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보의 손을 빌어”--- 1888 미네아폴리스 대총회 대표자들에게 배부된 기쁜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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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보의 손을 빌어”
지금은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라는 구절에 관련된 시간 문제에 대해서 지나쳐야겠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하는 연구는 율법과 약속의 관계에 대해서 하기 때문이다. 율법은 “중보의 손을 빌어” 시내산에서 사람에게 주어졌었다. 이 중보는 누구인가? 단 한 가지 대답밖에 없다. “하나님은 한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라”(갈 3:20). 하나님이 한편이고 사람들은 다른 한편이면 그리스도 예수는 중보자가 되신다. 하나님이 이 거래의 한편이신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로서 다른 이가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중보가 되어야 한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중보로서의 그리스도의 일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 반역하였다.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길로 갔거늘”(사 53:6) 우리의 죄와 허물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나누어 놓았다(사 59:1, 2 참조).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그리스도는 이런 원수됨을 없애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시키기 위하여 오셨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의 화평이 되시기 때문이다(엡 2:14-16 참조). 그리스도는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 3:18).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에게 나아가게 되었다(롬 5:1, 2; 엡 2:18 참조).
그리스도 안에서 반역하는 마음인 육신의 생각이 없어지고 그 대신에 성령의 마음이 주어져서 “육신을 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롬 8:4)게 된다. 그리스도의 일은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고 부서진 것을 회복하고 나뉘어진 자들을 재연합시키는 것이다. 그의 이름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실 때에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벧후 1:4)가 된다.
중보로서의 그리스도의 일은 시간이나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겠다. 중보가 되는 것은 중개사가 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는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 중보가 되셨었으며 우주에 죄가 없고 속죄가 필요없게 될 때에도 중보자가 되실 것이다.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7). 그는 아버지 하나님의 형상이며 생명이 되신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고 그 안에서만이 하나님의 생명이 모든 피조물에게 흘러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생명의 빛이 온 우주에 충만하게 하는 중보이며 길이다. 인간이 타락했을 때에 처음으로 중보자가 된 것이 아니고 영원부터 중보자였었다. 인간뿐만 아니라 어떠한 피조물이라도 그리스도에 의하지 않고는 아버지에게 가지 못한다. 천사도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다. 바꾸어 말하면 죄가 세상에 들어왔으므로 어떤 새로운 능력이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 가운데 계속 머물러 있으면서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기 위하여 역사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창조되었으며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보혈을 통하여 우리가 구속을 얻는다(골 1:14-17 참조). 우주를 충만하게 하고 붙들고 있는 능력은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이 된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엡 3:20, 21).
율법은 약속을 거스리지 않음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아니다. 결코 그럴 수가 없다. 만일 그렇다면 율법이 중보이신 그리스도의 손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하나님의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고후 1:20 참조). 그러므로 율법과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조화되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 율법과 약속을 주셨다는 사실에서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을 거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또한 율법을 주시는 것은 언약에 새로운 사항을 더 넣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미 확증을 했으므로 더 넣거나 빼거나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법이 소용없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고 지키지 않는 문제가 관계없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언제나 변함없이 율법은 약속을 거스리지 않으며 또 새로운 사항으로 율법을 부가하여 넣는 것도 아니다. 왜 그런가? 그것은 간단한 일이다. 그것은 율법이 언약 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성령의 약속에 이 율법이 내포되어 있다.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히 8:10).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이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행 7:8)을 때에 그에게 행하여진 것을 가리킨 것이다(롬 4:11; 2:25-29; 빌 3: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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