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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여인 어쩌려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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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영근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10.04.30 07:27 조회수 5,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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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항상 안녕하세요? 라고 하지요. "안녕"은 좋은 것 같아서 좋아합니다. 정겨운 우리 인사이거든요.

지난번 Carrlyn c, James 글을 통해 하갈의 이야기를 했지요.

아마도 잘 아는 하갈, 하실지 모르겠거든요. 그러나 제임스의 훌륭한 분석을 유의해 들으시면서

유익 많이 받았으면 하는 바램이 있거든요. 바쁘신대 조금 길지라도 꼭 읽어보세요.

 

졸지의 일을 경험해 보셨습니니까? 하갈의 사정이 내 사정이고 내 사정이 하갈의 사정이더라구

요. 그래서 저는 하갈을 좋아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녀는 오랜 전 사람이지만 나역시 그가 당하

는 고초를 함께 살아 숨쉬며 지내고 싶은 심정이 있습니다. 물론 생각하는 바가  다 다르지요만....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만 제임스의 이야기에 나의 말투만 섞은 내용 글입니다.

 

아기까지 나은 한 남편의 아내 사라가 어린 아이처럼 집을 쫓겨나 방황합니다.(창 16장 참조)

여주인을 멸시했다는 일 때문입니다. 창세기 16장 4절에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

시..."했다고 성경은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방적으로 하갈을 나

쁜 사람으로 생각하며 외면합니다. 하갈은 억울할 뿐이지 어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

않을 수 있는 변호의 여지도 숨어있습니다. 여기에서 이것이 중요합니다.

 

제임스는 그의 저서 "Lost woman of the bible"에서 "하갈은 애급의 태양열이 뜨거운 사막지역에서

살면서 아무런 교육 없이 와일드하게 길러졌다. 그러나 그는 명철하였다."고 했습니다. "하갈은 본

디 상냥스럽게 섬기는 법을 교육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애급에 내려갔을 때에 왕으로부터 선물 받은 것이 하갈이고 보면 물건(노예

는 주인이 그의 생탈권을 가짐)치고는 꽤 쓸만해서 준 것이 아니었겠는가."하는 것입니다.

 

고의가 아니라도 그의 불운한 교육적 정황이 그러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고의 라고 한들 그 책

임성을 얼마나 잘 터득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고 보면 그의 잘못은 이지적인 죄의 성분과는 다

르지 않을까요? 따라서 그런 기준으로 그를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다

면 하갈은 정상적인 사람으로 당한 굴욕으로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요? 오히려 아들을 가지지 못

한 사라의 시셈이 억압적이지는 않았을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지성의 마음 문을 열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내면 아내지, 노예면 노예

지 아내가 노예의 일을, 노예가 아내의 일을 어떻게 함께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도 두 여인이

한 가정에서 말입니다. 될 말이 아닙니다. 그 잘못의 불협화는 당연한 것 아닐까요? 누구의 책임

이어야 하는 것일까요? 아브라함이나 사라는 무관한 것일까요? 사라는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사

라는 온통 잘못하여 뜨거운 사막으로 쫓겨나야만 하는 것일까요?하는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하갈은 드디어 쫓겨났고 헤브론의 마무레 숲에서부터 브얼세바까지 200-250리를 여주인의 채형

이 두려워서 도망을 갔습니다. "사래가 하갈을 학대했더니..."(창 16:6)라고 성경에는 쓰여있습니

다. 당시의 종의 생탈권이 주인에게 달려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곳의 사막을 1마일 쯤만 걸어보십시요. 뜨거운 불볕 더위에 걸어갈 수 있는지 가늠해 보십시요.

야생마처럼 광야에서 길러진 몸이라도 거의 300리를 걸어가면서 그가 당하는 슬픔은 어떤 것이

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지요. 그래도 자기 나라가 애급이라고 생각해서 남쪽을 찾아 정처없이

가고 또 간 것이지요.

 

"하나님은 하갈에 대한 여주인의 가혹함을 묵과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하갈이 그 일에  대하여

일차적인 책임이 없다는 것을 아셨다."(본 교회 성경 주석)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개입하셨습니다. "네가 어디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나는 여주

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창 16:8-9) 하셨

습니다.

 

"복종하라"는 히브리어 동사는 학대에 대하여 "자신을 포기하라"는 뜻입니다. 이 선언은 하갈에

게야말로 비참하고 한심스러웠으며(miserable), 위험하고(dangerous), 희망이 없어 보였다.(hope

-less)는 것이었습니다.

만약에라도 하갈이  지금 당신이라면 당신은 그 여주인에게로 돌아가는 일이 가능한 일이며 그

리 쉬운 일이겠습니까? 뜨거운 햇볕을 타고 다시 300리 길을 어찌 가야만 하는 것입니까? 아마

도 대개의 사람들이고 보면 절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갈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여주인에게로 돌아갔습니다.(창 16:13) 무슨 연고일까

요?

 

"감찰하는 하나님"(God Who Sees), 하갈의 "이 경험은 하나님이 하갈에게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

씀하셨다는 확신을 주셨다. 그녀는 하나님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불렀는데 하나님은 자

기를 보시고 외로움과 고통 중에 있는 자기에게 오셨을 뿐 아니라 자기도 그분을 뵐 수 있도록

허락하시고 살려주셨다. 하갈은 곧 하나님을경외하였고 하나님은 하갈을 그러한 궁지에 방치하

지 않을 것이었다. 이 약속은 하갈에게 있어서 큰 위로가 되었다."(본교회 성경주석 창 16:13절

주해)고 했습니다.

 

하갈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 여주인에게로 돌아간 사실이 우리에게 어떠한 교훈을 줍니까?

만약에라도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면 "하갈식 축복신앙"은 사라졌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가

다시 여주인에게로 돌아갈 수 있었던 용기는 "믿음과 순종과 포기"였습니다. 

포기신학의 의미는 여기에서 우리의 크나큰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을 포기하

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언약의 축복을 놓치기 때문입니다.

 

멀리 도망하는 자가 왔던 길로 좀처럼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원심력의 원리와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젠 할 수 없어! 라고 말합니까?  하갈은 이점에 있어서 우리의

모본입니다.

그가 당하는 모진 외로움을 하나님을 대면하는 감격으로 극복할 수 있었고 주인에게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제임스는 하갈이 여주인에게로 돌아간 후에 마음이 평화가 있었던 것으로 묘사한 것은 우리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대면하여 만나보고 그분의 말

씀에 순종하고 그 길을 가는 것이었으니깐요. 환경과 여건은 변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사라에게 선한 마음을 가지라고 역사하였을 것이라는 견해는 긍정적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술, 그랄에 있을 때에 하갈은 신령한 감화 아래  있었다."(본 교회주석)고 하

셨으니 우리는 그 사실을 맏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재발, 하늘나라에서는 이런 일이 없을텐데.........

다음에 계속해서 하갈 이야기를 더 말씀 드리겠습니다. 기다리세요.

화창한 5월, 행복지수 100%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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