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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과 보통사람들을 제자로 양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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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8일 안식일

일몰:오후 6시 3분

 

기억절 :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막1:16 ~18 ).

 

도입)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사람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받는 경영자였다. 그런데 일본의 기업 경영자 가운데 스티브 잡스보다 더 관심을 끄는 분이 있다. 일본인들에게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은 <일본전산>의 나가모리 시게노부라고 한다. 일본전산의 파격적인 경영은 언론의 관심을 끌고 대중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점은 일본전산이 아주 거대한 기업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일본기업가운데 100위권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쟁쟁한 대기업의 경영자보다 더 주목받는 이유가 있다. 1978년 일본전산은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중소기업이었다. 신입사원을 선발해야 하는데 회사가 원하는 인재들이 별로 없어서 고민이었다. 나가모리 사장은 응시한 160명의 사람들을 면접을 통해서 절반으로 줄였다. 그리고 절반에게 도시락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최종 33명을 뽑았는데 합격의 기준은 도시락을 가장 빨리 먹은 순서대로 33명을 합격시켰고, 커트라인은 15분이었다. 불합격한 사람들은 이것이 무슨 시험이냐고 항의를 했고, 지역 언론들은 이 해프닝을 보도하면서 일본전산이 한심한 회사라고 훈수를 두었다. 나가모리는 계속해서 사회가 납득할 수 없는 기준으로 사람들을 선발했다. “큰 소리로 말하기”, “화장실 청소”, “오래 달리기”가 시험과목이었다. 회사도 성장하고 경영인으로도 유명해진 다음에 나가모리는 그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저도 도쿄대나 교토대 출신의 유능한 인재를 선발하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중소기업에는 그런 사람들이 도무지 오지 않습니다. 밥 빨리 먹기 시험은 명문대 출신은 아니지만 잠재능력이 큰 사람을 뽑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일본전산의 성공의 비결을 이렇게 설명했다. “일본전산에서 세계적 발명품이 나오고 세계적인 기업이 되었는데 그 탁월한 제품들을 누가 만들었을까? 바로 그 때 밥 빨리 먹고 목소리 커서 뽑힌 사람들입니다”그의 지론은 ‘능력의 개인차는 아무리 커도 5배를 넘지 못하지만, 인간의 의식의 차이는 100배의 차이를 넘는다’는 것이다. 지금은 아주 탁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더라도, 미래가 있는 사람들을 지혜롭게 선발해서 동기를 부여하고 훈련시켜서 최고의 능력을 이끌어 내는 것, 이것이 나가모리가 밝힌 고속성장의 비결이었다. 물론 평범한 사람을 뽑아서 유능한 사람을 만들었던 나가모리의 비전과 리더쉽, 전략과 실행이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을 것이다. 일본전산의 인재등용과 나가모리 회장의 리더십을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을 떠올리게 된다. 평범한 사람들을 비범한 사람들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역방식이며 예수님의 리더십이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비범한 인재들이 아니었다. 갈릴리에서 자라나고 살아가는 평범한 젊은이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예수님을 만나 훈련받았을 때 제자들은 평범을 뛰어넘어 비범한 사람들로 전 세계에 예수님의 꿈을 그려나가게 되었다.

 

연구범위: 눅 2:21~28, 마 15:32~39, 마 16:13~17, 눅 12:6~7, 눅 13:1~5, 약 2:1~9.

*교과 토의 시간은 믿음과 생각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훌륭한 평형 장치이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십자가의 빛에 인종, 정치, 경제, 사회의 장벽이 무너진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의 관점에서 대단한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할 때에 종종 이런 중요한 진리를 잊곤 한다.

예수님은 세상의 명예와 성공을 허무하고 무의미하게 여기신다. 사실 그분을 가장 괴롭게 했던 사람들은 높은 지위를 차지했던 바리새인들, 부자 사두개인들 그리고 로마 귀족과 같이 가장 성공한 사람들이었다. 반대로 목수, 어부, 농부, 주부, 목동, 군인, 하인들과 같은 보통 사람들은 대부분 그분을 따르고 영접하였다.

 

안교활동반과교과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시며 제자들은 계급의 구분을 알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➋ 느끼기 : 비록 평범한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가치 있게 여기신다는 점을 마음에 새긴다.

➌ 행하기 : 인종과 국적, 경제적 수준과 교육의 정도 등 인위적인 구분을 부추기는 사회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바른 관점을 가지고 살아간다.

 

Part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그대는 교회에 부자가 더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까?

❷ 예수님이 가난한 성장기를 보내셨다는 사실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느끼십니까?

❸ ‘보통 사람들’과 어울리며 그들을 변화시키셨던 예수님에게서 배울 점은 무엇입니까?

❹ 예수님처럼 한 영혼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려면 우리는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할까요?

B. ❶ 어떤 종류이든 차별을 받은 경험이 있으면 말해 봅시다.

❷ 인종과 성별, 신분과 계급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❸ 평등사상은 초기 교회의 폭발적인 성장에 어떤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까?

❹ 베드로의 변화를 볼 때 그대는 어떤 위안 또는 용기를 얻게 됩니까?

 

결론

기독교의 위대함은 가장 무식하고 단순한 사람들의 증거를 통해 세계를 휩쓸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교육이 필요없다는 뜻은 아니지만 자신의 한계를 알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는 자들은 누구든지 그분을 위해 비범한 일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친교를 위한 특별 활동 계획을 확정합니다(2월 15일 또는 16일).

❷ 안식일 오후 활동을 소그룹 모임, 방문 활동, 봉사 활동 중에서 선택합니다.

❸ 특별 활동과 안식일 오후 활동을 위해 기도합니다.

 

첫째날(일) 2월2일

미천한 출신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함이더라”(눅 2:24).

 

교사강해 1)

A. B. Bruce는 “The training of the Twelve"라는 책 표지에서 예수님의 제자양성을 진흙으로 도자기를 빚는 그림으로 표현했다. 예수님의 제자양성은 진흙으로 정교하고 우아한 도자기를 빚어내는 것보다 훨씬 더 온갖 정성과 기술을 요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는 생명을 빚어내는 종합예술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제자양성을 통해서 세상적인 사람을 신앙적인 사람으로, 쓸모없는 사람을 예수님을 닮은 작은 예수들로 빚으셨다. 모난 돌이라도 미켈란젤로의 손에 들어가면 위대한 작품으로 탄생된다. 이처럼 진흙처럼 보잘 것 없는 사람도 예수님 손에 들어가면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로 변화된다. 우리 역시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다. 대단한 학벌도 없고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지도 않다. 그러나 누구를 만나 어떻게 훈련받는지에 따라 평범은 비범으로 바뀌며 우리의 삶 역시 탁월함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여러분 안에 아직 영글지 않은 희망의 싹이 있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비범한 인생을 위해 지금 자신을 훈련하라. 그리스도는 제자들의 이력서를 보지 않았다. 하나님은 아직 기록되지 않은 인생의 쉼표에 더 마음을 쓰신다. 여러분 자신도 아직 쓰여 질 것이 더 많은 자신을 격려하며 오늘 하루 더 내 안에 숨겨진 탁월함의 보물을 위해 땀을 흘리시기 바란다.

 

눅 2:21~28, 막 6:2~4, 레 12:8을 읽어 보라. 이 성경절에 따르면 예수님은 어떤 계층에서 태어나셨는가? 그런 계층의 삶은 그분의 사역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요셉과 마리아가 드린 제물은 경제적으로 가난했던 그들의 처지를 가리킨다. 이런 전통은 레 12:8에 기록된 모세의 법에서 유래했다. 원래는 어린양을 제물로 바쳐야 했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을 위해 예외 규정이 있었다. 그래서 형편이 어려운 자들은 산비둘기와 집비둘기로 대신할 수 있었다. 이렇듯 마구간 탄생에서 부모가 바친 제물까지, 예수님은 가난하고 평범한 백성의 가정에서 생애를 시작하신 것으로 묘사되었다. 실제로 고고학적인 증거에 따르면 예수님이 어린 시절을 보내셨던 나사렛은 다른 곳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가난하고 중요성이 떨어지는 마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목수일이 지조 있는 직업이지만, 그렇다고 사회의 지도층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예수의 부모는 가난하여 그들의 매일 수고에 의지하여 그날 그날을 살아갔다. 예수께서는 빈곤과 극기와 궁핍을 잘 아셨다. 이 경험이 그에게는 한 방벽이 되었다. 그의 부지런한 생애에는 시험을 이끌어 들일만한 한가한 시간이 없었다. 그에게는 부패한 교제를 위한 길을 터놓는 목적 없는 시간이 없었다. 그는 할 수 있는 대로 시험하는 자가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닫았다. 돈이나 오락이나 또는 칭찬이나 비난도 그릇된 행동에 동의하도록 그를 유인할 수 없었다. 그는 악을 식별하는 일에 지혜로웠고 또한 그 악을 대항하는 일에는 강하였다”(시대의 소망, 72).

 

교훈

예수님은 단지 인간으로 오셨을 뿐 아니라 시골 마을의 가난한 가정의 자녀로 태어나 성장하셨다.

 

부가작용)

어느 시대나 위대한 스승일수록 재능이 많은 자들을 문하생으로 받아들인다. 당시 랍비들은 엄격한 시험을 통해서 유능한 사람을 문하생으로 받아들였다. 탁월한 능력을 지녔던 사도 바울은 본래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다. 플라톤의 아카데미 입구에는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들어오지 말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기하학을 모르면 플라톤의 제자가 될 수 없었다. 공자는 ‘인생의 즐거움은 훌륭한 인재를 얻어서 가르치는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인간 기초가 잘 되어 있고 재능이 많은 자들을 제자로 삼아야 스승의 가치가 높아진다. 그런데 예수님은 달랐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위대한 인생을 살리라고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었다. 예수님께서 이런 자들을 제자로 부르신 이유가 무엇일까? 이는 세상에서 지혜롭고 권세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다(고전1:26-29). 인간조건이 좋고 사회적 신분이 높은 사람일수록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힘든다. 왜냐하면 자랑할 것이 많아서 교만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인간적으로 자랑할 것이 없었다. 그래서 늘 겸손했다. 부족한 자신을 제자로 불러주신 예수님께 늘 감사하면서 기쁨으로 제자생활을 했다. 이처럼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인간의 행위나 조건에 있지 않고 100% 예수님의 은혜에 기초한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별로 자랑할 것이 없는 자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셔서 키우시고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귀하게 사용하신다.

 

나의 삶 속으로

|묵상|

그대의 가정 환경은 어떻습니까?

못 배운 부모님, 가난한 살림살이, 많은 형제…. 지금은 사라졌지만 과거에 학교에서 가정환경 조사를 할 때면 난감했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보다 더 부끄러웠던 것은 그런 사실 앞에 당당하지 못했던 나 자신이었던 것 같습니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정규 교육도 받지 못하고 아버지의 일과 가사를 도우며 성장하신 예수님의 생애는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면서 동시에 훌륭한 모본을 제시합니다.

 

|적용|

예수님의 가난했던 성장기에서 그대가 본받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우리를 위해 가난해지신 예수- “그분은 영원 전부터 부요하셨으나, 우리가 그분의 가난을 통하여 부요해지도록 우리를 위하여 가난해지셨다. 그분은 빛과 영광으로 옷 입고 그분의 명령을 수행하고자 기다리고 있는 하늘 천사들의 무리에 의해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와 같은 본성을 입으시고 죄된 인생들 사이에서 머무르기 위하여 오셨다. 여기에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이 있다. 그것은 지식을 초월한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증언보감 1권, 234).

 

기 도

우리와 함께 가난한 삶을 사시고, 우리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신 예수님, 우리가 세상에서 무시되고 버림받을지라도, 하늘에서는 예수님의 친구와 형제자매로 영접을 받을 줄로 믿고 감사드립니다.

 

둘째날(월) 2월3일

“보통사람”들을 변화시킴

 

교사강해 2)

본 훼퍼는 '부르심은 곧 은총이다'라고 말했다. 75세의 평범한 할아버지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음으로 '복의 근원'이 되었다. 양치던 목동 다윗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음으로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었다. 시몬과 안드레도 갈릴리 바다에서 일생 동안 고기잡이를 하다가 이름 없이 사라질 사람들이었는데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음으로 초대 교회의 목자요 인류의 스승들이 되었다. 어부들을 부르셔서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드시는 예수님은 소망의 예수님이시다. 이 예수님은 마치 통나무를 깎아 위대한 예술품으로 만드시는 위대한 조각가요 예술가이시다. 이 예수님은 평범한 사람, 곧 보통사람들을 위대한 인물로 빚으시는 위대한 도편수요, 창조의 주님이시요, 참 목자이시다.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막 1:16~18).

 

요 2:1~11, 마 15:32~39을 읽어 보라. 예수님은 사람들을 제자로 삼고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간단한 일상의 욕구와 필요를 어떻게 사용하셨는가?

 

보통 사람들은 자연적인 신체적, 정서적, 사회적 욕구가 비슷하다. 그들은 몸에 필요한 영양과 인격적 존중 그리고 우정을 필요로 한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특성을 이해하시고 이러한 일반적 욕구를 통해 사람들에게 다가설 기회가 많은 상황에 계셨다.

예수님은 물을 발효되지 않은 포도 과즙으로 변화시키셨고, 어부들을 설교자로 바꾸어 놓으셨다(막 1:16~18). 그분은 평범한 사람들을 비범하게 변화시키는데 전문가이셨다. 구경꾼들은 그분의 자격에 대하여 묻곤 했다(막 6:3). 그들은 예수님에게 과시할 것이 없다고 지적했다. 그들은 비범한 것을 열망했기 때문에 평범하게 보이는 것을 간과했고 영원한 손실이 될 것들마저 놓쳐 버렸다.

예수님은 자주 평범한 자들을 찾으셨다. 자급력이 부족한 그들은 성공을 위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선천적 재능과 성취에 현혹된 사람들은 자신들보다 더 위대한 것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한다. 얼마나비극적인 일인가! 예수님 당시의 많은 사람은 최고의 교육과 사회적 지위 그리고 개인적 부를 소유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은 모두 잊혀졌다. 그러나 농부, 어부, 목수, 목동, 옹기장이, 주부, 하인 등 그리스도를 위해 비범한 증인들로 변화된 보통 사람들은 기억되었다.

 

교훈

예수님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욕구를 통해 사람들에게 다가가셨으며, 평범한 사람들을 제자로 삼아 비범한 일을 행하도록 변화시키셨다.

 

부가적용)

수석을 좋아하는 한 부자가 있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의 집에서 아름다운 돌을 보았다. 돌의 모양새가 너무 마음에 들어 부자는 값은 충분히 줄 터이니 그 돌을 팔라고 했다. 그러나 주인은 더 많은 돈을 바라며 팔지 않았다. 그 뒤에도 부자는 몇 차례나 더 그를 방문했지만, 그때마다 주인은 핑계를 대며 머뭇거렸다. 어느 날, 주인은 ‘돌의 가격’을 더 올릴 방도를 궁리하다가, 예쁘게 갈아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정성스럽게 돌을 갈았다. 다음 날 부자가 다시 찾아왔다. 주인은 허세를 부리며 갈아 놓은 돌을 내놓았으나, 부자는 한 번 흘끗 보더니 그냥 돌아가 버렸다. 그러고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타고난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사람들이다. 꾸미고 가꾸었더라면 선택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는 언제나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야 한다. 감추고 싶어도 감추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꾸미고 싶은 마음은 모든 인간에게 언제라도 유혹이다. 제자들은 훗날 예수님의 일을 계승하였다. 평범한 그들을 예수께서는 저들을 사도로 만드신 것이다. 이 세상은 점점 지식과 학식으로 꾸며진 사람들을 요구한다. 교회 내에서도 그렇다. 하지만 이것이 '복음적인’ 참 모습은 아니다.

 

나의 삶 속으로

|묵상|

그대도 예수님처럼 평범한 사람들을 가치 있게 여깁니까?

사회적으로 성공하거나 재력이 있는 사람이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면 많은 경우 상당한 기대감을 갖고 그 사람을 주목합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평범한 사람의 출입은 큰 관심을 끌지 못합니다. 모든 교회가 해당되지는 않겠지만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이런 차이가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귀하게 영접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적용|

그대가 무의식적으로 소홀히 했던 사람들에 대하여 어떻게 태도를 바꾸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예수께서 부르신 사람들- “평범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 중에 만일 부름을 받아 활동한다면 그들을 세상의 가장 존귀한 사람들과 동일한 수준까지 끌어올려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한 채 반복되는 일과를 꾸준히 수행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잠재 능력들을 일깨워 주는 데는 솜씨 있는 접촉이 요구된다. 예수께서 당신의 동역자가 되도록 부르신 사람들은 이와 같은 사람들이었다”(시대의 소망, 250).

 

기 도

아버지, 우리가 남에게 행한대로 받아야 한다면 하늘의 영접을 받지 못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차별없이 영접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하든, 평범하든, 가난하든 모든 사람을 똑같이 귀하게 여기는 마음씨를 가지게 하옵소서.

 

셋째날(화) 2월4일

흠 많은 어부를 부르심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

 

교사강해 3)

베드로는 오랜 경험을 통해 익힌 고기잡이 기술로 그물을 던졌다. 그는 고기잡이에 관한한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은 풍부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인생도 지금까지 자신이 겪어왔던 그 판단이 최고인양 믿으며 살아왔다. 그런데 주님을 만나던 날 베드로는 이 경험이 맞지 않는 실패를 체험하였다. 그의 경험과 상식이 무너져 내리던 날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새로운 희망을 걸었고, 상식 밖의 일이었지만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한 낮에 깊은데에 그물을 던졌다. 베드로가 깊은 곳에 그물을 던졌을 때에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가 많이 잡혔다. 이 순간 베드로를 지배하던 경험의 벽이 무너졌다. 베드로의 자아가 완전히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회개할 때 옷을 찢는 관습이 있다. 그물이 찢어질 때 베드로의 마음도 함께 찢어졌다. 하나님 앞에서 그가 지니고 있던 교만이 완전히 깨어졌다. 눅 5:8절의 말씀에 보면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하였다. 회개의 순간 베드로는 두 가지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였다. 하나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깨달았고, 또 하나는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았다. 이 깨달음 이후에 베드로는 수제자가 된 것이다. 실패 속에서 주님을 만날 때 그것은 오히려 복이 되었던 것이다. 시몬의 배가 비어있다는 것 곧 밤새 물고기를 하나도 못 잡은 실패가 곧 예수님을 모시고 새로운 차원의 삶을 출발하는 놀라운 축복의 시작이 되었다. 우리의 인생이 무엇으로인가 가득 차 있으면 예수님께서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된다. 자기 의, 자기중심, 교만, 죄, 자기만족, 자기 충만, 물질적인 성공, 소위 목회성공, 등등 예수님 아닌 것으로 가득 차 있을 수 있게 된다. 내 속에는 무엇이 차고 넘쳐있는가 하는 것은 잘 생각해 보면 본인이 알 수 있고 또 다른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신약 성경을 보면 베드로는 모든 제자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제자이다. 실제로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보통 사람이 비범한 사람으로 변화된 것이다.

아래의 성경절을 읽어 보라. 수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어떻게 현저하게 변화되었는가?

눅 5:1~11. 베드로는 여기서 자신에게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어떤 말로 표현했는가? 이런 특성을 우리 삶에 계발해야 할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마 16:13~17. 이 말씀에서 우리는 베드로에 대해 그리고 성령을 향한 그의 열린 마음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마 26:75.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에 대하여 어떤 통찰을 얻게 되며, 하나님이 그를 사용하신 방법에 대하여 무엇을 알게 되는가?

 

예수님은 베드로와 많은 시간을 보내셨고, 베드로 역시 엄청난 경험들을 예수님과 함께했다. 실수가 많은 평범한 어부에 불과했지만 예수님과 보내는 시간을 통해서 심지어 그분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뼈아픈 실수를 저지른 후에도 베드로는 급격하게 변화되었다.

우리는 베드로의 이야기에서 많은 교훈을 얻는다. 그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어렴풋이 파악하자마자 자신의 단점을 이해하고 그것들을 시인하였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성품에 흠이 많은 베드로를 인내와 관용으로 변화시켜서 역사를 바꾸는 인물로 만드셨다.

 

교훈

베드로는 성격적 결함이 많은 어부였지만 예수님은 그를 제자로 부르시고 변화시키셔서 역사를 바꾸는 인물이 되게 하셨다.

 

부가적용)

시몬은 밤새도록 수고한 것이 모두 허사가 된 허탈하고 답답한 마음으로 그물을 씻고 있었다. 피곤하고 실의에 빠져 있었다. 물고기 잡는 것이 그의 직업인데 아무 수확이 없이 피곤한 아침, 허전한 파장을 맞고 있는데 예수께서 그에게 오셔서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다. 시몬은 이 호수가가 자신의 삶의 터전이요 여기서 잔뼈가 굵은 어부이다. 나름대로 고기잡이에는 일가견과 경험과 소신과 오기가 있는 사람이었다. 반면에 예수님은 알려진 대로 목수의 아들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어 쫓고... 시몬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인생을 사는 분이시다. 그가 말했다.“ 세상적으로, 인간적으로 시몬의 입장에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정말 당치않은 헛소리이다. 순종하기 불가능한 말씀이다. 그러나 시몬은 그간에 듣고 알던 예수님을 믿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 봤다. 아마도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에 책임을 지시는 분으로 알았을 것이다. 시몬은 자신의 경험과 판단의 차원을 넘어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작정했다. “우리가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자신을 맡겨드렸다. 시험해 본 것이 아니라 내 맡겼다는 말이다. 시험해 보는지 아닌지는 예수님께서 아신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 밤새도록 한 마리도 못 잡았는데, 단번에 그물이 찢어지게 잡혀서 요한과 야고보에게 와서 도와달라고 소리쳤다. 그런데 이게 이게 웬 일인가? 두 배에 나누어 실었는데도 둘 다 물에 잠기게 되었다. 엄청난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기적이다. 이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할렐루야! 예수님께서 감당할 수 없는 축복을 주셨다.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면 하나님은 차고 넘치게 주시는 분이시다.

 

나의 삶 속으로

|묵상|

그대에게는 어떤 성격적 결함이 있습니까?

오늘날 성격적 결함은 성격 유형이라는 심리적인 해석으로 미화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기질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죄의 영향으로 뒤틀린 인간의 본성을 당연시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는 모가 난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변화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물론 아무리 원해도 자신의 성격을 개선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그들과 달랐던 점은 거듭된 실수 끝에 마침내 자아를 포기하고 예수님께 굴복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적용|

그대는 자신의 어떤 단점을 시인하고 어떻게 자신을 주님께 맡기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우리가 평생 배워야 할 교훈- “베드로의 변화는 하나님의 자비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이적이었다. 크신 교사의 발자취를 따라가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평생 동안 배워야 할 교훈이다”(교육, 91).

 

기 도

제게 있는 유일한 위대함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평범함에도 미치지 못하는 제 안에 오셔서 저를 변화시켜주시니 감사합니다. 베드로처럼 큰일을 하지는 못하지만 제 삶의 주변을 품을 수 있을 정도만 돼도 진정으로 감사하겠나이다.

 

넷째날(수) 2월5일

하늘의 평가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눅 12:6~7).

 

교사강해 4)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라는 책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어떤 엄마에게 고등학교 1학년에 다니는 축구선수 아들이 있었다. 16살이었다. 그 아들이 다니는 학교와 대학팀과 축구경기가 있었다. 아들은 유일하게 1학년 중에서 선수 명단에 들어갔다. 흥분한 아들이 엄마에게 경기를 구경하러 오라고 말했다. 엄마는 축구 경기를 구경하는 것이 처음이었다. 엄마는 친구들과 함께 그곳으로 가겠다고 약속했다. 마침내 경기가 끝났다. 엄마는 아들을 태우고 가기 위해서 탈의실 밖에서 기다렸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아들이 물었다. “엄마! 경기가 어땠어? 우리 팀이 멋지게 골을 넣는 장면을 봤어? 우리 팀이 수비가 철통같은 것도 봤지?”엄마가 대답했다. “그럼. 넌 정말 훌륭했다. 넌 멋있고 눈에 띄었어. 너의 그런 모습이 나는 무척 자랑스러웠다.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넌 열 한번 양말을 무릎까지 끌어올렸고, 땀을 많이 흘렸는지 여덟 번 물을 마셨고, 두 번은 얼굴에 물을 뿌리기도 했지. 난 또 네가 19번 선수와 5번 선수, 90번 선수가 교체되어 경기장 밖으로 나올 때 그들의 등을 두드려 주는 것이 마음에 무척 들었다.”아들이 말했다. “엄마가 어떻게 그 모든 걸 알고 있어요? 그리고 내가 어떻게 훌륭했다고 말할 수 있죠? 난 내내 후보 선수로만 있었고 경기장에는 들어가지도 못했는데” 그러자 엄마가 미소를 지으며 그를 껴안아 주었다. “아들아, 난 축구 경기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라. 내가 여기에 온 것은 축구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야. 난 너를 보려고 이곳에 온 거야.”축구에 대하여는 아무 것도 모르고, 또 한계를 가진 엄마가 자기 아들을 그렇게 세심하게 살펴보고 있었다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니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우리를 세심하게 살피시고 계시겠는가? 예수님이 참새를 왜 말씀하셨을까?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이 말씀의 뜻은 별로 가치가 없고 하챦게 여기는 참새라도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시고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그 말이다.

 

어떤 복음전도자는 자신의 세미나에 상류층 사람들이 참석한다고 자랑하였다.(물론 우리는 그가 좀 더 평범한 사람들의 참석도 기뻐했기를 바란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계급도 구별하지 않았다. 그분에게 평범한 사람이란 없었다. 모든 사람이 특별했다. 예수님은 흔한 예증과 직설적인 화법으로 군중들을 만나셨다. 그분의 태도를 보면 그분의 관심에서 제외되는 사람이 있었다는 암시는 없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제자를 양육하는 자들은 선교 봉사를 하는 동안 어떤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눅 12:6~7, 13:1~5, 마 6:25~30을 읽어 보라. 이 성경절에서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가치에 대해 무엇을 알게 되는가? 물론 우리가 이런 사상을 믿는다고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식으로 십자가의 보편성이 영원토록 제거했던 그와 같은 종류의 차별을 행하는 죄를 범하는가?

시장에서 가장 싼 새는 참새이다. 가장 작고 화폐 가치가 낮은 한 앗사리온에 두 마리를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토록 흔하고 별 볼일 없는 참새도 하늘은 잊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니 인간은 얼마나 더 소중하겠는가? 계급과 무관하게 십자가는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방법으로 모든 인간의 무한한 가치를 증명하였다. 계급이란 본래 하늘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는, 심지어 하늘의 원리와 반대되는 개념과 속성에 기초한 인간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교훈

예수님은 사람들을 대할 때 계급의 구분을 두지 않으셨다. 계급은 타락한 인류 역사의 산물일 뿐 하늘에서는 무의미한 개념이다.

 

부가적용)

아무리 미물이라도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 안에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으며 하나님이 허락치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죽지 않는다는 말인데 이는 하나님은 참새 한 마리까지도 보살펴 주신다는 말씀이다. 아무리 지극히 적은 미물이라도 하나님의 주의 깊게 살펴보시는 대상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참새 자체를 얘기하시고자 함이 아니었다. 마 10 장 29 절의 말씀의 뜻은 마 10:30 절과 31 절에 잘 나타난다. 마 10:30 절은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여기서 너희란 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너희의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되었다”는 뜻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자식을 사랑하니까 그 자식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다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피조물들을 사랑하시니까 참새 한 마리라도 잘 알고 계시며 특별히 자신의 형상으로 지은 사람에 대해서는 머리칼까지 셀 정도로 잘 아시는 것이다. 마 10:31 절에 보면 예수님은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말씀하고 계신다.

 

나의 삶 속으로

|묵상|

그대는 다른 사람을 무엇을 기준으로 평가합니까?

오늘날 우리는 외모를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먼저 생김새와 옷차림을 봅니다. 그리고 어떤 차를 타고 다니며 어떤 집에서 사는지 봅니다. 그리고 직업과 출신 학교를 조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 모든 것은 외모에 속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중심”을 보신다고 말합니다(삼상 16:7). 더욱이 하나님에게는 우리가 사람이라는 사실 자체가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입니다. 그래서 엘렌 G. 화잇은 그리스도께서 “한 영혼을 위해서도 돌아가셨을 것”(교회증언 8권, 73)이라고 말했습니다.

 

|적용|

그대 또는 교회가 사람을 구별하지 않으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영감의 교훈

한 영혼의 가치- “한 명의 죄인을 위해서라도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목숨을 버리셨을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십자가에 가까이 나아간다면 거기서 그대는 한 영혼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대가 그리스도와 교통하게 된다면 그대는 각 사람을 그리스도께서 평가하신 것처럼 평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그리스도께서 그대에게 대하여 품으신 사랑과 같은 깊은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품게 될 것이다”(실물교훈, 196~197).

 

기 도

중심을 보시는 아버지, 보잘것없는 저를 귀하게 여기시고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영혼을 아끼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닮아, 아무도 무시하지 않고 소중히 여기며 섬기는 삶을 살게 해 주시옵소서.

 

다섯째날(목) 2월6일

계급이 없는 사회

 

교사강해 5)

‘형제’ 혹은 ‘자매’라는 칭호는 피를 나눈 식구들에게만 주로 적용되었지 혈연관계가 없는 이들을 가리켜 말할 때는 그리스도 이전 시대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호칭할 때, 혈연관계가 전혀 없는 이들에게도 ‘형제’ 혹은 ‘자매’라는 용어를 빈번하게 사용했다. 오늘날 우리는 형제 혹은 자매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지만, 이 ‘형제 은유’가 기독교 공동체에서 비로소 시작된 용어라는 점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바울은 이 ‘형제’와 ‘자매’라는 용어를 혈연관계가 전혀 없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용함으로써, 다양성 속에서의 연합을 말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은 인종이나 종족, 자유인이나 노예, 남자나 여자와 관계없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진정한 몸의 지체라는 교회관을 보여 주었고, 비로소 이 말이 기독교 공동체의 용어로 굳어지게 되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피를 나눈 형제는 아니더라도 주 안에서 새로운 가족이 되고, 새로운 지체가 되었다는 사실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원시 기독교의 가장 매력적인 사회적 특성은 아마도 계급 구별의 철폐일 것이다. 계급을 나누었던 장벽은 복음의 무게에 허물어졌다. 보통 사람이 그리스도를 통해 승리하였다. 그리스도는 평범한 사람을 비범한 사람으로 변화시키셨다. 목수, 세리, 석공, 여왕, 하인, 제사장, 헬라인, 로마인, 남자, 여자, 부자, 가난한 자가 그리스도의 은혜의 나라 안에서 모두 평등해졌다. 실제로 기독교 공동체는 계급이 없는 사회가 되어야 했다.

아래의 성경절에서 우리는 인류 보편적 가치에 대하여 어떤 사실을 알게 되는가? 당시의 문화와 성경 기자들의 개인적 배경을 고려해 볼 때, 그들이 이런 핵심적인 개념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을 가능성이 많은 이유는 무엇인가?

 

갈 3:28~29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약 2:1~9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벧전 1:17, 2:9 “…외모로 보시지 않고…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요일 3:16~19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교훈

초기 기독교는 당시 봉건적인 사회의 두터운 장벽에도 불구하고 신분 구별을 철폐함으로 폭발적으로 확장할 수 있었다.

 

부가적용)

1948년 건국된 이스라엘은 2년 뒤인 1950년도에 헌법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 헌법을 만드는 과정에 ´이스라엘인의 자격´에 대한 논의로 많은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이스라엘인들은 전통적으로 유대교를 믿는데 사회가 개방되고 해외로 퍼져나가는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서 유대교를 믿지 않거나 아예 다른 종교로 개종을 하는 사람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당시 이스라엘 법원은 유대교를 믿지 않는 ´무신론자´는 이스라엘인으로 인정해야 하지만 다른 종교로 개종을 한 경우에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렸다. 20년이 지나 이스라엘 법원은 이스라엘인의 조건에 대해서 종교와 상관없이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다시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국회는 법원의 판결에 따르지 않고, 다른 지역에서 태어났더라도 유대교로 개종을 한 사람이라면 이스라엘인이 될 자격이 있다는 법안을 제정하고 통과시켰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종교가 그들의 뿌리를 나타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도들에게는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뿌리로 자리 잡아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의 확신이 있다면 그가 어느 교파에서 믿음 생활을 하던지 그는 그리스도인이며, 우리의 형제와 자매라 여겨야 할 것이다. 인간이 만든 교파 때문에 주님이 피 흘려 만든 그리스도인을 배척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세상은 사람들을 차별한다. 그래서 상처받는 사람들이 많다. 만약 교회 안에도 이러한 모습이 있다면 세상과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국적에 의해서도, 신분에 의해서도, 성별에 의해서도 그 누구도 차별받아야 할 자는 없다. 사랑으로 하나가 되고, 서로를 인정해주며,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이 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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