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은 약속을 높임 > 신학

사이트 내 전체검색

신학

율법은 약속을 높임

페이지 정보

글씨크기

본문

율법은 약속을 높임
이미 본 바와같이 율법은 약속 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약속을 거스리지 않는다. “아브라함과 그 자손이 세상을 유업으로 상속받으리라”는 약속은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롬 4:13)이다. 그러나 율법은 하나님이 “의를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들아”(사 51:7) 말씀하시는 바와같이 의이다. 그러므로 율법이 요구하는 의는 약속된 땅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의가 된다. 그러나 이 의는 율법의 행위로 얻지 못하고 믿음에 의해서 얻는다. 율법의 의는 율법을 행하려는 인간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믿음에 의해서 얻어진다(롬 9:30-32 참조). 그러므로 율법이 요구하는 의가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약속도 더욱 크게 보인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의를 주기로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기로 맹세하셨다. 그러므로 시내산에서 “불가운데 구름 가운데, 흑암 가운데서 큰 음성으로”(신 5:22) 율법을 선포하셨을 때에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함께 하였고 여호와의 모든 천사들 앞에서 온 땅이 흔들렸으며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율법의 측량할 수 없는 위대함과 위엄을 나타내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맹세를 기억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의 위대함을 계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의를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기로 맹세하셨기 때문이다. 율법을 선포하신 “큰 음성”은 산꼭대기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자비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큰 음성이다(사 40:9 참조). 하나님의 계명은 약속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계명은 반드시 이와같은 약속이 되어야만 한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실 때에 그것은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기만 하면 우리에게 경고하시는 죄로부터 지켜 주실 것이라는 그의 보증으로 생각할 수가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죄 가운데에 떨어지지 않도록 보호하여 주실 것이다.

죄와 의에 대하여 깨닫게 함
예수께서 보혜사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하셨다(요 16:8). 그 자신에 관하여도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 2:17).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먼저 필요를 느끼어야 도움을 받아들이게 된다. 먼저 병을 알아야만이 약을 쓸 수가 있다. 이와같이 의의 약속도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유의할 가치가 없다. 그러므로 성령이 맨 처음에 하는 위로의 일은 사람들에게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갈 3:22).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죄를 자백하려 할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이와같이 율법은 성령의 안중에서 사람들에게 약속의 충만을 받도록 유도하는 하나의 산 매체가 된다. 어느 사람이나 미지의 위험을 알려 주어 그의 생명을 구해준 사람을 싫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이같은 사람을 친구로 생각하고 항상 감사하게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다가올 진노에서 도망하라고 하는 그 경고의 음성을 들은 자들은 율법을 이와같이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그들은 시편 기자와같이 항상 “내가 두 마음 품는 자들을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시 119:113)라고 말할 것이다.

의와 생명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21절). 이 말씀은 우리에게 의는 생명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단순히 형식이나 생명이 없는 이론이나 주의가 아니라 살아있는 행동이다. 그리스도는 생명이며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의가 되신다.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롬 8:10). 두 돌비에 쓰여진 율법은 생명을 줄 수 없고 율법이 쓰여진 돌비도 마찬가지로 생명을 줄 수 없다. 모든 율법이 완전하나 그러나 생명이 없는 문자들이 변하여 살아 움직일 수가 없다. 율법의 문자만을 받는 사람은 “정죄의 직분”과 사망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산 돌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은 생명과 평안이 된다. “영의 직분”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받을 때에 율법이 시인하는 의의 생명을 가지게 된다.
이 21절은 율법을 주신 것은 약속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율법을 주실 때에 모든 상황―나팔 소리, 두려운 음성, 땅의 진동, “불붙는 산과 흑운과 폭풍”, 우레와 번개, 산에 경계를 정해 놓고 넘어가면 죽는―이 모든 것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율법은 진노를 이”룬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엡 2:2; 롬 4:15). 그러나 율법이 이루는 진노가 불순종의 자녀들에게만 이르러 온다는 사실은 바로 율법은 선하고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실망시키기를 바라시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율법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시내산에서의 그 무서운 광경들은 430년 전에 각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여 영원히 살아계시는 구세주를 믿음으로 얻는 의의 보증으로 주셨던 하나님의 맹세의 말씀으로 빨리 달려 가도록 하기 위하여 계획된 것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Copyright © KASDA Korean American Seventh-day Adventists All Right Reserved admin@kasd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