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굳세게 서서”--- 1888 미네아폴리스 대총회 대표자들에게 배부된 기쁜소식
페이지 정보
글씨크기
본문
“굳세게 서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시 33:6, 9). 성군을 창조한 똑같은 말씀이 “굳세게 서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이전과 같이 우리를 무력한 대로 내버려 두시는 명령이 아니고 동시에 행동으로 실천하는 명령이다. 고침을 받은 앉은뱅이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요 5:5-9; 행 3:2-8; 14:8-10). 명령은 그 명령한 일을 이룬다. 하늘이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것들이 우리의 선생이 되도록 하자.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사 40:26).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사 40:29) “굳세게 서서”라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
할례의 유익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할례 의식에 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에 대한 증거로서 할례에 대해서 그렇게도 많이 말씀한 본 편지서가 우리를 위하여 주님께서 보존하셨다는 것과 모든 시대를 위한 복음 기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하나의 의식으로서의 할례가 지금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 중 아무도 육신의 할례를 받으려는 사람은 없다.
지금 생각하는 문제는 어떻게 하여 의―죄로부터의 구원과 의의 유업을 얻느냐 하는 것이다. 사실은 의는 오직 믿음―그리스도를 마음에 받아들이고 그가 우리 안에서 그의 생애를 살도록 허용하는 것에 의해서만이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 하나님의 의를 얻었으며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사실의 표로서 그에게 할례를 주셨다. 할례는 아브라함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시험을 받을 때마다 하나님의 약속을 육신적으로 이루려고 하다가 실패한 것을 계속 생각나게 해주었다. 이것을 기록한 것은 우리에게도 똑같은 의미가 있다. 그 의미는 “육은 무익하”므로 육신을 의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할례를 받는 사실이 그리스도를 아무 소용이 없게 만들지 않았다. 바울 자신이 할례를 받았으며 편의상의 문제로 디모데를 할례받게 하였었다(행 16:1-3 참조). 그러나 바울은 그가 받은 할례를 외적으로 어떤 가치있는 것으로 생각지 않았으며(빌 3:4-7 참조) 디도에게 할례를 구원에 필요한 것으로 받으려고 했을 때에 허락하지 않았다(갈 2:3-5 참조).
이미 존재하는 사실의 표에 불과했던 것이 후 세대에 의하여 그 사실을 세우는 수단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므로 할례는 본 서신에서는 의를 얻을 목적으로 사람들이 행하는 모든 행위를 대표하고 있다. 유대 교사들이 이방인 가운데서 나온 신자들에게 구원의 큰 수단으로서 부과하려고 했던 육신에 행하는 외적인 할례는 육신의 행위를 대표하며 성령에게는 거스리는 일이다(행 15:1 참조).
만일 어떤 사람이 육신의 행위로, 다시 말하면 그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생각으로 어떤 일을 한다면 그리스도는 그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진리를 말하고 있다. 만일 그리스도를 완전히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결코 그를 영접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만일 그리스도를 우리의 모든 것으로 영접하지 않는다면 거절하는 것이다. 구세주 외에는 다른 분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는 둘이 될 수 없으며 또 구세주 되는 영광을 다른 사람이나 물건과 공동으로 소유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을 목적으로 할례를 받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인류의 유일무이한 구세주로 믿는 믿음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표로서 할례를 주셨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왜곡하여 믿음의 대치물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므로 어떤 유대인이 그의 할례를 자랑할 때에는 그 자신의 의를 자랑하는 것이다. 4절에서 이것을 말씀하고 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이것은 율법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인간의 능력을 경시하는 것이다. 율법은 거룩하고 그 요구는 아주 크므로 어떠한 사람도 율법의 온전함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 율법의 영광이 된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의가 우리의 것이 된다. 참된 할례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에게 예배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기뻐하고 육신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빌 3:3 참조).
율법에 빚진 자가 되어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3절).
“이봐요!” 어떤 사람들은 소리쳐 말한다. “이것은 율법은 피해야 할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거요” 바울은 할례받는 자들은 율법 전체를 행해야 된다고 말하면서 할례를 받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다.
친구여, 너무 성급하게 서두르지 말라. 이 구절의 말씀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라. 거듭거듭 읽어보면 좋지 않은 것은 율법이나 율법을 행하는 것이 아니며 피하여야 할 것은 율법에 빚진 자가 되는 것이다. 별로 큰 차이가 없는가? 먹을 음식과 입을 옷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러한 필수품에 빚지는 자가 되는 것은 슬픈 일이다. 더욱더 슬픈 일은 이러한 것들에 빚져 있지만 이러한 것들이 없는 것이다.
빚진 자는 어떤 것을 갚아야 할 의무가 있는 자이다. 율법에 빚진 자는 율법이 요구하는 것, 곧 의를 갚아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율법에 빚진 자는 누구나 저주 아래에 있다. 왜냐하면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하지 않고 어떤 다른 방법에 의해서 의를 얻으려고 하는 것은 영원한 빚이 되는 저주를 불러 들이는 것이다. 지불해야 할 것을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영원히 빚진 자가 된다. 율법을 모두 다 행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말한다. 이 율법을 어떻게 행할 것인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9).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것을 그만두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시인하라. 그러면 율법의 의가 우리 안에 이루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육신을 따라 행하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하기 때문이다.
- 다음글왜 그 일을 하시는가? 26.03.15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