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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과 실상은 보이는 것과 다름(교사들을 위한 강해와 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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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과 실상은 보이는 것과 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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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7일 안식일

일몰:오후 6시 2분

 

기억절 :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4:12).

 

도입)

한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서며 그 선택에 의해서 그 사람의 인생이 좌우됩니다. 어릴 때는 부모의 영향에 의하여 자신의 길을 정하지만 어느 정도 성장해서는 스스로가 선택해서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가령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어느 대학으로 갈 것인가, 혹은 군대를 먼저 갔다 오고 사회생활을 할 것인가 등의 여러 가지 선택의 귀로에 놓이는 것입니다. 또 결혼 적령기를 앞둔 사람은 이 사람이 자신의 배우자로서 맞는지를 신중하게 판단해야 하는 길에 서게 됩니다. 한 번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하게 되는 중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원하지 않는 결혼을 했다가 후회하면서 살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처음에는 좋아했으나 나중에 자신이 잘못 판단했음을 후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많은 상처를 남겨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길이 옳다고 판단했지만 나중에 잘못된 경우가 허다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내일을 알지 못하는 인간의 유한성 때문입니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지만 사망의 길인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일은 세상 관습이나 인간의 지식으로 볼 때에 매우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결국 사람들을 사망으로 이끄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의 보기에"라는 말은 세상적인 기준이나, 인간의 눈으로 판단하는 것을 말합니다(롬 1:28; 딤전 4:2). 다시 말해서 이 말은 절대적인 판단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자의적으로 판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일은 세상의 관습이나 인간의 기준으로 볼 때에 매우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보면 옳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신의 판단과 경험에만 의지하다가 실수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말씀을 무시하고 인간적인 경험에만 의존하면, 큰 실수를 하게 되어 크게 후회할 수가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탁월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혜는 매우 탁월하며 우수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창조자가 아니라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 뜻대로 살면 여러 가지 실수와 허점을 나타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나치게 자신을 과신하지 말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하며, 온전한 지혜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연구 범위 : 잠 14장, 단 7:25, 막 12:30~31, 잠 15:3, 사 5:20, 잠 15장, 마 20:26~28.

 

바울의 말처럼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고전 13:12)다. 우리는 거의 실상을 보지 못한다. 우리가 보는 것은 항상 생각에서 여과되어 들어온다. 우리의 눈과 귀, 우리의 모든 감각 기관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에 대하여 아주 좁은 관점만을 제공한다.

또한 우리는 외부 세계뿐 아니라 우리 자아에 대해서도 속을 수 있다. 우리의 꿈, 관점, 견해는 실제와는 상당히 왜곡된 자아의 모습일 뿐 아니라 최악에 해당하는 여러 종류의 속임수까지 왜곡된 의미로 제시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기만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잠언은 이 문제에 관하여 근본적인 조언을 제공한다. 우리는 어리석은 자들처럼 자신을 신뢰해서는 안 된다. 대신 우리는 세상의 모든 일이 엉뚱하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사건의 진행을 통제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요컨대 우리의 시력은 대단히 부정확해서 실재의 일부분만 보여주며 심지어 그 작은 것마저 왜곡시켜서 우리에게 보여준다.

 

*교과 토의 시간은 믿음과 생각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안교 활동반과 교과 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기만에 빠지지 않으려면 제한적인 시각을 가진 인간에게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함을 깨닫는다.

➋ 느끼기 : 자신의 지혜를 불신하고 하나님의 지혜 안에서 안전함을 느낀다.

➌ 행하기 : 넓고 정확한 하나님의 관점에서 배우고 그 빛 가운데 살기로 결심한다.

 

Part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나의 계획에서는 벗어났지만 하나님이 인도하셨다고 느꼈던 경험을 이야기해 봅시다.

❷ 지나친 자기확신의 태도는 어떤 면에서 위험한 것입니까?

❸ 지혜로운 자들은 어떤 마음과 태도로 미래를 계획합니까?

❹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우리가 맡겨야 할 일들은 무엇일까요?

 

B. ❶ 부모가 지켜볼 때 자녀들이 힘을 내는 경우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❷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살피신다는 사실은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줍니까?

❸ 그리스도인들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기뻐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❹ 하나님의 통치와 인도하심을 따라 우리가 전념해야 할 일들은 무엇일까요?

 

결론 : 전지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안전하게 인도하시기 위해 그분의 넓고 정확한 관점을 나눠주십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지난주 분반의 경험을 함께 토론합니다.

❷ 정식으로 분반을 시작할 날(12월 초)을 정하고, 교사(리더)와 반장(예비리더)을 확정합니다.

❸ 분반 계획과 새로운 교사(리더)와 반장(예비리더)을 위해 기도합니다.

 

첫째날(일) 2월 1일 미련한 자의 확신

 

“…어리석은 자는 방자하여 스스로 믿느니라”(잠 14:16).

 

교사강해 1)

성경에서 말하는 어리석은 자로서 방자한 자 중의 한 사람이 사라의 몸종 하갈입니다. 하갈과 같은 경우 한 낱 몸종에 지나지 않았던 그가 주인 아브라함의 아이를 잉태함으로 인해 스스로 마음이 높아져 나중에는 여주인 사라를 멸시하기까지 합니다. 종의 신분으로서 은혜를 입은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겸손해야 할 터인데 오히려 교만해지니 결국 아들과 함께 내쫓기고 말았던 것입니다. 주인의 씨를 잉태한 그 자체가 복임을 알아 자신의 위치를 지켜서 행동했다면 날이 갈수록 복을 받아 누렸을 것인데 자신의 본분을 잊고 아이를 내세워 행세하려 하니 있던 복까지 잃고 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어리석은 자는 방자하여 스스로 믿는 경우가 아닐까요? 또한 엘리사를 수종들던 게하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엘리사가 이웃나라 군대장관 나아만의 문둥병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료해 준 적이 있습니다. 너무 감격한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에게 온갖 좋은 것으로 선물하고자 했으나 엘리사는 거절하며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게하시는 그만 물질에 눈이 어두워 나아만 장군의 뒤를 쫓아가서 주인의 심부름인 양 속이고 선물을 받아 와 은밀히 감추었습니다. 더구나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엘리사에게조차 거짓말을 하므로 엘리사가 게하시를 저주하니 그에게 문둥병이 발하게 되었고, 그 후손에게까지 저주가 미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방자히 행한 죄는 이렇게 자신의 삶에 문제를 야기 시키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사람들이나 믿고자 하는 사람들은 결코 이런 악을 행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아도 큰 인물이 있으면 그들 수하의 사람들 간에 ‘내 상전이 높으냐, 네 상전이 높으냐’ 하면서 싸움을 일으키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런 아랫사람을 둔 상전은 그 마음에 얼마나 고통이 되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근저에는 자신을 믿는 이기주의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방자하여 스스로 믿느니라"(잠14:16).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어리석은 사람의 방자함은 좋지 못한 뿌리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욱 심각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방자하고 교만한 모습은 단순히 이기주의에 머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방자하고 교만한 모습은 마귀로 하여금 우리 안으로 들어오게 초청하는 역할을 합니다.

 

잠언 14장을 읽어 보라. 미련한 자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가?

미련한 자는 교만하게 말한다(잠 14:3). 첫 인상부터 그의 교만한 언사가 눈에 띈다. 입술과 관련되어 있는 ‘막대’는 나중에 받을 벌을 암시한다. 그의 교만한 언어가 입술에 매를 초래했다. 이는 지혜로운 자의 입술이 보존되는 것과 대조적인 결과이다(단 7:8 참고).

미련한 자는 지혜를 조롱한다(잠 14:6~9). 미련한 자는 지혜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지혜를 믿지 않고 그것에 대해 회의적이다. 그는 지혜를 찾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없는 지혜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장 끔찍한 것은 범법에 대한 그의 태도이다. 죄의 개념을 조롱하는 것보다 더 치명적인 위험이 어디 있겠는가?

미련한 자는 귀가 얇다(잠 14:15). 역설적이게도 미련한 자는 지혜의 가치를 믿는 이상주의자들에 대해서는 조롱하면서 자신이 들은 것에 대해서는 비평적으로 사고할 능력을 상실한 채 그저 “온갖 말”을 믿는다. 이런 모순적 상황이 세속적인 사회의 맹점이다. 비관적인 사람은 신앙을 어린이나 노인들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하나님을 비웃고 신앙을 조롱하면서도 정작 ‘순전히 우연한 지구 생명 탄생’과 같은 가장 어리석은 주장들을 신봉한다.

미련한 자는 충동적이다(잠 14:16, 29). 그들은 자신 안에 진리가 있다고 믿기 때문에 시간을 들여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대개 충동에 이끌려 즉각적으로 반응하다.

미련한 자는 다른 사람을 억압한다(잠 14:21, 31). 압제와 무관용의 기제(機制: mechanism)는 미련한 자의 심리학에서 비롯된다. 그는 다른 사람에 대해 관용하지 않으며 그들을 경시한다(단 7:25, 8:11~12 참고).

 

교훈 : 미련한 자는 자신이 지혜롭다고 생각하여 교만하게 말하며 진정한 지혜는 조롱하는 반면, 세상의 헛된 사상을 신봉하며 다른 사람을 경멸한다.

 

부가적용)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신을 과신하다가 큰 낭패를 경험합니다. 개역성경에는 "스스로"라는 말이 있지만 원래 성경에는 이 말이 없습니다. 또 본문에서 '방자하다'고 번역된 말(보테아흐)은 '확신하다', '자만하다', 조심성이 없다'는 뜻을 가진 말이며, '믿는다'고 번역된 말(미트아베르)은 '지나친다', '건너간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자신의 판단과 행동을 확신합니다. 그는 자만하며 신중히 행동하지 못하기 때문에 때때로 큰 실수를 경험합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사단은 간사하고 치밀하고 강합니다. 그러므로 지혜자는 죄에 대해 두려움과 신중한 태도를 보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자신을 과신하고 자만하며 조심하지 않기 때문에 죄의 유혹에 쉽게 넘어갑니다. 그는 자신이 얼마든지 죄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는 간교한 사단의 유혹을 극복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사단의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날마다 깨어 기도하며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죄의 미혹에 빠져서 큰 실수를 하게 되고, 이로 인해 크게 후회를 하게 됩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자신에 대하여 얼마나 확신합니까?

세상에서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특징으로 ‘자기확신’을 꼽습니다. 자신에 대하여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성공에 대한 확신을 갖는다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뛰어난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상대주의적인 문화 속에서만 통하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절대적인 가치와 진리에서 벗어난 자기확신은 실패와 멸망을 자초할 뿐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믿으라.’는 세속적인 충고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불신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권면을 받습니다.

 

| 적용 |

‘자기확신’의 태도에서 얻은 실패의 경험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영감의 교훈

미련한 자 - “솔로몬은 말한다.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경건을 부르짖는 사람 중에 이런 자들이 수백 명이나 있다. 사도는 말한다.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다.’ 세상의 오락에서 행복을 추구하며,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미명하에 공언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세상과 연합시키려 하는 사탄의 공작은 얼마나 교묘하고, 기술적이며 간교한가! 그리하여 주의하지 않는 자들은 그 길에 아무 나쁠 것이 없다고 자만하면서 그물 속으로 바로 들어간다”(교회증언 2권, 143).

 

기도

아버지, 성공인 줄 알았던 과거의 삶은 사실 실패였습니다. 오히려 겸손하게 아버지의 능력의 손에 붙들렸을 때가 제게 가장 성공적인 시기였습니다. 어리석고 무지한 자기확신의 태도를 버리고 다시 그때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둘째날(월) 2월 2일 지혜로운 자의 두려움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잠 14:21).

 

교사강해 2)

여기에 언급된 "이웃"은 우리 주변에 사는 사람들 뿐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모든 사람들을 말합니다(약 3:9). 그러므로 예수님은 유대인과 적대 관계에 있던 사마리아 사람도 유대인과 이웃 관계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0:29-37). 우리의 이웃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고귀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업신여기는 일은 범죄입니다. 우리는 흔히 학벌, 신분, 재물, 또는 인종에 따라 사람들을 차별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서 동등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대할 때에 재물이나 신분, 또는 학벌이나 인종에 따라 차별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중한 존재로 간주하십니다. 예수님도 자신의 목숨을 버리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과 함께 이웃을 귀중히 여기고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중국 속담에 유교무류(有敎無類)란 말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이끌어 가르쳐 줄 뿐, 가르치는 상대에게 차별을 두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아 빈부와 귀천에 관계없이 동등한 인격체이며 하나님께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세상풍조와 인심에 휩쓸려 힘 있고 돈 많은 사람을 우대하고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기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최근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에게 하루 일당 5억원의 황제노역 판결을 내린 지방법원판사의 판결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예수님은 과부 어린아이 남녀노소 가난한 자 부자를 차별하지 않고 똑같이 사랑으로 대했습니다. 세상풍조가 아무리 돈과 권력을 쫒는다 해도 목회자와 성도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웃을 돌보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복 받는 길임을 다시 한 번 되새겨야 할 때입니다.

 

잠언 14장을 다시 읽어 보라. 지혜로운 자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가?

지혜로운 자는 겸손하게 말한다(잠 14:3). 지혜로운 자는 입술의 사용을 자제한다. 그들이 조용히 자신을 성찰하는 이유는 자기확신의 거만함이 없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자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고려한다. 그래서 그들은 시간을 들여 증거를 검토하고 살핀다. 그들은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배울 준비가 되어 있고 기꺼이 경청하고자 하기 때문에 침묵한다.

지혜로운 자는 배움과 지식을 가치 있게 여긴다(잠 14:6, 18). 미련한 자는 배우기를 어려워한다. 왜냐하면 스승의 발아래 앉아 있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반면 지혜로운 자는 겸손하기 때문에 배우기가 쉽다. 그래서 그들은 배움과 성장의 경험을 즐긴다. 그들을 지혜롭게 하는 것은 그들에게 없는 지식과 지혜에 대한 이 같은 탐구심이다.

지혜로운 자는 행동을 삼간다(잠 14:15). 그들은 죄악의 존재를 알고 있다. 그래서 발걸음에 주의한다. 그들은 자신의 감정이나 개인적 견해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든 일을 확인하고 조언을 구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한 말에 대해 항상 주의한다. 그들은 좋은 말과 나쁜 말을 구분한다(살전 5:21).

지혜로운 자는 고요하다(잠 14:29, 33). 그들은 자기의 방식을 신뢰하기보다 하늘의 방식을 의지하기 때문에 조용히 머문다(잠 14:14). 그들로 하여금 침착하게 자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다(사 30:15). 그들에게 확신을 주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다(잠 14:26).

 

교훈 :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에게 없는 지식과 지혜를 추구하며 자신의 생각보다는 하늘의 조언에 의지하고 다른 사람들을 소중하게 대한다.

 

부가적용)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신을 과신하다가 큰 낭패를 경험합니다. 개역성경에는 "스스로"라는 말이 있지만 원래 성경에는 이 말이 없습니다. 또 본문에서 '방자하다'고 번역된 말(보테아흐)은 '확신하다', '자만하다', 조심성이 없다'는 뜻을 가진 말이며, '믿는다'고 번역된 말(미트아베르)은 '지나친다', '건너간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자신의 판단과 행동을 확신합니다. 그는 자만하며 신중히 행동하지 못하기 때문에 때때로 큰 실수를 경험합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사단은 간사하고 치밀하고 강합니다. 그러므로 지혜자는 죄에 대해 두려움과 신중한 태도를 보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자신을 과신하고 자만하며 조심하지 않기 때문에 죄의 유혹에 쉽게 넘어갑니다. 그는 자신이 얼마든지 죄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는 간교한 사단의 유혹을 극복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사단의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날마다 깨어 기도하며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죄의 미혹에 빠져서 큰 실수를 하게 되고, 이로 인해 크게 후회를 하게 됩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지혜로운 자의 이러한 신중함은 ‘자신감 결여’와는 어떤 차이점이 있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지혜로운 자는 동정심이 깊고 세심하다(잠 14:21, 31).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막 12:30~31). 우리는 다른 사람을 홀대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가장 훌륭한 신앙의 예는 다른 사람들 특히 궁핍한 자들을 대접하는 방식에 있다.

 

| 적용 |

지혜로운 자의 태도에서 그대가 특별히 배워야 할 태도는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하나님께 의존된 인간의 지혜 - “인간은 지혜로운 자가 되기에 앞서 하나님께 대한 저들 자신의 의존성을 인식해야 하며 그분의 지혜로 충만해져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신령한 능력의 근본이 되시는 것처럼 지적 능력의 근원도 되신다. 세상 사람들이 과학의 놀라운 절정이라고 생각하는 수준에 도달한 가장 위대한 인간들일지라도 사랑하는 요한이나 사도 바울과 비교할 수 없다”(부모와 교사와 학생에게 보내는 권면, 66).

 

기도

하나님, 그 동안 제 목소리와 주장이 너무 강했던 것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만큼 제가 자만했고 지혜롭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볼지 모르지만 이제 성령님의 지도를 따라 하나님께 여쭈며 말과 행동을 삼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셋째날(화) 2월 3일 여호와의 눈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잠 15:3).

 

교사강해 3)

여기에서 '감찰한다'고 번역된 말(초포트)은 '주의 깊게 살핀다', '자세히 관찰한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며(편재성), 또 모든 것을 아십니다(전지성). 하나님은 아니 계신 곳이 없으며, 또한 모르시는 것이 없습니다(대하 16:9, 슥 4:10, 마 10:26,30, 히 4:13).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믿게 되면 우리의 삶은 경건하고 책임 있는 삶으로 변할 것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그 어떤 악과 죄도 하나님 앞에 숨겨질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처음에 죄를 범할 때에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혹시 재앙이 임하지 않을까 하여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재앙이 즉시 임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심판이 없다고 생각하고 점 점 죄를 짓는 일에 더 담대해집니다. 그들은 죄를 거듭하면서 양심이 마비되고, 결국 죄가 주는 쾌락을 즐기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행하는 모든 불의와 죄악을 모두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기다려 주십니다. 그리고 이때에 회개하는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내 회개하지 않고 죄에 거하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적절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대는 위의 성경절에 대해 어떻게 느끼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지금부터 잠언의 두 장은 어조를 바꾼다. 이 장들은 이전의 장들보다 더욱 신학적이다. 앞선 장들보다 하나님에 대하여 더 많이 언급한다. 그리고 그분이 모든 곳을 감찰하고 계신다는 놀라운 사실을 말한다(잠 15:3).

고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이런 예민한 자각을 ‘여호와를 경외함’이라고 지칭했다. 이 같은 관련성은 시편에도 나타난다. “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시 33:18). 욥도 하나님을 땅끝까지 보며 하늘 아래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살피시는 분으로 묘사한다(욥 28:24). 이런 이유 때문에 욥은 “주를 경외함이 지혜”(욥 28:28)라고 결론을 내렸다.

잠 15장은 어느 곳에서든지 선과 악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상기시킨다. 솔로몬이 깨달았던 것처럼 참된 지혜는 선과 악을 분별하는 능력이다. 인간의 차원에서의 이런 인식은 언제나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한다. 왜냐하면 우리를 보는 사람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을 지켜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죄를 지었는데도 별 탈 없었으니 앞으로도 없으리라고 생각하도록 자신을 속인다. 그러나 그럴 리가 없다.

우리는 신실하게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히 4:13)나기 때문이다.

잠 15:3, 사 5:20, 히 5:14을 읽어 보라. 특별히 선악의 개념을 객관적인 실체가 없는 단지 상대적인 인간의 개념이라고 주장하는 시대에 이 말씀은 우리에게 어떤 핵심적인 기별을 제시하는가?

 

교훈 :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살펴보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해야 한다.

 

부가적용)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악행뿐만 아니라 선행도 하나님 앞에 숨겨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고난 중에서도 인내하면서 선행을 계속하는 사람들도 보고 계십니다. 그러나 때로 의인에게 즉시 상급과 축복이 임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인을 성숙하게 하고 더 큰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 의인에게 더 큰 어려움을 주실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의인들은 낙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어떤 어려움이 찾아 와도 하나님의 전자하심을 믿는 사람들은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이 행하는 모든 선행을 보고 계시며, 때가 되면 적절한 상급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의 전자하심을 믿는 신앙은 우리의 경건에 큰 도움이 됩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자신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을 얼마나 의식하고 삽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행위를 감찰하시지만 우리의 잘못을 찾아내기 위해 감시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사는 모습을 보시고 기뻐하시며 우리가 믿음과 멀어져서 어둠 가운데 행할 때에는 슬퍼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그분을 등지고 떠나려고 해도 우리를 바라보시는 그분의 사랑의 눈빛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시 139:7).

 

| 적용 |

우리를 사랑의 눈으로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그대가 선택하지 말아야 하는 행동은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여호와의 눈에는 숨겨지지 않음 - “그들은 위대한 하늘의 예술가께서 모든 행동과 말을 심리하시고, 그들의 태도와 생각과 마음의 의도까지 성실하게 묘사하고 계신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사람의 눈에는 그 동기가 숨겨졌을지라도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여호와의 눈에는 알려진 기만적 행위들이 모두 산 글자로 기록된다. 모든 이기적 행동이 드러난다”(교회증언 1권, 501).

 

기도

우리가 죄를 선택할 때마다 아버지는 얼마나 모욕을 당하십니까? 자비의 눈앞에서 저지르는 우리의 뻔뻔한 죄악들을 깊이 뉘우치며 회개합니다. 언제나 아버지의 의로움과 선하심을 거역하지 않는 자녀가 될 수 있도록 제 손과 발을 붙잡아 주옵소서.

 

넷째날(수) 2월 4일 여호와의 기쁨

 

“고난 받는 자는 그 날이 다 험악하나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하느니라”(잠 15:15).

 

교사강해 4)

「행복은 쓰레기통에도 있다」라고 하는 재미있는 이름의 책이 있습니다. 까뮈를 비롯한 여러 철학자들의 행복론을 원희석이라는 분이 엮어 놓은 것입니다.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강아지 한 마리가 제 꼬리를 뒤쫓아 마당에서 뱅글뱅글 돌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본 어미개가 강아지 한테 물었습니다. “애야, 너는 왜 그렇게 꼬리를 쫓고 있니?” 강아지는 대답했습니다. “사실 나는요, 세상의 그 어떤 개도 풀지 못한 우주의 온갖 문제들을 해결했어요. 그래, 우리 개한테 가장 좋은 것은 ‘행복’이라는 것을 알았지요. 더욱이 그 행복은 바로 내 꼬리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꼬리를 쫓아 돌고 있는 거에요. 내가 내 꼬리를 잡는다면 나는 틀림없이 행복해질 테니까요.” 가만히 듣고 있언 어미 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나 나름대로 우주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왔고 마침내 몇 가지 견해를 갖게 되었단다. 나 역시 개한테 가장 좋은 것은 ‘행복’이며 그것이 내 꼬리에 있다고 판단했었단다. 그러나 내가 나 자신의 일에 열중하고 있을 때에 꼬리는 자연히 나를 따라오기 때문에 일부러 그것을 뒤쫓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단다.” 여러분,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대단히 철학적인 문제이며 두고두고 생각해야 될 문제입니다. 자신의 일에 열중할 때에 가장 의미가 있고 영원한 가치를 가진 선한 일에 열중하고 있을 때에 행복은 자연히 따라 오는 것입니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나이 많은 시인이 뜻있는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결국 일에 쫓기고 한평생 고생만 하게 되는 것 같다.’ 또 그는 자신의 생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난 75년간의 내 생활 가운데 정말 즐거웠던 날은 고작 28일, 그러니까 4주밖에 되지 않았다. 자, 여러분의 생애에는 즐거운 날이 며칠이나 된다고 생각합니까? 이것을 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행복은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행복은 쟁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릇 싸워서 얻는 것이면 그것을 얻는 바로 그 순간부터 불행의 뿌리가 내리는 것입니다. 억지로 얻어지는 행복은 그대로 무너집니다. 이미 가졌던 행복마저 다 빼앗깁니다. 행복은 의의 길에서, 선한 길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길에서 자연히 얻어지는 것이요 거저 뒤 따라오는 것입니다. 행복은 부수입니다. 행복을 목적으로 추구해서 행복을 얻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잠언 15장을 읽어 보라. 기쁨이 우리에게 중요한 자산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은 우리에게 곤경 없는 삶을 약속하지 않는다. 예수님도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고 말씀하셨다. 잠 15:15은 괴로운 나날 가운데서도 즐거운 마음을 간직하는 사람은 더욱 나은 인생을 살 것이라고 설명한다. 언젠가 아픔과 고통, 불행이 찾아온다. 하지만 우리는 그 때와 방법을 조정하지 못한다. 단지 어떻게 그것에 대응할지에 대해서만 어느 정도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잠 15:13~14, 23을 읽어 보라. 이러한 기쁨 가운데 하나님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 성경절들이 기쁨의 이유를 명확하게 언급하지는 않지만 13절과 14절에 나타나는 의미상의 대구는 ‘즐거운 마음’이 곧 “명철한 자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것은 믿음을 가지고 눈앞의 시련 너머로 구원을 바라보는 이의 마음이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이며, 우리가 경험으로부터 우리 자신뿐 아니라 하나님과 그분의 사랑에 대해 아는 것이 그토록 결정적인 이유이다. 명철함이 있는 자는 어떤 시험이 오고 어떤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것들을 견딜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

잠 15:23은 우리를 또 하나의 중요한 사상으로 안내한다. 받을 때보다 줄 때 더 큰 기쁨이 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건네는 좋은 말은 말하는 사람에게 기쁨을 준다. 말이든지 행동이든지 다른 사람을 축복함으로 복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앞서 잠언 연구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의 언어에는 큰 힘이 있다. 그것은 매우 긍정적이거나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좋은 말은 듣는 사람뿐 아니라 그 말을 건넨 사람에게 훨씬 더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교훈 : 누구나 슬픔과 고통을 당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명철이 있는 자들은 그것들 너머의 구원을 바라보며 남에게 베푸는 삶을 통해 기쁨을 느낀다.

 

부가적용)

하나님을 경외하고 죄를 멀리하는 사람은 즐거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마음에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형통할 때에 교만하지 않고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미 받은 축복을 계속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함을 믿고 평안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은 형통할 때뿐 아니라 고난이 찾아와도 믿음으로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가 누리는 기쁨의 원천은 무엇입니까?

‘하루, 일주일, 한 달, 일 년을 행복하려면 어떻게 하라.’는 식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아는 기쁨이 대부분 일시적이라는 뜻입니다. 일시적인 기쁨은 반복될수록 효과가 감소하고 강도를 높일수록 무감각해집니다. 그렇다면 변치 않는 기쁨의 원천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랑에 대한 확신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에 대한 확신은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행복과 기쁨을 줍니다. 그래서 성경은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요일 3:1)고 했습니다.

 

| 적용 |

그대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며 하나님의 기쁨을 느끼기 원합니까?

 

영감의 교훈

고난 가운데 충만한 기쁨 -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모든 가파른 길에는 피곤을 회복시키는 기쁨의 샘이 있다. 지혜의 길 안에서 행하는 자들은 고난 가운데 있을지라도 기쁨이 충만하다. 이는 그들을 사랑하시는 구주께서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들 곁에 동행하시기 때문이다”(청년에게 보내는 기별, 150).

 

기도

아버지, 누구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것처럼 어떤 일을 당해도 하늘의 기쁨과 평화를 결코 놓치지 않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어두운 세상에서 축복의 통로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다섯째날(목) 2월 5일 하나님의 주권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잠 16:1).

 

교사강해 5)

어떤 사람은 이 구절을 보면서 ‘경영의 무가치’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경영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아무리 경영해도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경영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지 그 자체의 무의미를 강조한 말씀은 아닙니다. 조금 더 읽어보시면 잠 16:9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도 계획을 정죄한 날씀이 아닙니다. 계획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계획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 안에서 계획할 때 계획을 하도록 하신 하나님이 그 계획을 또한 실현시켜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으로 내 인생의 계획의 알파와 오메가가 되게 하십시오. 그 계획을 탄생시킨 주께서 그 계획을 실현하도록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꿈을 가지고 계획을 세우지만, 상황이 때로는 더 좋게, 때로는 더 나쁘게 변한다. 성경은 인간의 자유와 책임의 가치를 인정한다. 반면 모든 사건의 진행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력을 단언한다(잠 20:24, 21:31, 단 2, 7장).

잠 16:1은 무엇에 대해 말하는가?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우리는 준비하며 계획한다. 그러나 최후의 결정은 하나님의 몫이다. 이는 우리의 준비가 쓸모없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우리가 신앙생활 속에서 우리의 계획을 하나님께 맡기면 그분이 그 계획을 가지고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계획이 그분의 지도를 받게 되며(잠 16:9), 결과적으로 그분을 통해 계획이 이루어지고(잠 16:3), 심지어 원수들의 노력마저 우리를 위하여 사용된다(잠 16:4, 7).

우리가 특별히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이런 말씀을 이해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그러나 상황이 매우 심각해 보이고 우리의 계획이 기대했던 방향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라도 이런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를 주고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게 한다. 요점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복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그분의 인도하심을 확신할 수 있다.

잠 16:18~19을 읽어 보라. 야망은 인간의 성공에 어떤 역할을 하는가?

늘 그렇듯이 성경은 교만에 대해 경고한다. 타락한 존재로서 우리는 무엇에 대해 교만하게 되는가? 어떤 죄가 교만 즉 원죄보다 하나님을 더욱 거스르겠는가?(겔 28:17). 예수님은 크고자 하는 열망의 폐단에 대해 단호하게 훈계하시며 제자들에게 대신 겸손을 추구하도록 촉구하셨다(마 20:26~28).

잠 16:33을 읽어 보라. 우연은 인간의 성공에 어떤 역할을 하는가? 성경은 우연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물론 어떤 이들은 사건의 진행이 우연에 좌우된다고 생각하겠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여전히 통제하고 계심을 믿어야 한다.

 

교훈 : 모든 일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 우리는 일의 성공을 계획할지라도 그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겸손하게 그분의 지도를 따라야 한다.

 

부가적용)

먼저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난다”고 하였으니 마음의 경영 자체가 하나님과 일치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사업 아이템이나 비전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이루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우리의 아이템이나 비전은 빛을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기도드려야만 합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잠 19:21절). 우리가 계획이나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하나님과 늘 상의를 해야하고,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심을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이 맞는다면 그 일은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입니다. ”너희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잠 16:3)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행사를 맡긴다면 우리의 경영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일이 시간이 걸릴 수 있는 일이지만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심을 반드시 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성공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인생의 계획을 수립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이었던 다윗의 성공 요인은 그가 어떤 일을 계획하고 행동하기 전에 항상 주님의 뜻을 먼저 물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는 일국의 왕이었지만 하나님을 온 세상의 주관자로 인정하고 겸손하게 그분께 굴복했습니다. 엘렌 G. 화잇은 “우리는 모든 계획을 주님께 가지고 나아가 주님께서 인준해 주시는지 보아야 한다”(자서전, 447)고 말했습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 적용 |

현재 그대가 하나님의 뜻을 여쭈어야 할 계획은 무엇인가?

 

영감의 교훈

성공의 비결 - “하나님은 우리가 항상 침착하고 인내하기를 원하신다. 다른 사람들이 어떤 길을 따를지라도 우리는 우리와 유사한 환경에서 그분께서 하기를 원하시는 대로 행함으로 그리스도를 나타내야 한다. 우리 구주의 능력은 예리한 말을 줄기차게 늘어놓는 데 있지 않았다. 그분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 것은 그분의 부드러움과 그분의 무아적이고 겸손한 정신이었다. 우리의 성공의 비결도 동일한 정신을 나타내는 데 있다”(교회증언 7권, 156).

 

기도

주님, 지금까지 제 마음대로 계획하고 행동했던 과거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주님을 진실로 제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며 앞으로의 모든 계획을 주님께 의탁합니다. 제 삶이 주님의 뜻을 이루는 선한 도구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여섯째날(금) 2월 6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태초부터 사탄은 범죄하면 이익이 있다고 사람들에게 말해 왔다. 천사들도 그런 식으로 유혹했고 아담과 하와도 그 방법으로 유혹하여 범죄하게 했다. 그리고 지금도 같은 방법으로 군중들을 인도하여 하나님을 순종하는 길에서 떠나도록 하고 있다. 범죄의 길은 바람직해 보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잠 14:12)다. 대담하게 이 길에 들어섰다가 죄의 결과가 얼마나 쓰라린 것임을 알고, 일찍 거기를 떠나는 자들은 행복한 자들이다”(부조와 선지자, 720).

 

“감사와 찬양의 정신보다 몸과 마음의 건강을 더욱 증진시켜 주는 것은 없다. 우울하고 불만스런 사상과 감정을 물리치는 것은 기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의무이다. 만일 우리가 하늘과 연결되어 있다면 슬퍼하는 사람들의 대열에 끼어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동안 내내 탄식하고 불평하면서 걸어갈 수 있을까? 끊임없이 불평하는 한편, 즐거움과 행복을 죄처럼 생각하는 자칭 그리스도인들은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치료봉사, 251).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실재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매우 제한되어 있다는 개념에 대해 토의해 보십시오. 이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실재한다는 사실을 알지만 우리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 휴대 전화, 위성 프로그램, 라디오 프로그램 등 지금 우리 주위에 떠 다니고 있지만 우리가 보지도 듣지도 도무지 느끼지도 못하는 전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것들의 존재는 인간의 감각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됩니까? 이런 이해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들 예를 들면 천사와 같은 존재를 인정하는데 얼마나 도움이 됩니까?

 

➋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통치하실지라도 인간의 자유의지와 선택의 자유를 이해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경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선택의 자유와 하나님의 주권을 모두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둘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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