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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갈라디아서 3장 8절과 22절 사이의 유사성을 주목하라.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큰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우리는 복음이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둔 같은 성경에 의해서 전파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가두었다”는 말은 23절에서와 같은 글자 그대로 “매인다”는 말이다. 법에 의하여 가두어진 사람은 감옥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세상의 정부에서도 범죄자는 법에 의하여 그를 붙잡아 가둔다. 하나님의 법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항상 작용하고 있으므로 사람이 죄를 지을 때에 즉시 그를 가둔다. 온 세상이 이와 마찬가지의 상태에 놓여 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며,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롬 3:23, 10)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전하였었던 저 노아 시대의 불순종한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옥”(벧전 3:19, 20)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람들도 다른 모든 죄인들과 마찬가지로 “소망을 품은 갇혔던 자들”(슥 9:12)이었다. 하나님께서 “그 높은 성소에서 하감하시며 하늘에서 땅을 감찰하셨으니 이는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해방하”(시 102:19, 20)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를 주시고 그를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사 42:6, 7).
개인의 경험에서 아직까지 주께서 주시는 기쁨과 자유를 체험적으로 알지 못하는 죄인을 이야기 해보자. 지금까지는 이런 기쁨과 자유를 체험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하나님의 영의 역사로 죄를 깊이 깨닫게 될 것이다. 지난 날에는 의심과 망설임이 많았고 쉽사리 자기 변호를 했지만 지금은 아무런 할 말이 없게 될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과 성령이 계시는 것에 대해서 의심이 없게 될 것이다. 또 그것을 확신시키려고 구구한 말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 마음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알게 되며 그러므로 옛 이스라엘과 같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출 20:19)고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는 감옥에 갇히는 것이 곧 사면팔방의 벽으로 둘러 싸여 빠져 나갈 수도 없는 옥에 갇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큰 바위 아래 생매장시키는 것같은 사람들을 정죄하는 말이 마치 율법의 돌비가 우리의 생명을 박살내는 것같이 느끼고 한장의 대리석이 우리의 심장을 터지게 하는 것같이 보이는 것처럼 매우 생생하게 느끼게 될 것이다. 그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우리가 받도록 하는 유일한 목적을 위하여 갇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 기쁨이 될 것이다. 우리가 의심의 성문을 여는 열쇠가 되는 이 약속을 붙잡을 때에 즉시 감옥문은 활짝 열릴 것이며 그러면 “우리 혼이 새가 사냥군의 올무에서 벗어남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시 124:7)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율법 아래, 죄 아래
방금 성경이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기 위해서라는 것임을 보았다.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후에 계시될 믿음이 계시되기까지 갇혀 있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나 죄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롬 14:23 참조). 그러므로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죄 아래 있다는 말과 같다. 우리가 죄 아래 있기 때문에 율법 아래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로부터 구원을 가져다 주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에 죄로부터 해방을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는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율법을 범하는 자들이다. 의인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율법 안에서 행하고 있는 자들이다.

율법은 간수, 현장 감독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새 번역에서는 몽학 선생 대신에 가정 교사로 번역한 것을 볼 수 있다. 이 말이 더 좋다. 그러나 독일어 성경이나 스칸디나비아 역 성경에서 “교도소의 감독”이라는 말로 번역한 말이 휠씬 더 의미가 잘 전해진 것같다. 이 말에 해당하는 우리 나라의 말은 간수라는 말이 될 것이다. 헬라어에서는 영어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정교사이다. 가정 교사는 학교가는 아이들을 따라 가면서 학교 가지 않고 도중에 노는지를 보는 종이다. 만일 아이들이 도망하려고 하면 다시 데리고 올 것이며 또 바로 잡기 위하여 매를 때리는 권리까지도 가지고 있다. 헬라어에서는 몽학 선생이라는 의미가 전혀 없지만 몽학 선생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현장 감독”이라는 말이 더 좋을 것이다. 여기서의 의미는 오히려 감옥 벽 밖에서 다니기를 허락받은 죄수를 따라 다니는 감독을 뜻한다. 이 죄수는 실제로 감옥 안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자유를 박탈당하고 있다. 사실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이 다 “죄 아래 가두어져 있고”, ”율법 아래” 있다. 그러므로 율법은 그들의 간수로 행동하고 있다. 그들을 가두고 놓아주지 않는 것은 율법이다. 죄인은 그들의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은혜스러우시지만 죄인을 죄없다고 하시지 않는다(출 34:6, 7 참조). 다시 말하면 악을 선하다고 하면서 거짓말을 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이 그들의 죄를 떠날 수 있는 길을 제공하신다. 그때에 율법은 더 이상 그들을 대적하지 않으며 더 이상 그들을 가두지 않으며 그리하여 그들은 자유롭게 살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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