 컸던 큰 아들마저 잃은 할머님은 땅이 꺼져라 한숨 쉬시고 담배를 피우시며 세월을 한탄하시니 나는 참 외롭고 슬펐다.


근심과 걱정이 가득하던 우리 가정, 아무도 교회 나가는 사람이 없던 우리 방 남쪽 벽에 누가 준 것인지 모르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 그림이 걸려있었는데, 나는 그분이 누군지 몰랐지만 그 그림을 바라보노라면 엄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우리 집엔 '창세 시대와 부조들의 생활'이란 일본말로 쓰여진 오래된 책이 한 권 있었는데, 아마 우리 집을 찾아온 어떤 문서전도인으로부터 마음 좋으셨던 우리 할아버지께서 예수님 그림과 함께 그 책을 사셨을 것이라고 추측해 본다. 어머님께서는 그 책을 읽으시고 잠자기 전에 어린 우리 남매에게 재미있게 이야기해 주셨다.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가 있는 아이들을 보면 참 부러웠다. 뒷산에 올라 풀을 뜯어먹는 소를 지키며 책을 읽고 있노라면 저 아래 읍내로 뚫린 길로 아버지께서 걸어오실 것만 같았다. 푸른 하늘 위로 흘러가는 뭉게구름을 바라보며 "구름아, 구름아, 우리 아빠 계신 곳으로 날 실어다 주렴..."하고 시를 지어보기도 했다. 그러면 아버지가 더욱 그리워 눈물이 핑 돌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밤 꿈을 꾸었는데, 아버지께서 외갓집 대문으로 들어오시는 것이었다. 나는 부엌 문을 박차고 달려가 "아버지!" 소리치며 품에 안겼다. 그리고 잠이 깬 나는 아버지가 그리워 흐느껴 울었다. 꿈이라도 좀 더 길었으면 좋았을텐데...


내가 2학년까지 다녔던 경산 중앙 국민학교 성암 분교가 어느날 갑자기 영남 삼육학교가 되었다. 원래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 땅이었지만 2차대전 말기에 일본 제국주의의 박해로 선교사들이 떠나고 교회가 해산되면서 일본 정부에 빼앗겼던 땅을 되찾았다고 한다. 나는 경산 중앙 국민학교 본교로 옮겨 갔지만, 성암 분교의 아름다운 추억이 깃든 삼육학교에 호감을 가졌다.


영남삼육 중고등학생들은 토요일 오후마다 이웃 동네로 전도 활동을 나왔는데, 아이들을 모아놓고 찬송과 손놀이도 가르쳐주고, 그림들을 걸어 놓고 재미 있는 성경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그후 어느날 밤 다시 꿈을 꾸었는데,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천천만만의 천사들과 함께 구름을 타고 이 땅으로 오시는 꿈이었다.

나는 두 손을 높이 들고 흔들며 "하나님 아버지 어서 오세요!"하며 환영하였다.


그 꿈을 꾸고나니 얼마나 기쁘던지 그 이후로는 외롭거나 쓸쓸하거나 어려운 일을 만날 때 그 꿈을 생각하며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다'고 믿으면 힘이 났다.


초등학교 시절 한 반이었던 김무성이의 아버지는 서울 중앙청에서 근무하시다가 피란오셨다고 하였다. 서상재의 부모님은 경산 중학교와 경산 농예학교와 경산 고등학교를 세운 교육자들이셨다. 상재의 고모 동숙이도 공부를 잘 했다. 김종철이의 아버님은 프린스톤 대학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으셨고, 후일에 서울 영락 교회 당회장이 되신 분이셨다. 종철이 부모님은 우리 외가집을 사서 고아원을 세우셨는데, 종철이 어머님과 이모님이 차례로 원장으로 고아들을 키우시며 선한 사업을 하셨다. 나의 친한 친구 종철이네 집에 가서 탁구도 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즐겁게 놀던 추억이 그립다.


우리 반에 가정환경도 좋고 공부 잘 하는 학생들이 많았는데도 내가 1등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전적으로 어머님의 헌신적인 사랑과 교육열 덕분이었다. 어머님은 아침 밥을 지으시면서 나에게 소리 내어 책을 낭독하며 예습을 하라고 명하셨다. 학교 갔다 오면 숙제를 다 하고, 날마다 복습을 하라고 명하셨다. 일요일이나, 공휴일이나 방학 때도, 동양사, 서양사, 영어공부 등 숙제를 많이 주셨다. 저녁에 자기 전에는 날마다 일기를 쓰라고 하셨다. 잠들기 전에 베드 타임 스토리를 들려주셨다. 어머님은 나와 나보다 4살 적은 누이동생 귀주의 성장기를 기록하셨다.


"시간을 아껴 써라. 흘러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글을 써서 책상 앞에 붙여주셨다. 

그리고 시간을 아껴 쓰는 모본을 몸소 실천하셨다. 참으로 모범적인 좋은 어머님이셨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국어책을 잃어버렸는데, 국어책을 빌려오라고 하셔서 빌려오니, 밤새도록 국어책을 노트에 써서 주시던 사랑하는 어머님의 모습이 무척 그립다.


아버지 없이 가난하게 살던 나는 옷 살 돈이 없어서 어머니께서 손수 만들어주신 한복을 입고 학교에 다녔다. 여름 방학 동안 그림일기를 그려, 방학이 끝난 후 학교에 가져 갔더니, 칭찬을 들었던 생각이 나고, 전교에서 남학생 1명 여학생 1명 착한 어린이를 뽑는데, 남학생 대표로 뽑혀 교육감상을 받아 어머니께 기쁨을 드리던 생각도 난다. 가난한 중에도 자녀 교육을 위해 최선을 다 하신 어머님의 은혜는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제 3부 찾아오신 예수님, 새출발, 침례


영남삼육 중고등학생들은 안식일 오후에 우리 외갓집도 방문했는데, 수양딸로 들어와서 집안 일을 도와주던 명암 아지매가 외할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영남삼육학교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얼마 후, 해군 사관학교에 다니다가 폐결핵과 대장염으로 집에 와서 휴양하며 생사의 기로에 있던 외삼촌이 명암 아지매와 함께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였다. 가끔 외갓집에서 잠을 잘 때, 새벽에 외삼촌이 무릎 꿇고 '눈을 예수께 돌려 그 얼굴을 주목하라. 주의 영광스러운 광채에 세상 영화는 사라지네' 찬미부르던 경건한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생각이 난다. 치료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외삼촌의 병을 다 고쳐주셨고, 복음 전하는 주의 종(전 재림교회 미주협의회장 박형종 목사님)이 되도록 축복하셨다.


박형종 목사님의 형님 박해종 목사님은 경북대학교 의예과 재학 중 학도병으로 나갔다가 인민군의 포로가 되고, 다시 유엔군의 포로가 되는 등 죽음의 고비를 여러번 넘기고, 반공포로 석방으로 집에 와 있을 때 동생의 감화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영남삼육 국어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시다가 삼육대학에서 신학공부를 하시고 삼육대학 신학 교수가 되시고 총장님으로 봉사하시고 은퇴하셨다.


우리 가족에게 닥쳐온 재난을 축복으로 바꾸어 주시고,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형통하게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린다.


어머님과 함께 외삼촌 댁을 방문하여 건강 음식도 먹고, 성경말씀도 듣고, 찬송 부르고 예배드리면 참 좋았다. 

외삼촌들과 외숙모님들은 나를 사랑하셨고 믿음이 자라도록 여러모로 도와주셨다.


우리 외갓집에 복음을 전한 영남삼육 학생들의 선교봉사가 참으로 감사하다. 

그들이 옥토에 뿌린 복음의 씨앗이 100배의 풍성한 열매를 맺어 우리 집안에 벌써 100여명의 행복한 재림 성도들이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재림 교회 성도가 되고, 삼육교육을 받고, 로마린다 위과대학 치과대학을 졸업한 의사 치과의사들도 30여명이 되어 신앙생활 잘 하며, 주님의 몸된 교회를 도우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부모님께 효도하고, 형제 간에 우애하며 행복한 재림 성도들로 보라모디게 살아가고 있으니,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 감사하고 감사하다.


믿음 좋은 영남삼육 학생들과 교사들을 통해 우리 가족을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린다. 할렐루야!!! 


(일전에 조재경 목사님 사모님과 대화하는 중에 영남삼육학교 시절, 우리 외갓집을 방문하여 복음 전하던 추억을 말씀하셨다. 재난 당하고, 우환 중에 허덕이던 우리 가정을 찾아와서 구원의 길, 행복의 길로 인도해주신 전화위복의 하나님과 복음을 전해준 분들, 참 감사하고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도 고해같은 이 세상에서 재난 당하고, 병들고, 시련 속에 허덕이는 이웃들에게 소망의 예수님을 증거하여, 영원한 행복과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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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시카고 기사! "끝없는 감사와 찬양의 삶" "시선 [영원을 걸으며] 펴낸 박옥종 여사]" "[청상의 망부석] 40년의 한과 고통 2백편의 신앙시로 승화시킨 역작" 25살의 아름다운 나이에 6.25 사변으로 남편이 행방불명, 40년간 [청상의 망부석]이 된 박옥종 여사(69세)가 최근 [영원을 걸으며]란 시선을 펴내고 기뻐하고 있다. [시조사]에서 발간된 동 시선에는 [엔학고래], [소망의 별], [나의 기도]등 험한 인생의 여정 속에서도 구원의 밧줄을 놓지 않고 기쁨과 탄원, 슬픔과 고통을 줄줄이 꿰어 하나님께 바친 2백편의 주옥같은 글들이 3백여 페이지에 가득 차 있다. 시카고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 담임 정무흠 목사의 어머니인 박옥종 여사는 경남여고 출신으로 대구 청구대 국문과에서 수학했으며 1991년 레익 미쉬간칼리지에서, 도 삼육대 신학과에서도 공부의 근을 놓지 않고 배움의 집념을 불태우며 수많은 시들을 써왔다가 이번에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경북고교 출신의 남편을 맞아 모든이의 선망의 대상이 된 행복한 결혼생활이 전쟁으로 7년만에 끝이 나고 온실속의 꽃이 냉혹한 바깥 땅에 내동댕이 쳐진듯 밤마다 단말마의 고통에 시달리다가 [복잡다기 요급심장치료]라는 진단을 받게된 어느날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이 가슴을 비수로라도 열어봤으면"하고 몸부림쳤다는 박옥종 여사. 그러나 부처도, 육신의 부모도 살려줄 수 없었던 생명의 외경 앞에서 빈사의 상태에서 드린 기도와 탄원이 하나님께 상달되어 오늘의 행복한 삶을 얻게 되었다는 것. "가랑잎 굴러가는 소리에도 사랑하는 남편의 발자국 소리인가 방문을 여시고 한밤중에라도 아버지가 오시면 즉시 문을 여러드려야 된다시며 옷입은채로 주무시던 어머니, 아침 식사 때면 제일 먼저 밥그릇 떠서 아랫목에 묻어두시던 너머님이, 요즘은 자식들과 손자, 손녀, 외손자들까지 다 믿음안에서 공부 잘하고 건강해서 무척이나 행복하시다"고 정무흠 목사는 말한다. "이제는 남편 잃고 잠안오는 밤의 말할 수 없는 번뇌를 쏟아놓는 글을 쓰지 않고 나의 생명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께 끝없는 감사의 찬양의 글을 바치며 이 넘치는 은혜를 이웃에게 나누고자 살아가고 있다"고 박여사는 최근의 심경을 고백하고 있다. "안된다. 죽어서는 안된다. 너는 두 어린 생명의 너머니가 아닌가. 네가 죽으면 두 아이는 고아가 될 것이다..." 그 고통스런 죽음의 순간에 어른거렸던 한살짜리와 세살짜리 아이들이 커서 어엿한 정신과 의사 출신의 목사가 되었고, 한국의 미 공군 병원 부원장 김영섭 장로의 부인도 되었다. 시집출판 못지 않은 인생의 또다른 역작이 된 것이다. 또한 손자, 외손자까지도 로마린다 의대에 진학, 학교 부근에서 그 핏줄들을 돌보며 남북통일의 소원을 품고 [도르가]와 같이 어려운 이들을 구제하며 성경대로 실천하려 애쓰는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다. "나 낙심되어 주저앉았을 때 내 귀에 안위의 말씀을 주셨으며 슬픔에 싸인 내게 주의 사랑으로 가득 채우셨기에 아아 주님,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내 곁을 떠나가도 주는 영영 나와 함께 하시리니...." 시집의 제목처럼 [영원을 걸으며] 함께 동행하실 이가 있는 행복한 그 길을 박옥종 여사는 이제, 기쁨에 겨워 편편의 자작시로 남기면서 살아가고 있다. 배미순 기자 (한국 일보 시카고 1993.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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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LA 기사 - "시집 [영원을 걸으며] 발간한 69세 박옥종 여사" "청소년 위한 작품 쓰고싶어" "인생의 희비, 신앙심 섬세히 그린 30여년 틈틈이 쓴 2백여편 수록" 녹의 "꿈인양 녹의 떨쳐 소리 없는 환호 속에 태양은 부신 깃발 태고와 의연하다 무수한 깃발 너와 나 바람으로 얻어진 날 한풍 매선 채찍 남은 날 헤어가며 언젠가 꿈은 진정 이루리 믿던 마음 오늘사 성의 떨치고 햇님 맞아 웃으리 갈라디아서 5장 5절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이 글은 칠순을 바라보며 그동안 겪어온 인생의 희비와 깊은 신앙심을 결집시켜 책으로 펴낸 박옥종 여사의 시집 [영원을 걸으며]에 수록된 [녹의]라는 시조다. 1959년부터 1991년까지 틈틈이 눈앞에 떠오르는 시상을 노트에 적어놓았던 글중 2백여편을 골라 시집을 발간한 박여사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의 건강과 여유, 그리고 섬세한 표현력을 보여주고 있다. 1924년 경북 영천 태생인 박여사는 20세 되던 해에 결혼하고 남매를 얻었으나 6.25때 석탄공사에 근무하던 남편을 잃는 슬픔을 맛보아야 했다. 생사조차 알 수 없는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은 박여사의 글중에도 자주 나타나고 있으며, 때문에 [통일]을 염원하는 한국현대사의 비극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후 자녀들을 고아로 만들 수 없다는 일념으로 일제때 획득했던 교사자격증을 이용, 남천국민학교 등에서 잠시 교단에 서기도 했던 박여사는 [만성신장염]으로 인해 더욱 어렵고 힘든 생활을 살아야만 했다. 그러나 험한 인생의 격동 속에서도 남다른 향학열을 불태우기도 했던 박여사는 37세 때 대구 청구대학 국문과에서 공부하기도 했으며, 1979년 도미이후 1991년에는 레이크 미쉬간 칼리지에서 수학할 정도였다. 신문 및 잡지등에 자신의 작품을 싣기도 했는데 서두에 쓰여진 시조 [녹의]는 가람 이병기 선생의 추천으로 [여원]지에 실렸던 작품이다. 박옥종 여사가 쓴 글은 6.25의 생생한 기록이 담긴 2천5백매에 달하는 장편소설을 비롯해 큰 상자에 넘칠만큼 많은 양이 있었으나 미국으로 이주하는 준비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태워버렸다고 하면서 "나의 글이 불속에서 사라질 때마다 아깝고 안타까와 쳐다볼 수가 없었지요"라고 회고했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하고픈 일이 많다는 박여사는 새벽 4시에 일어나 기도와 함께 산책을 즐기고 대부분의 시간을 독서에 할애하고 있다. 김소월, 이광수의 작품을 좋아하고 도산 안창호선생을 가장 존경한다는 박여사는 "요즘은 내가 영어를 잘 했으면 참 좋을 텐데"라는 아쉬움과 함께 한인 청소년들을 위한 글을 쓰고 싶다고 말한다. 시집을 발간한 후 변화에 대해 박여사는 독자들에게서 호평의 전화가 걸려오고 때로는 직접 만나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며 독자들이 좋아하는 모습에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황성락 기자 - 한국 일보 LA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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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딸아! 내가 여기 있노라!!! - 박옥종 (정무흠 목사의 어머니) 2008.03.11 23:07 조회 수: 9790  추천:58 나는 가장 연약한 사람이었다 몸도 마음도 불면 날아갈 듯 이 세상에서 살기에 지쳐 쓰러져가는 인생이었다 가장 연약하고 가장 못난 이 인생을 불쌍히 여기사 주님께서 이끌어 내셨다 천애 낭떠러지 밑에서 구원자만 애타게 기다릴 때 절망은 가슴을 짓눌렀었나니 오 주여, 희미한 빛조차 없던 그 캄캄한 밤 신음하며 오열하던 그 슬픔의 날들 누구에겐지도 모르게 내 팔을 뻗고 떨리는 손끝으로 더듬었을 때 불쌍한 딸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인자한 그 음성이 음악처럼 들렸네 너는 이 밧줄을 꼭 잡아라. 한줄기 생명의 빛과 함께 내려진 밧줄 매달리며 매달리며 나는 흐느껴 울었노라. (박옥종 著, 영원을 걸으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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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옥종 여사의 시집 출간을 기리며 - 신계훈 목사 (삼육대학교 교수, 총장, 한국 연합회장) 그 숱한 민족의 비극이 시작되던 그 해 6월 25일, 그 길고 지루했던 여름, 가녀린 망부석 하나가 외로운 모습을 다듬고 있었다. 속히 다녀 오리라던 출장길을 따라 흔연히 상경한 부군은 전쟁 길에 막혀 끝내 돌아오지 않았으며, 애달프게 기다리던 이십대 후반의 아직도 젊은 여인은 그대로 청상의 망부석이 되어 고달픈 삶의 뒤안길에서 외로운 풍화를 시작했다. 박옥종 여사이시다. 겨우 세 살과 한 돐을 맞는 아들 딸 아기 둘을 둘러업고 품에 안으며, 손목을 이끌고 면면이 이어온 고달픈 생존의 날들은 참으로 더디 흘렀다. 언제나 초롱초롱한 두 어린 자식의 눈망울을 바라보며 살아야 할 까닭을 찾은 여사는 생존을 위해 떳떳한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어설픈 기름 장사, 힘 겨운 보따리 장사, 명문의 고등교육을 받은 덕분에 그래도 가능했던 가정교사, 국민학교와중학교 교사 등 열 서너가지도 더 되는 일감을 찾아 몸부림치듯 살아온 십 수년이 더디기는 했지만 천천히 흘러갔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고달픈 삶의 여로를 외롭고 힘겹게 달리던 여사는 마침내 기진하여 쓰러졌으며, 이내 짙은 흑암이 시야를 가려버렸다. 바로 그 때 비쳐 온 한 줄기 빛, 그리고 잇달아 내려 온 한 가닥의 밧줄, 여사는 혼신의 힘을 다 해 그것을 붙잡았다. 끝내 돌아오지 않는 부군을 기다리다 두 자식과 함께 인생의 여로에 지쳐 쓰러진 가련한 여인에게 뻗쳐 온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었다. 행여 놓칠새라 그 손길을 붙잡은 여사는 더 이상 풍화로 낡아져가는 한낱 외로운 망부석이 아니었다. 이제 여사는 마침내 돌아오실 몸과 맘의 영원한 하늘의 님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리는 만년 소녀가 되신 채 어느덧 고희를 눈 앞에 두고 계시다. 지나간 40여년 홀로 걸으신 여사의 인생 여로가 이제 익을대로 익은 포도송이처럼 맺혀 알알이 그 모습을 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그것이 이번에 출간된 여사의 시집, "영원을 걸으며"의 전모이다. 아무도 함께 하는 이 없이 홀로 애쓰며 맺히신 고독한 열매를 모두가 함께 맛보게 되었으니 참으로 감격스럽다. 여사의 시 망부석과 사군가에 수놓인 망부의 애상, 유한과 고신적적에 스며진 청상의 고독, 애모곡에 넘치는 절절한 모정, 사자모에 드러난 애틋한 효심.... 서정이 넘치고 잔 정이 많으신 여사는 천생의 가냘픈 시인이시다. 무엇보다도 삶의 온갖 탄원을 기도로 배태하여 시의 옷을 입혀 출산시킨 진솔한 기도의 시집을 가지게 되어 참으로 대행스럽다. 그러나 이번 시집이 여사의 모든 작품이 아니다. 또 다른 두 작품이 벌써 세상에 빛을 보였다. 여사의 인생 역작인 아들과 따님이다. 서울 가신 아빠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철부지 세살짜리 아들 무흠은 그후 의대를 나와 어엿한 의사가 되어 국내외에서 자선을 계속하다가, 어머니의 바램을 자신의 소원과 아울러 마침내 목양자의 길에 들어서 지금은 미국에서 안수받은 중견 목사로 애오라지 목자의 길을 걷고 있다. 참으로 갸륵한 일이요 장한 아들이다. 그리고 그 때 한 돐이었던 포대기 속의 딸 귀주는 대학을 나온 후 선교와 봉사로 이름난 의사의 아내로 미국에 살고 있다. 언제나 어머니의 마음을 뿌듯하게 하는 그 어머니의 그 따님처럼 살고 있다. 슬하에 두신 될성부른 손자 다섯과 손녀 하나는 여사가 신명을 다 해 쓰신 인생 시집을 영원히 빛내주는 편편의 자작시들인 것이다. 1979년 도미하신 이래 자녀들과 함께 사시며 기도를 호흡으로, 말씀을 음식으로 삼고 사시는 여사는, 이제 잠시 후 그 모습을 드러내실 영원한 하늘의 님을 오늘도 애타게 기다리시는 불퇴전의 영원한 망부석으로 우뚝 서 계시다. 오상고절 박옥종 집사님의 여생에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이 가득하시기를 진심으로 기도드리고 싶어져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뫃는다. 나의 어머님을 위해서처럼... 1992년 12월 12일 서울의 교외 청학리 산 기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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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의 새벽길 - 박옥종 나는 내 마음 문을 활짝 연다 귀하신 주여 들어오시옵소서 내 마음의 보좌에 주께서 좌정하시자 내 마음엔 사랑의 밀물이 가득하고 주님의 사랑은 내 마음에 기쁨 충만케 하여 나는 가슴 터질듯한 감사로 노래부른다 나의 찬양이 새벽 공기 속에 올라갈 때 새들의 찬양과 어우러진다 주신 몸과 마음 다하여 찬양하네 사슴처럼 뛰고 싶고 나비처럼 춤추고 싶어라 새들과 함께 찬양하며 나는 걸어가네 나는 푸르른 수목 우거진 푸른 잔디 사이의 흰 길을 걸어가네 힘차게 기쁘게 사랑으로 충만하여 흰 구름 강물 처럼 양떼처럼 떠가는 하늘 바라보며 걸어가네 ***박옥종 시선 "영원히 새로운 것"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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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태지회장 이재룡 목사 추천사 - 박옥종 시선 "영원히 새로운 것" 이 시집의 시를 한 수 한 수 읽어 내려 가노라면 저자이신 박옥종 집사님께서 살아오신 한 평생의 믿음의 삶이 우리의 마음에 진한 감동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이른 아침 눈을 들어 주님을 우러르며 하루를 열면, 온통 창조주의 영광으로 마음과 세상이 황홀케 되니 감사와 찬양이 절로 나온다는 그분의 인생관과 온종일 주님과 더불어 걷는 그분의 모습 속에서 마치 하나님과 날마다 동행하던 에녹의 모습을 보는듯 합니다. 이 책에 수록된 모든 시의 구구절절은 마음에서 울어 나온 저자의 기도요, 신앙의 간증이요, 주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입니다. 그러기에 이 심오한 마음의 명상은 읽는 이들의 마음 속에 신선한 감동과 새로운 각오를 일깨울 것입니다. 오로지 한 평생 주님만 바라보며 오늘도 그분을 만날 소망 속에 예비하며 살아가는 저자의 올곧은 신앙 자세를 흠모하면서 우리 모두의 삶도 그와 같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가슴 설레임 속에서 기다려 온 우리 주님은 약속하신대로 분명 오실 것이니 찬란한 영광의 아침 그 주님을 뵈올 때까지 오늘도 진실하게 예비하며 살아가겠다는 저자의 의지와 소망이 우리 모두의 것이 되기를 기원하면서 그분의 감동에 함께 젖어보도록 여러분 모두에게 일독을 권하는 바입니다. 북아태지회 목회부장 이재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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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하 목사*** 2014.06.07 06:07 정목사님, 좋은 글, 감동적인 간증 감사합니다. 지금 저희 명광 교회에서는 목사님의 자당 고 박옥종 집사님의 자서전 읽기 열풍이 일고 있습니다. 100만원 고료 당선작 원고 모집을 5월 말까지 했으나 워낙 책의 양이 많아 6월 15일까지 기간을 연기했습니다. 저희 교회 여집사님들은 대부분 참여하여 인터넷에서 그 많은 양의 내용을 모두 복사하여 세심히 읽고 있습니다. 담임 목사로서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 모릅니다. 제가 새벽에 일어나 5시간여 박옥종 집사님의 뜨거운 재림 신앙의 전기를 읽으며 받았던 그 감동이 우리 교회 여집사님들에게 고스란히 전달 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박옥종 집사님의 파란 만장한 삶 속에서 오직 주 여호와를 의지하며 재림 신앙을 굳건히 지키신 그 아름다운 삶은 우리 교회 여집사님들에게 큰 교훈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상금 100만원하고는 견줄 수 없는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열매로 그들의 삶에 보답 될 것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 명광 교회 뿐 아니라 우리 재림교회에 수 많은 여성들이 고 박옥종 집사님의 신앙을 본 받아 이 마지막 때에 참으로 훌륭한 믿음의 여성들이 많이 나타나길 기도합니다. 그러한 여성들이 많이 나타날 때 또한 이 교회를 이끌어 갈 훌륭한 아들 딸들이 수 없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목사님의 자당 고 박옥종 집사님께서 앤드류스 교회인지 어디서인지 새벽 기도 시간에 낭랑한 목소리로 말씀을 읽으시던 그 음성이 제 귓전에 남아 있습니다. 남은 생애 더욱 건강하시고 기도하시고 계획하시는 모든 일들이 주 안에서 형통하시길 간절히 기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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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하나님은 알지 못하였지만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던 분들***         박옥종(정무흠 목사의 어머니) "일본 사람들이 진주만 공격으로 대승리를 거두었다고 성대한 축하 행진을 하고 완전히 들뜬 기분을 내고 있던 그 해에 우리 외할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셨다. 내 나이 만 12세(우리 나이로 14 세), 부산 여고보 1학년 때였다. 내 생애에 처음으로 가까운 분이 돌아가신 슬픔과 무상을 느낀 첫 사건이었다. 사춘기의 소녀의 가슴에 큰 충격이었다... 나의 외할아버지에 대한 가지가지 추억들이 되살아난다. 특히 오빠들과 내가 한 해 겨울 방학에 외가에 갔을 때 보았던 사건이 생각이 난다. 새벽같이 어린 소녀가 엄마 등에 업혀서 할아버지가 계시는 사랑 앞에 들이닥쳤다. 화상을 크게 입은 아이였다. 소녀의 아버지는 술버릇이 나쁜 사람이었는데 이 새벽에 술에 만취가 되어 집에 돌아오자 화로를 들어 집어 던졌는데 그 불이 잠자고 있던 딸을 덮친 것이었다. 그 엄마는 어쩔 줄을 모르며 울며 할아버지께 애소하는 것이었다. “불쌍한 이 어린 것 살려 주이소! 살려 주이소!” 외할아버지는 그 엄마를 위로하며 안위시키며 그 딸아이의 화상 입은 얼굴과 목과 가슴과 팔에 흰 고약을 바르셨다. 매일 그 엄마는 딸을 업고 왔고 그 어린 딸의 상처는 나아갔다. 나중에 들으니 그 소녀가 상처 없이 깨끗이 나아서 예쁜 처녀가 되었고 시집을 가서 잘 살고 있다고 들었다. 외할아버지는 연구심이 많은 분이었고 다른 사람을 도우시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예비하시는 분이었다고 생각된다. 외할머니가 발찌가 났을 때 대구 동산 병원에 입원하셔서 치료를 받으셨다. 그 때 그 병원에서 두 가지 연고를 쓰는 것을 보시고 외할아버지는 그 제조법을 물어서 그 연고를 예비해 놓으셨고 그 연고를 써서 그 화상 입은 여아를 상처 없이 낫게 하셨던 것이다. 외할아버지의 별세는 온 동네의 슬픔이었다 한다. “한 5년만 더 살아계셨어도 우리가 잘 살게 되었을 텐데…….” 하고 동네 사람들이 한탄을 하였다고 한다. 이웃을 자신의 몸같이 사랑하신 외할아버지, 그 분은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 곧 기독교의 하나님은 알지 못하셨지만 천의(天意)를 깨닫고 천의(天意)에 따라 살았던 분이라 생각된다... 외할아버지 별세 후에 외할머니께서 우리 집에 다니러 오셨다. 언제나 두 분이 같이 다니셨는데 혼자 오시기는 처음이었다. 우리는 외할머니한테 얘기해달라고 졸라댔다. 외할머니께서 그 때 들려주신 얘기가 있는데 그 얘기는 이러했다. 어떤 가세가 기울어진 양반집에 모자만이 살고 있었다. 그 많던 노비들도 다 떠나고 모자만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어머니가 말씀하시기를, “아들아, 우리 집 노비들이 아무데 살고 있다고 들었는데 여기 노비문서를 가지고 찾아가서 그들을 면천(免賤)시켜 주고 그 대신 그들의 형편대로 그들의 성의를 받아오면 이 곤경을 면할 것 같구나.” 아들은 어머니의 말씀대로 종들이 한 동네를 이루고 살고 있다는 곳으로 떠났다. 옛 주인을 종들은 반가이 맞이해 주었다. 그들의 노비 문서를 다 불사른 후 사정을 이야기하자 종들은 다 감동하여 어진 주인의 가정의 형편에 마음 아파하며 자기들의 힘대로 삼천 냥을 모아 말에 실어 젊은 주인을 보냈다. 그러나 그 아들은 그 돈을 집에까지 못 가져오고 중도에서 다른 일로 없애고 만다. 강을 건너려고 할 때, 그는 한 늙은 남자와 두 여인이 울면서 깊은 강물 속으로 뛰어들려고 하는 것을 보았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하고 그는 그들에게 물었다. "나의 독자가 빚을 갚지 못해 감옥에 있습니다. 오늘 중으로 3000냥을 갚지 못하면 그는 처형당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외아들이 처형당하기 전에 나의 아내와 며느리와 함께 자살하려 합니다." "제발 자살하지 마십시오. 내가 3000냥을 드리겠습니다."라고 그는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의 전 재산을 그들에게 주고 돈 한푼 없는 빈털털이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고대하고 있던 어머니에게 모든 이야기를 소상히 아뢰었을 때 그 어머니는 무엇이라 말했을까? “아들아, 인명을 구하는 것이 가장 귀한 일이니라. 네가 참으로 잘 하였도다. 한 사람의 생명 때문에 다른 세 가족의 생명도 위경에 놓여 있었다니 네가 어찌 네가 얻은 돈이라고 사지에 이른 사람들을 못 본 체하고 올 수 있었겠느냐? 바로 너를 그 시간에 당도하게 한 것은 천의(天意)였느니라. 천의가 무심치 않아 그들을 살리셨거늘 어찌 너와 나의 생명인들 굶어 죽게 하시겠느냐?” 참으로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었다. 지금 내가 하나님을 믿고 보니 하나님의 뜻은 정직하게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게 하고 계시는 것이다... 근검절약(勤儉節約) 나의 외가에서 본 추억들 중에는 마치 활동 사진의 필름이 전개되듯이 선연하게 나타나는 장면들이 여러 개 있다. 그것들은 거의 10세 미만 때의 회상이다. 내가 그 때 일을 일부러 생각해 보려고 해서 오는 현상이 아니라 문득 문득 내 생애에서 내가 외할아버지가 생활하시던 장면을 회상하며 나도 본 받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축대에 떨어져 있는 쌀을 하나하나 주우시던 외할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그 외할아버지의 모습 때문에 한 알갱이의 곡식도 한 톨의 밥풀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사람이 된 것 같다. 외할아버지는 부자였고 존경 받는 어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질하다가 그랬는지 어떻게 되어서 쌀이 떨어져 있었는지는 모르나 그것을 발견하신 외할아버지께서 아무 말씀 않으시고 그 한 알갱이 한 알갱이를 줍고 계셨던 것이다. 외할아버지는 가난한 이웃과 친척을 돕는 일과 또 모든 사람에게 손 대접하는 일이나 가족들에게나 후한 분이었다. 그러나 외할아버지 자신의 곡식 한 알갱이도 소홀히 하지 않으시는 근검절약의 정신으로 말미암아 집안사람이나 자손들이나 친척들이나 온 동네 사람들까지 그 혜택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셔서 한 머슴에게 정해놓은 시간에 종을 치게 하시고 가난하여 학교에 못 보내는 집 아이들을 외할아버지 사랑방에 모아 공부를 가르치시고 사랑채의 한 방에 차려져 있는 한의원의 모든 재료로 동네 사람들에게 무료로 치료를 베푸시며 들레지 않고 조용히 언제나 누구에게나 선을 베푸시던 외할아버지였다. 부지런해야 된다는 것을 생활로써 모본을 보이셨다..." **그 영광의 빛 속으로! 제 1부 출생과 배경 중에서 (박옥종)** kasda.com 글동네에서 그 영광의 빛 속으로 1-5부를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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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충만한 화잇 여사가 쓴 "시대의 소망"에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글이 있습니다.*** " 이방인 가운데서 하나님을 모르고 섬긴 자들 즉 인간의 도움을 통하여 한 번도 빛을 받지 못한 자들일지라도 멸망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을 알지 못하였으나 자연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율법이 요구하는 일들을 행하였다. 그들의 행위는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을 감화시킨 증거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는다." 구원의 소망 80쪽,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의 가정에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과 은혜와 영원한 생명의 축복 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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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영광의 빛 속으로 - 박옥종 (kasda.com 칼럼과 글동네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5 그 영광의 빛속으로 제 5부 감사의 노래 4 그 영광의 빛속으로 제 4부 침례! 새출발! 인생역전! 3 그 영광의 빛속으로 제 3부 한국 동란! 고난의 세월! 가난 속에 핀 꽃 2 그 영광의 빛속으로 제 2부 행복한 결혼! 해방! 아들, 딸의 출생! 1 그 영광의 빛속으로 제 1부 출생과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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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하 2013.10.19 13:55 정무흠 목사님. 제가 오늘은 우리 아이들이 일찍 함께 잠을 자자고 조르는 바람에 저녁 9시 반쯤 잠자리에 들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새벽 1시쯤 잠에서 깨어 정목사님이 올려 놓으신 어머님의 자서전같은 글들을 4시간여 읽었습니다. 구구절절.... 진심과 정직, 하늘을 향한 끊임없는 믿음, 윗 어르신들에 대한 예의와 자녀들에 대한 지극함, 하나님과 사람 앞에 언제나 반듯하게 살아 오신 어머님의 삶이 저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최근 들어 이렇게 오랜 시간을 남의 글들을 읽은 적이 없었는데 정말 정목사님의 어머님의 글은 결코 중간에 멈출 수 없는 진지함과 더불어 흥미를 갖게하는 놀라운 힘이 있었습니다. 훗날, 하늘에서 정목사님의 어머님을 뵈올 것을 생각하며 이 새벽 어머님을 사랑하시고 정목사님의 가족들을 사랑하신 그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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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지원 2015.04.20 02:35 그 삶의 무거운 짐, 불면의 날들, 그 온갖 슬픔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연약한" 딸을 부르는 "인자한 그 음성". 애끓는 그 어머니의 슬픔을 이긴 삶은 자녀의 푯대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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