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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과 죄 없는 자의 옷(예화및 부가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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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과 죄 없는 자의 옷
4월 16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8분

도입)
학창 시절 교복을 입으면 행동거지를 조심하고 학생답게 행동하였다. 그러나 교복을 벗고 사복을 입으면 행동에 방종하게 된다. 사복을 입고는 다방에 출입하거나, 미성년자 입장금지 극장을 드나들고 그랬다. 그런데 정말 꼴불견은 교복을 입은 채로 건들거리며 다니던 학생들이 있었다. 담배를 꼬나물고 다니면 정말 봐 줄 수 없었다. 너무 볼썽사나운 모습이다. 그런 학생들을 보면, 사람들이 그 학교를 가리켜 뭐라고 불렀는가? 똥통! 학교를 망신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안식일학교 학생이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으라는 것은 의의 옷을 입으라는 것이고, 그 옷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하신다. 다시 말씀드리면, 그리스도인으로서 공인의식(公人意識)을 가지라는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예수님의 증인이 된 것이다. 내가 잘못 살면 나 혼자 욕먹고 끝나는 게 아니다. 나 때문에 예수님도 욕을 보시고 하나님 영광 가리고, 교회를 욕먹게 하고, 동료 성도들 도매금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타락하여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로마서 13:14 “오직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말씀을 읽었다. 그는 인간이 재단한 옷을 벗고, 그리스도를 옷 입기를 간절히 사모하였다. 그때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믿고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로 옷입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입는 것”이며,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의로움에 믿음으로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은혜로 전가되어진 그리스도의 의(칭의)는 성도의 참여(성화)로 완성되어야 한다.

기억절 :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

결론: 무궁한 행복 안에서 인류의 조상을 감싸고 있었던 빛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피 흘림을 통해서 또 다른 옷으로 덮어주셨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
서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을 상징합니다.

첫째날(일)
4월 10일 태초의 나날

도입)
하나님은 지구를 참으로 아름다운 곳으로 만드실 뿐 아니라 그 지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기에 가장 이상적인 장소를 만드셨는데 그곳이 에덴동산이다(창2;8). 그러면 에덴동산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인지를 살펴보자. 원래 이 에덴이란 말은 히브리말로서 “즐거운”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동산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는 정원을 가리키고 있는데, 이것을 헬라어로는 ‘파라다이소스’(paravdeiso")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여기서 낙원을 의미하는 영어 파라다이스(paradise)가 나왔다. 그래서 이 에덴동산이란 말의 의미는 ‘기쁨의 낙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신약 성경에 보면 ‘낙원’이라는 말을 더러 볼 수 있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옆에 있는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가게 될 것”이라고 하셨으며(눅23;43), 사도 바울이 내가 세 번째 하늘에 갔다 왔다고 하면서 그곳을 바로 낙원이었다고 말했는데(고후12;1-4), 여기에 소개하고 있는 낙원은 모두 “파라다이스”(paradise)로서 창2;8절의 에덴동산에서 동산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창2;8절의 동산을 영어로는 ‘가든’(garden)이라고 하지만 헬라어로는 ‘파라다이소스’ 라고 표현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그래서 낙원이란 말은 결국 에덴동산과 같은 의미로서 기쁨의 장소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창 2:8~9).

교훈: 아담과 하와는 최상의 환경 속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렸다. 우리에게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교제의 길은 항상 열려있다.

부가적용)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의지나 선택유무와 상관없이 관계성을 갖고 살아간다. 관계성의 기원을 살펴볼 때 태초에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아담과의 관계 즉 수직적 관계로부터 시작하여 아담과 하와라는 인간관계, 수평적 관계와 나아가 부부라는 관계성과 더불어 함께하는 공동체의 기본단위인 가족관계가 형성이 되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관계가 유지되고 성숙, 발전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위해 필수적으로 동반 되어져야 하는 수단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교제라 하겠다. 그러므로 관계와 교제는 나누어서는 생각할 수도 존재할 수도 없는 동반자 관계이다. 하나님의 세상을 향한 구원계획은 범죄 함으로 단절된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하여 특단의 처방을 내 놓으셨는데 그것이 바로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교제의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다. 이 길만이 유일한 교제의 근거가 되고 방편이 되는 것이다. 하늘에서 풀리면 땅에서는 자연히 풀린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수직적 관계를 먼저 회복하시면 사람(이웃)과의 수평적 관계와 더불어 알게 모르게 묶였던 관계와 문제들이 회복될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교제하시기를 기뻐하시고 또한 교제의 문을 항상 활짝 열어 놓으셨다.

부가예화)
시골에서 살던 두 사람이 런던에 올라와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이 큰 도시의 큰 교회에서 일 년을 다녔는데 아무도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없었다. 하루는 두 사람이 의견을 내고 결단하였다. 한 사람은 ‘다음 주일에도 말 걸어오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면 나는 교회를 떠나겠다.’ 그는 결국 떠났고 그의 인생은 깨어지고 파산되었다. 또 한사람은 다음 주일에도 말 걸어오는 사람이 없으면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을 찾아가서 말을 걸어보겠다고 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성도들 간의 교제가 이루어지고 교회의 사역에 참여하면서 은혜를 받게 되었다. 그가 후에 영국의 교회역사에서 청교도 사역자로, 신학자로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된 리차드 백스터 목사이다. 우리가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데 이것은 결국 하나님과 나와의 영적 교제이다. 그런데 또한 이웃과의 관계, 성도간의 관계와 교제가 있다. ‘네가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그러면 이웃을 사랑 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사랑의 계명이고 능력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영감의 교훈 •
▶ 최초의 인간
“태초에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과 본성에 완전히 조화를 이루었다. 의의 원칙이 그의 마음에 새겨져 있었다”(각 시대의 대쟁투, 467).

둘째날(월)
4월 11일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함

도입)
옷의 역사는 인간의 타락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네 가지 기만적인 유혹에 속아 선악과를 먹고 난후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그들이 벌거벗은 것을 알게 되었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창2:25)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3:23)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창3:7)
인간은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았을 때 벌거벗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사탄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먹고 눈이 밝아지면서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 알게 되었다. 이유는 죄를 범하는 순가 그들이 입혔던 하나님의 영광의 옷이 벗겨져 버린 것이다.
榮 = 火 火 + ? + 木
Glory fires (two persons cover tree (of life)
한문의 영화로울 영(榮)자는 타락전의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로부터 나오는 빛이 생명나무를 덮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 두 사람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더라고 했다 (창2:25). 로마서 3장 23절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이 말씀은 인간이 타락과 함께 하나님이 입혀 주셨던 영광의 옷이 벗겨지고 말았다. 그래서 인간은 나뭇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어야 했던 것이다.
한문에 벌거벗을 나(라)자가 세 자가 있는데, 倮, 裸, 躶이다. 모두다 사람이 자신을 동산에 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 뒤에 숨겼다는 의미이다. 또는 동산에 있는 나무로 자신의 옷을 삼았다는 말이다.
倮 = 人(身) + 田 + 木
naked man (body) from Eden fruit tree
裸 = 衣 + 田 + 木
naked clothing from Eden fruit tree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난 후 그들이 벌거벗었음을 알게 되었을 그 순간부터 인간은 옷을 만들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벌거벗음을 가리기 위해 입었던 옷은 여러 가지 용도로 발전되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듯이, 옷은 자신의 신분, 자신의 특성을 나타내는 언어로 쓰인 지 오래되었다.
躶 = 身 + 田 + 木
to hide body is (become) tree
문자적으로 '아담과 하와가 나무가 되었다'는 말이지만, 이는 자신의 벗은 것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도망하여 나무 뒤로 피한 아담과 하와를 불러내셨다.
來 = 人 人 + 木
to come two persons from tree
올 래(來)자는 아담과 이브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벗었으므로 나무 뒤에 숨었다가 하나님께 불려 나오는 모습을 묘사한 글자이다.
일축하고, 사람들을 두 부류의 사람으로 나눈다면, 한 부류는 인간이 만든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고, 또한 부류는 하나님이 재단하신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다. 인간이 만든 옷은 자신의 벌거벗음, 곧 자신의 죄악을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가리려고 하는 위선의 껍질을 상징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친히 재단하여 아담과 하와에게 입혀주었던 옷은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인간이 만든 옷은 낡고 헤어지며 더러워진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의 의는 더러워지고 낡아지는 옷과 같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입혀주시는 의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입는 옷이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에 죄 씻음을 받은 성도들에게 입혀주는 영광의 옷인 것이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 2:25).
죄로 인하여 불결해지고 더러워지고 일그러진 세계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에덴동산에 살았던 아담과 하와의 도덕적 조건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들은 고통, 고생, 속임수, 배신, 죽음, 손실 그리고 수치, 특히 죄로 인해 세상에 편만해진 성(性)적 수치를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창 2:20~25을 읽어보라. 어떤 종류의 가깝고도 친밀한 관계가 나타나 있는가? “한 몸”(창 2:24)으로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뿐 아니라 서로에게도 가까웠다. 본문은 그들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았다고 분명하게 가르친다(25절). 이 얼마나 순수하고 순결한 모습인가!
“이 무구(無垢)한 부부는 아무런 인조 의복을 입지 않았으며 그들은 천사들처럼 빛과 영광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이 빛의 두루마기가 계속 그들을 둘렀다”(부조와 선지자, 45).
이 빛의 두루마기가 정확히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기능 했으며 그것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비록 그들이 이 빛의 두루마기를 입었을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벌거벗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부끄러워 아니하였다는 것은 빛의 두루마기가 그들의 벌거벗음을 완전히 숨겨주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무죄한 환경에서는 벌거벗음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부끄러움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벌거벗음에 대한 강조는 무구(無垢)한 부부가 영유했던 일종의 신체적 친밀함을 보여주려는 듯하다. 그들은 하나님과 그들 서로를 향하여 완전한 진실과 자유와 열린 마음으로 살았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가 목적하는 바였으니 얼마나 좋았겠는가!

교훈: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바대로 가장 순수하고 행복하게 살았다.

부가적용)
원래 하나님이 사람에게 지정하여 주신 에덴동산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세계이다. 선악을 아는 지식의 열매를 먹은 사람은 더 이상 여기서 살 수 없었다. 먹은 즉시 나타난 현상은 벗은 자기가 부끄럽다는 것을 인식한 것이었다. 그래서 부끄러움을 숨기려고 옷을 만들어 입기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아주 먼 옛날 신화 같은 역사가 아니고 지금 사람들의 모습이다. 존재자체로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래서 끊임없이 쉴 새 없이 자기 존재를 감추고 자기를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해서 옷을 입는다. 돈이 옷인 사람이 있고, 명예가 옷인 사람이 있고, 훌륭한 자식이 자기의 옷인 사람이 있고, 고급 아파트가 자기 옷인 사람, 박사학위, 의사, 변호사 같은 알아주는 타이틀이 자기의 옷이요, 이름인줄 알고 있다. 자기보다 좋은 옷을 입은 사람을 만나면 열등감에 시달리다가도 자기보다 못한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우쭐댄다. 자기가 걸친 옷을 보고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주기를 기대한다. 그 옷을 위해 평생을 허비한다. 상대방을 볼 때도 그 존재를 보기보다 걸쳐진 옷을 본다. 옷을 보면서 위대한 인생이라고 찬양하기도 하고, 비참한 인생이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옷으로 상대방을 보고 옷으로 자기가 평가받기를 바라는 만큼 인생이 피곤하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옷도 시간이 지나면 헤어지고 낡아지는 법이다. 자랑하던 돈도 사라질 때가 오고, 고생고생해서 마련했던 명예와 학식과 영광의 옷도 빛이 바라고 더 좋은 옷을 입은 사람 앞에 무릎 꿇을 때가 온다. 대통령이 옷인 사람도 쓸쓸히 퇴장하고, 대기업회장이 자기 옷 인줄 알던 사람도 결국은 존재자체만 가지고 흙으로 돌아가고 만다. 이것이 바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사람의 실제적인 모습이다.

•영감의 교훈 •
▶ 하나님으로 옷 입음
“순결한 아름다움을 입고서 아담과 하와는 에덴의 광경과 소리들을 좋아하였다. 그리고 오늘날 비록 죄가 지면에 그림자를 드리웠지만 하나님은 그 자녀들이 당신의 솜씨를 보고서 기쁨을 얻기를 바라신다”(증언보감 3권, 112).

셋째날(화)
4월 12일 시험

도입)
창 2:9b절에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고 하였다.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를 왜 동산 "중앙 복판에 두셨는가? 그것은 두 나무가 동산의 중심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무엇인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문자 그대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언약의 법을  묘사한다. 따라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오늘날의 용어로 옮기면 법을 의미한다. 조물주와 피조물이 존재하는 곳에는 필연적으로 질서 곧 법이 존재하게 된다. 하나님 자신이 사랑과 공의다. 선악과를 범하여 사망이 온다고 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언약의 법이 없어야 한다면 사람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강물에 익사할 수 있기 때문에 물이 없어져야 한다면 사람 또한 없어져야 한다. 사람이 강물에 익사하는 것은 사람의 부주의에서 오는 것이다. 성경은 선과 악을 구별하고 깨닫게 하는 것이 율법이라고 증거 한다. <롬7: 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ㄱ)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출 20:17, 신 5:21> <롬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생명과와 선악과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나타내는 하나님의 율법임을 알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6~17).

나무가 선과 악을 동시에 알려준다는 사실이 참으로 흥미롭다. 하나님께서 분명 아담과 하와가 선을 알지 못하도록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아담과 하와를 포함하여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은 “심히 좋았”다. 하나님께서 막으시려고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악에 대한 지식이었다.
타락한 이 세상에서도 부모들이 그들의 자녀들을 악한 지식으로부터 보호하려고 하지 않는가? 하물며 하나님께서 빛의 옷을 잃고 수치와 고통과 사망을 겪게 할 악의 지식으로부터 아담과 하와를 지키고자 하지 않으셨겠는가?

교훈: 아담과 하와는 그들에게 주어진 자유를 가지고 순종의 시험을 치러야 했다. 하나님은 그들이 악에 대한 지식을 모르기 바라셨다.

부가적용)
에덴동산에서의 삶은 풍요로웠지만 진정한 감사와 기쁨, 행복과 사랑을 느끼는 삶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상대성을 모른다면 그 참된 가치를 올바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 번도 가난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물질이 없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모른다. 따라서 자신이 부유하게 산다는 것에 대해 중심에서 감사하게 생각하지 않으며 기뻐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또 아파 보지 않은 사람은 질병의 고통을 뼈저리게 느껴 보지 못했으므로 건강의 중요성을 잘 모르며 상대적으로 건강한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처럼 에덴동산에 살면서 눈물, 슬픔, 고통, 불행을 한 번도 겪어 보지 않았던 아담과 하와는 그것이 행복인지를 알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참된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주고받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어도 죽음의 고통을 알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아무것도 모른 채 에덴동산에서 무의미하게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에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시고 육의 세계를 경험케 하셨다. 곧 이 땅에서 온갖 희로애락을 맛보고 사망을 알게 되니 아담과 그 후손들은 눈물, 슬픔, 고통, 질병, 사망이 없는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게 되고, 이러한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진정으로 감사하는 참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영감의 교훈 •
▶ 율법의 신성성
“하나님의 율법은 그분 자신만큼 신성하다. 이것은 그분의 뜻의 계시요, 그분의 품성의 사본이며,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의 표현이다. 생물이나 무생물을 막론하고 모든 것 곧 천지 만물의 조화는 창조주의 율법에 완전히 순응하는 데 달려있다”(부조와 선지자, 52).

넷째날(수)
4월 13일 새롭게 시도하는 옷

도입)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주님은 십자가를 지셨고 왕으로써 받지 못할 온갖 비방과 침밷음과 온갖 조롱을 받으셨다. 심지어 강도에게까지도 조롱을 받으셨다. 그리스도는 죄인의 모양을 입는데 까지 자신을 비워 낮추셨건만 종국에는 십자가 위에서 벌거벗기심을 당하시는 참담한  부끄러운 수치를 받으셨다. <요 19:23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24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그리스도께서 당하시는 조롱과  참담한 수치에 대해 시편에서는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사람의 모양이 아닌 벌레와 같은 취급을 받으셨다. 그러나 주님은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참으셨다. 왜 그리 하셨는가? 그리스도는 벌거벗은 우리들의 부끄러운 죄와 허물을 덮어주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의의 옷을 입혀주시기 위해 당신이 벗기시는 부끄러움을 참으셨다. 사람에게도 가장 큰 모욕과 수치는 옷을 벗기는 것이다. 첫 사람들은 범죄 하므로 아담과 하와를 덮고 있던  빛이 사라졌다, 그들은 자신들의 벗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벗은 몸을 가리우고 동산 숲에 몸을 숨겼다. 그러나 무화과나무 잎으로는 가릴 수 없다. 옷을 입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 마지막 아담이신 주님은 우리에게 의에 옷을 입혀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기위해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온갖 조롱과 함께 마지막으로 옷을 벗기시는 부끄러움과 십자가의 죽으심 맛보셨다. <히2: 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은 느낌은 바로 죽음의 그림자가 그들을 덮었다는 의미이다. 주님의 벗기신 모습은 실제로 우리들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주님이 부끄럽게 벗기우심으로 우리를 부끄럽지 않게 옷을 입혀 주셨다. 주님이 부끄러움을 당하시므로 우리를 부끄러움 당하지 않게 하시고 비천한 우리를 우주 만물과 천만 천사들과 아버지 앞에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셨다. “할렐루야!! <히2: 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롬9: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33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주님의 당하신 수치와 죽으심이 진정한 자기를 부인한 죽음이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창 3:7).

우리 모두 알고 있듯이 아담과 하와는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 결과가 비극적이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역사상 가장 절제된 표현이 될 것이다. ‘비극적’이란 말은 우리 조상의 불순종이 초래한 참담한 결과를 담기에는 부족하다.
창 3:6~11을 읽어보라. 타락 후 아담과 하와에게 처음으로 일어난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그들의 죄악의 결과가 어떠함을 암시하는가? 사단이 그들에게 말한 것과 같이 아담과 하와의 눈은 밝아졌다. 그래서 그들은 이전과 다르게 세상과 사물을 보게 되었다. 본문에서 그들의 벌거벗음이 또다시 언급되었다. 이것이 본문을 지배하는 주제이다. 순진무구함으로부터의 타락, 범죄 그리고 하나님과 서로를 향한 새로운 관계. 이 모든 것들이 벌거벗음을 알게 되었다는 말 속에 표현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셨던 질문을 주목하라.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창 3:11). 이는 그들이 범죄 이전에 벌거벗었음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벌거벗음은 자연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벌거벗었음에 대하여 신경을 쓸 뿐 아니라 벌거벗음이 가지고 온 수치에 억눌렸다.
수풀 뒤에 웅크려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며 하나님을 피해 숨으려는 아담과 하와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아마도 그들의 수치를 가리기에는 무화과 잎이 최고였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행위로 얻는 구원에 대하여 첫 번째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행위와 수고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했다. 그 당시 그들의 노력이 가련하기 그지없었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들보다 더욱 가련한 처지에 있다.

교훈: 시험을 극복하지 못한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노력으로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려고 노력했지만 그것은 헛수고였다.

부가적용)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창 3:7) 아담과 하와는 죄로 인한 수치감을 가리기 위해 무화과 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인간은 영원히 수치감을 느끼면서는 살 수가 없다. 무엇으로라도 수치를 가려야만 그나마 얼굴을 들고 살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꾸미기를 좋아한다. 백발이 수치가 아니건만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은 검은 색으로 염색을 한다. 외모가 부끄러운 사람들은 화장을 하고, 기능성 속옷을 입으며, 굽이 높은 신발을 싣는다. 속이 빈 사람들이 겉으로 더욱 요란을 떠는 것은 자기의 수치를 가리고 싶어서인 것이다. 수치를 가리려는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내면의 수치스러운 인격을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법으로, 예절로, 교양으로, 도덕으로 무장을 한다. 그래서 얼핏 보면 참 신사답고, 인격자 같고, 교양인 같고, 지성인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그 내면은 여전히 더럽고 추하고 악한 것이다. 다만 겉으로만 그렇게 꾸미는 것뿐이다. 무화과 잎 옷은 시간이 가면 마르고 부서져 버려서 입으나 마나가 되어 버린다. 그러면 또 다시 만들어 입어야 한다. 매일 매일 새로 만들어 입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안 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죄와 수치의 문제를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가지고 있지 아니한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는 것은 종교 역시 마찬가지이다. 종교는 인간의 내면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를 못한다. 종교란 인간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도록 자신을 꾸미는 노고와 수고에 불과하다. 종교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스런 인간 사이를 중보해줄 제사장, 혹은 제관이 필요하다. 그리고 죄를 용서받기 위한 제물이 필요하다. 또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한 무거운 계율적 생활이 필요하다. 이러한 일들은 수고와 노력만 따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않는다.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으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영원히 수립해 주지를 못한다.

•영감의 교훈 •
▶ 죄의 결과
“범죄한 후 아담은 처음엔 자기가 일층 더 높은 생존 상태에 들어가고 있다고 상상하였다. 그러나 곧 그의 죄에 대한 생각이 그를 공포심으로 채웠다. 지금까지 온화하고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던 공기가 이 범죄한 부부에게 갑자기 차갑게 느껴졌다. 그들이 누려 왔던 사랑과 평화는 사라지고, 그 대신 그들은 죄에 대한 의식, 장래에 대한 공포, 영혼의 벌거벗음을 느꼈다. 그들의 몸을 두르고 있었던 빛의 두루마기는 이제 사라져 버렸다”(부조와 선지자, 57).

다섯째날(목)
4월 14일 가죽 옷

도입)
의상치료(衣裳治療 Fashion Therapy)라는 말이 있다. 요즘 다양한 치료 방법이 등장하고 있다. 음악치료, 미술치료, 독서치료, 심지어 놀이치료까지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의상치료이다. 의복을 통해 정신 질환을 치료하거나 혹은 성격을 개조하는 보조적 치료방법이다. 간단한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지독한 개구쟁이 아이가 있다. 그 아이에게 아주 좋은 신사복을 사 입히는 것이다. 그러면 행동이 조신해지고 성격도 온순해진다고 한다. 한 마디로 사람이 옷에 맞춰져 변화되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죄로 인해 부끄러움을 알게 된 곳을 가리기 위하여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최초의 언약과 함께,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서 입히셨다(창세기 3:7, 3:21). 이 무화과 나무치마(사람이 자기 노력으로 자신의 근본적 죄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 하는 것)에서 가죽옷(하나님께서 주신 구속의 방법)으로의 전환은 구속의 중요한 상징이 된다. 즉, 구원(죄를 가리는 것)이 인간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의 언약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인간의 죄를 가리기 위해서 죄 없는 누군가가(여기서는 짐승이) 피를 흘리고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구약전체를 흐르는 그 놀라운 구속언약의 파노라마가 시작되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21).

교훈: 하나님은 처음부터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의 희생과 하나님의 은혜 밖에 없음을 보여주셨다.

부가적용)
아프리카 등지에는 무서운 황열병이 있다. 그래서 아프리카 국가에 입국하려면 황열병 예방주사를 맞고 증명서를 지참해야 된다. 그 백신이 만들어진 유래가 있다. 1927년 서부 아프리카 ‘아시비’라는 토인이 황열병 병균 접종을 받았고 그 피에서 백신을 얻어냈다. 그 한 사람의 희생의 피가 많은 사람들을 살린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의 피는 이보다 더 귀하고 귀한 것이다. 이런 대속의 복음을 믿는 자는 죄 씻음을 받는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가죽옷을 입은 것처럼 예수님의 피로 깨끗해진 흰옷을 입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계7:9 보면, 하나님 보좌 앞의 광경이 나온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보좌 앞의 영광스런 모습이다. 흰옷(의인이 되었음 의미) 입고 종려나무가지(승리의 상징)를 흔드는 성도들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무화과 나뭇잎 옷 대신, 전혀 새로운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21) 가죽 옷은 짐승이 죽어야만 만들 수 있다. 다시 말해 짐승이 피를 흘림으로써 만들어진 옷이다. 이것은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했음을 암시한다. "피 흘림이 없은 즉 죄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옷은 인간이 스스로 수고하여 만든 옷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손수 만드신 옷이라는 것이다.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을 내게 더 하심이..."(사 61:10) 이 옷은 말할 것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옷이 되신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를 입은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처럼 죄 없는 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수치도 부끄러움도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죽 옷은 나뭇잎 옷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러한 옷을 입은 자는 더 이상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고, 죄인으로 드러날까 봐 걱정할 필요도 없다. 그리스도는 이런 신비한 옷이 되어 주신다.

•영감의 교훈 •
▶ 그리스도가 필요함
“우리는 생애의 순결과 성결을 추구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마침내 영광의 왕국에서 하늘의 분위기에 적합하게 되고자 한다. 이러한 그리스도인 품성의 높은 경지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는 길뿐이다. 인류를 고양시킬 다른 길은 없다”(교회증언 2권, 588).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저는 하나님 아들의 가죽을 둘러쓰고 있는 염치없는 죄인입니다. 예수님은 죽고, 저는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겁니까? 이 숭고함과 순결함 아래 저를 굴복시킵니다.

예비일(금)
4월 15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부조와 선지자, 44~70 “창조”, “유혹과 타락” 그리고 “구속의 경륜.”

“순결한 흰 두루마기는 본래 우리의 시조(始祖)가 거룩한 에덴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입혀 주셨던 것이다. …사람들은 저희가 잃어버린 순결한 두루마기를 대신할 그 어떤 것도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준비하신 옷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서게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옷 곧 그리스도의 의의 두루마기를 회개하고 믿는 모든 자에게 입혀 주실 것이다. …하늘 베틀에서 짠 이 두루마기에는 사람이 만든 실은 한 올도 섞이지 않았다. 인간으로 나타나신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품성을 나타내셨고 이 품성을 우리에게 나눠 주신다”(엘렌 G. 화잇, 마라나타, 78).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옷 곧 그분의 의의 옷을 준비하셨는데, 그분께서는 그것을 회개하고 믿음으로 그것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 모든 자에게 입혀주실 것이다. …주님께서 믿는 죄인들을 바라보실 때에 그분은 그들을 가리고 있는 무화과 잎이 아니라 그분 자신의 의의 두루마기를 보신다”(엘렌 G. 화잇 언급, 리뷰 앤드 헤럴드, 1898. 11. 15.).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창 3:6을 읽으십시오. 사탄이 하와를 타락시킬 수 있었던 방법은 무엇이었습니까? 오늘날도 사탄은 이 방법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습니까?
➋에덴동산 이야기에서 벌거벗음이라는 중심 주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봅시다. 이 주제로부터 우리는 다른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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